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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이 싫어해? 송연조가 물었다. 바둑알같이 까만 눈에 겨울빛이 둥글게 고여 있었다. 그녀는 습관처럼 바닥을 구두코로 두드렸다. 불안을 숨기려 할 때 종종 드러나는 습관이었다. 한기조는 대꾸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지윤이 싫으냐고?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에도 송연조는 그를 알지 못했다.
한기조는 서지윤이 누군지도 몰랐다. 애초에 송연조를 제외하면 관심을 두는 일이 드물었다. 송연조가 예쁘다고 하니 송연조가 늘 부러운 눈으로 흘긋거리는 여자애들을 몇몇 떠올렸다. 그러고도 서지윤이 누군지 정확히 반추할 수 없었다.
여름, 학부모 회의가 한창일 무렵 조부가 찾아왔다. 정확히는 조부라는 사람이었다. 친부조차 본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는 제 혈육이라고 했다. 기조는 친모를 떠올렸다. 이젠 그녀의 얼굴도 가물가물한 지경이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백발 성성한 노인이 저를 찾아왔던 무렵을 상기했다.
고래 등같이 검고 두꺼운 차체가 마당 앞에 덩그러니 주차되어 있었다. 운전수 하나와 보조석에 앉은 수행원 하나. 모두 다부진 체격에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무엇보다 형형한 안광이 그랬다. 두 사내 모두 서슬 퍼런 기운이 한가득했지만 상석에서 내린 노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조는 그자가 제 조부인 것을 알아보기 전 생사에 갈림길에서 느끼는 공포를 먼저 느꼈다.
곱사등이 된 외조모와 달리 조부는 백발이 성성함에도 곧게 핀 척추를 갖고 있었다. 회색 슈트를 입은 노인이 기조를 보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러고는 얇은 입술을 움직여 그를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강진오 그놈이 죽기 전에 하나는 잘하고 갔군.’
그가 서느런 웃음을 터트렸다. 한 움큼 찌푸린 기조의 낯을 본 노인이 더욱 마음에 든다는 듯 흡족한 얼굴을 했다. 노인은 그의 조부라고 밝혔다. 이런저런 사업을 한다며 소개한 그가 한기조에게 자신과 같이 외조모의 집을 떠날 것을 권유했다. 앵벌이 생활이라도 해보려 집을 나가려 했던 기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떠나지 않았다. 떠나지 않으려는 그에게 노인은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슬레이트 지붕 아래서 생활하는 기조에게 생활비를 지원해 주는 것과 함께 생활을 돌봐줄 사람을 딸려 보냈다.
기조가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던 배경의 뒤에는 조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부는 부유했고 또한 권력자였다. 제힘을 과시하는데 거침이 없는 사내였다. 백발이 성성했으나 연치가 어떻게 되든 젊은 시절 그대로의 기세를 간직한 형형한 사내였다.
‘원하는 게 있으니 혼자 남으려 한 것이겠지?’
조부로서 혈육을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한 그에게 외조모를 치워 줄 것을 요구했다. 눈앞에서 치워주기만 한다면 어디든 갖다 박아도 상관없었다. 외조모에게 그가 고물과 다름없는 것처럼 그에게도 외조모는 어디 박아둘 데 없는 고물이었다. 조부는 그녀를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 묶어둔 뒤 기조의 눈앞에서 완전히 치워버렸다.
‘…….’
‘이런 고물상 같은 집에 널…….’
‘그 전에. 제가 할아버님의 손주란 것은 어떻게 확신하는 것입니까?’
조부가 웃었다. 만만치 않은 놈이야. 하고 중얼거린 노인이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기조를 찾아오기 전, 그의 친모에 대한 조사를 이미 마쳤다고 했다. 강진오가 스물을 갓 넘겼을 시절 술집에서 만나 동거까지 갔던 어느 여자에 대하여는 물론 임신을 한 그녀와 결혼하기 싫어 그녀의 궁벽한 사정을 핑계로 책임지지 않으려 했던 아들의 추태까지. 그들의 지난한 연애사는 충분한 증거였다. 그리고 강진오는 자식이 태어나기도 전 연인을 집 밖으로 내몬 파렴치한이었다.
도리어 그의 친모인 한윤희를 찾으러 헤맨 건 강진오의 부친인 강근영이었다. 강근영은 본래부터 혈육에 대한 정이 남달랐던 사내였다. 그러했기에 자식이 개망나니라도 버리지 못했다. 강진오가 비운의 사고로 죽은 것은 차라리 속이 시원한 일이었다.
제 손으로 쳐 죽이지 못해 허구한 날 사업을 말아먹으며 다른 조직의 손에 목숨이나 위협당하던 아들이었다. 차라리 죽은 게 고마운 일이다. 직접 숨을 끊지도 못하고 남의 손에도 끊기는 걸 보는 게 싫어 번번이 조직원들의 목숨을 잃어가며 그를 구해냈던 일을 생각하면 더욱.
‘하하. 넌 유전자 검사란 것도 모르냐?’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동의 없이 일어난 일에 관한 심사가 틀어지려 하던 참이었다. 조부는 친모의 준비성에 관해 칭찬했다.
‘네 어미가 이미 서류를 만들어 뒀더군. 네 아비가 죽을 날만을 기다린 모양이야.’
가물가물한 기억이었다. 기조는 친모의 신변에 관해 묻지 않았다. 던져두듯 버리고 간 이후로는 관심 둔 적 없는 사람이었다. 되찾으러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기대한 일도 없었다. 생모에게는 아주 자그마한 애정도 덧붙이며 산 적이 없다. 그런데 생부의 자식이란 걸 증명한 서류를 준비했었다니. 애정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조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차에 오르기 전 가장 처음 던졌던 질문을 반복했다. 기조는 대꾸하지 않으려다 변명처럼 졸업이라는 유예기간을 내밀었다. 조부는 사고를 그렇게 쳐놓고도 더 다닐 생각을 하느냐며 뇌까렸다. 기조는 낯 한 번 붉히지 않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모든 것은 그가 마련해 주었다. 학교를 옮기고 싶다고 했다면 지금 다니는 학교와는 비견될 수 없을 정도의 좋은 학교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게 국내든, 해외든. 기조로선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부를 소유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변하고 싶지 않다. 그를 좀먹던 노인의 집이었다. 그런데도 이 허물 같은 집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간다면 과거의 주검밖에 되지 않을 것을 두고 기조는 쉽사리 떠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이곳에 사는 자신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좋아하는 여학생이라도 있느냐?’
‘…….’
‘아무렴, 그런 게 아니고서야 미련이 남을까.’
그가 다시 웃었다. 기조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송연조 때문에, 송연조 때문에……. 송연조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송연조를 더 알고 싶어서. 그 애랑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멀어진다면 그 애와 더는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조부가 뒤돌아섰다. 기조는 다시 남겨졌다. 남겨져 송연조가 걸을 때마다 풀썩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생각했다.
맥이 가파르게 뛰었다. 뛸 때마다 모퉁이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기조는 왼쪽 가슴을 거머쥔 다음 느리게 숨을 들이시다 내뱉었다. 헐렁한 옷밖에 잡히지 않은데 심장을 움켜잡은 기분이었다. 펄떡, 펄떡.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발밑이 조금씩 어긋나는 기분이 들었다.
‘기조야.’
송연조가 어슷거렸다. 그는 주저앉아 옹송그렸다. 우산을 쓰거나, 교복 치마를 팔랑거리거나. 그게 아니면 울먹이거나. 말을 붙이거나, 눈길을 피하거나. 토라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송연조가 제게서 완전히 고개를 돌렸을 때를 생각했다. 도시락을 가져다주었을 때. 야무지게 묶은 보자기를 달랑달랑 들고 다가와 잽싸게 내민 뒤 사라졌을 때였다. 급하게 뒤도는 등에 모멸감을 느꼈다고 하면 이해할까. 왜 단둘이 있을 때만 종알거리는지 묻고 싶었다.
왜 내게는 더 오래 머물러 있지 않은지. 왜 내게 낯만 붉히다 뒤도는 건지. 나는, 나는……. 이따금 참을 수 없었다. 더 참을 수 없는 건 그의 앞에서 그녀를 모욕하는 일이었다. 김형일의 코를 깨고 한쪽 눈을 망가트린 건 계획에 속하는 일이었다. 도리어 그가 놀랐던 건 그 이후의 처분이었다. 퇴학이 아닌 전학이었고 그는 다시 귀찮아졌다. 지난 일에 대한 소회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나 현영훈의 치아를 부러트리고 안와골을 부서트리건 그로서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을 하는 건 싫었다. 원하지 않았다. 어디서든 죽은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그런 취급을 받는 데 익숙했으니까.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는 건 싫다. 가능하면 죽은 듯이 학교를 다니다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데 자꾸 네가 어긋나게 하잖아. 송연조.
넋을 되찾은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성을 되찾았을 땐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있을 때였다. 왜곡된 기법의 촬영화면처럼 지나간 일들이 어물거렸다. 불쑥 찾아온 한기에 이를 꽉 깨물었다. 기조야. 하고 부르던 목소리가 귓가를 웅웅 울렸다. 그것만 생각났다. 그러니까 진정이 되었다. 송연조의 목소리를 되감았다. 송연조를 모욕한 놈을 곤죽으로 만든 거니까 후회감이 들지도 않았다. 그렇게 다시 괜찮아졌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송연조가 무시하지 않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송연조가 낯을 붉히다 그의 앞에서 뒤도는 것은 그가 죽은 것처럼 사는 놈이라 그렇다. 남들 앞에서 상종하면 위신이 우스워지니까. 그가 괄시와 냉대에도 반응하지 않고 받아들인 결과다. 그렇다면 편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이 되는 게 낫다. 그편이 누구에게도 괄시당하지 않는다.
중심에 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를 좀먹던 노친네가 집을 비우자 그는 스스로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조부는 물질적인 여유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여유까지 주었다. 그는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 제 혈육이 피멍을 주렁주렁 단 것조차 사내답다며 웃는 사람이었다. 그러며 저를 모욕한 이들의 눈을 잃게 하고 안와골을 으깬 것을 두고 제 손주답다 만족스러워했다.
‘암, 산짐승 같은 것들을 휘어잡고 살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조부는 만족했다. 그러나 송연조는 아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