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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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이 욱신거렸다. 두들겨 맞기라도 한 양 앓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참았다. 입술을 사리물고 젖은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꿈속에서 한기조가 나왔다. 그는 골목을 배회하고 다니는 병든 개처럼 외롭고 가엾은 모습이었다. 어리석게도 그 시절의 연조는 그가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는 건달의 손자란 것도 모르고 무작정 그를 사랑했다.

진정으로 가엽고 덧없는 것은 연조였다. 연조는 그 무렵 그들이 어떤 식으로 끝을 맺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한기조는 연조에게서 멀어져 갔다. 무턱대고 상처를 준 다음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하다는 듯. 일방적인 행위였다. 무식하기도 했고 얻어내고 싶은 게 있는데 요령을 몰라 바보짓을 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는 종잡을 수 없었다.

어느 밤을 생각했다. 싸라기눈. 창백한 전등 불빛 아래 눌어붙은 핏물 따위로 범벅을 한 소년이 붉은 기 선연한 입술로 입을 맞췄다. 더운 숨이 기도를 데우고 한 움큼 체온을 흩뿌리다 떠났다. 그리고 그다음부턴 전시하듯 사귀는 여자들을 늘어다 놓았다.

연조는 일어나 벗은 나신을 내려다보았다. 10년도 전의 일을 회상하려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 일을 기점으로 한기조에 관한 미련은 버리려고 해서 더욱 그랬다. 뒤척거리다가 암막 커튼 사이로 희붐한 빛이 식물의 줄기같이 가늘게 비쳤다. 부스럭거리는 입술을 말아 문 뒤 이불을 움켜잡았다.

기조와 몸을 섞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부디 마지막이길 바라면서도 염원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 불안했다. 이불 속 발을 움직이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려고 하던 찰나 발목에서 금속성의 날붙이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연조는 더럭 겁이 들어 일어났다.

“뭐야. 이게…….”

소름이 쭈뼛쭈뼛 돋았다. 그녀는 눈 밑을 발발 떨며 이불을 걷어냈다. 가느다란 발목에 긴 사슬이 묶여 있었다. 시선을 돌려 조도가 낮은 곳에서 뱀이 똬리를 틀 듯 틀고 있는 사슬의 형체를 응시했다. 동맥이 끊긴 자리를 기점으로 피가 죽죽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무너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침대와 멀지 않은 곳에 쇠줄이 걸려있었다. 발을 자르지 않으면 벽을 부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손을 떨며 쇠줄을 끊어내려 했다.

개 목줄도 아니고……. 이게, 무슨……. 거듭 한기조를 생각했다. 더는 안다고 말할 수 없는 남자였다. 무슨 생각인지, 10년을 넘겨 가며 그를 알고도 종잡을 수 없는 사내라고 생각했다. 눈이 빠르게 젖어들었다. 결혼식장에서 납치되었다. 긴장으로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그 뒤부터였나. 의식이 없었다.

대기실에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사람이 많아서 납치하기 버거웠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쉬울 수 있는 거지. 왜, 왜……. 쇠줄을 잡고 끙끙대고 있을 때였다. 철커덕하고 문이 열렸다.

연조는 젖은 눈을 벌겋게 뜨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말끔한 차림새였다. 쇠줄을 잡고 끙끙대던 그녀는 이불로 벗은 나신을 가리며 옹송그렸다. 한기조는 구두를 벗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연조는 그제야 방안을 둘러볼 수 있었다. 너른 공간이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일조량도 적절했다.

침대 외엔 가구가 몇 점 없긴 했지만 채워 넣으면 무척 근사할 것 같았다. 연조는 입술을 달싹이며 낯을 구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겁이 났다. 숨이 막혔다. 한기조가 벗고 있을 때는 겁보다 화가 났는데 그가 재킷까지 모두 말쑥하게 차려입자 겁만 들었다. 그녀는 구석에 바짝 붙어 그를 노려보았다. 자꾸만 눈물이 났다.

할 말이 많았다. 따져서 물어야 할 것과. 요구해야 할 것들을 메모해서 정리해야 할 만큼.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기조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들어와 으레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둑한 시선이었다. 때론 음습했고 때론 건조했다. 종잡을 수 없는 열기였다.

그녀는 이불을 끌어모은 채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한기조는 넥타이까지 반듯하게 맨 상태였다. 어디 한군데 흐트러짐 없이 말쑥했고 낯빛은 상한 기색 없이 환했다. 연조는 시선을 떨구었다. 괜스레 바라보기 힘들었다. 한기조는 달라진 게 없었다. 13년이나 지나도 그대로였다.

여자보다 더 말간 피부만이 주기적인 태닝으로 그을린 것 빼고는. 아닌가. 근육도 조금 더 굵직굵직해졌다. 열일곱 무렵에도 또래보다 체구가 큰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소년다운 풋내가 이목구비에 선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괜찮아?”

커다란 손이 불쑥 다가왔다. 연조는 놀라 그를 피하며 훌쩍거림을 참았다. 저를 피하는 연조를 본 한기조는 잠시 멈칫하더니 그대로 그녀의 이마를 감싼 뒤 체온을 느꼈다.

“해열제 먹어야겠다.”

“…….”

말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한기조가 이렇게 다정했던 적이 있었던가 모르겠다. 기억하는 한 한기조는 늘 어려운 사람이었다. 열여섯 여름. 처음 말을 붙였던 때부터 그가 어려웠다. 거절당할까 늘 노심초사했고 성의가 짓밟히는 날에는 울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렇게 가까워지고는 어땠더라.

“내, 내 드레스 어디 갔어? 내가 입고 있던 거.”

“…….”

“내 발목에 이건, 이건 뭐야?”

한기조는 답하지 않았다. 어둑한 시선이 날붙이처럼 차가웠다. 연조는 시위하듯 발목을 움직여 철커덕 소리를 내보였다. 음울한 눈이 그대로였다. 미칠 것 같았다.

“나 집에 갈래. 보내줘. 이제 집에 가고 싶어. 너, 너 하고 싶은 거 했잖아. 나 집에 갈래…….”

계속 울음이 나왔다. 참으려 했는데 참아지지 않았다. 음부가 쓰리고 욱신거리는데 그것보다 지금 이 상황 때문에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녀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한기조를 보는 게 싫었다. 당장 집에 가서 수영을 안고 싶었다.

“연조야.”

젖은 이불로 뺨을 문지른 뒤 슬쩍 고개를 들었다. 이마를 짚던 기조의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글록을 잡던 손가락의 표면이 딱딱했다. 눈물이 입술 틈에 고였다. 기조가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붙인 뒤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연조는 이불을 꽉 쥐고 놓지 않았다.

“여기가 네 집이잖아.”

“…….”

“가긴 어딜 가겠단 거야.”

아연함으로 물들어 있던 연조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번졌다. 한기조는 다정하게 웃었다. 연조의 작은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이 그녀를 단숨에 들어 제 허벅지에 앉혔다. 버둥거릴 힘도 없어 맥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그는 기어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이불을 앗아 내동댕이쳤다.

“수, 수영 씨한테 전화할래. 내 애, 애인…….”

“네 신랑이 여기 있는데 그 새끼가 왜 나와.”

연조가 눈을 홉떴다. 숨을 멈췄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기조는 손이 눈물을 닦은 뒤 남편처럼 다정하게 입술을 맞췄다. 그러고는 볼에 붙은 긴 머리카락을 하나씩 떼어낸 뒤 긴 머리를 어깨 뒤로 넘겼다.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얼어있던 연조가 뒤늦게 가슴을 가리며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이불을 뺏긴 뒤로 잡을 게 없어 그의 재킷을 잡고 있던 연조가 경련하며 손을 거두었다. 언뜻 다정한 빛이 돌던 한기조의 눈이 사나워졌다.

“그런 적, 그런 적 없어. 너랑 결혼한 적 없어. 이,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전화기 내놔.”

비척거리는 호흡이 엉망이었다. 연조는 간신히 몇 가닥 요구를 늘어놓은 뒤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허리를 잡고 있던 남자가 억세게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도도록하게 솟은 유두가 그의 손가락 틈에 끼었다. 그의 손은 가슴보다 한참이나 컸다. 언제나 그의 손보다 가슴이 크던 여자를 만나던 한기조가 떠올랐다.

그의 여자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긴 머리에 달라붙은 탑 원피스가 매혹적인 여자들이었다. 큰 키에 늘씬하고 무엇을 더 보태지 않아도 충분히 예쁜 여자들. 언젠가 같이 일하던 사람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저 여자들이야말로 진짜 여자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연조는 지나가는 그의 여자들을 보며 생각했다. 한기조는 남자다운 남자였다. 그의 여자들은 그와 같이 섰을 때 조금의 모자람도 보이지 않는 여자들이었다. 동성이 보기에도 매력적이었고 홀릴 듯 예뻤다.

‘저런 여자들이야말로 진짜 여자지.’

진짜 여자를 사귀는 한기조에게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느 틈인가. 그렇게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한기조가 애인과 팔짱을 끼고 걸어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게 감정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의 여자들은 몹시도 화려했으므로 연조는 자신이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 것을 가지고 태어난 여자들을 홀린 듯 바라보았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철마다 여자를 바꾸고 달마다 사귀는 여자를 늘어트리는 한기조였다. 눈물짓는 애인들을 두고도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영문도 모르고 버림받는 여자들이 늘었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게 어울리는 남자였다. 이런 잘나 빠진 껍데기로 수십의 여자들을 끌고 다녀도 이해가 갔다. 소년기를 벗어난 그는 완연한 수컷의 모습이었고 연조는 다소 그런 그에게서 괴리감을 느끼게 된 터였다.

“나, 나 이거, 이거 좀 풀어…….”

“네가 그 새끼 얘기나 하니까 이걸 채워놓은 거야.”

“…….”

“신랑도 몰라보고 그딴 버러지 얘기만 하니까 말이야.”

“왜, 왜 이러는 거야. 안 이랬잖아. 안 이랬…….”

“연조야.”

가슴을 움켜잡은 채 그녀를 안고 있던 남자가 그녀를 침대 위로 쓰러트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긴 머리카락이 풀썩이며 하얀 침대 위로 흐트러졌다. 억센 힘이 그녀의 손목을 결박했다. 발목에 채워진 쇠줄이 덜그럭거리며 소리를 냈다.

“내가 그 새끼를 꼭 회쳐야 할까?”

“무슨…….”

“나는 지금 네가 그 새끼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회 치고 싶거든. 그 새끼 좆을 끊어낸 다음 기름통에 시멘트 반죽 처넣고 싶어. 그런데…….”

“…….”

“네가 울까 봐 안 하는 거야.”

긴 손가락이 눈언저리를 스쳤다. 가볍게 툭툭 치는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연조야’ 하고 불렀다. 더운 숨이 섞여 있었다. 한숨 쉬듯 나른한 음률. 연조는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한기조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았다. 본 적은 없어도 그가 어떤 식의 삶을 꾸려나가는지는 아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매번 후회했다.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람에게 한때 연민을 느낀 저도 어리석다 여겼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자신이 못내 한심하면서도…….

한기조가 웃었다. 농도가 엷은 물감처럼 희미했다. 남자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과 목덜미 따위에 입을 맞췄다. 거듭되는 입맞춤에 폐부가 덜그럭거렸다. 그의 기다란 육신을 감싼 슈트의 질감이 황홀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연조는 어깨를 옹송그린 뒤 그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자는 비쩍 마르고 볼품없는 몸에 고양된 눈을 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가 무슨 말을 더할지 궁금했다. 신경을 좀먹는 벌레가 ‘지르르, 지르르’하고 울며 귓불의 살을 갉아먹었다. 한 움큼 흐른 눈물에 입을 맞춘 기조가 다정히 속삭였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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