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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득한 유자청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허리를 숙여 행주로 얼른 그것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냄비에 물을 끓이고 한기조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차마 마주 보기도 힘든 상처들이 자꾸 눈에 어른거렸다. 원장실로 들어가 서랍 속 펑퍼짐한 옷을 찾는다고 찾으면서도 계속 아롱거려 괴로웠다.
누가 때린 걸까. 누가 때려서 저 예쁜 얼굴이 엉망진창이 된 걸까. 가슴이 아팠다. 잘게 떠는 손가락에 마저 번진 멍이 연조의 심장, 그 작은 모퉁이, 모퉁이들을 와그작와그작 좀먹었다.
‘물어볼까?’
싫어하려나? 그래. 싫어하겠지. 분명 그때처럼 노려보며 박차고 뛰어나갈 것이다. 그건 싫다. 안된다. 뛰쳐나가도 연고는 바르고 뛰쳐나가야지. 들고양이 같은 소년을 생각하며 냄비의 물을 조심스레 따랐다. 화장실 문이 조금 열리며 보송보송한 손이 삐져나왔다. 연조는 옷을 가져가는 소년의 팔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얼마 있지 않아 젖은 머리의 한기조가 나와 연조를 바라보았다.
“다 씻었어?”
“…….”
“그럼 여기에 앉아 봐.”
대꾸하지 않는 소년을 향해 의자를 가리켰다. 허공에다 대고 소리치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벽하고 대화해도 이것보다는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소년은 순한 양이 되어 그녀의 말에 따랐다.
빨간 포비돈과 연고를 꺼내 들어 보였다. 기조는 이번에도 저항이 없었다. 조심스레 손을 들어 불그스름한 안와골과 입매에 연고를 바르고 네모난 밴드를 붙였다. 그러고는 소년의 얼굴을 감상했다.
희고 매끄러운 피부였다. 연조는 가파르게 떨리는 긴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촘촘하게 돋은 속눈썹이 도기 인형처럼 섬세했다. 빛깔이 엷은 눈동자였다. 그와 대조되는 검은 머리칼이 유달리 하얀 살갗을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부럽다. 연조는 가지지 못한 것들이다. 엄마에게서 물려받지 못한 것들……. 간질거리는 심장보다 감상이 선행되었다.
검은 잉크처럼 진하고 똑바른 눈썹과 발그스름한 눈가. 오른쪽 눈 밑의 눈물점. 긴 속눈썹과 높고 반듯한 콧대. 보기 좋은 모양의 입술……. 기조의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사실 들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기조의 외할머니가 동네에서 억센 노파로 자자한 것처럼 기조의 모친 또한 소문이 자자한 여자였다.
한갓진 동네이니 별 시답지 않은 소문이 대단한 뉴스라도 되는 양 일파만파 퍼지는 것은 당연하다지만 기조네 집안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연조야. 너 넘어트린 애 말이야. 걔, 엄마가 말했잖아.’
‘뭐가?’
‘걔네 엄마 완전 술집 여자래.’
‘여보!’
곁에서 듣고 있던 아빠가 언성을 높였다. 흙탕물이 튄 교복 치마를 문질거리던 엄마가 눈을 꼽쳐 뜨며 남편을 흘겼다. 애 듣는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며 아빠가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엄마는 개의치 않고 읊조렸다. 내심 듣고 싶지 않던 연조가 한숨을 푹 쉬며 TV를 보았다.
‘듣고 있어? 너 걔랑 이제 말 섞지 마. 제 엄마 닮아서 매꼬롬하게 생겨선 못하는 짓이 없어. 아주.’
엄마가 구시렁거리며 치마를 털었다. 연조는 매꼬롬하게 생겨선 자식을 버려두고 나갔다는 기조의 엄마를 생각했다. 기조의 엄마에 대해서 듣는 것이 오늘이 처음만도 아니건만 괜히 제 욕을 들은 것처럼 귓등이 시큰거렸다.
누구도 기조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기조의 엄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엄마도 본 적이 없다면서 왜 아무렇게나 말하는 걸까. 엄마는 왜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욕하고 그래? 그렇게 따져 묻고 싶은데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연조는 엄마가 털던 치마를 홱 집어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거 마셔.”
“…….”
“유자차야.”
기조의 손에 머그잔을 쥐여 주었다. 누구에게 맞았냐고 묻는 대신 꼭 병원에 가보라고 말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조는 컵라면을 끓이려고 일어났다. 소년의 시선이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컵라면 먹고 가.”
“…….”
“밥 안 먹었잖아. 먹고 가. 그리고 기조야.”
“…….”
“누가 너 때리면 나한테 말해. 내가 도와줄게.”
기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조는 뒤돌았다. 이제는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은커녕 아는 척도 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날 이후로 한기조는 연조를 무시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