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사님. 저 여자 변태 아니에요? 기분 더럽게 자꾸…….”
문이 열렸다. 기조는 듣지 않고 먼저 나갔다. 여자가 종종걸음을 치며 그를 따랐다. 연조는 발간 얼굴로 등을 보인 여자에게 허리 굽혀 사과했다. 이인혁의 제안을 수락하고 보름. 그럭저럭 일에 적응하고 있는 참이었다. 준 재벌쯤 되는 그룹이라 전해 들었는데 맡기는 일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몇 년 전에 따놓은 자격증이 큰 도움이 됐고 무엇 보다 일이 쉬웠다. 퇴근도 일찍 시켜주었고 사정을 헤아려 주는 씀씀이도 큰 사람들이 직장 동료들이었다.
그러니 아쉬운 점이 없었다. 한기조만 빼면…….
“인혁아.”
엘리베이터 문 너머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급하게 내린 연조가 밝은 목소리로 동창을 불렀다. 회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게 기뻐 쪼르르 다가가 말을 붙였더니 인혁이 딱딱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회색 슈트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인혁이 그녀를 응시했다. 남자는 엷은 웃음기도 없었다. 괜히 머쓱해져 입가에 웃음을 지우는데 앞서 걸어가던 한기조가 그들을 응시했다. 덩달아 따라가던 여자도 그녀를 돌아보았다.
연조는 그제야 자신이 이 머쓱한 분위기를 만들었단 걸 알고 작게 소곤거렸다.
“나, 갈게.”
“그래.”
“있잖아. 나중에 점심 같이 먹을래?”
“뭐?”
“그냥 뭐, 좀 물어볼 것도 있고……. 근데 넌 나 안 반가워?”
“어? 아니. 반갑지.”
인혁이 시선을 다른 데다 돌리며 눈썹을 좁혔다. 자꾸만 어려워하는 기색이 보여서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동창 모임에서만 해도 퍽 수다스럽던 남자가 지금 이 자리에선 지나치게 딱딱했다. 불편한 기색이 완연한 낯을 본 연조가 뒤를 돌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데면데면하게 군다면 딱히 아는 척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이인혁을 보내고 로비를 걸었다.
한기조는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얽혔다. 개암 색, 빛이 고인 눈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불현듯 그의 열여덟이 떠올랐다. 부서진 유리의 파편 같은 희고 서늘한 얼굴. 창백한 푸른빛……. 연조는 그 무렵을 어렴풋이 기억해내며 남자를 보았다. 그의 곁에는 여전히 불퉁한 얼굴의 여자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무례를…….”
여자와 눈이 마주친 연조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여자는 사과를 고이 받아주지 않고 표독스럽게 대꾸했다.
“무례인 줄 알면서…….”
“씨발. 내가 너는 닥치고 있으랬지?”
그때였다. 을씨년스러운 일갈이 날아왔다. 연조는 놀란 눈으로 기조를 바라보았다. 애인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얼어붙은 여자가 빨간 입술을 꾹 다물었다.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차가운 일갈에 그녀는 끼고 있었던 팔짱도 스르륵 풀었다. 그 여자가 김예라였다. 연조는 여자처럼 주눅이 든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한기조는 할 말이 있는지 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싸한 침묵 속에서 연조가 마른 입술을 몇 번 물다가 입을 뗐다.
“저…….”
“이사실로 올라와.”
“어?”
“지금 말고. 12시에.”
“어, 어.”
누그러진 말투였다. 퍽 다정한 말씨이기도 했다. 문득 볼이 빨개졌다. 연조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쿵 하고 뛰었다. 불쾌할 정도로 강한 움직임이었다. 연조는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어쩌면 만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만회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예전처럼 친구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친근한 사이는 아니라 하더라도 예전처럼. 그러니까 기조와 사이가 불편하지 않았던 그때처럼. 짧았지만 달콤한 순간이었다. 짧아서 더욱 달콤했을지도 모른다. 연조는 언제나 그 시간이 그리웠다. 가슴이 괜히 설렜다. 기조에게는 애인이 있는데. 애인이 있으니까 이러면 안 되는데……. 친구 사이가 아닌 자꾸 그 이상의 것을 바라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그리하여 연조는 제 마음이 끔찍하게 여겨졌다.
기조는 놀라울 정도로 잘생겼고 흠잡을 데 없이 준수했다. 그리고 애인이 있었다. 그러니 연조와 애인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 어떤 남자에게도 연조의 애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기조 같은 남자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심장이 재차 빠르게 뛰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걸음을 돌리지 않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뜯어보는 눈빛이 꼼꼼했다. 차디찬 일갈을 기억하고 있던 연조가 다소 창백한 낯을 하자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툭 하고 건드렸다. 닿은 뺨에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웠다. 닿은 것이 아니라 마찰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낯이 빨갛게 달아오를까 봐 덜덜 떨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문 대문니에 힘을 주었다. 기조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입술을 움직였다.
“그만 가봐.”
그가 걸음을 돌렸다. 하녀처럼 그의 뒤를 지키고 있던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르다 말고 연조를 흘깃거렸다. 뾰족한 시선이었다. 연조는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김예라는 뒤돌아서는 끝까지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연조는 그 시선을 받아내기 버거워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