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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발작하듯 튕겨 나온 것일까. 그 성질머리 말이다. 연조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어 물었던 적도 있지만 기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물고 늘어진다 한들 돌아올 답이 시원할 것 같지도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기조는 전학 가지 않았다. 학부모 회의가 몇 번이고 열렸고 그때마다 기조의 집으로 전화가 갔지만 그의 외조모는 학부모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물론 회의 과정에 간섭하는 일도 없었다. 손주가 학교에서 무슨 일을 저질러도 알아서 하라는 어투였다.
퇴학을 시키려거든 그리하고 다시 전학을 보내려거든 그것도 그리하라고 했다. 경찰이 왔다고 해도 눈 껌뻑하지 않을 태도에 학부모들마저 물렸다고 진저리칠 즘 기조가 보여주었던 폭력은 잊혀 갔다.
다만 아이들 사이에서는 잊히지 않았다. 몸서리 쳐질 정도로 압도적인 잔인함. 그것은 후천적인 학습이 길러낸 결과와는 거리가 멀었다. 감히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기세였다. 드잡이질하며 서열을 정해 무리를 이루는 수컷의 습성을 생각하면 사내애들의 세계에서 기조는 결코 잊힐 수 없는 존재였다. 비단 그가 몇 번의 폭력을 더 과시하며 존재를 빛내지 않아도 결과는 같았다.
그러나 한기조는 결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얼룩이 되어 살아남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 폭력에 덜덜 떨던 또래들을 보고 우러름이라도 받고 싶었던 것일까. 묵묵히 제 자리를 고수하며 외톨이로 살아가던 한기조가 움직임을 보인 것은 그날로부터 사흘 뒤였다. 어느 날 한기조는 제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는 아이에게 말을 붙였다. 그 아이뿐만 아니라 학급의 모든 아이들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으나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처럼 굴었다.
실제로도 그에겐 어려운 일인 것 같지 않았다. 학부모 회의가 끝나고 결과가 발표 날 무렵 기조는 교실에서 가장 따르는 이가 많은 학생이 되었다. 친구라고 보기엔 그렇고 추종자들이라고 부르기에도 어려웠다. 친밀감을 가장한 우러름.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세계의 알파. 그 무렵의 한기조를 설명해야 한다면 그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점차 궁지로 몰리는 일이 사라져 갔다. 기조를 따르는 아이들은 학부모회의 각각 한자리 차지하는 제 부모에게도 결코 그가 불리할 증거를 내놓지 않았다.
무식할 정도로 단순한 세계여서 그런 걸까. 급격한 변화가 위태해 보이는 일은 없었다. 부자연스러운 면도 보이지 않았다. 기조는 늘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다만 모두를 포용했고 모두를 아울렀다. 그의 사위에는 형용할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매료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학교를 졸업할 즘, 기조는 이전과 다른 의미에서 학교에서 유명한 학생이 되었다. 살갑진 않았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에겐 종종 엷게 웃기도 했고 쉬는 시간이면 목적 없이 뛰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는 축구 시간에도 참여했다. 아우르는 이들이 많아지며 한기조가 구축한 무리에선 서열이 공고해졌다. 그는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다시 폭력을 보이는 일 따위 하지 않았다.
종종 제가 만든 무리를 비집고 들어와 제 멱을 틀어잡을 놈이 보이면 비죽 웃음을 지으며 우롱하긴 했지만 신변에 해가 될 정도로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영리함을 넘어 영악한 처사였으나 그 시절 그 무렵에는 아름다운 거죽에 씐 가식들이 나이답지 않은 영악함이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그렇게 연조의 세계에 잠식한 지 한 해가 더 흘러 열일곱이 되었을 때 기조는 연조가 가까이하기에도 조금 어려운 상대가 되어있었다.
예전처럼 틈을 안 보이게 입을 걸어 잠그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둘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퍽 가까워져 편하게 말을 섞을 수 있었다. 연조는 그것이 나쁘지 않다고 여겼고 그에게 친구가 더 많아질수록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네가 더는 외톨이처럼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어느 날인가. 학교를 졸업할 무렵, 연조가 기조에게 말했다. 기조는 웃지 않았다. 제 무리 안에 있을 때 비췄던 엷은 웃음도 없었다. 학교 한편에 외톨이처럼 눌어붙어 있던 시절, 그 표정이었다. 감각이라곤 마모되다 못해 소실된 표정. 연조는 그를 살피다 할 말을 찾지 못해 구두코로 바닥을 툭툭 쳤다.
“라면 먹으러 갈래?”
기조가 물었다. 연조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너희 집이 어딘지 안다고 해서 밀쳐졌던 지난여름이 생각났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한기조의 집은 주황색 슬레이트 지붕이 누런 똥색으로 보일 만큼 낡고 궁벽한 주택이었다. 마당이 있었으나 관리되지 않았고 잡초만이 무성했다. 연조는 그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서며 그의 외조모를 찾았다.
“너희 할머니는 어디 계셔?”
“요양원에.”
“어디 아프시니? 정정하시다고 들었는데…….”
“나이가 드셔서 옮기셨어.”
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기조는 예전처럼 연조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흘려듣기는커녕 그녀가 하는 작은 눈짓까지 착실하게 살폈다.
“언제?”
“좀 됐어.”
시선을 돌렸다. 연조는 소년의 흰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미끈했다. 언젠가부터는 멍이 새로 자리잡히지 않았다. 입가에 생채기를 달지도 않았고 소매가 떨어진 교복을 입고 오지도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든 게 금시초문이었다.
“들어와.”
연조는 의아한 시선을 거두었다. 내부는 허름했다. 연조는 천천히 방안을 훑었다. 기조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장롱이라고 부르기에도 뭣한 가구가 쓰러지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다만 옷은 그곳에 넣어두지 않는 듯 행거가 있었다. 연조는 행거에 걸린 옷들을 보았다. 대체로 검은색이거나 회색이었다. 옷이라곤 교복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옷들이 꽤 많았다.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아주 반듯하게 정리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게 기조의 손길인 것 같진 않았다. 왠지 느낌이 그랬다. 방안은 허름했지만 말끔했고 가구며 물건이 적긴 했지만 몇 개는 아주 새것으로 보였다. 낡은 것과 새것이 아주 명확하게 갈렸다.
대체로 낡은 것은 노인의 것이고 새것은 기조의 것으로 보였다. 이를테면 행거나 책상 같은 것 말이다. 침대는 없지만 꽤 값이 나가는 것으로 보이는 매트와 이불이 방 한편에 정리되어 있었다.
“여기가 네가 자는 데야?”
“응.”
“어, 어디 앉으면 돼?”
“아무 데나.”
“그럼 여기 앉을게.”
매트 반대편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기조가 그 모습을 보더니 뒤를 돌았다.
“라면 끓여 올게.”
“내가 도와줄까?”
“아니.”
“그래도…….”
“그냥 있어.”
더는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연조는 쭈뼛거리며 방안을 둘러보다 기조가 덮고 자는 이불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질감이었다. 이런 허름한 집의 노란 장판과 어울리지 않는 색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조 스스로가 샀거나 혹은 할머니가 남겨 주신 물건은 아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을까? 이런 물건들이라면 원조를 받지 않는 이상 구입하기 힘들어 보였다. 심지어 기조가 고른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연조는 의아한 눈으로 방안을 훑다 삐거덕 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기조를 쳐다보았다.
“뭐 하고 있었어?”
“방 구경. 이불 되게 푹신푹신하다.”
연조가 만지작거리던 이불 끝을 들어 보였다. 기조는 어디선가 접이식 상을 꺼내 냄비를 올려놓았다. 연조는 의아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칫하면 기조의 기분이 상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 나무젓가락을 내밀었다.
“기조야. 넌 요리 잘해?”
라면을 덜어 후후 불다가 물었다. 김이 나는 면을 식히지도 않고 집어넣던 기조가 우물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요리하는 거 좋아하는데.”
“왜?”
“응?”
“라면 밖에 할 줄 몰라. 요리 잘하는 걸 좋아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거야. 비슷한 구석을 찾으면 더 친해지잖아.”
어느덧 식어버린 면을 붙잡고 연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애써 웃으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기조는 말없이 그를 응시하다 단무지가 담긴 종지를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연조는 단무지를 하나 집어 까득까득 소리가 나게 씹으며 다음 할 말을 찾았다.
기조와 단둘이 공간에 남겨지는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제는 무시하지도 않고 회피하지도 않지만 왜 지난여름보다 지금이 더 그를 대하기 힘든 걸까. 도리어 기조가 먼저 다가와 말을 붙이는 일도 잦은데.
“먹어.”
“으, 응.”
기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둘은 제 몫의 면만 열심히 먹었다. 가시방석이었다. 왠지 그를 느끼는 건 연조 밖에 없는듯해서 더욱 불편했다. 요즘 따라 눈앞의 소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전에도 명확히 짚어낼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조야. 있잖아.”
“응.”
“너 지윤이 알지? 서지윤.”
“응.”
“걔 되게 예쁘잖아.”
기조가 고개를 들었다. 대꾸하진 않았다. 괜히 말을 꺼냈나. 하지만 궁금했다. 기조에겐 여자가 많았다. 따르는 남자도 많은데 여자도 적지 않았다. 교실 한구석에서 눌어붙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을 때도 그에게 시선을 주는 여자들이 적지 않았다. 드러내놓고 호감을 표시하는 아이들은 없었지만 그와 시선이 얽힐 때면 다들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연조는 제가 느끼는 이 불편함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고 있었다. 명확히 짚어 말할 순 없지만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했다. 기조와는 더 가까워질 수 없을 것이다. 이만큼 친해진 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이었고 기조에게 고마운 일이지만 이게 끝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아니. 그냥……. 걔도 너희 집에 오고 싶어 했을 거 같아서.”
다 먹은 냄비를 휘휘 저었다. 궁색한 대꾸가 스스로도 창피했다. 지윤의 얼굴을 떠올렸다. 쌍꺼풀진 두 눈에 큰 키, 엷은 파마를 티 나지 않게 한 모습이 한눈에 보기에도 연조와는 다른 타입이었다. 나래와 함께 더불어 종종 화장실도 같이 가고 밥도 먹었지만 지난여름을 기점으로 다시 가까워지는 일은 없었다.
지윤은 기조를 좋아했다. 둘이 나란히 설 때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으므로 연조도 싫지 않았다. 질투가 나지 않느냐고 하면 그건 모르겠다. 예전에, 그러니까 여름에는 화가 났을 법도 한데 요즘은……. 기조는 이제 그녀만의 소년이 아니다.
“걔가 왜 내 집에 오고 싶어 하는데.”
무심한 음성이었다. 본래가 시큰둥한 성격이라 일반적인 반응이 돌아오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번엔 조금 상처였다. 연조는 무표정한 얼굴에 서린 신경질적인 기운을 알아채곤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그냥 해 본 말인데……. 싫으면 말고.”
한기조의 눈이 엷게 일그러졌다. 연조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편해서 도로 라면이 올라올 것 같았다.
“그만 갈게.”
“…….”
“오늘 고마웠어.”
연조가 문고리를 잡았다. 기조는 할 말이 있는지 굳은 얼굴로 입술을 꿈틀거렸다. 연조는 우두커니 그를 바라보다 문을 열고 나갔다. 바람이 날카로웠다. 금방 코끝이 얼얼해져 왔다. 그녀는 저를 뒤따라 나오는 기조에게 웃음을 지었다. 뒤돌아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손목이 잡혔다.
반 바퀴 틀어져 그를 올려다보았다.
“서지윤 안 예뻐.”
“어?”
“그러니까 걔 얘기 내 앞에서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