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눈물이 채 식기도 전에 남자가 가랑이를 파고들었다. 근육질의 몸을 감싼 슈트가 부스럭거리며 그녀를 감싸 안았다. 앞섶이 터져 나갈 것처럼 부푼 남자의 중심이 음부와 마찰했다. 이불을 쥐고 있던 손가락을 제 입속에 넣고 빨던 그가 손톱 끝을 살짝 깨물었다. 찌르르 울리는 고통이 쾌감에 가까웠다.
연조는 제 다리를 벌리고 음부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응시했다. 가랑이를 모으려고 하니 그가 무서운 눈빛으로 엉덩이를 때렸다. 정확히는 회음부였다.
“싫어.”
“좋을 거야. 좋게 해 줄 자신 있어. 응? 연조야. 핥아 줄게.”
“아니, 아니야. 제발. 기조야. 내 말, 내 말 좀 들어봐! 우리 수영 씨 어디 갔어? 어떻게 한 거 아니지? 잘못된 거 아니지? 응?”
양 손목이 결박된 채로 울음을 터트렸다. ‘공구리’를 친다는 걸 친절하게도 풀어 설명하던 그가 떠올랐다. 그래서 더럭 겁이 들었다. 제 신변에 대한 위협보다 수영의 목숨이 더 촉박하다고 느낀 건 그때부터였다.
기조는 드러내놓고 수영을 싫어했다. 개인에 대한 단순한 호불호가 아닌 증오에 가까웠다. 연조는 언제고 그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저에게 접근하는 남자에게 살의에 가까운 증오를 감추지 않으면서 매번 연조의 앞에서 휘황찬란하게 꾸민 여자들을 데리고 다녔다. 매대 앞에 진열한 상품들처럼.
그 이상의 가치는 없는 것처럼. 애정보다는 과시욕이었다. 연조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여자들 대체로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멸시하고 모멸할 때도 있었다. 비이성적인 망념에 젖어든 그녀들이 열패감을 토로할 때마다 연조는 괴로웠다.
“너 이런 거 안 했잖아! 나, 너랑 안 하고 싶어. 안 하고 싶어. 기조야. 이런 거 싫어. 너랑 안 할래.”
엉엉 울었다. 연조는 몇 번이나 우는 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린 애도 아니고. 운다고 달라지는 일도 없는데 기조가 그녀의 가랑이 사이를 파고들려 할 때마다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뭘 안 한다는 거야. 넌 신랑하고 안 자는 여자 봤어?”
“왜 자꾸 이상한 소리 해? 왜 자꾸 말 돌려! 내가 왜 네 아내냐고!”
“박수영 그 새끼하곤 모텔만 잘 가더니. 그 새끼 자지는 빨면서 내 건 못 빨겠단 거야?”
“더러운 소리 그만……!”
“씨발. 그래서 내가 네 보지 빨아주겠다고 했잖아.”
“너랑, 너랑 말씨름 안 할 거야. 안 해. 흑, 흐윽……. 수영 씨, 수영 씨 불러줘.”
식장이 떠올랐다. 신부 대기실을 기웃거리던 수영과 입술 끝을 말아 올리던 연조. 머리를 한 아름 틀어 올리며 속눈썹을 찍어 올리던 기억이 머릿속을 범람했다. 아무 문제 없던 시간들이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조는 결혼식 전 마지막으로 기조를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이 남자가 얼마나 난폭하게 굴었는지.
수영에게 데리러 와달란 말도 차마 하지 못했다. 사람 하나 죽이는 게 담배를 피우는 것만큼이나 쉽다던 남자였다. 연조는 덜덜 떨며 울었다. 버둥거리며 그의 품을 벗어나려 애를 쓰다가 이불로 몸을 가렸다. ‘수영 씨’란 말에 기조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재킷을 벗었다. 철커덕하며 벨트 푸는 소리가 났다.
울음을 삼켰다. 식장에서의 마지막 의식을 더듬다가 그가 제 안에 사정했단 걸 기억해냈다. 다행히 눈을 떴을 때 가랑이 사이는 전부 정돈되어 있었다. 이걸 한기조가 해 준 걸까? 모르겠다. 그보다 중요한 게 너무 많아서 제 음부에 그의 손길이 닿았단 건 생각하고 싶지 않다.
연조는 훌쩍이며 눈두덩을 연신 문질렀다. 또 할 모양이었다.
“여자친구 있었잖아. 많았잖아. 왜 갑자기…….”
“너한테 사랑한다고 했어.”
“그 말 하는 게 아니라…….”
“네가 자꾸 못 알아먹으니까. 연조야. 응?”
“…….”
“씨발. 나 좀 봐 달라고 그렇게! 됐어.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이제 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기조가 이불을 쥔 채 가슴을 가린 연조의 어깨를 안았다. 연조는 푸드덕대면서도 밀치지 못했다. 기기한 열감에 싸인 개암 색 눈동자가 그녀의 가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였다. 마주 보기 힘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한기조가 제게 봐 달라고 했던 적이 있었나?
“예뻐.”
버스럭거리는 음성이 타들어 가는 지푸라기처럼 홧홧했다. 연조는 가슴으로 뻗어오는 손을 응시했다. 예쁠 리 없었다. 연조는 제가 가진 어느 것도 예쁜 모양이라고 여기는 게 없었다. 학습된 결과이기도 했지만 실제도 그러했다. 한기조가 날이면 날마다 바꾸는 여자들과 비교하면 더더욱.
하얀 얼굴에 맵시 있는 몸매에, 여성적인 굴곡을 가진 여자들……. 그 여자들의 가슴을 주무르던 한기조가 하는 말이면 믿음직하지 못했다. 연조는 내키지 않은 걸 먹은 사람처럼 표정을 일그러트린 뒤 그의 손을 쳐 냈다. 징그러운 촉수를 보는 듯한 눈으로 그를 노려본 뒤 더욱 구석으로 물러났다.
“……보지 마.”
눈두덩이 식었다. 지난 13년을 생각하니 별로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한기조가 없을 때 한기조가 저를 납치한 이유를 생각했다. 갑자기 미쳤나.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시답지 않은 짓에 시간을 허비하는 남자는 아니었다.
“아까부터 계속 같은 질문 하고 있다는 거 알지? 왜 갑자기 날 여기로 데리고 왔어? 여기가 어딘데. 그거부터 말해.”
기조는 듣지 않았다. 굳은 낯빛이 아무래도 좋다는 듯 누그러졌다. 그는 연조를 답삭 안았다. 그리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제 허벅지에 그녀의 알몸을 올려놓고 피부를 쓸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고 다시 눈두덩이 열기로 데워졌다.
“나중에, 나중에 말해줄게.”
“언제? 그게 언젠데? 너 자꾸 왜 이래. 이상하게 하지 마.”
옹송그린 가슴을 쥔 남자가 울고 있는 연조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러더니 아랫배로 손을 옮겨와 둥글게 원을 그리며 부드럽게 쓸었다. 자궁이 있는 자리였다. 밋밋하여 볼품없는 가슴과 마찬가지로 뼈마디만 홀쭉한 배였다. 손이 닿은 자리가 문드러질 것 같았다. 한기조가 저를 보고 하는 소리도 우롱 같았다.
“말하라고. 지금! 지금! 나한테 왜 이러는지도 말해……. 이것도 풀고!”
발목을 움직였다. 기조는 일그러트린 그녀의 눈가를 슥슥 문지르며 가만히 쳐다보았다. 연조는 그 우묵한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저런 얼굴은 무섭다. 어떤 원한 관계였는진 모르지만 상대의 뺨을 맨손으로 후려칠 때와 비슷했다. 물론 완전히 같은 건 아니지만. 어쩌면 이토록 ‘방자하다’시피 멋대로 구는 것은 한기조가 제게 그런 식의 폭력을 쓰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애인에게 ‘공구리’를 치겠다 할지언정 연조의 목숨을 쉬이 위협하진 않았으니까.
“네가 내 애 가지면.”
“뭐?”
“널 임신시킬 거라고.”
탐미적인 입술의 끄트머리가 위로 당겨졌다. 임신이란 말에 기조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연조만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간 뇌까렸던 소리가 어떤 악의도 저의도 없는 순수한 진심이란 걸 깨닫자 말문이 막혔다.
“결혼식은 애 낳고 나서 하자. 그땐 너 원하는 대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줄게.”
“난, 난……. 내가 풀어달라고 했지. 언제…….”
“말했잖아. 네가 애 배면 풀어준다고.”
냉랭한 일갈이었다. 더는 묻지 말라는 투였다. 사실 더는 듣고 싶지 않은 망언이기도 했다. 연조는 입을 걸어 잠갔다. 어젯밤, 망설임 없이 사정하던 것이 떠올랐다. 처음이니까, 처음이니까 임신하진 않았을 거다. 그럼 괜찮다. 그렇게 생각했다.
“예쁠 거야. 너 닮으면…….”
“그런 소리 하지 마. 난, 나 닮은 애 싫어.”
연조가 진저리쳤다. 정말로 싫었다. 자신을 닮은 애라니. 나는 내가 너무 싫은데. 무슨 죄가 있어서 내 애가 나를 닮아. 연조는 낯을 구겼다. 수영과는 아일 가지지 않을 작정이었다. 애가 좋아도 제 피를 이은 제 애가 싫어서. 애를 낳기 싫다는 연조였다. 누구는 아이를 임신하는 과정이나 아이를 낳는 과정이 싫어서 임신을 피한다고 했다.
연조는 반대였다. 아이를 좋아했지만, 그래서 아이를 낳는 수고를 감당할 수 있지만. 그녀를 닮은 아이는 싫었다. 평생 낳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아이를 자주 보고 사랑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보육원의 교사가 되었다. 그걸 기조가 알지 모르겠다. 아마도, 아마도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 자신에 대한 염증과도 같은 불신과 혐오가 어디서 비롯된 건지. 어디서 파생되어 내내 고여 있게 된 건지.
“나는, 나는 싫어. 아기 가지는 거 싫어.”
도리질했다. 기조는 여자를 응시했다. 넌더리 나는 것을 앞에 두고 질려 버린 눈이었다. 그런 눈을 한 연조는 처음이라 말문이 막혔다. 늘 무감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만큼이나 감정도 모호해서. 기조는 늘 애가 닳았다. 드러내기를 주저하는 여자였다. 연조는 입술을 달싹이다 남자를 바라보았다. 긴 시선이 위협적이었다. 바닥을 캐듯 그녀의 감정을 찬찬히 캐어내려 하는 것이 보였다.
“난 내 애 가지는 거 싫어. 진짜야. 수영 씨 하고도 아기 안 낳기로 했단 말이야. 이해 못 하겠지만. 난, 난 그래.”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불안한 표정을 짓자 기조의 얼굴에서 표정이라고 할 것이 사라졌다. 어느 때보다 사나운 얼굴이었다. 깔고 앉은 허벅지가 가시방석이었다. 발작하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던 것이 무안해졌다.
“왜?”
기조가 물었다. 연조는 무엇에 대한 되물음인지 궁금했다. 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왜 널 닮은 애가 싫은데?”
속눈썹을 깜빡였다. 반사적인 행위였다. 버둥거리며 그를 밀어내자 그가 다시 침대에 연조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가까이 있었다. 묵직한 숨결이 입술 언저리에 닿았다. 언제든 키스를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연조는 그저 그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답을 하지 않으면 또 저 혼자 노려보다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연조는 괜스레 그런 말을 한 것이 난감해져 시선을 내리깔았다.
“물었잖아. 왜 싫으냐고.”
“그게, 그게 왜 궁금한데…….”
“궁금하지. 앞으로 너 하고 애를 가질 건데.”
더는 할 말이 나지 않아 입술의 보푸라기 같은 껍질을 빨았다. 왜 싫으냐고? 왜 싫으냐고……. 왜 저를 닮은 아이가 싫으냐고. 모르겠다. 왜 태어나지도 않은 제 자식이 싫은지. 왜 저를 닮은 아이를 잉태하는 일이 끔찍할지. 한 번이라도 그 애가 사랑스러우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의 아이를 가진다고 해도 결과는 같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녀는 그 애가 징그러웠다. 그 애를 징그럽게 느끼는 자신도 징그러웠다.
그러나 정말로 두렵고 끔찍한 것은 아이를 두고 별수 없이 모친을 닮아갈 연조의 미래였다. 자식은 어머니를 닮는다고 하지 않았나. 연조는 제 모친이 어떤 태도로 그녀를 키웠는지 모두 기억했다. 그 일관되고 한결같은 양육 태도가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는 것 또한 선명한 일이다.
살아가며 모친을 닮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는 그녀였지만 같아지지 않으리라 말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난, 난 싫어.”
“…….”
“네, 네 애인 있잖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예하랬나? 예영이랬나. 꼭 연예인처럼 예쁜 여자였다. 하긴 그 여자 말고도 그의 연인들은 모두 연예인처럼 예뻤었다. 이목구비가 선명한 것과 달리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이름이 뭐가 됐든 그 여자가 있었다. 그렇게나 예쁜 여자가 기조에게는 있었다. 그 여자 외에도 무수히 많은 여자들이 있었지만 연조는 유독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그러니 그런 여자가 기조의 아이를 낳는 게 옳았다. 남녀는 놀랍도록 준수한 외모의 한 쌍이었으니 자식 또한 예쁘고 잘생기지 않을까.
그 훌륭한 외양을 닮는다면 미운털이 박힐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럼 그 애를 차별할 일도 없을 것이고 그 애가 박대당할 일도 없을 것이고……. 좋아하는 남자가 제게 잔혹하게 구는 이유를 외모 탓으로 돌리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 예, 예영……? 아무튼, 아무튼 있었잖아. 네 애인.”
더듬거리며 그녀를 상기시켜주었다. 기조는 반응하지 않았다. 척척한 눈빛이 습윤했다. 마른 침을 삼켰다. 아기라니 말도 되지 않는다. 가질 일도 없고 낳을 일도 없다. 그게 한기조의 아이라면 더욱.
“왜? 왜 안 가지고 싶단 건데. 몸 버리는 거 싫으면 대리모 해 줄 여자라도 구해보고.”
“미쳤어? 왜…….”
“그게 싫으면 날 납득시킬 이유를 말해보던가.”
“내가, 내가 왜 널 납득시켜야 하는데?”
기가 막혔다. 더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막무가내 요구 따위 졸속으로 들어 줄 일은 없을 것이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물기가 식기 시작했으나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몸은 여전히 뻣뻣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연조는 경련하듯 어깨를 떨었다. 거머쥔 이불을 연조에게 내민 한기조가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녀는 발작하듯 이불로 어깨를 가린 뒤 현관문을 응시했다.
경찰일까? 경찰이면 구해달라고 소리를 질러야 하나? 아님 수영 씨? 그 사람이 여기까지 올 수 있을까? 모르겠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한기조와 입씨름만 하고 있는 처지였다.
연조는 저벅저벅 들어오는 남자의 구두를 힐긋거렸다. 수영은 아니다. 그 사람은 구두를 신는 법이 없었다. 기다란 몸에 먹색 슈트를 반듯하게 입은 남자가 연조를 쳐다보았다. 연조는 벌겋게 달군 낯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뽑아서 젓 담그기 전에 그만 봐.”
한기조가 낮게 뇌까렸다.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황량한 내부에 흐드러졌다. 연조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기만 했다. 웃음을 터트리던 남자가 입술을 뗐다.
“들어와.”
사람이 하나 더 있나? 욕이 나올 것 같았다. 누구는 벗겨 놓고 자기들은 시시덕거리면서 홈 파티라도 열 작정인가. 분이 났다. 연조는 고개를 들어 악에 받친 눈으로 기조를 응시했다.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와 웃음을 터트린 남자는 이인혁이었다.
이인혁. 건달도, 일반인도 아닌 반달처럼. 각이 잡힌 교복을 입고 줄담배를 피우던 녀석. 지난 13년간 연조 또한 익히 보아온 얼굴이다. 고교 학창시절보다 졸업한 이후 그와 말을 트게 되었다고 하면 아이러니하려나.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했다. 건달과 엮일 건더기라곤 아주 자그마한 흠도 없었다. 그런데도 한기조와 한기조의 측근들은 그녀에게 종종 말을 걸고 선물을 주고 집에 바래다주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겹겹이 쌓여 오늘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연조는 음산한 얼굴을 한 기조의 얼굴을 쳐다보다 현관을 들어오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어?”
의도치 않은 탄성이 입 밖에 샜다. 연조는 의아함과 불안감에 발을 동동 구르며 여자와 기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새집 냄새가 물씬 풍기는 내부를 둘러보던 이인혁이 떨떠름한 웃음을 지으며 여자에게 손짓했다.
“기조야.”
얼굴만 빼고 목 끝까지 이불을 두른 연조가 마지못해 그를 불렀다. 한기조는 기다렸단 듯 다가왔다. 그러곤 능숙하게 쇠줄을 풀었다. 그는 이불 채로 그녀를 둘둘 말아 드레스룸으로 갔다. 번데기처럼 둘둘 말린 채 다른 방으로 온 연조가 그의 셔츠 깃을 잡았다.
“뭐야?”
“뭐가?”
“아까, 아까 네 애인. 네 애인이잖아.”
잡은 셔츠 깃이 구겨지는 줄도 모르고 움켜잡았다. 턱이 덜덜 떨렸다. 그 여자가 맞았다. 그러니까, 기조의 애인 말이다. 그가 몇 년 전 사귀던 여자. 늘 한 줌 만한 허리를 한팔로 안고 다니던 여자. 그 여자였다. 예영이었나. 예하였나. 아니, 아니다. 얼굴을 보니 알겠다.
“예라 씨 맞지?”
거푸 물었다. 늘 하던 화장을 지우고 긴소매를 입으니 다른 사람 같았지만. 아니. 그보다 같은 사람인 줄 뒤늦게 알았던 건 일그러진 한쪽 얼굴 때문일 것이다. 연조는 그것이 두려웠다. 턱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마구잡이로 흐를 정도로 무서웠다.
“말해봐.”
“옷 입어.”
붙박이장에서 카디건과 통 원피스를 꺼낸 그가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연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리도 원하던 옷을 건네받고도 기쁠 수 없었다.
“어떻게 한 거야? 네 애인이 왜 저런 거야? 설마 네가 그런 거 아니지?”
“그게 궁금해?”
험한 욕을 입에 담은 것처럼 기조의 낯이 일그러졌다. 연조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 고개를 숙였다. 귀를 막고 싶었다. 그렇다고 할까 두려웠다. 왜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의 얄팍한 인간성에 대해 실망한 것은 십수 번도 넘는 일인데.
이제 와 셀 수도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실망한 일. 혹은 겁을 먹고 주저앉은 일. 타인의 일부를 훼손시키고도 반듯하게 잠을 자는 남자였다. 대저 그런 일에는 망설임도 미련도 없었다.
“내가 그랬어.”
“돼, 됐어. 아, 안 말해도 줘도 돼. 어차피 내 일…….”
“저년이 널 우습게 여겼잖아.”
내리깐 시선을 추켜들었다. 언 눈이었다. 냉골처럼 차고 사나워서 말 붙이기도 힘든 인상이었다. 알고 있었다. 한기조가 어려운 사람이란 것을. 이인혁을 포함해 그의 측근들에게조차 그는 힘든 사람이었다.
위계의 차이는 분명하고 굳이 서열을 들이밀지 않아도 한기조는 처음부터 모두에게 딱딱하고 버거웠다. 천성이 그랬다. 곁을 주지 않았고 틈을 주지 않았다. 적어도 연조에겐 그랬다.
“내, 내가 왜…….”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넋이 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른 눈 밑에 말랑한 입술이 닿았다. 오른쪽 입매 끄트머리. 길쭉하게 팬 자상이 눈에 닿았다.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외마디 일갈이 귓가를 맴돌았다. 부딪쳐 오는 입술이 다정했다. 감사나운 눈과는 너무도 달라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 손에 감아쥔 이불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연조는 처음으로 자신이 혐오스럽던 날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