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46)

* * *

그러니까 그날의 기억은 이러했다. 한기조와 엘리베이터에 동승한 여자는 ‘예라 씨’라고 했다. 풍만한 가슴에 빨간 탑이 무척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뾰족한 구두코와 높은 굽이 다각다각 소리를 낼 때마다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입술에 칠한 진한 루주가 조명을 받아 반지르르했다. 기조는 그런 여자들을 만났다. 이따금 다른 스타일의 여자들을 만나도 큰 맥락에선 벗어나지 않았다.

예뻤다. 그리고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천국에서야 만날 수 있다는 미남이 부와 권력을 한꺼번에 쥐었으니 마다할 여자가 없었다. 기조의 팔짱을 낀 여자를 곁눈질했다. 흘긋거릴 생각은 없었는데 예뻐서. 그러니까 너무 예뻐서 자꾸만 시선이 갔다. 잘생긴 남자에게 시선이 가는 것처럼. 어릴 때 고치지 못한 버릇이었다.

“뭘 쳐다봐?”

여자가 물었다. 연조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작게 대꾸하고 입을 다물었다. 여자는 불쾌했는지 기조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소곤거리는 소리에 볼이 빨개졌다.

기조의 시선이 그녀에게 흘깃 돌아왔다. 목 주변을 이글거리던 열이 얼굴로 몰렸다. 낯이 홧홧하고 뜨거웠다. 쥐구멍에 숨을 수 없으면 증발이라도 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기조의 냉랭한 눈길이 몇 주 전을 생각나게 했다.

“너는 입 다물어.”

기조가 낮게 일갈했다. 여자는 붉은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불퉁한 표정을 했다.

‘애인이 있었구나.’

몰랐다. 그때, 그러니까 기조를 다시 만났을 때 그때는,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다. 하긴 나이가 몇이기에 아직 애인이 없을까. 연조는 애써 표정을 밝게 꾸미려 했다. 기조와 몇 년 만에 다시 재회한 것인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복도를 마지막으로 사이가 틀어져 버렸다. 혼자서만 각별했던 것일까. 기조는 연락도 없이 학교를 그만두었다. 유학을 간 건지. 아니면 학교를 옮긴 건지. 연조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빈자리를 더듬으며 결석이 반복된다는 생각만 했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그가 보이지 않은 지 2주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연조는 고민 끝에 교무실을 찾았다. 돌아온 것은 그가 학교를 그만두었단 말이었다. 이유는 불분명했다. 담임은 굳이 캐묻지 않은 것 같았다. 기조는 늘 그랬고 이제 와 증발하듯 사라졌다 한들 교사들에게는 도리어 쾌재인 일일 것이다.

교무실을 나오는 걸음이 비틀거렸다. 허망해서 눈물이 나오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배신당했다는 감정만이 선명했던 것 같았다. 무엇에, 왜 배신을 당한 건지 알지 못했다. 곰곰이 헤아려도 그가 제게 이런 식으로 굴 이유가 있었을까. 왜 갑자기, 왜, 왜……. 잘 지냈었던 것 같은데. 분명히 아무 탈 없이 지냈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기조는 그녀에게 가혹하게 굴었다.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그녀에게 접근했고 이해할 수 없는 태도로 일관되게 그녀를 몰아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조는 기조가 싫지 않았다. 잘못 없는 친구를 무리와 때리고 괴롭혀도 연조는 그에게서 완전히 등 돌릴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나 쉽게 등을 돌렸다. 이유도 없이 그녀를 괴롭히고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떠났다. 마음이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사실은, 사실은 배신당했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는데. 그와 그녀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눈물이 났다. 비적이고 나오는 울음 때문에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잠갔다.

그때 왜 입을 맞췄을까. 왜…….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데 왜 입술을 맞춘 거지. 기조에게 그녀는 무엇이었을까. 낭패스러웠다. 감정들이 빠르게 달구어지다가 둑이 터지는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

연조는 쉼 없이 울었다. 화장실에서 그녀를 발견한 나래가 책가방을 싸 조퇴를 하라고 등을 떠밀 때까지. 울고, 울고, 울다가 집에 가서는 끙끙 앓았다. 기조와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렇게 마무리 지었고 그렇게 가슴 속에 묻어두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것이 8년 후였다.

예고 없이 그녀를 떠났듯, 예고 없이 그녀를 찾아왔다. 8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도중이었다. 기다란 장신의 남자가 작고 아담한 카페를 가로질러 들어왔다. 윤곽 자체는 조형처럼 미끈하여 슬림한 인상을 주었지만, 위압적인 거구였다.

연조는 향수 냄새가 큼큼하게 나는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가 ‘송연조’ 라고 부르기 전까지, 아니. 그가 눈썹을 치켜들며 계산대 위에 얹어둔 손가락을 까닥거리기 전까지 눈앞의 남자가 ‘한기조’였다는 것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허둥거리며 그를 맞이하고 있을 때 그가 입술을 뗐다.

‘이제야 기억났어?’

다분히 불쾌한 어투였다. 연조는 심란했고 혼란스러웠다. 그를 알아보고 감정이 뒤죽박죽 얽혀 정리되지 않았을 때 그는 아메리카노를 하나 주문했다. 허둥지둥 계산을 하고 커피를 내려 그에게 건네자 그는 주말에 시간을 내어달라 했다.

연조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버버거리며 대꾸를 하느니 그러는 게 나은 것 같았다. 기조가 가고 나서도 계속 심장이 쿵쾅거렸다. 좋은 건지 아닌 건지. 연조도 자신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그저 계속해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시 앓아누울까 봐 겁이 났다. 당장 기조가 보고 싶어서 주말이 되었으면 하다가도 흘러가는 시간이 두려워 매일 밤 꿈자리가 사나웠다.

그리하여 토요일의 날이 밝았을 때 연조는 다소 떨리는 가슴으로 첫사랑의 앞에 섰다. 그런 어설픈 사랑도 사랑이라 할 수 있다면 한기조는 그녀에게 사무치는 사랑이었다. 예약된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가 그를 찾아 더듬거렸다.

모던한 인테리어에 클래식이 흐르는 레스토랑은 정적이고 차분했다. 괜히 더 긴장되어 속이 울렁거렸다. 신경 써서 입고 온다고 입고 왔는데도 옷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조는 가난한 대학생이고 부모님의 사업은 불경기 속에서 맥을 추리지 못하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다 말고 카운터에 예약자의 이름을 말한 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룸으로 이동했다. 남자는 먼 곳에서도 도드라졌다. 두툼한 근육과 대비되는 늘씬한 윤곽이 어디에서든 돋보이기 때문이리라. 연조는 그의 앞에 당도하고도 쭈뼛거리고 있었다.

구면이라고 해도 오래전의 일이다. 눈치를 보다가 의자를 빼주는 기조의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작 그는 몸에 밴 습관이라도 되는 듯 어색한 기운 없이 태연했다. 그런 와중에 연조만이 희게 달뜬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매끈한 얼굴이 거뭇했다. 소녀 시절, 그녀가 기억하던 연약한 빛은 희미하게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연조는 왠지 서글퍼 손가락 끝을 문질렀다. 훤칠한 미남일 뿐만 아니라 사내다운 골격이었다. 동년배의 남자라면 굴욕감을 느낄 수도 있을 법한. 키는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 할 만큼 커다랬고 길쭉길쭉한 몸은 아시아인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체구였다.

“잘 지냈어?”

“어?”

“8년이잖아.”

식전으로 나온 마른 빵을 움켜쥐고 있을 때였다. 기조가 물었다. 빵을 먹기 위해 입을 벌리는 것조차 부끄러워 굳어있던 참이었다.

“어……. 그냥, 그냥 학교 다니고 그랬어.”

다른 말이 기억나지 않았다. 사실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왜 그때 말없이, 떠난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떠난 건지. 학교를 그만두고 뭘 했는지.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라질 만큼 그녀가 싫었던 건지.

언젠가 기조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모두 묻고 싶었다. 어릴 때는 기조가 불편했지만 시간이 흘러 서로가 어른이 된 후에는 조금 더 편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연조는 그때보다 더 기조가 불편했다. 두근거리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고. 예전에도 그랬는데 지금은 더했다.

“먹어.”

연조가 더듬거리며 대꾸하자 기조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김이 나는 수프를 가리켰다. 연조는 스푼을 들어 한입 먹었다. 갈색 고기와 감자가 먹기 좋은 크기로 담긴 수프는 부드러운 크림맛이 강하게 났다. 훌륭한 맛이었다. 나래와 같이 왔다면 빵도 리필 했을 것이고 수프도 세 그릇을 비웠을 것이다. 그런데 기조의 앞이니까. 속이 울렁거렸다. 연조는 눈을 깜빡이며 볼이 간지러운 것도 참고 기계적으로 요리를 먹었다.

“너는 안 먹어?”

“…….”

기조는 답이 없었다. 연조는 스푼을 쥔 손을 멈추었다.

“나는 어떻게 지냈냐고 안 물어봐?”

“어?”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안 궁금하냐고.”

할 말이 나지 않았다. 바닥이 보이는 그릇을 서버가 치우고 몇 가지의 요리를 가져다주었다. 희고 오목한 접시 위에 덩그러니 앉은 도미가 푸릇푸릇한 새싹을 얹고 있었다. 연조는 검지의 손톱을 꾹 눌렀다.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

“어, 어떻게 지냈는데?”

연조는 간신히 물었다. 입술 끝이 경련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긴장으로 얼룩져 자꾸만 땀이 났다. 화장이 망쳐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고 표정이 이상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런 것을 염려하느라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기조가 말을 붙이지 않으면 연조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됐어.”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연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남자친구 있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기조가 다시 말을 붙여왔다. 남자친구라니. 하긴 남자친구가 있을 만한 나이이기는 했다. 나래를 보면 일 대 일 미팅부터 단체 미팅까지. 또래 대학생들을 보면 적게는 한 번, 많게는 서너 번의 연애경험이 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없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고 할 만큼.

“있었는데 헤어졌어.”

연조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 언제 헤어졌느냐고 물으면 대강 얼마 전에 헤어졌다고 얼버무리려고 했다. 그러면 다들 더는 묻지 않았다. 간혹 여자들은 새로운 남자를 소개시켜 주겠다며 들이밀기도 한다고 했지만 연조는 그조차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한기조이지 않나. 그런 귀찮은 짓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올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연조는 말없이 커트러리를 움직이고 있는 남자의 안색을 살폈다. 이렇게나 미남인데 표정을 굳히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사나워 보였다.

설마 거짓말인 걸 알아챘나 싶어 걱정이 들었다. 사실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사귀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기보다는 그녀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막연하게 외모가 볼품없어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보다 연조가 학교에 머무르는 시간이 오래되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인테리어 가구점을 하던 아버지의 일이 어려워졌다. 이런저런 악재가 겹쳤지만 다행히 대학까지는 무사히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연조에겐 나래처럼 대학 생활이라는 호사를 누릴 여유가 나지 않았다.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할 수도 있었으리란 생각을 했다. 비슷한 형편에 같은 대학을 다니는 아르바이트생은 멀끔한 외모에 부유한 남자친구를 만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데이트했으니까.

“맛은 어때?”

채끝살을 우물거리고 있을 때였다. 먼저 식기를 놓은 기조가 물었다.

“맛있어.”

연조는 고개를 들었다. 내내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다가 용기 냈다.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이런 얼굴에 설레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연조도 설렜냐면…….

“내가, 내가 계산…….”

“네가 내려고?”

식사가 대강 끝나고 자리를 일어설 때였다. 연조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기조의 앞에 섰다. 하얗게 질렸다가 빨갛게 익었다가 굳은 낯빛을 데우는 열이 제멋대로였다. 연조는 어설프게 신은 구두 때문에 휘청거리며 일어나 지갑을 꺼내 들었다.

처음 신는 구두의 굽 때문에 휘청거리자 기조의 손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지만 연조는 반사적으로 그를 밀쳐내며 입술을 물었다. 남자의 표정이 일순 딱딱해졌다가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연조는 눈을 깜빡이며 복잡한 마음을 가다듬었다. 널뛰는 감정들이 주체 되지 않았다.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 눈 밑이 떨리는데 팔이 닿으면 머리가 터져 죽지 않을까. 그녀가 펄쩍 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는 말없이 손을 거두었다. 연조는 게슴츠레 눈을 내리깔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다는 아니더라도 그녀 몫의 식사값은 내야 하지 않을까. 나래가 말하기를 그래야 남자들이 좋아한다고 했다. 데이트를 해보지 않은 연조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하니 집에서 나올 때 비상금을 털어 나왔다.

기조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자주 보게 되는 일은 없어도 나쁜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꼬박꼬박 꿍쳐둔 비상금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기조는 그녀가 카운터로 걸어갈 때부터 노골적으로 정색을 하더니 휘청거리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일렬로 줄을 서 있던 직원들은 환한 웃음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이미 계산이 되어있던 건가. 연조는 눈을 깜빡이며 제 허리를 감은 팔을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눈가에 열이 몰렸다. 연조는 입술을 꾹 깨물고 그의 팔을 걷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는 제 벤틀리의 조수석에 그녀를 구겨 넣고 차에 올랐다.

그러고는 말없이 차를 몰아 그녀의 집 앞으로 갔다. 주소는 말해 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그녀가 집 앞에서 내릴 때까지 말이 없었다. 불쾌함이 완연한 얼굴이라 캐물을 수도 없고 따질 수도 없는 문제라 연조는 그저 모든 게 불편했다.

그렇게 재회가 끝났다.

‘기조가 너 채용하고 싶다는데 경리로 일할래?’

그리고 어느 날 찾아온 이인혁이 물었다. 아마도 기조를 만난 지 일주일이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그때는 이인혁이 이런 일에 손 담그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아니. 한기조가 그런 종류의 일을 하는 남자란 것도 알지 못했다. 그들이 모두 물밑의 검은 손인 줄 알았더라면. 정치권과 협착한 탓에 이젠 사법계의 ‘골칫거리’라고 운운할 수도 없는 지경이란 걸 미리 알았더라면.

그러나 연조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몰라서 응했다. 이인혁과는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만났고 우연히 동창 모임에서 연조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고 한 그는 아주 친절한 얼굴로 기조의 소식을 전하며 그녀를 이끌었을 뿐이었다.

수습인데도 적지 않은 페이였다. 집도 알아봐 준다고 했다. 제 한 몸 누일 작은 고시텔에서 지내던 그녀로선 회사에서 번듯한 집을 알아봐 준다는 게 고마움을 넘어 황송할 지경이었다. 사회 경험도 적은 탓에 그 제안이 수상한 줄도 몰랐다.

바보 같은 일이었다. 하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고작 경리하나 뽑는데 고급 아파트까지 선물할까. 그렇지만 그때는 그게 좋은 제안인 것 같았다.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구겨진 인생에 볕이 든 것이라고……. 아무 의심도 없이. 심지어 나래마저 기조의 친절쯤으로 여기라고 했으니까.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등록금과 생활비를 모으던 나날이 지겨웠다. 얼른 학업을 끝내면 제대로 된 일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조는 거두절미하지 않고 그의 제안에 응했다. 다시 돌아간다면 고시텔이 아니라 길바닥에 나앉는다 해도 응하지 않을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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