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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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헤집던 것을 그만두고 자리서 일어났다. 모조리 의미가 없는 옛일들이었다. 품이 큰 원피스에 카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김예라는 주방을 오가고 있었다. 이인혁은 테이블에 앉아 아이패드 쳐다보고 있었고 한기조는 보이지 않았다. 연조는 쭈뼛거리며 침묵이 에워싼 공간을 둘러보았다.

발목에 쇠줄을 차고 있지 않은 데도 차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 서늘한 감각이 젖어들어 헤어져 나오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연조는 회색 카디건으로 앞섶을 여몄다. 속옷을 주지 않아 고스란히 드러나는 가슴의 흔적이 불편했다. 김예라가 뒤를 돌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하던 여자의 얼굴은 무슨 짓을 당했는지 오른쪽 얼굴의 조직이 괴사하다시피 했고 다른 쪽 또한 피부가 축축 늘어져 예전과 같지 않았다.

시선이 부딪히자 화들짝 놀라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아이패드를 쳐다보고 있던 이인혁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흘긋 쳐다보았다. 식은땀이 났다. 현기증에 눈앞이 휘청거렸다.

“괜찮아?”

이인혁이 일어나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연조는 그 손에 잡혀 몽롱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인혁은 13년 전과 다른 면이 없었다. 말쑥한 얼굴에 뒤섞인 날 티가 한기조와는 다른 방향으로 정제되지 않은 인상이었다. 말끔한 이목구비에 눌어붙은 날것의 기운이 냄새를 풍겼다. 그의 얼굴이 눈앞에서 빙빙 돌았다. 흰 얼굴에 검은 머리를 단정히 걷어 빗은 남자가 염려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너는 여기 왜 온 거야?”

맥없는 읊조림이 입술 밖을 흘렀다. 연조는 제 팔뚝을 잡은 손을 털어내며 기계처럼 주방을 뒤적이는 여자를 살폈다. 이상했다. 왜 한기조의 애인이 저런 차림으로 주방에 있지? 내가 저 여자를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더라? 왜곡된 현실에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물의 표면을 부유하는 나뭇잎 조각처럼. 꼭 으스러진 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너 밥 해주러.”

“뭐?”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이인혁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의자에 앉혔다. 그는 원두커피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커피 마실래?”

여상한 물음이었다. 연조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 너랑 한기조랑 작당했지? 내 결혼식…….”

“한 잔 타 와.”

이인혁이 김예라를 불렀다. 꼭 종 부리는 듯한 시늉이었다. 연조는 제 말을 듣지도 않는 남자를 얼이 나간 얼굴로 보다 주먹을 꽉 쥐었다. 김예라와 이인혁이 과거에 어땠는지 반추했다. 이인혁은 그녀에게 동기였고 김예라는 그에게 상사이자 친구의 애인

이었다. 예의와 존중이 필요한 것은 김예라였다.

말없이 머그잔에 커피를 타기 시작하는 여자를 보며 눈 밑이 슬금슬금 떨려왔다. 누가 꾸민지도 모르는 장단에 놀아나는 기분이 몹시도 더러웠다. 연조는 신경질적으로 이인혁을 노려보았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 상황에 자빠지게 된 것 말이다. 화가 나는 건 당연했다.

“저 여자는 여기 왜 있어? 그리고 너는 여기 왜 온 건데? 아니, 아니. 내가 왜 여기에 있어? 그것부터 말해봐.”

“밥 먹어. 먹고 나서 말해. 숙자가 동태찌개 잘해.”

“……숙자가 누군데?”

“쟤.”

이인혁이 턱짓했다. 다방에서 레지 부려 먹는 건달 꼬라지였다. 연조는 어깨를 움찔 떠는 여자를 보았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두 남자에게 위축이 된 모습이 확연하게 느껴지던 차였다. 과거, 여자가 제게 어떤 식으로 굴었든 간에 안쓰러운 것은 안쓰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예라 씨한테 너 왜 그래?”

과거에도 이인혁이 그녀에게 친절한 것은 아니었다. 한기조와 한기조의 측근은 모두 건달들이었고 으레 그런 사내들이 여자를 대하는 방법은 조악할 정도로 질이 나빴다. 여자의 턱을 잡고 돌려가며 반반하다 우롱하고 치마를 뒤집어 속옷 안으로 손을 욱여넣고. 연조는 이인혁이 그런 식으로 여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러니, 그런 이유로 무례한 것이라 생각했다. 무슨 년, 무슨 년. 이따위로 보스의 여자를 돌려 씹는데 한기조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 모두가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그래도 오늘은 심한 처사였다.

“여기.”

쟁반에 커피를 공손히 받친 여자가 테이블에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연조는 턱을 떨었다. 컬이 풀린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묶은 여자가 굳은 안색으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자세히 보니 손에도 화상 자국이 있었다. 비위가 뒤틀렸다.

“욱!”

입을 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인혁이 덩달아 일어나며 그녀를 붙잡았다.

“괜찮아? 벌써 임신했어?”

“무슨 소리야! 너, 너.”

“아니. 난…….”

“이인혁.”

한기조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에게선 담배 냄새가 짙게 났다. 연조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벌써 임신한 거 아니지?”

이인혁이 다시 물었다. 그는 정말로 궁금한 것 같았다. 한기조가 이인혁을 신경질적으로 밀어내며 연조의 앞에 섰다. 겨울 공기와 뒤섞인 니코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주방을 분주히 오가던 여자가 식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연조는 그녀를 곁눈질하다 말고 그를 드레스룸으로 끌어당겼다. 소매가 잡힌 한기조가 옅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갔다. 그도 모른 채 연조는 딱딱한 낯으로 쏘아붙였다.

“예라 씨가 왜 내 밥을 해줘?”

“그야 오늘부로 우리 집 가정부가 되기로 했으니까.”

“네 애인이었잖아.”

“그랬지.”

“그런데 왜 그래? 예라 씨 얼굴…… 그거, 그거 왜 그런 거야. 왜 좋아하는 여자한테…….”

“내가 언제 걔를 좋아한다고 했어?”

대수롭지 않은 어투였다. 이제 와 별게 다 궁금하다는 낯이기도 했다. 움켜잡았던 셔츠 깃을 놓았다. 툭 하고 떨어지는 손을 그가 대신 받아들었다. 그가 손등을 끌어당겨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손가락 손가락 하나를 공들여 만지더니 꽉 움켜잡았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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