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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깼다. 숙자가 예라일 적의 과거가 꿈으로 나왔다. 연조는 도무지 예라가 그렇게 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예라는 연예인 지망생이었고 기조의 애인이었으며 과거가 어찌 되었든 간에 그녀의 정체성에 금이 갈 정도의 해악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딛고 있는 땅은 바닥 중 가장 바닥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더는 대답하고 싶어 하지 않기에 연조는 등을 돌렸다. 예라에게 밖으로 나갈 키를 주란 말 또한 하지 못했다. 그녀의 처지를 아는데 그 요구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를 수 없었다. 그녀가 그 요구에 부응하든, 하지 않든 그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일어나 화장대 앞에 앉았다. 이 집은 거울이 많은 집이다. 연조가 살던 오피스텔에는 거울이 딱 하나밖에 없었다. 화장실 안, 세면대 앞에 달린 거울. 필수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보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밖으로 나가기 전이나 화장을 할 때를 제외하면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았다.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초등학생 때는 거울을 볼 때의 두려움도 없었다. 중학생 때도 그런 압박감은 느끼지 못했다. 기이하게도 이 이상한 압박감은 성인이 되었을 때. 사회를 나갔을 때 찾아왔다. 예라 같은 여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녀가 밉기보다는 늘 두려웠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이, 상황이 만들어내는 불편함이, 그것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기조. 한기조. 아니. 더 정확히는 강기조. 그녀의 삶의 마지막 조각까지 전부 부식시킨 그 남자……. 그 남자 때문에. 그 남자를 원하였기 때문에…….
거울을 바라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덮은 어깨와 목선이 야윌 대로 야위었다. 형편없이 마른 모습에 연조는 짜증이 났다. 왜 한순간이라도 그녀는 그녀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을 그만두지 못할까. 한기조에게 안기는 와중에도 몰골이 얼마나 형편없을지 걱정하던 것이 떠올랐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 와중에도 기조의 눈에 비친 저를 염려했더랬다.
차라리, 차라리 기조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미치지 않았을 텐데. 왜 기조를 사랑했었을까. 손을 들어 눈두덩을 문질렀다. 푹 꺼진 눈 밑과 홀쭉한 뺨을 짜증스레 흘겨보다 물을 틀었다. 얼굴을 거푸 씻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별안간 화장실 문이 열렸다.
새벽녘 깊이 잠들어있던 남자는 이미 말쑥한 차림이었다. 정사를 나누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깨끗하게 걷은 얼굴이 금욕적인 느낌을 주었다. 무너지고 싶지 않아 시선을 내리깔았다. 앞에는 거울이 있고 뒤에는 기조가 있다. 정말이지 끔찍한 상황이다.
“나가.”
남자가 연조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볼에 맺힌 물방울이 주루룩 흘러 턱 끝에 맺혔다. 그의 숨이 쇄골에 번졌다. 간지러웠다. 긴 팔이 그녀의 허리를 안아왔다. 넝쿨이 감기는 것처럼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이 그녀를 덮쳤다. 마침내 시선을 들었을 때 남자는 아름다운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희미한 체취를 들이마시는 동작이 애처로웠다. 왠지 모르게 구역질이 났지만.
그를 알게 된 후로 매일 생각했다. 왜 스스로 사랑할 수 없는지. 단지 눈에 보이는 것. 물질적인 모든 것만이 전부는 아닐진대 이 남자로 말미암아 눈 모양 하나 입매의 기울기 하나 증오하게 된 것인지.
“놔.”
“새벽에 어디 갔었어.”
“그런 적 없어.”
“거짓말. 나 두고 밖에 나간 거 다 알아.”
“사람 숨 막히게 하지 마.”
“연조야…….”
“제발.”
“내가 어떻게 해야 해?”
“…….”
“어떻게 하면 예쁨받을 수 있어?”
남자의 팔을 긁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구역감에 몸서리치던 연조가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어떻게 해야 예쁨받을 수 있냐고? 모르겠다. 이제 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힘들었다. 그것은 수영마저 그랬다. 수영마저 사랑할 수 없다고 느꼈다. 결혼을 마음먹고 그에게 제 마음 그대로를 토해내던 밤에도 수영에게 감정의 어려움을 느꼈다.
남자는 증오하는 대신 그녀를 받아들였고 인정했다. 있는 그대로 보아주었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작하자고.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모습을 잊지 말자고. 연조가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해갈되지 않는 감정을 토로하고 뒤틀린 제 모습을 보여주었음에도 결코 등을 돌리지 않던 것. 연조로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다.
“그만…….”
그를 다시 떼어내려 할 때였다. 화장실 문이 두드려졌다. ‘대표님’하는 소리가 문 너머 들려왔다. 목덜미에 코를 비비며 응석을 부리던 남자가 그녀의 볼에 깊이 키스한 뒤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몹시도 차가운 눈으로 부하 앞에 섰다.
“집 안으로 들어오지 말랬지?”
“하지만. 그 경찰이……. 그러니까 장 형사 말입니다.”
“그 병신 아직도 안 뒤졌어? 넉 달 전에 숨넘어간다고 하지 않았나.”
“예. 그런데 얼마 전에 퇴원했다고……. 죄송하지만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장 형사가 누굴 좀 데리고 왔는데…….”
안색이 하얀 남자가 안절부절못하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경찰이 왔단 소리에 고개가 돌아간 연조는 기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남자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의 입술 끄트머리에 팬 길쭉한 자상이 엷게 꿈틀거렸다.
“침실에서 나오지 마.”
대꾸하지 않았다. 별안간에 남자가 그녀의 화장실에서 끄집어내 침대로 데리고 갔다. 그가 사슬을 주워들었다. 연조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의 손에 들린 사슬을 뺏어 벽으로 집어 던졌다.
“미친 새끼.”
욕처럼 뇌까리는 말이 음산했다. 손을 들어 남자의 뺨을 후렸다. 그의 오른쪽 뺨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다시 왼쪽 뺨을 후리려 했을 때였다. 남자가 그녀의 손을 감아쥐었다. 연조는 씩씩대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나가고 싶어?”
“…….”
“그럼 같이 나가지. 뭐.”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현관 앞에는 처음 보는 중년 남자와 젊은 남자 둘이 있었다. 연조는 건조한 눈으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야. 강 대표. 나 기억하지? 일산 창고에서 강 대표가 보낸 짱깨한테 모가지 썰린 짭새.”
남자가 키득거렸다. 질펀한 웃음이 만면에 가득한 것을 본 연조는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기이하게도 그의 뒤로 각을 잡고 서 있는 남자 둘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럼요. 기억하고 말고가 있겠습니까. 장 형사님이랑 제가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아 참. 박 경위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좀 바빴거든요. 내일 이 전무 시켜서 부조금 보내겠습니다.”
기조가 웃었다. 칼날 같은 웃음이었다. 베일 것 같이 서늘했다. 박 경위란 말에 장 형사란 남자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연조는 순식간에 아귀처럼 변하기 시작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별안간 그의 등 뒤에서 누군가 비집고 나왔다.
“연조야.”
체구가 다부진 순경들 사이에서 볏짚처럼 마른 남자가 튀어나왔다. 무기력한 눈으로 형사들을 훑던 연조의 낯에 딱딱한 기운이 스미기 시작했다. 뼈마디의 윤곽이 도드라질 정도로 마른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홀쭉하게 팬 뺨이 바르르 떨렸다.
수영의 건조한 눈이 금방 젖어들었다. 속옷도 입지 않고 걸치고 있던 가운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허벅지 사이를 스치는 면을 움켜잡았다. 침대를 구르며 한기조가 물고 빨았던 흔적들이 다시금 알알해졌다.
“연조야.”
수영은 헐떡이고 있었다. 운동장을 달린 것도 아닌데. 남자의 쌕쌕대는 호흡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심장이 북처럼 뛰었다. 장 형사를 밀치고 나온 남자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기조는 웃고 있었다.
“괘, 괜찮아? 어? 몸이, 몸이…….”
연조의 손을 잡은 수영이 그녀의 어깨와 목덜미를 훑었다. 쇄골에 박힌 순흔이 봉긋했다. 불그스름하게 번진 그것은 옅기에 따라 도도록하게 솟아 보이기도 했다. 손이 잡힌 연조는 어깨를 움츠렸다. 제 옆에 선 남자가 흔쾌히 그녀를 데리고 현관 앞으로 나온 게 납득이 됐다.
“어디, 어디 맞았어? 목이…….”
“…….”
“내가 아내에게 손찌검을 할 만큼 얄팍한 놈으로 보였나? 박 사장.”
“무슨, 무슨 아내라니. 연조는…….”
수영이 이를 갈았다. 그러면서도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의 여자가 제 아내가 될 여자였다는 반박은 물론. 애인을 데리고 나가겠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도둑맞은 신부를 코앞에 두고도 씨근거리기만 하는 스스로가 역겨웠다. 여자의 손을 움켜잡는 순간까지도 오금이 지렸다. 수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대체 연조한테 뭘…….”
“너덧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연조의 허리에 긴 팔을 두른 남자가 열등한 것을 보는 것처럼 시선을 내리깔았다. 남자들의 평균보다 월등히 체구가 큰 남자와 남자들의 평균을 밑도는 수영은 한눈에 보기에도 체격 차이가 심했다. 이를 악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남자의 어떤 면도 이길 수 없었다. 저항할 수 없는 것은 비단 도리를 모르는 폭력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면도 남자가 지닌 것을 이길 수 없었다. 패배감에 신물이 올라왔다. 눈 밑이 엷게 떨리는 것을 참아내기 위해 이를 물었다. 연조를 만나고, 사랑하고, 결혼을 결심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기르던 개의 내장이 집안 한가운데 널려진 것을 마땅히 삼킬 수 있는 고통이라고 여기기까지.
그에게 송연조란 여자가 얼마나 큰 부피를 가지고 있었던가.
“씹질한 흔적이란 것까지 말해줘야 알아듣나?”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수영은 비루먹은 개처럼 힐긋거리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늘 이런 식이었다. 잘린 손가락을 비닐 봉투에 넣어 대문에 걸어 놓는 것 보다. 의식 있는 채로 귀가 잘린 남자에게 끓는 기름을 붓는 행위를 보여주는 것 보다.
이런 식의 모욕이 늘 견디기 힘들었다. 연조를 놓지 못하는 건. 어쩌면 이런 행위들 속에서 모멸감을 이겨냈다는 증명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였다.
“수영 씨.”
남자에게 맥없이 안겨있던 연조가 그를 불렀다. 상황에 몰입되어 강력한 수컷이 주는 열등감에 앓고 있던 수영이 눈을 깜빡였다. 연조는 제 곁에 선 커다란 남자를 흘깃 쳐다보고는 그대로 수영의 목을 안았다. 셋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장 형사가 입술 끝을 슬그머니 올렸다. 강기조는 멸망할 것이다. 썩고 문드러져 딛고 선 땅이 늪으로 변하는 줄도 모르고……. 지리멸렬하게 지속되었던 그의 오랜 사랑이 그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형체를 몰라보도록 짓이길 것이다.
“반장님…….”
이 순경이 장 형사를 작게 불렀다. 그는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야. 강 대표 표정 좀 봐라. 씨발. 아주 울겠네. 울겠어.”
장 형사가 킬킬거렸다. 배를 잡고 웃으려는 남자를 걱정스레 쳐다보던 이 순경이 시선을 들었다. 장 형사의 말대로 남자의 낯은 일그러져 있었다. 자주 보진 않았지만. 저런 얼굴을 한 건 사진으로도 보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강기조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연했고 처량했다. 미세한 열이 몰린 눈가와 뭉개진 낯이 애달프기까지 해 웃음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순경은 박수영의 목에 팔을 감고 있던 여자와 시선이 엉켰다. 애달픈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여자는 생각보다 서늘하고 맥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