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4/46)

* * *

정사 후 정신을 잃은 것처럼 잠이 들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힘든 아침이 되었을 때 연조는 노파처럼 숨을 쉬었다. 고롱고롱 울리는 숨소리가 호흡기를 단 노인 같았다. 새벽 무렵 기조는 그녀를 안고 잠들어있었다. 연조는 어느새 익숙해진 단단한 가슴팍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기조와 일을 치를 때마다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그녀는 텅 빈 옆자리를 쳐다보다가 가까워지는 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몸은 좀 어때?”

대답하지 않았다. 기조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완벽히 성장한 차림이었다. 근육의 굴곡이 맵시 있게 드러난 차콜 그레이 색의 슈트는 그 냉골 같은 성정을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했다. 머리를 걷어 올린 이마는 반듯하니 잘생겼고 그 아래 이목구비는 날카롭고 묵직한 인상을 만들었다. 기조는 잘생겼다. 그러나 그의 외피에 속을 만큼 연조는 더이상 어리석지 않다.

“죽 사 왔어. 너 전복죽 좋아했던 거 같아서.”

“…….”

“왜 대답이 없어. 목 아파? 모과차 마실래?”

침대의 빈자리에 앉은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니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연조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보기 싫었다. 입술을 문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대답 좀…….”

“수영 씨.”

그의 손이 닿기 전에 고개를 들었다. 남자를 다시 응시했다. 아픈 얼굴이었다. 저 좋을 대로 다 해놓고 저따위 표정을 지었다. 반칙이다. 연조는 그의 아픔에 약했다. 어릴 때도 그랬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지. 마른 음성이 이어졌다.

“놔둬.”

“…….”

“너 원하는 대로 다 했잖아.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됐는데 그 사람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짓쳐들어온 햇살이 남자의 얼굴에 음영을 그렸다. 낙엽 빛 눈동자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감돌았다. 다시 또 그런 얼굴이었다. 상처 주었을까? 상처를 입히게 된 걸까? 그러나 통쾌하지 않았다. 조금도, 조금도…….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땠을까. 연조가 울먹일 때면 행복했을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어떤 마음이 들어서 그녀를 괴롭혔을까. 곪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흘려보내지 못해 썩혀 두었다. 수영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든 것은 기조였다. 그녀를 갉아먹은 것 또한 기조였다.

“그 자식을 살려둔 건…….”

“좋았어?”

“뭐?”

“나를 이런 식으로 괴롭히니까 좋았어?”

남자가 굳었다. 연조의 뺨 위로 눈물이 긴 곡선을 그렸다. 입술을 짓씹었다. 남자는 번번이 그런 방식으로 그녀를 죽였다. 마음을 그리고 사랑을……. 조금이나마 좋게 마무리 지으려 했던 그녀의 노력을. 그 우습지도 않던 수고를. 못 박아 난도질하고 갈가리 찢었다.

“기억 나? 네가 다 벗은 여자를 안고 날 불렀잖아.”

“…….”

“내 앞에서 내가 모르는 여자 가슴을 주무르면서 웃었어.”

“그건…….”

“호텔에서 애인과 밤을 보내면서 나한테 서류 심부름을 시킨 적도 있었지. 네 생일날 나를 특별한 척 대우해놓고 며칠 뒤 나를 부른 자리에서 다른 여자에게도 음식을 잘라 줬어.”

턱이 덜덜 떨렸다. 연조는 울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우스워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연조는 어느 때고 기조의 앞에서 우스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긴장을 놓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그녀와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 갖고 놀 상대가 되어주기를 바란다는 걸 안 뒤부턴 더욱.

지나가고 없는 그 순간순간들을 반추했다. 몇 번인지 모르겠다. 기대하고 절망하다 마침내 감각을 느낄 세포마저 소실한 것. 언제 그를 끊어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이 대체 언제였는지…….

연조는 고개를 떨구었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가끔은 뜯어내고 싶었다. 근육을 덮은 피부. 신경을 조밀하게 감싼 세포. 숨 쉬는 것. 만들어진 것. 세상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것들……. 다 찢고 싶다. 감은 눈 사이로 그녀가 읊조렸던 과거의 어느 날이 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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