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9/46)

* * *

입사한 지 두 달이 조금 지났을 시점이었다. 입사를 제안한 뒤 고급 아파트까지 알아봐 주던 이인혁은 회사에서 더는 저를 아는 척하지 않았다. 처음 이틀을 제외하면 같이 밥을 먹는 일도 없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유달리 버거워하는 연조로서는 모든 게 어려웠다. 일하는 사람들과는 데면데면했다. 그녀가 일하는 부서는 ‘강 이사’. 그러니까 일신의 회장인 강근영 회장이 쓰러진 후 경영의 실질적인 지휘에 나선 한기조를 보좌하는 비서 팀이었다. 비서라고 해도 비서팀의 회계와 경리 일을 조금 보는 사원이긴 했지만.

어쨌든 흔한 기회는 아니었다. 여자든, 남자든 모두 까다로운 얼굴이었다. 팍팍한 눈빛에 까칠한 인상에 숨이 조여오는 것과 달리 일을 그르쳐도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고 대체로는 사근사근하게 반응했지만 한기조의 측근은 뭔가 달랐다. 남자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비서팀의 사람들보다 더 차갑고 어딘가 사늘한 인상이었는데 ‘전무’나 ‘부장’이라는 직함을 다는 것치고 특별히 하는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들 모두 일신 그룹의 상부에 기거했고 대체로 모든 부서의 직원들이 그들을 껄끄러워했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연조가 지나갈 때마다 시선을 주었다. 물품을 하나씩 뜯어보는 것처럼 면밀하게. 한기조의 여자들과는 조금 다른 눈빛이었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해도 불쾌했고 두려웠다.

“안녕.”

휴게실에서 요구르트를 빨고 있을 때였다.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연조는 귀가 잡힌 토끼처럼 놀라 고개를 돌렸다. 김예라였다. 연조는 코끝과 볼이 발개져 요구르트를 잡은 두 손에 꽉 힘을 주었다.

“강 이사님 동창 맞지? 그때 이사실에서 본.”

“아……네.”

작게 대답했다. 그때라고 하면 입사 후 한기조와 처음으로 대면한 날이었다. 그리고 이 여자와 한기조가 진짜 사귀는구나 다시 확인했던 날이기도 했다.

“그때…….”

“죄, 죄송합니다. 정말, 전 모르고…….”

“죄송할 게 뭐 있어. 난 더 짜릿했는걸. 그리고 코트 고마웠어.”

“…….”

“진짜야. 어디 박아뒀는지 모르겠는데. 찾으면 줄게.”

예라가 예쁜 눈을 찡긋거렸다. 연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코트. 코트. 그래. 그때 이후로 돌려받은 적이 없다. 연조는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여자는 색이 단정한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빨간 탑 드레스를 입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여자가 연조의 옆자리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고개를 돌렸다.

문득 예라의 발가벗은 모습이 떠올랐다. 한기조가 빨간 하이힐만 신은 그녀를 제 허벅지에 앉혀 놓고 커다란 가슴을 주무르던 모습 말이다. 12시에 올라오라고 해서 갔더니 그 꼴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여자를 다 벗겨 놓은 건지. 아니, 그보다 설마 작정하고 불러들인 건지 의심이 들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여자와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 줄 순 없으니까.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둘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한기조는 엷게 웃고 있었다. 여자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치댔다. 두꺼운 목에 두른 팔이 가느다랬다. 연조는 그것을 표정 없이 보고 있었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희다 못해 퍼렇게 질려가는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 말아 문 아랫입술에 힘이 빠질 때마다 주먹을 세게 쥐었다.

안면의 근육을 망가트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지만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아마도 기조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무엇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연조 같은 여자가 기조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 그럴지도 모른다. 그녀 같은 여자가 기조처럼 잘난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들켜서. 그래서, 그래서 마음이 망가지거나 거절당하여 추해지고 싶지 않았다. 연조는 지금도 충분히 너저분하게 살고 있는 여자였다. 추했고 추레했다.

어쨌든 간에 최대한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기색도 없이 그냥, 그냥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애인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 애인과 대낮에 다 벗은 채로 사무실에 있었으니까……. 기조의 말을 듣고 올라가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떤 기대를 걸었는지, 왜 기대를 했던 건지. 한심했다.

한심하고 화가 나서 평소보다 더 지독히 자신이 혐오스러웠는데. 그런데도 콧잔등이 시큰거리고 눈두덩이 뜨끈했다. 그 자리에서 눈물을 터트릴까 두려웠다. 정말로 그런다면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울지 않았다. 말아쥔 손가락에 힘을 풀고 연인을 바라보니 신기하게도 눈물이 식었다. 마치 피가 식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 기조가 정말 이 여자와 사귀는구나. 그래도, 그래도 정말로 여자를 사귄다고 한 적은 없는데. 하긴 그녀가 기조의 무엇을 알겠나. 어린 시절을 잠시 같이 보냈던 남자였다. 그마저도 한 단락에 지나지 않아 짧고도 짧았다.

한기조는 부유했고 미남이었고 대저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모든 것을 갖춘 남자였다. 그런 남자에게 애인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습게도 그랬다. 시작한 것도 없는데 끝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 게 부끄러워졌다. 발밑이 조각나고 쿵쿵 뛰던 심장이 진물을 내며 뭉개졌다. 난삽하게 얽히던 감정들이 더 너저분해지기 전 입을 뗐다.

“나, 나중에 올게.”

“송연조.”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온 소리였다. 가슴을 한껏 주무르며 여자의 입술 끝을 지분거리던 한기조가 여자의 가슴을 찰싹 때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허벅지를 깔고 앉아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여자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일어났다. 그녀는 몸을 감출 것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연조가 제 코트를 벗어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고개는 반대쪽으로 돌린 채였다.

그 모습을 본 한기조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남자는 연조의 코트를 받아든 여자를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네 거야?”

“예?”

“그거 네 거냐고.”

“아니, 아니. 저 여자가 줘, 줘서…….”

“그런데 왜 네 거처럼 걸쳐?”

막무가내였다. 그저 트집을 잡고 있는 것일 뿐인데도 여자는 아무 말 못했다. 주눅 든 얼굴이 가여웠다. 입술을 꾹 다물고 그를 쳐다보다 운을 뗐다. 불현듯 화가 일었다. 기조가 살얼음처럼 차가운 낯빛인데도 그랬다. 같이 주눅이 들기보다는 화가 났다. 말투, 눈빛. 행동. 모두 폭력적이었다.

“네가 뭔데, 내 맘대로 주는 건데 왜 트집이야?”

“…….”

“네가 뭔데?”

“…….”

“네가 뭔데 내가 내 옷을 주는 건데 트집 잡냐고.”

“송연조.”

“왜? 뭐!”

이 꼴 보여주려고 불렸냐?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연조는 호흡을 참듯 분을 씩씩 눌러 참았다. 화가 났다. 왜 화가 나는 건지 모르겠다. 다만 모욕적이었고 불쾌했다. 제게 이런 식으로 구는 게 화가 나는 것을 넘어서서 서러웠다. 간신히 삼켰던 울분이 눈두덩에 몰렸다. 시선을 내리깔고 주먹을 세게 말았다가 쥐었다. 기조가 싫었다. 기조가 미웠다. 그리고 자신도 싫었다.

화내고 싶은데 화를 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정말로 화를 내는 이유가 아니니까. 그래서 그런 것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에는 방편에 불과하지 않으니까. 비참하고 서러운데 별수 있나. 연조는 가슴 한편에 오는 둔통을 무시했다. 근원도 이유도 불명한데 곱씹을 여유도 없었다.

“나가.”

한기조가 뇌까렸다. 여자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단둘이 되었다. 끓어오르던 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차게 식은 낯을 꼿꼿하게 들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말아 문 채 눈을 둥글리고 있으려니 한기조가 거리를 좁혀 왔다.

반질반질한 구두코가 거의 코앞에 다가왔을 때였다.

“오랜만이야.”

“뭐?”

“오랜만이라고.”

문득 긴 손가락이 턱에 닿았다. 잡아서 이리저리 돌리는 건 아니었다. 그저 턱에 손가락을 대고 가볍게 들어 올리는 것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심장이 쿵쾅대서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좀 전에 나간 여자가 떠올랐다. 그가 데리고 다니는 여자는 그런 여자들이었다. 비서실에서 타이핑을 치는 여자조차 연예인처럼 예뻤다. 그러니, 그러니까……. 입술을 말아 물었다. 자꾸만 생각날 것 같았다. 생각나서, 생각나서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그런 게 싫었다. 그런 식으로 한번 감정에 휩싸여 버리면. 이 감정이 얼마나 추악한지. 왜 이런 식으로 함몰되는 수밖에 없는지 이유를 알면서도 자꾸만 추락하게 되는 것이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고. 헤어 나오고 싶어도 헤어 나올 수 없다. 그저 끝없이 무력해지는 것이다. 그런 게 싫었다. 그런 것을 모두 겪은 후 단단해지는 것을 기다리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본능적으로 두려웠던 것이리라. 정오가 되기 전 모든 시간 속에서 그런 감정을 느꼈다. 두렵다고. 그를 만나 이끌리듯 시선이 닿게 되는 것도. 체념인 건지 뭔지 하나씩 포기하게 되는 것도. 모두 싫었다. 가장 싫은 것은 이런 식으로 뒤늦은 열패감에 잠기는 것이다.

“…….”

“머리.”

“어?”

“짧아졌네. 열여덟 살 때보다.”

“어…….”

“여기 이마에……. 앞머리도 자르고.”

“……응.”

맥없이 대꾸했다. 한기조는 방을 나간 여자에 대해 해명하지 않았다. 사실은 해명할 필요가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연조는 그녀가 계속 신경 쓰였다. 왠지 끔찍하게도 오래 갈 것 같았다.

“그리고는 변한 게 없어.”

시선을 들었다. 대화를 나눈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거스르지 못했다. 숨이 막혔다. 너는 너무 많이 변해서, 그래서 몰라보겠단 말을 할 수 없었다. 소년기와 비교도 할 수 없이 넓어진 어깨. 두꺼운 몸. 근육, 날렵함……. 거뭇해진 피부. 전부 달랐다.

“너는, 너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아.”

입을 꼭 잠그고 있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연조는 기묘한 열감에 잠겨 그를 바라보았다. 따지고 보면 사원과 이사의 관계였다. 까마득히 높고 아득하게 다른 신분인데. 그때와 같은 건 아무것도 없는데 연조는 말을 높이지 않았다. 한기조 또한 다른 말이 없었다.

“그래?”

“응.”

“어떤 점이 달라진 것 같아?”

“……그냥, 그냥 다.”

그가 턱을 치켜들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그녀를 데웠다. 연조는 입술을 꿈틀거리다 말고 운을 뗐다.

“왜 불렀어? 시킬 거 있어? 난, 난 김 비서님 밑에서 일하는 거라…….”

“이인혁한테는 고마워했다면서 왜 나한텐 안 해?”

“어?”

“일자리 소개시켜 줘서 고맙다고 밥이라도 사야 하는 건 나 아냐?”

“아……고, 고마워.”

한기조가 웃었다. 그는 뒤를 돌았다. 그러고는 책상으로 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백색 지포 라이터가 딸깍거리며 불꽃을 틔워냈다. 담배 연기가 빛무리 속에서 흩어졌다. 연조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았다. 몇 번 연기를 빨아들이던 기조가 그것을 흘긋 보더니 물었던 담배를 뱉었다.

“여하간 예민해.”

그가 혀를 찼다. 그러나 종내는 재떨이에 담배를 지져 껐다. 연조는 다소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기조가 걸어와 그녀의 앞에 섰다. 연조는 두 발자국 더 물러났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가 다시 그녀를 끌어와 제 앞에 두었다.

“입고 갈 건 있냐?”

“뭐가?”

“네 코트 걔 줬잖아.”

한기조는 애인을 ‘걔’라고 칭했다. 연조는 그게 이상해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좀 전에도 연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낮에도 그랬고……. 어찌 되었든 그녀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의자에 있는 제 코트를 집어 연조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그것을 받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밖에 안 나갈 건데.”

“걔 집에 갔잖아. 코트 못 돌려받을걸.”

그러고 보니 그랬다. 퇴근 시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입고 나갈 코트가 없었다. 여자와 연락처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라 꼼짝없이 이대로 퇴근해야 할 터였다. 연수는 망설이다가 엉겁결에 코트를 받아들었다. 희게 질렸던 낯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발밑이 조각나 그대로 꺼지고 싶던 좀 전의 순간을 기억해냈다. 거지 같게도 또 날아오를 것 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코트를 넘겨받고 가만히 있으려니 그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입어.”

“지금?”

“잘 어울리는지 보려고.”

그게 왜 중요한데? 묻고 싶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아서 그냥 코트를 입었다. 길게 주절주절 말하다가 그녀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런 게 싫었다. 기분이 확 나빠졌다가 또 좋아졌다가. 머리에 꽃을 달아도 이것보단 일관성 있게 돌지 않을까. 낯을 굳히고 코트를 걸쳐 입었다. 한기조의 코트는 지나치게 품이 컸다. 당연하게도 줄줄 흘러내리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그는 그게 마음에 드는지 아까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웃었다.

“이제 나가 봐.”

“언제 돌려줄까?”

“너 내킬 때.”

“……내일 돌려줄게.”

“그러던가.”

그날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연조는 나가보란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사실을 나왔다. 기억을 거스르고 난 뒤 다시 여자를 응시했다. 다리를 꼬고 담배를 태우던 여자가 입술을 뗐다.

“일요일에 한 이사님 생일 파티하는 데 올래?”

“네?”

“동창이잖아.”

“별로, 별로 안 친한데…….”

여자가 웃었다. 가소롭기도 하고 언짢은 것을 본다는 듯한 웃음이기도 했다. 연조는 한사코 거절할 생각이었다. 생일 파티든 뭐든 사적인 자리에서 한기조를 보고 싶지 않았다. 사내에서도 주기적으로 마주치는데 밖에서까지야…….

“비서팀은 대부분 올 텐데?”

“비서팀이 왜요?”

“파티는 사람 수 많을수록 좋으니까 뭐. 게다가 김 비서님은 이사님이 상해 유학 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우셔서……. 팀 자체가 특별한 편이지.”

“그래도…….”

“다 같이 오는 자린데 와야지. 넌 동창이니까 특별히 더 일찍 와야 해.”

“어, 어디서 여는 건데요.”

예라가 웃었다. 담배를 모두 태운 그녀가 연조에게 다가와 앉았다. 여자가 그녀의 장막처럼 긴 머리카락 끝을 잡아 들어 올렸다.

“어머, 이 머리 푸석, 푸석한 것 좀 봐. 좀 자르든가 펌을 하든가 해야겠다. 이사님 생일 때 이러고 왔다고 하면…….”

“가겠다고 한 적 없는데…….”

“오게 된다면 말이야. 어머, 너 여기 눈 앞트임 좀 해야겠다. 여기도, 여기도 봐봐. 알갱이 같은 거 말이야. 이것도 레이저로 좀 지져야 해.”

“네?”

여자가 다가와 꼬집은 피부를 뜯었다. 연조는 당황해서 그녀를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있던 예라가 ‘하면 더 예쁘겠단 뜻이야.’ 하고 속삭였지만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도 여잔데 그러고 이사님 옆에 있는 건 부끄럽지 않아?”

“무슨…….”

“이사님 좋아하는 거 다 알아.”

“저는 동창…….”

“동창은 무슨. 이사님한테 친구 같은 거 없어. 너도 알잖아. 이사님 그런 거 안 만드셔.”

“…….”

“너 같은 게 되지도 않는 갖은 주접떨면서 꼬리 치는 게 거지 같아 보여 그러는 거야.”

“말이 좀 심하신 거 같은데요.”

“너 하는 짓거리보단 하나도 안 심한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집에 가선 이 말도 하고 저 말도 하고 아주 코가 납작해질 정도로 쏘아붙이는 건데. 하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심장만 북처럼 둥둥 울리며 혀는 포르말린 속에 절인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너보다 심한 걸로 보이니? 정말? 그렇게 보여? 네가 내 남자 앞에서 살랑거리는 건 하나도 안 심한 일로 보이지?”

“그럼 적 없…….”

“이사님 코트 입고 퇴근했다며! 그거 가져다준다고 밥까지 얻어 처먹어 놓고는 뭐?”

귀가 먹먹했다. 맥이 비칠거리며 현기증이 살짝 일었다. 연조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명치가 따끔거렸다. 시큰거리는 눈두덩을 깜빡거리다가 입술을 뗐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안했다.

다음날 코트를 가져다주면서 한기조는 밥을 먹자고 했다. 연조는 코트를 빌려준 일이 고마워서 밥이라도 한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들하고는 밥을 먹는다는 일이 썩 좋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했다. 남자친구가 있는 나래로서는 애인이 있는 남자의 코트를 받아 입고 돌려주면서 밥까지 얻어먹었다는 연조가 이해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그 남자도 질이 나쁜 남자이니 끊어내야 하는 건 당연지사. 대학을 다니며 남자친구를 사겨본 적이 없는 연조로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몰라서 폐를 끼친 것에 관해 할 말이 없었다. 사과는 구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도 용서는 받아주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죄송,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대학 때 남자친구를 사겨볼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이런 게 에티켓이라면 스펙을 쌓듯 경험을 쌓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여자는 기가 찬 지 ‘하!’하고 웃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렇게 싫어하는데, 싫어서 넌더리를 치는데 애인의 생일파티에는 왜 부르는 걸까.

“너희 둘이 뭐해? 싸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조가 고개를 들기 전 예라가 먼저 표정을 바꾸었다. 그녀는 다시 화사해졌다. 연조는 이인혁을 응시했다. 그의 옆에는 한기조도 있었다. 오늘도 슈트를 말쑥하게 빼입은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한기조는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싸우는 거 같은데?”

“무슨, 무슨 말씀을……. 연조 씨가 김 비서님한테 하달을 못 받은 거 같아서요.”

“뭘?”

이인혁이 되물었다. 연조는 창백한 얼굴로 허수아비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공간을 벗어나고 싶은데 딱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슴벅이다 축축한 손을 맞잡았다.

“그래? 좋은 생각…… 인가?”

이사님이 특별히 아끼시는 동창 아가씨를 생일 파티에 초대하고 싶다는 예라의 말에 이인혁이 한기조를 응시했다.

“근데 연조는 표정이 왜 그래?”

“……어?”

“쟤한테 두들겨 맞은 표정인데?”

“아니, 아닌데. 그런 거 아니거든?”

도리질을 했다. 이인혁이 웃었다. 그는 다가와 시선을 내리까는 연조의 눈을 맞추려고 애를 썼다. 초등학교 때 책상에 고개를 묻고 우는 여자애의 눈물을 보기 위해 머리를 기울이며 낄낄대는 애 같았다.

“맞는 거 같은데?”

“이 전무님도 참! 무슨 말씀을 전 그냥…….”

“넌 입 다물어.”

이인혁이 차게 일갈했다. 별안간 정색하는 모양이 연조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방금 전 연조에게 놀리듯 장난친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한기조가 낮은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검은 짐승이 느리게, 느리게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소름이 쭈뼛 돋았다.

“이 전무는 나가 봐. 쟤 데리고.”

시선을 맞추려 안간힘을 쓰는 이인혁이 툴툴대며 밖으로 나갔다. ‘쟤’라고 불린 김예라도 함께였다. 연조는 눈동자를 둥글리다 말고 푸석푸석한 머리끝을 만져보았다. 사라지고 싶었다. 자연스레 예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난날 무수히 남자들의 시선에서 빗겨난 저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게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종종 저를 두고 소고기 등급을 매기는 것처럼 등급을 매기고 예쁘장한 학우들과 비교하기도 했었다. 얼굴, 머리, 키와 체구. 스타일까지. 유행을 탈 줄 모르는 연조. 꾸밀 줄 모르는 연조. 꾸며도 어색한 연조. 여자 학우들 사이에서도 늘 밋밋하고 두드러지지 않던 재학 시절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해졌다. 지금도 연조는 다르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는데.”

조금씩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마모되고 녹이 슬고……. 예전에는 그런 것들이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러니까 평가 같은 것들 말이다. 지금 모습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싫은 것도 아니었다. 남자들의 관심을 못 받는다고 하등 불편한 건 없었다. 불쾌하긴 했지만 아무 일도 아니었다. 남자 경험이 없는 전적 또한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 언젠가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러면……. 그 때 하면 되니까.

그렇지만……. 왜 네 앞에만 서면 모든 게 부끄러워지는 걸까. 왜 너를 만난 이후로는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걸까.

“그런데 왜 그 모양이야?”

“내가, 내가 왜?”

“네 얼굴.”

“나 원래 이런…….”

“애같이 굴지 말고.”

그가 손을 뻗었다. 얼굴이 한 번에 들어 올려졌다. 그는 양손으로 연조의 얼굴을 감싼 뒤 제게로 당겼다. 부드럽게 이끌려 시선은 개암 색 눈동자에 닿았다.

“왜, 왜?”

말더듬이처럼 계속 말을 더듬었다. 묻지 않기를 바랐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어떤 말도 섞고 싶지 않으니까. 그를 만나고 재회한 이후로는 모든 게 뒤틀리게 되었다. 한순간도 마음이 편한 적 없고 고단하기만 했다.

“왜 얼굴 만져?”

“싫어?”

“어.”

“…….”

한기조가 손을 거두었다. 발뒤꿈치가 반쯤 들려 있던 연조는 땅으로 툭 떨어졌다. 슬금슬금 남자의 눈치를 봤다. 좋아 보이지도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언짢은 것 같기도 했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연조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할 말 없으면 그만…….”

“그날 올 거야?”

“뭘?”

“들었잖아.”

“…….”

“와.”

둘러댈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가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숨이 엉킬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에게서 묵직한 우드 향이 났다. 걸음을 한 발 물렸다. 그가 한 손으로 연조의 팔뚝을 잡았다.

“맛있는 거 사줄게.”

한기조의 생일 파티는 처음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생일을 같이 보낸 적은 있어도 그의 파티에 참석하는 건 처음이었다. 파티라니. 초등학생 때 엄마가 롯데리아에서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어준 이후로는 참석한 적도 초대한 적도 없는 것이었다. 한기조의 생일 파티는 이인혁이 실소유주인 한 클럽에서 열렸다.

입구에서부터 숨이 막혔다. 지옥의 문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입을 꽉 다문 채 신분증을 요구하던 가드들 너머로 이인혁이 보이지 않았다면 고대로 돌아갔을 테다. 초대장이랄 것도 없이 그냥 오면 된다는 말을 들었는지라 예상 밖의 일이었다. 연조는 조금 젖은 채 내부로 들어섰다. 자두색 노란 조명이 가득한 복도를 지나 내부로 들어섰다. 진한 방향제 냄새와 함께 매캐한 향기가 콧속에 스몄다.

아는 사람을 최대한 빨리 찾으려고 했다. 그러니까 한기조와 이인혁 말고. 김 비서라던가 혹은 이따금 자판기 커피를 같이 마셨던 서 대리라던가. 하다못해 얼굴만 알고 지낸 사람까지도 그리웠다. 연신 눈동자를 굴리며 어색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할 때였다.

“이쪽이야.”

갑자기 튀어나온 이인혁이 그녀를 향해 방향을 가리켰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연조가 움찔 떨었다.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놀랄 게 뭐 있냐는 표정이었다. 연조는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인혁의 손에 문이 열리고 내부가 드러났다.

“어, 왔네?”

예라의 목소리였다. 다분히 밝고 경쾌했다. 연조는 잔뜩 굳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앉아있는 모두가 그녀를 응시했다.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죽도록 끔찍하게 여기는 연조의 입장에선 당장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너르고 푹신한 소파 위로 남녀가 어울려 앉아있었다. 대학 MT 때를 제외하면 남자와 어울려 앉아 본 적이 없는 연조로서는 심장이 쿵쾅거릴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안을 훑었다.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모두 썩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중앙에는 한기조가 그의 예쁜 애인을 끼고 앉아있었다. 옆으로는 가끔가끔 얼굴이 마주쳤던 남자들과 못 보던 사람들이 자리를 메운 상태였다.

어디에도 연조의 자리는 없었다. 선물이랍시고 손에 든 종이 가방과 행색이 초라해졌다. 드레스코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안다고 해도 그런 옷을 파는 가게와 착장 방법을 알지 못하니 단정하게만 입고 왔다.

어깨가 드러나는 탑 드레스라던가 가슴이 깊게 파인 옷이라면 입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입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자리를 채우고 있는 여자들 모두 그런 차림이었다. 어색하지도 부자연스럽지도 않았다. 긴 머리에 컬을 넣고 공들여 화장한 모습이 어디선가 관리를 받은 게 분명했다. 아마도 이 시간을 위해 하루 전체를 소비한 것 같았다.

그에 비하면 연조는 어떤가. 하루의 반을 갈까 말까 고민하는데 쏟았다. 전날 오후까지 선물을 고르고 나래와 저녁을 먹으며 백화점에서 선물을 산 뒤에도 가기 싫어 침대에 붙어있었다. 배탈이 났다고 이인혁에 문자를 할까. 아니면 집에 급한 일이 생겨 못 가겠다고 해야 하나. 사실 오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끝내 오고 말았다.

회사에서 퇴근하기 전 상사인 김 비서가 꼭 오란 말을 했기 때문이다. 다들 갈 거 같은 분위기였고 막 회사에 들어간 나래가 신입은 그런 자리에 꼬박꼬박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자리 일 줄 알았다면 내일 당장 죽어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홧홧해지는 낯을 느끼며 더듬더듬 그들을 보고 있을 때였다. 예라와 시선이 얽혔다. 여자는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긴 속눈썹 아래 조소가 가득했고 이 상황 자체가 재밌다는 것처럼 웃음을 지었다.

나머지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드문드문 ‘우산 안 쓰고 왔나 봐. 아이라인 번졌네. 근데 손에 든 건 뭐야? 선물이야?’ 하는 소리가 여자들 사이에서 들렸다. 키득거림과 함께 들리는 물음이 짓궂었다. 간신히 진정시키고 있던 머리가 폭발했다. 자리를 찾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연조에게 이인혁이 빈자리를 가리켰다. 하필 한기조의 옆이었다. 그의 오른편에는 예라가 있었다. 욕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뜨끈한 감각이 눈시울을 찔렀다. 눈물이 비집고 나올까 봐 무서워 걸음을 돌렸다.

“나,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별거 아닌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렇기에는 행색이 너무, 너무……. 화장실 표지판을 찾아 무작정 걸었다. 단번에 찾지 못해 종업원에게 물었는데 그것도 우스운 꼴인 것 같아 죽을 것 같았다. 그녀는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가 빠르게 문을 잠갔다.

“하아. 하아…….”

왜 이렇게 됐지?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창피함에 벌겋게 달아오른 낯도 낯인데 이런 걸로 도망친 것도 우스웠다. 나이가 몇인데. 왜 이런 걸로 눈물이 나? 바보도 아니고. 아주 어릴 때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발표도 잘하고 이목이 쏠리면 은근 그것을 즐기기도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서는 것도 힘들었다. 그녀는 변기에 앉아 잠시 호흡을 골랐다. 손에 들린 선물이 툭 떨어졌다.

왠지 그것마저 초라해 울음이 날 것 같았다. 아까 여자들이 말한 대로 아이라인이 번져 있으면 어쩌지 싶었다. 가방에서 빨리 거울을 꺼내 확인했다. 그냥 조롱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녀들의 말대로 어색하게 뺀 아이라인과 섀도우가 옅게 번져 있었다.

아 죽고 싶다. 이 꼴로, 이 꼴로……. 벌벌 떨리는 뺨을 문지르며 심호흡했다. 기조를 생각했다. 왜 기조하고만 마주치면 이럴까. 왜 기조 앞에만 설 때면 더 너저분해질까. 좋아해서 그런가. 기조를 좋아해서. 기조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모르겠다. 변두리에 있고 싶었다. 그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사그라들기를.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흔적 없이 흩어지기를.

언젠가 그를 마주 보았을 때 어색하게 웃으며 어서 그가 등을 돌리기만을 기다리지 않게. 그래. 그러지 않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기에 연조에게 늘 잔인한 걸까. 처음부터 왜 이런 자리에 부른 거지? 우린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왜, 왜……. 울음이 치밀었다. 입술의 양 끝이 일그러졌다. 눈을 깜빡이며 얕게 헐떡였다.

기조는 여자가 많았다. 부딪히거나 흘러가는 모든 여자가 발그레 볼을 데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그에게 모든 여자가 모래알갱이 같을 것이다. 그러니까 연조는……. 젖은 손등을 꾹꾹 문질렀다. 가슴 한편이 시큰거렸다. 손을 들어 왼편 가슴을 쓸었다.

굳이 이런 일을 겪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굳이…….

이렇게 모멸을 주지 않아도 되었다. 모욕을 주지 않아도 주제를 알고 있었다. 연조는 그를 감히 바라지 않았다. 그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될 때마다 괴로웠다. 소매로 콧잔등을 닦고 코를 훌쩍였다.

“짜증 나.”

다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참고 있었는데 이제 참을 필요가 없었다. 이대로 집에 갈 거니까. 어차피 화장실까지 도망쳤으니까 1차는 도망에 성공한 거다. 그리고 이대로 집으로 가야지. 아까 봤던 사람들이 복도에서 부딪힐까 봐 좀 걱정이긴 한데. 집에 일이 좀 생겼다고 둘러댈 생각이었다. 그리고 어쨌든 이 공간을 벗어나면 끝이다. 주말이 지나면 휴일이 껴있으니까 출근을 하지 않을 테고.

그러면, 그러면 잊히지 않을까. 이대로 잊히면 좋겠다. 없는 사람처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다행히도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자기가 주인공인 것도 아니고. 해프닝 중 하나인데. 그냥, 그냥. 그녀만 여기서 잘 탈출하면 되지 않을까.

눈물이 번진 눈두덩이와 코를 닦고 훌쩍거리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자꾸만 아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죽을 것 같았다. 구겨지고 찌그러져 아주 못 쓸 정도로 망쳐진 기분이었다. 사실 이런 기분에 잠겨 죽을 것 같았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고등학교 때. 그러니까 한기조를 둘러싼 여자들 사이에 낑겨 날카로운 시선을 받을 때.

연조는 그래서 기조와 멀어졌다. 중학교 때와 달라진 분위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괜스레 헐뜯기고 조롱받고, 비난받고. 그런 게 싫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생각이 들자 더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었다. 연조도 외모만 빼고 나면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인데. 엄마가 그러길 너는 은조처럼 예쁘진 않지만 은조보다 더 성격이 좋으니까 널 좋아해 주는 사람도 많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이 가시처럼 박힌 연조였다. 엄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본래도 성격이 솔직한 사람이라 연조는 그 곁에서 상처받는 일이 자주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이 예쁘지 않다는 걸 자각한 아홉 살에도 외모로 한창 예민해진 열다섯 살 때도. 엄마는 연조에게 꾸준히 그런 말만 했다. 결과적으론 성격은 성격대로 나빠지고 자존감은 자존감대로 떨어졌지만.

“괜히 왔어. 진짜…….”

다음 주 주말에 전시회를 같이 가자며 시간을 잡는 나래에게 문자를 한 통 보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나가야겠다. 휴대폰 시간을 보니 화장실로 온 지 40분이나 지나 있었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소리가 사라진 걸 확인한 연조는 조심스레 밖을 나왔다. 세면대 앞 거울을 보니 우느라 판다처럼 번진 아이라인이 우스웠다. 그녀는 제 꼴을 보고 조금 웃은 뒤 달랑거리는 종이 가방을 세면대 옆 쓰레기통에 버렸다.

백화점에서 산 넥타이핀이었다. 이걸 고르느라 남성 의류가 입점한 4층을 1시간이나 오가며 나래를 들들 볶았더랬다. 이것도 좀 우습지. 안 우스운 게 없네. 연조는 망설임 없이 선물을 버린 뒤 뒤돌았다. 어차피 한기조는 이것보다 더 좋은 선물을 많이 받을 것이다. 뭐 부자에다가 친구도 많아 보이고. 신경 써서 선물해 줄 여자도 많아 보이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화장실을 나왔다.

“지금 나왔어?”

“어?”

이인혁이었다. 연조는 굳은 얼굴로 그를 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망했다.’라는 생각이 빈틈없이 들었다. 안 그래도 울었는데, 얼굴 꼴이 말이 아닐 건데. 그렇지만 어떻게든 사고 회로를 긍정적으로 돌렸다. 복도가 어두워서 얼굴이 잘 안 보이겠지. 그녀는 준비해둔 문구를 입 밖으로 꺼낼 준비를 했다.

“들어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어.”

“나, 나 집에 좀 일이 생겨서…….”

“무슨 일?”

“그게, 그게 좀 급한 일인데…….”

“부모님 돌아가시고 그런 거 아니면 들어왔다 가. 강 이사가 너만 기다리고 있거든.”

별로 믿기지 않는 얘기였다. 연조는 의외로 자신이 준비한 변명이 들어 먹히지 않자 당황스럽기 시작했다. 대충 둘러대면 보내줄 것 같았다. 생일 파티 여는데 연조 혼자 온 것도 아니고. 굳이 그녀만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아냐. 나 진짜 급한 일이 생겨서…….”

“아! 제발. 지금 분위기 별로 안 좋은데 네가 가면 풀릴 거 같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왜 연조가 가면 분위기가 풀리지? 아니, 그 전에 안 좋을 이유가 뭐 있어? 아까 분위기가 좀 얼어붙긴 했지만 행사 파투날 만큼 대단한 폭탄을 던지고 간 것도 아니었는데.

이인혁이 그런 말을 하며 두 손을 붙였다.

“인혁아. 나, 나 진짜 일이 있어. 그래서 그래.”

“알아. 알아. 그냥 밥만 좀 먹고 가. 아니, 밥 싫으면 과일이라도 먹고 가. 너 리치 좋아하잖아. 그거 한 다발 시켜놨어.”

인혁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안으로 밀었다. 연조는 다시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씹었다. 이인혁 새끼. 진짜 죽여 버리고 싶어. 난 얘가 고등학교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이런 생각을 수십 번도 더 하며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이렇게 된 이상. 한 20분 자리에 앉아있다가 다시 핑계를 대며 일어나야겠다.

문이 열렸다. 다시 숨이 막혔다. 폐가 얼어붙고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김예라는 한기조의 옆에 앉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끝쪽 구석으로 밀려났고 나머지 여자들은 웬일인지 옷을 모두 갈아입은 상태였다. 화장 또한 전부 지워진 상태였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앉아.”

이인혁이 한기조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것만큼은 죽어도 싫어서 김 비서를 찾았다.

“김 비서님 왜 없어?”

“김 비서? 왜? 불러올까? 아니. 그 사람 좋아해?”

이인혁이 말을 버벅거리다 이상한 것을 질문했다. 연조는 미친 사람을 보는 것처럼 그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안 왔어?”

“어. 오늘 일이 좀 있어서……늦게 올 거 같은데.”

뒤에 합류하기로 했나? 그러고 보니 비서팀은 아무도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이인혁이 어깨에 눌러 앉히려고 해서 짜증이 났다. 연조는 그런 그의 손을 털어내며 주저앉듯 앉았다. 그러고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극도로 긴장한 상태에서 주변의 눈치를 연신 살폈다.

이인혁의 말대로 과연 리치만 한 다발이었다. 중간중간 키위와 사과 같은 과일이 보이긴 했지만 한기조의 앞에는 리치와 망고스틴만이 가득했다. 언젠가 이걸 좋아한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중학교 때. 한기조의 생일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무렵이 이브였을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였다. 그때는 그와 이렇게 서먹서먹하지 않아서 생일을 단둘이 보냈다.

피자를 시키고 샐러드바에서 샐러드를 가지고 오는데 리치만 한가득 가져오는 그녀를 향해 기조가 리치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연조는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피자집 밖에서는 흔히 먹을 수 없는 리치를 한가득 가져온 게 부끄러워서 그렇다고 했다.

그걸 기억한 건가 싶어서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선물은?”

한기조는 그녀의 몰골에 뭐라고 하지 않았다.

“어?”

“아까 들고 있었잖아. 내 선물.”

“아 그거…….”

버렸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둘러댈 핑계도 생각나지 않았다.

“버렸어?”

“어?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이, 잃어버린 거 같아.”

속이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막상 물으니 할 말이 이것밖에 나지 않았다. 그냥 그거 네 선물 아니었다고 할 걸 그랬나. 그런데 안 믿을 것 같았다. 너무 속이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연조는 당황한 얼굴로 앞만 쳐다보았다. 한기조는 어떤 말도 없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뒤틀린 낯을 했다. 스산한 눈빛이 그녀의 눈언저리를 스쳤다. 스커트를 꼭 움켜쥔 채 앞을 바라보았다.

이인혁이 양주를 유리잔에 따랐다. 네모나게 각진 얼음이 덜그럭거리며 소리 냈다. 호박색 술이 조명 아래 반짝거렸다. 한기조는 찡그림 한 번 없이 술을 넘겼다. 긴 팔이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너도 마실래?”

“아니.”

“마셔봐.”

“쓴 거 싫어해.”

기조가 또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을 했다. 그는 대기해 있던 남자에게 턱짓한 뒤 그를 일러 샴페인을 가지고 오게 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에는 길고 매끈한 샴페인 병이 올라왔다.

“마셔.”

튤립의 봉오리 같은 타원형 잔 속에 감미로운 색의 샴페인이 채워졌다. 연조는 느리게 도리질 쳤다.

“괜찮아. 달아.”

의심이 스민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잔을 들어 연조의 입술에 붙여주었다. 할 수 없이 조금 삼켰다. 맛있었다. 알코올의 쌉싸름함이 적었다. 연조는 몇 모금 더 삼킨 뒤 샴페인을 내려놓았다. 기조가 직접 리치를 까 그릇에 옮겨 주고 있었다. 연조는 아무 생각 없이 하얗고 탱글탱글한 리치를 입에 넣었다.

“맛있어?”

“응.”

“너도 먹어.”

다시 아무 생각 없이 리치를 덜어 기조에게 내밀었다. 그가 입을 벌렸다. 발그레 달아오른 연조가 웃음을 비죽 지으며 그의 입에 과일을 넣어 주었다. 검게 옷을 차려입은 남자들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암묵적인 시선이 몇 번이나 그들 사이에 오고 갔다. 술에 취약한 연조는 긴장이 옅어져 자주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몇 번 눈치를 보던 남자들이 표정을 누그러트린 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배 안 고파?”

“조금.”

기조가 물었다. 연조는 헤실헤실 웃으며 샴페인을 몇 모금 더 꼴깍꼴깍 삼켰다. 그는 사람을 불러 스테이크 한 접시와 생선구이를 시켰다. 그가 ‘농어 좋아해?’ 하고 물었다. 연조는 회로만 먹어봤다고 대답했다.

“여기 요리사 솜씨 그럭저럭 좋아.”

“응…….”

“울었어?”

“조금.”

테이블에 반사된 조명을 좇던 연조가 고개를 돌렸다. 샴페인은 처음이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아빠가 가족들을 데리고 레스토랑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샴페인은 쌉싸름했다. 단 것도 있다고 들었지만 연조는 마셔 본 적이 없었다. 술을 먹고 이렇게 잘 취하는 타입인 줄도 몰랐다.

그녀는 기조가 연신 입에 넣어 주는 리치를 받아먹으며 오물거렸다. 귓불을 건드려도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연조를 본 기조가 부드럽게 물었다. 울음을 터트렸냐는 물음에 연조는 작게 ‘응’ 하고 대답했다. 알코올에 마비된 이성이 통제력을 잃었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손등으로 비볐다.

“왜 울었어?”

“그냥,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그의 손끝이 눈두덩과 눈 밑을 부드럽게 더듬었다. 닦아내는 손길에 연조는 무기력했다. 눈을 잠시만 감았다가 뜬다는 게 남자의 입술이 입술 끄트머리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데도 모르고 있었다.

“눈이 부었잖아. 안 아파?”

“괜찮아.”

“오늘 입고 온 옷 예뻐. 화장도…….”

“거짓말.”

“진짜야.”

“다 지워졌는데……비 맞고 와서.”

“미안. 차를 보낼 걸 그랬네.”

“……안 올 걸 그랬어.”

“그러지 마. 너 오는 거만 기다렸어.”

“나 말고 다른 여자랑 있었잖아.”

그가 웃었다. 선물은 어디 갔냐고 했다. 연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자꾸 채근했다. 네가 사온 걸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대답하지 않았다. 두툼한 손이 엉덩이를 만지려고 했다. 연조는 짜증을 내며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하지 마…….”

“귀여워. 만지게 해 주면 안 돼?”

묵직한 체취가 호흡에 섞여 있었다. 귓불에 혀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가 귓바퀴를 빨려고 했다. 연조는 가물거리는 눈을 닦으며 치근덕거리는 그를 떼어내려 했다. 남자가 한껏 고양된 호흡을 내뱉었다. 뱀 같은 손이 그녀의 가슴을 더듬으려 했다. 연조는 눈을 떴다. 시선이 엉켰다. 남자의 휘어진 눈에서 기묘한 열기가 비쳤다. 연조는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다 엉덩이를 한 칸 물렸다.

남자는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종업원이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와 생선구이를 들고 나타났다. 손을 거둔 남자가 직접 나이프를 잡아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리고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냈다. 연조는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다 샴페인을 멀리 치워냈다.

“난, 난 술이 좀 안 맞는 것 같네.”

“그런 것 같아. 다른 놈하곤 같이 안 둬야겠어.”

“…….”

그가 낮게 읊조린 뒤 스테이크를 잘라 포크에 찍어 내밀었다. 연조는 그것을 가만가만 쳐다보기만 했다. 미지근한 숨이 입술 끝에 닿던 게 기억났다. 그러자 모든 게 불편해졌다. 남자는 포크를 한 번 더 내밀어 재촉했다.

“먹어.”

“응…….”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알아서 먹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처럼 만에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는데 흥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더욱 그랬다. 연조는 그가 내민 포크를 받아 들었다. 스테이크는 맛이었다. 윤이 반들반들한 스테이크 조각을 한 입 먹었다. 시중이라도 들 듯 그가 곧바로 농어구이를 잘라 접시에 덜어주었다.

“넌 안 먹어?”

문득 익숙한 광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도, 그보다 더 예전에도 자주 이랬다. 한기조의 생일날 피자를 먹으러 갔을 때 그가 코트를 빌미로 식사를 하자고 청했을 때. 리치를 까주고 잘 바르지도 못하는 생선 가시를 발라낸답시고 발라내며 그녀에게 생선 살을 먹여주었다. 연조는 그런 그가 부담스러워 몇 번이고 ‘너는 안 먹어?’하고 물었다.

“별로. 난 먹고 왔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연조가 샴페인을 치우자 그가 다시 종업원을 불러 음료를 시켰다. 푸른색의 칵테일이었다. 연조는 그것을 불미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그를 응시했다. 어쩌다 보니 정신이 들었다.

네 생일인데 어째서 넌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나만 먹이느냐 묻고 싶었다. 그러나 혀가 돌돌 말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릇의 바닥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무렵 포크를 내려놓았다.

“더 안 먹어?”

“응.”

고개를 들고 좌중을 바라보았다. 기조가 입가심을 하라고 칵테일을 내밀었다. 다시 취할까 두려워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시킨 정성을 보아 한 모금을 마셔주어야 할 것 같았다.

“고마워.”

고개를 젖히고 홀짝거릴 때였다. 시야에 여자들이 들어왔다. 앉아있는 여자들과 한기조가 무슨 사이인지 알 수 없었다. 물을 계제도 되지 않아 엄두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먹고 마시며 취기에 젖은 웅얼거림을 한기조에게 늘어놓고 있을 때 모두 구석에 박혀 훌쩍거림을 참고 있었다.

조심스레 그녀들을 뜯어보았다. 모두 단조로운 색상의 차림이었다.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도 진한 화장과 컬이 들어간 머리카락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 시간가량 흐른 건 알았지만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짐작 가지 않았다. 예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명이 적게 드는 어두운 구석으로 밀려난 탓에 잘 보이지 않지만 화장을 지운 얼굴에 뺨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속이 불편했다.

“있잖아. 무슨 일 있었어?”

좌중을 훑은 연조가 물었다. 개중에는 젖어있는 여자들도 있었다. 표정이며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연조는 구석에서 훌쩍임을 참으며 부어오른 입술을 만지고 있는 여자를 응시했다. 소름이 돋았다.

“기조야.”

대꾸 없는 남자를 채근했다. 구석에 박혀있던 예라가 고개를 들었다. 겁에 질린 얼굴이 모멸감을 씹어 삼키는 양 흉흉했다. 연조는 저를 바라보는 여자들의 눈에서 무언가를 읽어냈다. 정확히 짚을 순 없지만 예라와는 조금 달랐다.

부어오른 눈가와 볼 따위가 자꾸만 눈에 거슬렸다. 살뜰하게 그녀를 챙기는 남자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무슨 일 있었어?”

“궁금해?”

남자가 되물었다. 잘생긴 얼굴에 뜬 웃음이 버스럭거리며 부서졌다. 순식간에 등이 서늘해졌다. 양주를 따고 있던 이인혁이 표정 없이 여자들을 보았다. 여자들과 짝을 이룬 듯 앉아있던 남자들 굳은 표정이었다.

“내 선물은 어디 있어?”

“내가 물은 건…….”

“버렸어?”

“아니. 그게 아니라…….”

“쓰레기통 뒤져봐.”

남자가 문가에 대기하고 있던 남자를 향해 명령했다. 남자는 일언반구도 없이 뒤를 돌았다. 각을 잡고 인사하는 모습에 쓴 물이 올라왔다. 식도가 뒤집히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그거,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목이 떨렸다. 좋았던 분위기는 어디 가고 남자는 딱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릴 적 기조를 생각했다. 그래야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조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다시 허리에 팔을 둘러왔다. 이번에는 밀칠 수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던 남자가 그녀가 버렸던 종이가방을 찾아왔다.

“풀어줘.”

구겨진 종이 가방을 열어 상자를 꺼낸 그가 연조에게 리본을 풀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말없이 리본을 풀었다. 기조의 손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해줘.”

별걸 다 시킨다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연조는 아무 말 없이 넥타이핀을 들어 기조의 넥타이에 집어 주었다.

“잘 어울려?”

“…….”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가 멍했다. 칵테일에도 알코올 성분이 들었던 건지 뒤늦은 취기가 급습했다. 연조는 맥없이 앉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한 눈썹과 반듯한 코. 각 잡힌 눈매와 보기 좋은 모양의 입술. 사내다운 얼굴이었다. 정욕 적인 눈과 달리 절제된 인상이 언제 어느 곳이든 두드러졌다.

연조는 그 얼굴이 두려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만 일어나고 싶었다.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보려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혼 좀 냈어.”

“…….”

“주제를 모르잖아. 술집 작부들 데려다 놓고 대접 좀 해 주니까 기어오르는 게 눈에 보여서.”

“무슨…….”

“나는 너하고 놀려고 저것들을 부려다 놓은 건데.”

“…….”

“작부 년들 주제에 네 자리를 꿰차려 하고. 게다가.”

시선을 들었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뇌까리고 있었다. 호흡을 멈추었다. 놀라 눈을 깜빡거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긴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툭 하고 건드렸다.

“이걸 버리게 했으니까.”

“…….”

“네가 울었잖아.”

< 2권에서 계속 >

잠식

텅 빈 식장에 눈 둘 데 없었다. 수영은 눈을 덮고 느리게 문질렀다. 발밑이 슬금슬금 문드러지기 시작하더니 꺼먼 나락으로, 나락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일주일 전의 잔상이 지나쳤다. 그는 입술 밖으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밀어 넘기며 무너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결혼식이 치러지든, 치러지지 않든 연조는 내 여자다. 그러니까 찾아야 해. 어떻게든 찾아야…….

‘잊어. 내 여자를 알고, 마음에 두고, 사랑했던 날들을 잊어라.’

찾기는커녕 마음에 둘 권리조차 없다고 했다. 알고 사랑하고 염원했던 그 모든 날을 잊으라고. 연조에게 그 남자가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그녀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부식시켰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연조가 얼마나 진저리치는지 알고 있는데. 번한 것을 알면서 등 돌릴 수 없는 까닭이다. 말아 쥔 주먹이 떨렸다. 막 식을 마치고 하객이 빠져나간 식장을 바라보았다.

연조가 납치되지 않았다면 그들이 무사히 부부가 될 수 있었다면 오늘 이 시간 그들은 프라하에 있어야 했다. 억세게 문 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영문을 모르고 넋이 나가 골든타임을 놓쳤던 일주일 전이 떠올랐다.

연조가 납치되기 전날 밤. 그녀의 집 앞에서 전화하며 미래를 속삭이던 날들이 바스러졌다. 연조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신부대기실이었다. 서두르고 앞당겨도 식을 앞둔 신랑의 입장에선 모든 게 불안했다. 양가 부모님을 챙기고 하객을 맞이하고. 신부 닳을까 봐 걱정된다며 너스레를 떠는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그녀를 잊고 있었다. 그 남자가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런 짓을 벌일 줄 알았으면……. 왜 생각하지 못했지. 충분히 이런 일을 벌이고도 남을 인간인데. 그 작자는 무서워하는 게 없는 인간인데.

한심하다. 박수영. 한심해. 왜 이렇게 병신 같아. 왜 그 인간 앞에서는 벌벌 떨기만 할까. 하긴, 저 같은 소시민이 할 수 있는 게 없잖나. 상대는 반건달이다. 완전 건달도 아니고 양지에 발 한 짝 끼고 있는 속은 시커먼 조직 폭력배의 보스였다. 서른 평생 들어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남의 생살 썰고, 지지고, 효용과 목적에 따라 목숨을 앗는 게 일인 사람이다. 밥 먹듯 해 온 일이 그토록 무자비한데 연조의 일이라고 해서 다를 게 있을까. 왜 이렇게 안일했지? 왜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을까.

“박수영 씨?”

텅 빈 식장 의자에 앉아 지나간 것들을 헤아리고 있을 때였다. 낯선 음성이 수영을 두드렸다. 이름이 불린 줄도 모르고 망연자실하게 앉아있었다.

“거기 박수영 씨 맞죠? 문호서점 사장님.”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회색 낡은 점퍼를 입은 채 이쑤시개를 질겅질겅 씹는 남자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 술이라도 한잔 걸친 양 대낮부터 불그스름한 낯빛이었다. 수영은 대답하지 않고 남자를 응시했다. 그의 뒤로 비슷한 인상의 젊은 남자 둘이 따랐다.

“누구…….”

“형사입니다.”

남자가 씹고 있던 이쑤시개를 무심하게 뱉고는 신분증을 내밀었다. 장영호……경찰서 강력 1반……. 시선을 들었다. 남자가 다시 신분증을 가져갔다. 수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보았다. 날티라고 해야 할까. 강단이라고 해야 할까. 표현하기 모호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는 남자였다.

“애인을 강기조한테 도둑맞았다고 들었는데.”

“그걸 어떻게…….”

“형사라고 했잖수.”

“…….”

“안색 보니 말이 아닌데 속 좀 타셨겠수다.”

“하실 말씀이 뭡니까.”

“애인 찾아야지.”

“……찾을 수 있습니까. 그 사람, 그 사람!”

“날고 기어봤자 깡패 새낀데 뭐.”

장 형사가 웃었다. 뺨에 난 길쭉한 자상이 험악했다. 형사보단 건달 같았다. 수영은 말아쥔 주먹을 풀었다. 그가 자리를 옮길 것을 권했다. 수영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일행을 따랐다. 장 형사가 그를 이끈 곳은 식장 근처의 국밥집이었다. 대낮부터 소주를 시키는 모습에 신뢰도가 떨어졌지만 이내 의심을 접었다.

“강기조.”

“…….”

“본 적 있습니까?”

호흡이 떨렸다. 그 남자의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 목울대가 떨렸다.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이름을 읊조리는 데도 오금이 저렸다. 가장 처음 그 남자를 마주했던 날이 떠올랐다. 못처럼 박혀 어느 때고 그의 목을 죄어 오는 사내.

“장 형사님.”

“그날. 강 대표 본 적 있나?”

“언제…….”

“식장에서. 박 선생님 애인 되는 아가씨가 사라진 날 말이우다.”

소주를 한 모금한 장 형사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식탁 아래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수영이 눈 밑을 떨었다. 단지 그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모멸감에 턱이 떨렸다. 강기조를 처음 본 날. 그리고 연조가 납치된 날. 사라진 연조의 행적을 더듬으며 경찰에 신고를 하려 휴대폰을 들었을 때.

“연조를 마지막으로 본 건. 신부대기실에서입니다. 아침 10시 30분……. 그 정도인 것 같아요. 경찰 말로는 연조가, 그러니까 연조가 수면제가 든 음료를 마셨다고 했습니다.”

“그건 알아.”

수영이 고개를 들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입술을 떨었다.

“그날 강 대표 식장에서 본 적 있느냐고. 그 말이우.”

“아뇨. 아뇨 없습니다. 그 사람과 같이 다니는 사람도 본 적 없습니다.”

고개를 저었다. 강기조와 그의 측근을 식장에서 본 적은 없었다. 그전까지도 사람을 붙였다거나 하는 느낌은 갖지 못했다. 그것은 연조도 마찬가지였다. 연조는 강기조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강기조와 처음 대면했던 그 날도 아무 사이 아니라고 했다. 아무 사이 아닌데도 수영은 그가 연조에게 많은 의미를 지닌 남자란 걸 느꼈다. 표정이 그랬다. 끊어내고 싶은데 끊을 수 없는 사람. 어떤 것도 묻지 않았지만 연조를 만나며 알게 되었다.

강기조가 어떤 사내인지. 그가 어떤 식으로 연조에게 집착하고 있는지…….

“사장님도 참 대단하우. 강기조 그 새끼 성격에 자기 여자한테 남자 붙은 거 알면 일찌감치 공구리 쳐도 쳤을 텐데. 용케 살아남았수.”

소름이 돋았다. 수영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몇 번이고 살해 협박을 받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마도 연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그자는 연조의 미움을 받는 걸 두려워하니까. 자신을 죽이는 것보다 자신을 죽인 뒤 연조의 증오를 감내하는 걸 염려해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이리라.

“살해 협박은 받은 적 많습니다. 죽진 않아도 말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잘린 손가락이 저희 집 대문 앞에 걸려있던 적도 있었죠. 어머니가 키우는 개의 내장이 소파에 피 칠갑되어 널려져 있었던 적도 있었고…….”

장 형사가 내뿜은 연기에 코가 아렸다. 수영은 담배를 피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폐암으로 죽은 이후로는 호기심이 당기지도 않았다. 연조는 그런 점이 좋았다고 했다. 담배를 싫어해서 비흡연자와 사귀고 싶다고 했는데 수영이 비흡연자라서 좋았다고. 그는 연조를 생각하며 죽지 않고 살아남았기에 강기조에게 당했던 모든 것을 떠올렸다. 하나씩 끄집어낼 때마다 살이 떨렸다.

“정말로 강제로 부둣가에 끌려가 그와 대면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 선생님은 인천 부둣가에 끌려갔던 사람 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장 형사의 옆에 앉아있던 젊은 순경이 표정 없이 읊조렸다. 전혀 기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다음은 없다고 말하던 강기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영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자신이 실수한 걸 알았는지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수영은 조금 웃었다. 그를 본 장 형사가 툭 내뱉었다.

“그러고도 사귈 마음이 났수? 아니, 그 전에 그 아가씨는 어떻게 만났지? 강기조 그 새끼가 보초를 얼마나 열심히 섰는데. 세상에서 제일 열심히 하는 일이 그 아가씨 감시하는 거던데. 아니, 그 전에 그 새끼는 무슨 마음으로 박 선생이 그 아가씨하고 이거저거 다하고 결혼하는 거까지 봐 줬지?”

“그건, 그건…….”

기분 나빴다. 마치 연조와 사귄 것을 강기조가 눈 감아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그녀와 한 모든 것이 강기조가 허용한 일이란 것처럼.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했단 것처럼.

“마치. 그가 허용했기 때문에 저희가 사랑할 수 있었단 말로 들리는군요.”

“아. 뭐.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지만…….”

“아닙니까? 형사님 말씀은…….”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않수? 우리 박 선생님은 강기조 그 새끼가 펼치는 협박과 공작을 이겨내고 결실을 맺은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악독한 새끼를 박 선생님이 당해낼 리 없잖아. 응? 그 새끼가 뭐 해가면서 밥 처먹는 새끼인지 박 선생님도 알지 않수.”

형사의 말은 잔인했다. 눈 밑이 다시 발발 떨렸다. 거드름을 피우는 척 폐부를 찌르는 말에 분이 차올랐다. 강기조가 뭐하는 자인지는 알고 있었다. 모를 수 없었다. 그는 폭력배이되 사업가였고 동시에 로비스트이면서 깡패였다. 구체적인 사업을 어떤 것으로 하는지는 모르지만 사내는 부유했고 부유한 만큼 잔악했다.

“모를 리 없잖습니까. 전…….”

“아니. 모르는 것 같은데?”

“알 만큼 압니다. 그동안 당해온 게 있는데.”

“당하기만 했지 진짜 모르는 것 같은데?”

장 형사가 웃었다. 그는 피웠던 담배를 끄고 소주를 한 모금 삼켰다. 그를 따라 앉은 젊은 순경들은 김이 모락모락 솟는 국밥을 후후 불며 먹었다. 장 형사는 제 시선을 피우지 않는 남자를 보고 조금 웃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발끈했다.

“몰라. 당신은 모르니까 그 아가씨하고 결혼할 생각을 했지. 어우. 나 같으면 그 아가씨하고는 아는 척도 안 해.”

장 형사는 넌더리를 쳤다. 저는 형사였다. 하는 일이 강기조 같은 놈을 잡아들여 콩밥 먹이는 것이었다. 그래. 그랬었다. 예전에는, 예전에는 공무이기도 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때도, 지금도 그를 쫓으며 당했던 수모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버틸 수 있었다. 박 경위도 그도 그렇게 버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사적으로는 엮이고 싶지 않다. 특히 그 여자. 송연조와는 조금의 친분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연조는…….”

“그 새끼 트라이어드(triad)야.”

“그게 뭡니까?”

“짱깨라고.”

“예? 한국인 아닌가요?”

“아니. 기반이 홍콩 쪽에 있다고.”

장 형사가 다시 담배를 물었다. 마른침을 연신 삼키고 있는 이 어수룩한 남자가 갑갑했다. 아무것도 몰라서. 이렇게 순진하니 강기조 같은 놈의 여자와 배가 맞을 수 있구나 싶었다. 하긴 아는 놈은 못 건드린다. 알면 건달이 끼고 사는 여자와 어떻게 사귈 생각을 하겠나. 어우.

“원래 화교 출신이야. 뭐 그 새끼 친모는 한국인이겠지. 죽은 강 회장도 한국에서 산 지 오래된 데다 귀화했으니 한국인이긴 하겠지만. 기반은 홍콩에 있어.”

“맞습니다. 트라이어드에서 떨어져 나온 애들이긴 합니다만 한국이 주 활동 무대라고 할 수 있죠. 그래도 홍콩하고 대만, 상해 쪽에 지분은 엄청납니다. 한국에선 대부업체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주류로 하고 있긴 한데……. 홍콩에선 카지노랑 마약은 꽉 잡고 있고요. 주로 유흥 쪽으로 규모가 큰 사업을 하고 있긴 한데 요즘은 싱가포르로도 진출했더라구요. 아마 금융업 쪽으로 물꼬를 튼 듯합니다.”

국밥을 후루룩 소리 나게 먹고 있던 이 순경이 끼어들었다. 제 눈치를 보고 얼른 입을 닫았지만 아마 갑갑한 듯싶었다. 장 형사는 강기조의 여자와 결혼하려 했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른다. 강기조가 어떤 남자인지. 강기조와 접촉하기만 했을 뿐. 순진하긴……. 소주를 넘기며 어수룩하게 생긴 남자를 흘깃거렸다.

강기조와는 다른 타입이다. 성질부터 껍데기까지. 단정하긴 하지만 그게 다다. 좋은 말로도 미남이라고 해 주긴 그렇고 자세히 보면 귀엽긴 한데 보통 여자들은 강기조 같이 생긴 놈을 더 좋아하지 않나. 껍데기 하나는 독보적이니 말이다. 밥맛이 떨어질 정도로 미끈하게 생긴 깡패 놈을 떠올리다 말고 한숨을 푹 쉬었다.

송연조가 왜 이 남자를 좋아했을까. 저 좋다는 남자가 입 벌어지게 잘생긴 데다 돈도 많은데. 하긴 깡패 새끼 마누라 되는 것보다야 번듯한 사업장 가진 자영업자가 신랑으로 낫긴 하다. 장 형사는 잡스러운 생각을 치우고 운을 뗐다.

“무슨 얘긴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연조를 찾을 수 있습니까?”

“그건 모르지.”

“그럼 지금…….”

“우리가 박 선생님하고 장난하는 거로 보이우? 장난하는 거 아니니까 확답을 못 드린다는 거 아닙니까. 어쨌든 박 선생님이 사귀는 아가씨분은 화교 출신 조직 폭력배가 침 발라둔 여자고. 그 뭐야. 어. 납치까지 당했는데 어떻게 장담을 하냐. 내 말은 그 말이지.”

수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 형사는 혀를 찼다. 어수룩하게 생긴 남자가 말귀 알아듣는 능력도 없으니 갑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영은 분에 차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형사가 찾아왔기에 뭔가 다를 줄 알았다. 이따위 국밥이나 시켜 놓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도 참은 건 연조를 찾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잔 겁니까. 당신들은 경찰이고. 경찰이라면 마땅히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 일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연조가 납치됐다고요! 경찰에 신고를 한 지 일주일도 지났습니다. 관할 경찰서에선 아무 연락도 없고……! 나는, 나는! 나도 알고 있습니다. 나 같은 놈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거! 그러니까 형사님에게 부탁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 연조 제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무력감에 가슴이 쓰라렸다. 이런 감정에 잠식되어 숨이 막혔던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연조가 이런 식으로 납치된 것 또한 한두 번이 아니듯 말이다. 종종 강기조는 연조를 데려가 내놓지 않았다. 어디서 뭘 하는지 알 수도 없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돌아온 연조는 해쓱한 얼굴로 별일 없었다며 얼버무렸다. 이런 일이 거듭되자 결국 울음을 터트리긴 했지만 제대로 들은 바는 없었다. 다만 연조는 모든 게 모욕적이라고 했다. 모멸감 때문에 참을 수 없다고. 제 품에 안겨 울음을 흘리는 여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밖에는……. 장 형사가 그랬든 수영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니까. 경찰도 몸을 사리는 조직 폭력배의 우두머리이니까.

“아. 왜 재수 없게 남자가 질질 짜고 그러우?”

장 형사가 따라 일어났다. 스테인리스 컵에 물을 쪼르륵 따르던 순경 둘이 한 번에 컵을 비운 뒤 따라 일어났다.

“보러 가면 되지.”

“지금 뭐라고…….”

“보러 가자구.”

장 형사가 무심하게 뇌까렸다. 수영이 고개를 들었다. 화색이 도는 얼굴을 본 장 형사가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어떻게 안 죽고 용케 살아있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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