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희준아.”
송연조가 다른 놈의 이름을 불렀다. 또래보다 반 토막 난 키에 자그마한 체구였다. 얼굴이 희고 곱상했지만 절룩거리는 발이 그 곱상한 얼굴을 가리고도 남았다. 한기조는 그를 남들보다 더딘 친구라거나 한쪽 다리가 짧지만 걷는 데는 문제가 없는 ‘친구’라고 부르기 싫었다. 송연조가 놈의 책가방을 들어주려 하거나 혹은 도시락을 싸 준다거나 그에게만 보였던 관심을 나눈다고 생각하면 더욱. 피가 거꾸로 솟다 못해 얼어붙는 것 같다.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박히듯 다가왔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물론 송연조를 알게 되어 처음 겪는 일이 많았다. 뭔지도 모르고 그 감각에 빠졌고 뭔지도 몰라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예기치 않게 마주하게 되는 일은 모면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기조는 잘라낼 수 없었다. 압제에 가까운 감각이다.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송연조가 놈에게 인사했다. 어수룩하게 복도를 걷던 놈이 벙긋 고개를 들더니 긴장한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지능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등신 같기 그지없었다. 한기조는 무리 속에서 그녀를 우두커니 응시했다. 어둑하게 바라보는데 송연조는 제게 인사하진 않았다. 시선이 얽히자 양쪽 입꼬리를 엷게 올릴 뿐이었다.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 같은 반으로 배정받았다. 조부의 입김이 닿은 결과였다.
가능하면, 가능하면 송연조를 더 자주 보고 싶었다. 그 애가 더 말을 자주 걸고 그 애가 더 자주 웃고, 그리고 다른 누구에게도 관심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어떤 것도 머릿속에 두고 있지 않으면 좋겠다. 세계의 축이 그였으면 좋겠고 그 축의 흐름 끝에는 한기조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에게 송연조가 그런 것처럼. 그들 사이엔 세상의 작은 티끌조차 끼어들 수 없이 견고해졌으면 좋겠다.
“같이 밥 먹으러 갈 사람 없으면 우리랑 밥 먹을래?”
“어? 응, 아니, 아니…….”
“남자애 없어서 걱정되면 괜찮아. 안 이상해 보일 거야. 나래 남자친구도 우리랑 같이 먹는다고 했거든. 4반에 박준호 알지? 걘데…….”
송연조가 종알거렸다. 환한 얼굴이었다. 반년 전과 비슷한 낯빛이었다. 아니 그보다 살갑고 다정한 빛이었다. 미묘하게 달랐다. 긴장한 기색도 없었고 이를 드러내며 재잘대는 모습이 그를 대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게 참을 수 없었다. 그를 뒤틀고 멋대로 범람했다. 선홍색 입술이 봉긋 거리며 움직였다. 송연조는 놈의 팔을 잡고 제 친구들이 있는 쪽으로 갔다. 얼빠진 표정을 한 놈은 연조의 손을 털어내지 않았다.
“뭐 봐?”
옆에서 연필을 돌리며 문제집을 풀고 있던 이인혁이 물었다. 반듯하게 각이 잡힌 칼라깃과 깨끗한 소매로 알 수 있듯 한기조를 둘러싼 무리 안에서도 나름의 무게를 가진 놈이었다. 한기조가 허용한 권력의 중추였다.
“박희준 저 병신 새끼. 밥 먹을 애들이 없어서 여자애들이랑 먹나 보네.”
“…….”
“연조 쟤는 불쌍한 애들 보면 그렇게 챙겨주고 싶나 봐.”
“……저게 불쌍한 애들 챙겨주는 거야?”
“그럼? 뭐 다른 거라도 있냐?”
“…….”
“……병신만 보면 불쌍해서 뭐라도 하나 챙겨주려고 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뭔 다르게 해석할 게 있냐. 페티시라도 있나 보네.”
피가 식었다. 이인혁은 냉소적으로 읊조린 뒤 다시 문제집에 집중했다. 낯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인혁에게 화가 나는 건지 송연조에게 화가 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자신에게 화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릿하던 정신에 달군 징이 박히듯 알알해져 왔다.
서느렇게 가라앉은 한기조의 표정을 본 이인혁이 떨떠름하게 그를 흘긋거렸다. 곁눈질하는 시선마저 두 눈을 뽑고 싶을 정도로 난폭한 감정에 사로잡힌 한기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다.
“흐윽, 흐으윽……. 잘못했어. 잘, 잘못했어. 미안, 미안…….”
“희준아. 네가 뭘 잘못했어?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했다고 하니까 우리가 이상해 보이잖아.”
이인혁이 웃었다. 뇌까리는 어투엔 다분히 조롱기가 가득했다. 그의 손에는 말보로가 끼워져 있었다. 기조는 은백색 지포 라이터를 빙글빙글 돌렸다. 담배를 피우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공부도 하면서도 놀기도 논다는 이인혁이 교사 뒤편에서 말보로를 꺼내 물었다.
한기조는 놀라는 대신 그에게 말보로를 건네받은 뒤 입에 물었다. 한갓진 시간을 태우기 위해 적절한 행위였다. 담배를 피우는 걸 본 조부는 뺨을 후리는 대신 제 지포 라이터를 건넸다. 그는 다 늙은이의 취향을 따를 필요는 없겠지만 싼 맛에 싸구려 담배를 피우는 일만큼은 봐주지 못한다고 했다.
이걸 시가라고 했나. 아직까진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다. 고개를 들어 박희준을 보았다. 주눅이 든 채 엉엉 울고 있는 놈이 이인혁의 손에 머리채가 잡혔다. 머리채가 잡힌 놈은 재래식 변소에 대가리를 박혔다. 똥물이 채 치워지지 않은 변소에 구역질을 하며 괴로워했다.
어린 사내놈들의 발에 명치와 등을 걷어차인 놈이 벌레처럼 사지를 비틀었다. 몇 놈들이 껄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담배를 피워보라고 주둥이에 던힐을 쑤셔 넣었다가 콜록거리자 뺨을 후렸다. 이인혁은 주먹이 아닌 손바닥으로 놈의 안면을 타격했다. 충격이 배로 커졌는지 그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고꾸라졌다.
지포 라이터를 엄지로 달칵거리다가 다비도프 시가에 불을 붙였다. 깊게 한 모금 빨아 넘긴 뒤 어떤 계집애를 생각했다. 그 계집애의 눈에는 똥물이 튄 화장실 바닥에 대가리를 처박고 우는 이 녀석과 그의 결이 다르지 않았다. 저항의 의지도 없이 바르작대는 이딴 병신과 다름없이…….
시가를 씹었다. 매캐한 연기가 텁텁했다. 덜 닫힌 문틈 사이로 인영이 비쳤다. 기척을 들킨 녀석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더니 쭈뼛거리며 도망쳤다. 다급한 발걸음이었다. 뒤따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오의 빛이 부옇다. 반사된 연기가 허공에 피어오르다 뭉그러져 갔다.
다시 기척이 들린 건 매질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어지는 발길질 속에서 놈이 실신에 가깝게 까무러쳤다. 한기조는 겁도 없이 남자 화장실의 문을 열어젖힌 송연조를 쳐다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펄럭거렸다. 까만 열매같이 동그란 눈에 가파른 빛이 어슷거렸다. 바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움켜잡은 송연조가 입술을 달싹이다 말고 박희준에게 다가갔다.
그를 에워싸고 있던 무리가 기조의 눈치를 살폈다. 한기조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송연조는 이인혁의 가슴팍을 밀치며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인혁의 입가에 걸쳐져 있던 얄팍한 웃음을 거뒀다. 그는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를 만지작거리며 한기조의 눈치를 살폈다. 축 늘어진 몸이 그녀의 어깨에 걸렸다. 무게 때문에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하는 송연조가 낑낑대며 그를 바라보았다.
달궈진 눈에 의아함과 두려움이 뒤섞였다. 송연조는 덜덜 떨면서도 그를 바라보았다. 맞닿은 시선이 어둡고 진득했다. 연조의 입술이 반사적으로 바르르 떨렸다. 그녀는 할 말을 찾는 듯 빤히 그를 쳐다보다가 다시 바닥으로 가라앉으려 하는 박희준을 들어 올리는 데 집중했다. 무리는 웃음도 없이 그것을 쳐다볼 뿐이었다.
“데려다줘.”
반쯤 정신을 잃은 박희준을 끌고 나가려면 송연조의 힘만으론 부족했다. 저 말라깽이 여자애가 정신을 잃은 사내애를 옮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기조가 뇌까리듯 내뱉자 이인혁의 곁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던 놈이 박희준을 들어 제 어깨로 옮겼다. 송연조는 여전히 씨근덕거리는 눈으로 놈과 몇 번의 실랑이를 하다 화장실을 나갔다.
송연조는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박희준이 구급차에 실려 가고 교무실을 몇 번 드나든 송연조는 노려보듯 그를 흘겨보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다문 입술에서 느껴지는 분기는 눈가에 매단 두려움과는 질이 달랐다. 소녀는 끝끝내 그를 아는 척하지 않았다.
이따금 그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가 틀어질 때마다 그를 의식하고는 다시 머리를 돌렸다. 주임 선생이 그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조부의 귀에 들어갔으리라 생각했으나 입학하기 전 조부는 학교의 발전을 위한 기금 차원에서 이사장에게 거액의 기부금을 납부했다.
학교는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기조를 특별 대우했다. 그리고 가끔은 그 대우의 끝이 궁금했다. 일탈과 비행을 묵과하고도 교사들은 추궁당하지 않았다. 학내의 누구도 강근영의 손자를 건드릴 수 없었다. 끌려가 생살이 잘리는 일을 감수하고서라도 계도를 원하는 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학교를 나와 이유 없이 골목을 배회했다. 송연조를 생각했다. 그 애가 보고 싶었다. 멱살을 잡고 싶다가도 긴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다.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까만 눈동자와 시선을 얽고 싶은데 송연조는 모든 게 알량한 동정이라고 했다. 이인혁의 입을 찢어놓고 싶었다.
푸른 어스름이 외조모가 남긴 허물 같은 슬레이트 지붕을 뒤덮었다. 좁은 골목을 지나 잡초가 무성한 마당에 이르렀을 때 외조모의 집을 점거한 서넛의 장정을 발견했다. 어스름 사이 떠도는 빛에 의지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근육이 피둥피둥하게 찐 놈들은 키가 작은 대신 하나같이 단단한 체구였다.
“네가 일신파 노인네 손자 놈이냐?”
대꾸하지 않았다. 한기조는 귀찮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쇠파이프와 야구 배트 따위를 든 놈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겨울날. 뒤통수를 휘갈기면 머리통이 깨질 무기로 바닥을 직직 긁는다면 다른 목적은 없으리라.
기조는 물러나지 않고 손짓했다. 제 연배보다 한참이나 어린놈이 손짓으로 자극하는 것을 본 놈들이 피식 웃으며 달려들었다. 우렁찬 기합이 마당을 울렸다. 기조를 상대로 휘두른 쇠파이프가 허공을 갈랐다. 짧게 호흡하며 달려드는 놈의 안면을 갈겼다. 뒤로 파고드는 놈의 일격을 피하며 동시에 다른 놈의 명치에 주먹을 꽂은 뒤 방심한 틈을 타 팔을 꺾었다. 쇠파이프를 놓지 않으려는 놈의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잭나이프였다.
팔을 허우적거리는 놈의 목을 조르며 두 발자국 물러났다가 주머니 속 잭나이프를 뺏어 놈의 목을 그었다. 피가 분수처럼 흩어지며 하얀 셔츠 깃을 물들였다. 사람을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 깊이 긋지는 않았으나 출혈로 인한 사망도 사망이다. 그는 헐떡이며 제 팔을 빠져나가려는 놈의 대가리를 세게 내리친 뒤 미끄러지는 잭나이프를 바로 잡았다. 칼로 사람의 목을 긋고도 일그러짐 한 점 없는 소년을 보는 장정 둘의 낯이 겁에 질려 있었다. 들어갈 틈을 보던 사내가 야구 배트를 휘둘렀다. 널브러진 사내를 던지듯 치우고 배트를 피했다. 그러나 다른 한 놈이 휘두르는 쇠파이프까지 피할 수 없었다.
등을 친 일격에 살갗이 얼얼했다. 머리통 한구석에 잠식한 송연조가 어릿한 감각에 나가떨어졌다가 대롱대롱 매달렸다. 주먹에 입술이 터졌다. 기조는 놈의 팔뚝에 칼을 꽂아 넣고 무자비하게 뽑은 뒤 다시 내리꽂았다.
살생이 이토록 쉬웠다. 목을 긋고 무두질하듯 내리치고. 숨이 끊길 때까지 자르고 베어낸 뒤 타인의 죽음을 거듭 확인했다. 모든 것들이 천성인 듯 아무렇지 않았다. 생살을 뜯기고 잘릴 때마다 도리어 살아있는 것을 느꼈다. 헐떡거리며 남은 한 놈을 보았다. 야구 배트를 든 놈은 명치에 칼에 찔린 뒤 바닥을 구르며 낑낑대고 있었고 다른 한 놈은 눈에 겁을 와락 매달고 있었다.
두 발자국 물러나 전화를 들고 도망치듯 골목을 빠져나가는 놈을 보며 기조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잭나이프를 든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 묻은 팔목이 어스름 속에서 번들거렸다. 그는 젖은 손등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문득 기척이 들렸다. 엷은 소리였다. 기조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골목을 바라보았다. 도망친 놈이 다른 놈을 불러들였다면 이번에는 기필코 멱을 따버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조야. 거기 있어?”
송연조는 남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과 함께 칭칭 감은 버건디색 목도리가 아침과 다르지 않았다. 반쯤 나간 넋이 다시 돌아왔다. 두들겨 맞은 살이 부풀고 으스러진 뼈가 비명을 질렀다.
“너, 너…….”
가로등의 흰 불빛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비칠거리는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할수록 드러나는 몰골에 그녀가 입을 틀어막았다. 생각했다. 송연조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얄팍한 동정, 알량한 선행. 그깟 대단치도 않은 연민으로 남의 세계를 뒤흔들어 놓고 또다시 그를 뒤틀기 시작한 계집애를 바라보았다.
망가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송연조가 그를 망가트려 놓았다. 누군가 그를 망가트리면 참을 수 없었다. 그를 부수면 반드시 상대도 똑같이 부쉈다. 등을 돌려 달아나지 않는 건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신념이었다. 배를 곯고 살지언정 구걸하지 않는 건 그의 자존심이었다. 가진 건 자존심밖에 없어서. 부서질지언정 굽히지는 않았다. 그것은 살아있는 고물로밖에 저를 보지 않던 외조모에게서 그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송연조는, 이 빌어먹을 계집애는…….
“왜 왔어?”
“기조야. 너, 너 병원에, 벼, 병원에…….”
“왜 왔냐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벼, 병원에 가야…….”
계집애가 떨었다. 무참하게 떨리는 눈동자가 발갛게 젖어있었다. 한기조는 제 팔을 잡으려는 손을 걷어낸 뒤 우악스럽게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악!”
“왜 내가 또 병신 같아?”
“아, 아파……. 기조야.”
“왜 내가 또 병신 같아서 잘해주고 싶어? 응? 박희준 그 새끼처럼 바닥에 구르면 덜덜 떨면 나한테 올래?”
“무슨,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무서워. 이러지 마.”
연조가 울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리질을 치며 그저 떨었다. 가슴이 갑갑했다. 속이 울렁거리며 옅은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얻어맞는 게 나았다. 질질 짜대는 여자애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알아듣지도 못할 천치한테 부서지고 외면당하고 매달리다 뒤틀어진 채 버려지는 건……. 이런 건…….
“기조야. 너 아픈 것 같아.”
연조가 울었다. 잡히지 않은 손으로 피 묻은 그의 뺨을 더듬으려고 했다. 한기조가 일그러졌다. 일말의 미련도 없이 생살을 긋고, 목을 잘라 내던지듯 버려도 눈썹 한 번 좁히지 않던 것을 생각했다. 굽히지 않고 구걸하지 않고 등을 돌려 달아나지 않는 것은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 모든 것에서 송연조 만이 예외였다. 또한 유일하며 무이했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렇겠지.
그를 파고들어 뒤흔들 여자는 이 여자밖에 없을 것이다. 선혈이 튄 자리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스쳤다. 얼어붙은 핏자국을 송연조가 더듬었다. 그는 그러도록 내버려 두었다. 지난 시간 송연조가 그를 무참히 파헤치고 들여다보며 아무것도 아닌 친절을 베풀어 그를 우습게 만들어도 개의치 않았던 것처럼. 농락하듯 그를 쥐고 흔든다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는 그녀의 손끝이 다친 상처를 더듬고 아픈 자리를 쑤시도록 놔두었다. 발발 떨리는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연조는 훌쩍이며 휴대폰을 찾았다.
“병원에 가자. 병원에…….”
그녀는 연신 울어대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 한기조는 떨어져 나간 손을 움켜잡아 제게 당겼다. 연조는 맥없이 끌려와 휘둥그레 눈을 떴다. 한기조는 그 맹한 얼굴에 입을 맞췄다.
늪 속의 개
한기조가 입술을 물었다. 윗입술이 맞닿고 아랫입술이 겹쳐져 더운 숨이 입안으로 들어와 마침내 기도를 타고 흘렀다. 핏물의 비린내가 코를 덮었다. 속을 뒤집을 정도로 역한데 그 속에 기조의 체취가 알싸하게 뒤섞여 있었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혀는 무람없었다. 연조는 그 이질감에 눈썹이 좁아졌다.
그가 입안의 빈 공간을 찾아 치아를 뒤적거렸다. 헐떡이며 가슴팍을 밀어냈다. 눈을 뜰 수 없었다. 뜨면 안 될 것 같았다. 파고드는 혀가 미끄덩거릴 때마다 간지러웠다. 무엇이 간지러운지도 모르면서 연조는 자꾸만 가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요란히 울렸다. 기조의 손이 움켜쥔 손가락을 꽉 눌렀다. 알알함이 지나칠 정도로 센 힘이었지만 앓는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만둘까 봐. 그만두고 여느 날처럼 냉랭히 그녀를 바라볼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