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46)

* * *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너라고.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 말을 족히 수십 번은 더 할 수 있는데 그는 늘 입을 잠그고 있었다. 그는 오래전 사랑을 인정한 바 있었다. 십수 년 전 그를 잠식한 첫사랑은 그를 무지몽매한 백정의 길로 인도했고 그는 어려움 없이 그 세계에서 서식했다.

여자는 어릿한 눈이었다. 채도가 밝은 눈동자가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눈두덩을 살살 문질렀다. 안 예쁜 곳이 없었다. 사랑스럽지 않은 곳도 없었다. 여자는 손을 들어 그를 걷어내는 대신 실망감이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곧장 피가 식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좋아 죽겠다가도 이 여자가 볼 것도 없이 실망스럽다는 눈을 할 때면 주먹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언제부터 이랬던 걸까. 여자 아니 연조는 늘 다정한 얼굴이었다. 기대감에 가득 차 그를 응시했다.

무슨 이유에서 변질됐던 간에 되돌리고 싶었다. 그녀가 제 행동으로 오해를 했다면 해명하면 되는 일이었다. 너를 오래전부터 사랑해 왔으며 너를 다시 만난 순간에는 기쁨으로 고양되어 충만했었다고.

그런데 네가 나를 사내로 보지 않아 나는 분했다고.

동그란 귓바퀴를 툭툭 건드렸다. 연조는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눈길을 제게로 돌리고 싶어 귓바퀴를 지분거리다가 긴 머리에 덮인 목을 쓰다듬었다.

다시 만났을 때 그 사랑스럽던 모습이 떠올랐다. 발그레 달아오른 뺨이나 꿈틀거리는 입술 같은 것들. 남의 손에 들려오던 사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예뻤다. 송연조는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늘어트린 손가락 하나. 빗어 내린 머리카락 한 올. 인화된 사진 속의 연조를 보며 상해 시절을 버텨냈던 기억이 났다.

그를 위해 말라붙은 핏자국 속에서 숨을 틔워내던 그였다. 연조를 다시 만났을 때 연조는 스물여섯이었다. 기억 속의 연조는 언제나 열일곱, 열여덟. 그 무렵의 소녀였는데. 인화된 사진 속에서 연조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두 보았는데.

눈을 감고 그녀를 그리면 늘 교복을 입은 채 배시시 웃던 소녀가 떠올랐다. 막상 마주한 소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지만. 그는 어느새 하얗게 파우더를 바르고 마스카라로 눈썹을 올린 여자를 응시했다. 분칠을 했으니 이제 이 여자의 음부를 벌리고 들어가도 된다. 브래지어 속의 젖을 주물러도 되고 허벅지에 그녀를 앉히고 혀를 섞으며 팬티 속에 손을 욱여넣어도 된다. 뭉친 마스카라 아래 상기된 눈동자를 보며 음탕한 생각을 했다. 말도 안 되게 그가 하는 생각이 지나쳐 머릿속이 읽히는 건 아닐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리하여 그녀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제 머릿속을 읽을 수 있게 된다면 더 좋지 않을까. 내뺄 필요도 없이 손목을 잡고 쓰러트려 가랑이를 벌릴 테니까. 놓아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절대로, 절대로…….

‘남자친구 있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확인하고 싶었다. 대저 그는 남의 손을 빌려 확인한 일들을 모두 믿지 않았다. 특히 연조의 일이라면 그랬다. 내심 아무도 없는 것은 당연하며 그를 기다려왔단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연조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있었는데 헤어졌어.’ 반듯한 발음이었다. 그 외는 전할 진실이 없다는 듯. 감정의 어떤 변동도 느끼지 않는다는 듯. 그렇게 한마디 대꾸함으로써 그들의 지난 시간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그저 너저분한 과거지사가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게 싫었다. 그게 못내 좆같았다. 저는 좋아 죽을 것 같은데. 당장 어디로 끌고 가서 엎어 놓고 개처럼 붙어먹고 싶은데. 눈앞의 여자는 그의 눈도 바라보지 않았다. 먹는 것도 먹는 건지 마는 건지 곁들인 채소만 씹고 있었다.

고개를 기울일 때마다 어깨를 덮은 머리가 얼굴을 가렸고 여자는 시선을 들어 그를 응시하지도 않았다. 본다고 해도 그가 접시에 시선을 줄 때 흘긋 보다가 다시 볼을 붉혔다. 고농도 알코올을 마시는 것도 아닌데 저랬다. 대강 먹고 일어나 자리라도 옮기려 할 때였다.

연조는 지갑을 꺼내 들었다. 구두 굽 때문인지 휘청거리며 가방 속의 지갑을 꺼내 드는 모습에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기분이 좆같아지는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허리에 팔을 감아 부축을 하려니 여자가 더러운 걸 떨쳐내기라도 하는 양 소스라치며 그를 털어냈다.

씨발.

한기조는 비틀거리며 카운터로 걸어가는 여자를 보며 퉁명스레 물었다.

‘네가 내려고?’

일순 그녀의 낯빛이 굳어졌다. 입술이 꿈틀거리며 대답을 하려 하는 게 보였지만 그는 듣고 싶지 않았다. 대체 저를 무엇으로 보고. 이 자리를 어떻게 생각했으면……. 그는 남자였다. 그들은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왜 기분이 좆같아야 하지. 달라진 게 없었다. 나아진 것 또한 없었다.

송연조에게 그는 언제까지나 얻어 처맞아 가엾고 애틋한 등신인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가 갈렸다. 우악스럽게 끌어당겼다. 잘록한 허리를 안고 벤틀리에 올랐다. 여자는 깨질 것 같은 얼굴로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꼭 다물었다.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았다. 차를 모는 내내 어떻게 해야 이 여자를 얻을 수 있을지 생각했다. 사랑으로 가득 차 그를 홀린 듯 쳐다보게 하고 싶었다. 그는 핸들을 꽉 쥔 채 머릿속을 정리했다. 연조를 집 앞에 내려주고 느리게 호흡을 토막 내듯 뱉어냈다.

언젠가 연조가 상처받은 눈으로 저를 쳐다볼 때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였던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린 계집애가 곁에서 알랑거리는 것을 받아주었다가 연조에게 그것을 들켰다. 기조는 오랫동안 그때의 연조를 잊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소녀는 곧 사라져버릴 것처럼 굳어있었다.

그는 핸들을 잡은 손을 까닥거렸다. 그 안에 담긴 질시와 서글픔은 분명 애정의 반증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애정의 증표를 간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그녀에게서 얻은 최초의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여움이나 동정이 아니라 그를 남자로 인지했기에 깊게 파인 홈이었다.

다시 한 번 사랑받고 싶다. 그 사랑을 영원히 그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 기조는 휴대폰을 들어 박 마담이라고 저장된 번호를 꾹 눌렀다.

앓이

연조는 테이블에 앉아 멍하니 반찬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한기조가 숟가락을 그녀의 손에 잡혀 주었다. 이인혁은 밥 대신 토스트를 먹어서 김예라를 두 번 손 가게 했다. 여자는 순종적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굽신거렸고 내색하진 않았지만 두 남자를 몹시도 두려워했다. 연조는 그녀를 어떻게든 집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설거지는 직접 하겠다며 퇴근을 시켜달라 기조에게 청했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지 않았다.

“숙자는 입주 가정부야.”

숙자란 말에 여자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이인혁이 기조의 말에 덧붙였다.

“예라는 예명이었지. 근데 숙자 쟤는 숙자가 잘 어울려. 웃기지도 않게 예라니, 앨리니. 이딴 걸로 불러봤자지. 청승이야. 청승.”

이인혁이 키득거렸다. 노골적인 우롱이었다. 듣기 싫어서 이인혁을 노려보았더니 한기조가 운을 뗐다.

“나가. 다 먹었으면.”

사늘한 축객에 이인혁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웃음기가 싹 가신 낯이었다. 연조는 몇 술 뜨지도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더 먹어.”

“별로, 별로 안 먹고 싶어.”

“밤에 또 한판 할 건데 이 정도 갖고 되겠어?”

“……너하고는 안 할 거야.”

한기조가 수저를 놓았다. 식탁은 빠르게 치워졌다. 그는 서늘한 눈으로 여자에게 눈치를 주었다. 들어가 보란 말을 하지 듣지 않아도 숙자는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다시 단둘이 되었다. 그는 연조를 침실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발목을 채웠던 쇠줄을 들었다. 연조는 그가 제 발목에 개처럼 줄을 매는 걸 무기력하게 쳐다보았다. 질리는 일이었다. 반항해도 멈추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할수록 더욱 가혹하게 굴지도 모른다. 상황이 이럴 진데 몸으로 저항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조야.”

발목에 채운 쇠줄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스스로도 한 짓이 같잖았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낯에 씐 그의 감정을 본 연조가 운을 뗐다. 어쩌면 한기조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을지 모른다.

“나, 이거 왜 해?”

“…….”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을 거야. 나 말도 안 하고 데려왔잖아. 최소한, 최소한 연락은…….”

“연락 드렸어.”

“뭐? 뭐라고 드렸는데? 엄마 아빠가 뭐라고 하셨는데?”

다급하게 물었다. 한기조는 긴 손가락으로 연조의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엷은 윤곽선 하나하나 감촉을 느끼는 듯 차분하게 매만졌다. 어루만지는 손가락이 잘게 흔들리다 그녀의 턱을 잡았다. 턱에 닿는 표피가 건조했다.

“찾지 말라고.”

“…….”

“당신 딸 찾지 말라고 했어.”

“……납치야. 이거.”

“알아.”

“경찰에 신고…….”

“해봤자 내가 어떤 인간인지 너도 알고 있잖아.”

말문이 막혔다. 남자의 손이 치맛자락 안으로 들어왔다. 곧장 가랑이 사이로 다가가는 손을 막지 못했다. 연조는 다시금 침상 위로 쓰러졌다. 입주 도우미로 일한다는 기조의 옛 애인이 떠올랐다. 하나같이 예뻤고 화려했던 여자들. 한때는 기조를 황홀히 올려다보며 사랑을 속삭이던 여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연조는 알고 있었다. 삐거덕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단추를 뜯고 벨트를 푼 남자가 불룩 튀어나온 물건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찔끔찔끔 흐르는 쿠퍼액이 허벅지의 단면을 적셨다. 그는 음부의 마른 살을 문지르며 구멍 안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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