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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었을 때 연조는 여전히 몽롱하고 알알한 정신이었다. 전날 저녁 흩날리는 싸라기눈 아래서 일어난 일에 흠뻑 젖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침을 먹으며 등교를 준비하는 내내 입술에 남겨진 체온을 더듬느라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어떻게, 어떻게 집을 나와 학교에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다시 입술을 더듬었다. 껍질이 일어난 살갗을 꾹꾹 누르며 그가 남기고 간 체온을 반추했다. 코트 깃을 물들이는 핏물과 눌어붙은 핏자국. 터진 생채기……. 사이사이 공간을 비워두지 않고 맞물리려 하는 소년의 욕심. 섞이고 싶다. 무엇이든 섞은 다음 떨어지고 싶지 않다. 연조는 제 안에 이는 욕심조차 알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러나 알 수 없어도 달갑지 않았다. 인지하고 싶지 않아서 내내 묻어두려 했는지도 모른다. 여자애들이 한기조에게 가까이 갈 때마다, 한기조가 그녀에게서 멀어질 때마다. 연조는 반 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좋아해야 할 일이었다. 한기조가 일탈을 일삼으면서도 아무런 제적을 받지 않는 건 좋지 않은 일이지만. 예전처럼 주먹질을 당하고 다니진 않으니까.
그건 좋아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데……. 기분이 좋지 않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책상에 내려두고 기조를 응시했다. 첫눈을 기억했다. 기조도 기억하리라 믿었다. 을씨년스러운 가로등의 불빛 위로 점점이 번지던 싸라기눈의 촉감이 그들을 깨웠으니까.
눅눅한 숨이 윗입술에 닿았다. 소년의 창백한 눈빛이 그녀를 내리눌렀다. 그는 움켜잡은 손을 놓은 뒤 뒤돌았다. 연조는 그를 데리고 응급실로 찾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나흘이 더 흘렀다. 연조는 그날 기조의 집으로 찾아간 이유를 되감았다. 박희준 때문이었다. 박희준에게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이유가 있다면 이유라도 들어보고 싶었다. 물론 어떤 이유를 들어 보인다 해도 납득할 수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기조를 안다고 생각했다.
“기조야. 이거, 이거 내가 만들었는데…….”
긴 머리에 굵은 웨이브를 넣은 소녀가 소년답지 않은 너른 어깨에 뺨을 기대며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반질반질한 손톱에 색 색깔의 매니큐어를 칠한 그녀는 교내에서도 꽤 유명한 인물이었다.
한기조가 그녀를 흘긋 내려다보더니 그녀가 내민 상자를 받아들었다. 여자친구라도 사귄 건가. 모르겠다. 눈을 깜빡였다. 난데없이 입을 맞췄다. 같이 첫눈을 맞고 그 알싸함에서 깨어 서로를 들여다보았다. 한기조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오래 알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사람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아.”
소녀가 초콜릿을 꺼내 한기조의 입에 갖다 댔다. 그는 이렇다 할 표정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입을 벌렸다. 무참히 내던져지던 연고가 생각났다. 다친 짐승처럼 날을 세우고 그녀를 경계하던 한기조의 멀지 않은 과거 말이다. 그 경계를 누그러트리고 마음 한 자락을 얻어내는 게 어려워 눈 밑을 닦던 날이 떠올랐다.
한기조에게서 그녀는 어떤 존재일까. 그녀가 그에게 했던 일들은 무엇일까. 불현듯 허공에서 시선이 맞닥트려졌다. 이름이 생각났다. 안수정. 안수정이었던 것 같다. 낯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고개를 돌리는데 삐거덕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쪽 하는 소리가 났다. 연조는 마른 입술을 슬그머니 적시다 다시 그들이 있는 쪽으로 바라보았다.
한기조는 제 어깨에 뺨을 댄 안수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의 손이 닿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던 애였다. 그래서 연조도 그에게 손을 대는 게 어려웠다. 누구든 쉽게 허용하는 성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녀만 어려웠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수정이 엷게 웃음을 터트리며 기조의 뺨에 묻은 제 립스틱 자국을 문질렀다. 멀리서 흰 살갗에 남은 멍 자국을 염려하는 게 들렸다. 이제 저런 건 안수정의 몫이 될 것 같았다. 기조를 염려하고 기조의 안부를 챙기며 아무렇지 않게 살갗을 훔치고 서로의 영역 안으로 침투해 깊이 파고드는 일. 입안이 타들어 갔다. 연조는 나흘 내내 닳도록 제 입술을 뜯으며 전전긍긍하던 시간을 생각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기조가 여자친구를 사귄다면 그렇다면……. 축하할 일이다. 안수정이든, 누구든 간에 마땅히 축하해 주어야 할 일이었다.
“쟨 뭘 봐?”
안수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으라는 듯 유독 톤이 높았다. 연조는 버스럭거리는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조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떤 표정이라 해도 잔인하게 다가올 터였다. 화장실로 들어가 얼굴을 씻었다.
“잘 어울리네.”
조용히 뇌까렸다. 안수정은 예뻤다. 예뻐서 유명한 애였다. 나갈 때마다 연예인 제의를 받는다고도 했고 인터넷에서 얼짱인지 뭔 지로도 유명했다. 연조는 인터넷은커녕 사진조차 찍는 게 싫은데. 인화된 사진 속의 그녀를 보는 일만큼 못 견디게 지루한 일도 없는데 안수정은 매일매일 제 사진을 찍어 홈피에 올렸다.
덕분에 덩달아 학교가 유명해졌다. 그런 애랑 기조가 사귄다. 사귄다는 말은 들은 적 없지만 사귀지 않으면 교실에서 뻔히 전시하듯 그러고 있을 리 없으리라.
“미친 거 아냐?”
씩씩대는 숨을 진정시키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안수정의 피부는 희다. 머리는 염색했지만 염색하기 전에도 자연스러운 갈색이었다. 진한 쌍꺼풀에 뚜렷한 이목구비가 달리 무언가를 더 더하지 않아도 예쁜 애였다. 그런 애가 기조의 옆에 있으니 정말 잘 어울렸다. 그러니 둘이서 뭘 하든 상관없다. 상관없는데, 그날 밤에는 왜 그런 거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연조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물에 젖은 눈이 따가웠다.
화장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겨울빛이 스산한 가운데 햇살만은 다사로웠다. 어느 여름 한기조가 생각났다. 실밥이 터진 교복 소매와 푸른 멍을 눈가며 입술에 매단 소년 말이다. 모른 척했다면 좋았으리라 생각됐다. 어차피, 어차피 이젠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더는 엮일 필요가 없는 사람이지만. 처음부터 몰랐다면, 그래서 마음 가는 일이 없었더라면 이런 번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괜히…….
“…….”
언젠가부터 한기조의 구두는 광이 났다. 소매의 실밥도 꼼꼼하니 촘촘했다. 배를 곯는 것 같지도 않고 멍을 매달고 다니는 일도 없었다. 작년 여름을 기점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묻고 싶었지만 물어볼 계제가 되지 않았으므로 연조는 그저 그가 변하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앞으로는 이런 관심까지 죽이고 살 것이다.
“울었어?”
“……아니.”
한기조가 물었다. 연조는 침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밝은 개암 색 눈이 공들여 그녀를 살폈다. 의중을 가늠하려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염려하는 것 같기도 했다. 눈물 자국을 찾으려는 듯 그는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젖었잖아.”
“얼굴 씻은 거야.”
“왜?”
기조가 되물었다. 연조는 대답하길 그만두고 입을 다물었다. 눈 밑이 엷게 떨렸다. 그만 발걸음을 돌리려 할 때였다. 그날처럼 한기조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돌려세우는 손길에는 조금의 힘도 실리지 않았지만 연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모욕적이었다.
“……할 말 있어?”
창백한 낯빛이 딱딱했다. 연조는 그의 손을 털어내며 버석거리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열기로 데워지는 눈가 때문에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없으면 그만 갈게.”
“송연조.”
잡힌 손목에 힘이 가해졌다. 사리문 입술을 씹으며 털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는 쉽사리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실랑이 끝에 벽으로 밀쳐졌다. 벽에 머리가 박힐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는데 두툼한 감각이 느껴졌다. 감은 눈을 뜨고 소년을 응시했다. 벽에 밀치는 주제에 머리에 손을 갖다 댈 건 뭔가. 그러면서도 가시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왜 안 울어?”
“…….”
“울 일도 아니란 건가?”
“저번부터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어.”
눈가가 엷게 일그러졌다. 뒤틀린 낯이 창백했다. 괴로운 듯 아픈 것 같기도 했고 비위가 상한 것 같기도 했다. 의중을 알 길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겁이 나기도 했다. 머리를 받친 손은 다정했지만 사납게 굳힌 낯에는 겁만 와락 들었다.
“뭐, 아무래도 좋아. 나는 각오가 되어있으니까.”
연조는 대꾸하지 않았다. 바라지도 않는다는 듯 한기조가 뒤돌았다. 연조는 우두커니 그를 바라보다 주먹을 쥐었다. 서럽다. 그런데 서러운 게 끝이 아니었다. 모르겠다. 몰라서 붙잡을 수 없었다. 서러웠다가 두려웠다가 다시 가슴이 뛰었다. 볕에 데워진 듯 눈꺼풀을 누르는 열이 마침내 왈칵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