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46)

* * *

그날은 마지막 근무일이었다. 딱 1년만 채우고 그만두려 했던 연조를 떠나지 못하게 잡아 둔 건 기간을 연장해 가며 붙들어 둔 건 한기조의 의지라기보단 결핍이 부른 처지였다. 아버지의 사업이 급속도로 힘들어지고 집안이 회복할 기세를 보이지 않자 부모님은 연조의 벌이에 의탁하다시피 했다.

기조의 회사를 그만둘 수 없는 건 그 때문이었다. 보수가 좋았다.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들어간 지 1년이 채 되기 전 알게 되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그만두지 못했던 건 그녀의 상황 때문이었다.

일자리를 구하게 되면 그만두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오자고 했지만 일자리는 쉽사리 구해지지 않았다. 그녀가 사직서를 내밀 수 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사업에 조금씩 활기가 돌기 시작할 무렵. 수영을 만나고 두어 달이 지난 후였다.

수영의 도움으로 면접을 본 보육원은 서울 외곽에 자리한 작은 시설이었다. 직접 자식을 낳고 싶진 않지만 아이들을 좋아했던 연조였기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어떻든 간에 얼른 근무하고 싶은 직장이었다. 사직서를 내밀었을 때 기조는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수리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말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할지 또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부스럼이 없었다.

하루일과 중 마지막으로 이 비서에게 기조의 집에 작은 문건 하나를 전해주고 돌아올 것을 지시받았다. 내키진 않았지만 거절할 순 없었다. 기조가 제집으로 연조를 부를 때는 보통 서류가 목적이 아니었다.

밥을 함께하잔 것이든 아니면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잔 뜻이든.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여자를 불러 놓고 그녀에게 모욕을 줄 수도 있었다. 생각이 그렇게 미치자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지만 별수 없었다.

그가 보낸 기사의 차를 타고 그의 집 앞에 내렸다. 종종 와 본 곳이기에 길을 잃지 않았다. 한강을 앞에 두고 널따랗게 펼쳐진 그의 집을 생각했다. 회사에서 마련해준 오피스텔을 비우려고 하니 제집에 들어와 살라던 남자의 제안이 떠올랐다. 물론 그 자리에서 거절한 일이었다.

문 앞에서 숨을 골랐다. 긴장으로 굳어진 근육을 이완시키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렸다. 샤워를 하고 있을 때면 종종 늦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서류만 테이블에 두고 문자를 보내자는 생각에 비밀번호를 눌렀다. 집안은 한산했다. 제대로 된 가구가 없는 것은 물론 마감된 벽면과 가재도구는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는 곳이 아닌 모델하우스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테이블을 찾아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샤워실과 연결된 침실에서 옅은 신음이 들려왔다. 테이블에 서류를 내려놓던 손이 굳었다.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연조는 어정쩡하게 굽혔던 허리를 펴고 침을 삼켰다. 그만 뒤를 돌아 나가야 하는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안와골에 열이 몰렸다.

몇 달 전 기조가 제게 목걸이와 귀걸이를 선물했다. 연조로서는 들어본 적조차 없는 브랜드의 패물이었다. 값어치를 따지기 힘든 고가의 보석. 오페라를 보고 식사를 하고. 비서가 할 일은 아니지 않느냐는 물음에도 기조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근무의 일환이라고 생각해.’

그와 동반하는 모든 것을 근무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라 했다. 더는 거절할 명분이 생각나지 않았다. 징글징글하다는 표정으로 저녁까지 먹고 나니 그는 대뜸 그런 것을 내밀었다. 당연히 거절했다.

어울리지도 않았고 이런 것을 받아야 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니 돌아올 것이 보복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지겨운 패턴이었다. 기조는 애인이 있었다. 많았다. 본 적도 없는 여자들이 애인이라고 회사 로비에 나타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아주 밤마다 끼고 다니는 여자들이 종류별로 있는 것 같았다.

장롱 속에 정리되지 않은 행거처럼. 그렇게 모아두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연조와 저녁을 먹고 싶어 했다.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오늘과 같이 보복했고 그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보복했다.

그녀를 좋아해서 벌이는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한다면 이럴 수 없었다. 뒤돌아 나가자. 그만, 그만 여기를 나가야 해. 속으로 되뇌었지만 삐거덕거리는 걸음은 침실로 향했다. 비스듬히 열린 문을 밀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무릎을 꿇은 여자였다. 예라는 아니었다. 그 여자는 오래전, 아니 오래되지 않았다. 여자는 기조의 생일. 그날을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레 보이지 않아 김 비서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는 불그죽죽한 얼굴로 자기도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영락없이 겁에 질린 모습이라 더는 묻지 않았다. 연조는 여자가 최근 기조가 데리고 다니던 모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수풀같이 긴 머리카락이 화려한 금발이었다. 염색일까. 느닷없이 드는 궁금증이었다. 가발로 보일 만큼 밝은색이었다. 평소 끼던 파란색 렌즈는 보이지 않고 인조 속눈썹이 눈물로 흠뻑 젖어있었다. 심장이 쿵- 쿵- 느리게, 그러나 거세게 뛰었다.

붉은 입술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져 있었다. 감당되지 않는지 꺽꺽거리며 괴로운 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해도 기조는 성기를 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재킷과 타이를 벗은 남자는 회사에서보다 조금 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는 한 손에 시가를 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연조에게로 옮아갔다. 무표정하게 담배를 태우던 그가 연조를 보고 웃었다.

“왔어?”

구역질이 났다. 여자의 입속에 있던 그의 물건에 시선이 갔다. 어느 날 그의 사무실에서 나신의 여자를 보던 때와는 달리 별로 놀랍지 않았다. 황망함도 없었다. 연조는 그의 성기를 물고 있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애교 있게 그의 팔짱을 끼던 여자는 폭행이라도 당한 듯 사색이었다.

실제로는 폭행을 당했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구음은 성애가 아닌 폭력처럼 보였다. 여자에게 시선을 주는 것을 느낀 기조가 물었던 웃음을 지우고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쥐었다.

“씨발. 더럽게 못 해.”

난잡한 욕설이 그의 입안에서 흘렀다. 그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타들어 간 시가의 끝을 툭툭 털었다. 가루가 여자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그녀가 그것을 피하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물고 있는 성기를 뱉으려 했다.

“뱉으면 죽어. 씨발 년아.”

여자가 콜록거리며 입에 문 것을 놓쳤다. 따귀가 날아갔다. 연조가 놀라 입을 막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표정 없던 낯이 사나웠다. 그녀는 가방을 내팽개치고 달려가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입이 퉁퉁 부은 그녀가 울먹거리며 덜덜 떨었다. 자세히 보니 어린 애였다. 갓 스물이나 넘겼을까. 화장이 진해서 그렇지. 대학 OT 때나 보던 앳된 얼굴이었다. 높은 힐을 신고 회사 전체가 제 것인 양 쏘다니던 활기찬 얼굴이 겁에 질려 있었다.

사색이 된 여자가 연조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울음소리가 났다. 연조는 주저앉아 그녀를 끌어안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행색을 정돈한 남자가 둘을 응시했다. 아니. 연조 하나만을 쳐다보았다.

“뭐하는 짓이야?”

“뭐하는 짓이냐고? 그럼 넌 지금 뭐 해?”

“왜 뺨을 때려.”

“받을 건 다 처 받아 놓고 하라는 것도 똑바로 못해서 말이야.”

“그렇다고, 그렇다고 네가 이 애를…….”

남자가 걸어왔다. 험악하게 굳은 얼굴이 낯설었다. 울음이 날 것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불룩한 앞섶을 보았다. 끔찍했다. 호흡이 조금씩 어긋나는 것을 애써 진정시켰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자꾸만 열기가 눈으로 몰렸다.

“어딜 봐.”

그가 그녀의 고개를 틀어쥔 뒤 제게로 돌렸다. 우악스러운 힘이 턱에 가해졌다. 앓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기조의 표정은 형용할 수 없었다. 노여움이 짓쳐 든 잘생긴 얼굴이 모욕을 받은 것처럼 근육이 꿈틀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뭐가. 대체 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니? 그렇게 되묻고 싶었다. 가능하면 품 안에 안긴 여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뺨도 후리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못했던 건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다. 입을 열면 훌쩍일 게 분명해서.

“내가 다른 계집애한테 좆을 물려도 너는 멀쩡해? 기분이 아주 좋아 죽지?”

“…….”

“씨발. 너는 예전부터 사람 하나 아주 병신 만드는 데는 도가 텄어.”

대꾸하지 못했다. 연조는 그저 불룩한 앞섶을 어쩌지 못해 씩씩대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데 도가 텄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는 건 그녀가 아니라 눈앞의 남자였다. 제 몸의 일부를 여자의 입안에 처박아 놓고 그 꼴을 또 보게 만들더니 뭐가 모자라고 아쉬워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하긴 좆도 상관없으니까 다른 새끼를 만나는 거겠지?”

번득거리는 눈이 흉기 같았다. 연조의 눈이 젖어 들어갔다. 남자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훌쩍이던 여자를 쳐다보더니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집어 던지듯 뽑아냈다.

“뭐하는 짓이야!”

연조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팔을 잡아챘다. 정신이 없었다. 벽으로 밀쳐진 여자가 바닥을 기며 울음을 터트렸다. 연조가 그의 팔을 안고 도리질을 했다.

“기조야. 제발, 제발……이러지 마.”

엉엉 울며 매달렸다. 그의 팔을 안은 연조를 본 기조가 여자에게 낮은 목소리로 ‘나가’ 하고 읊조렸다. 여자가 제 몸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집을 나가자 침실에는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연조는 헐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시선에 제 팔을 꽉 안고 놓아주지 않는 연조에게 닿았다. 당장 살인이라도 낼 것 같은 얼굴의 남자가 기묘한 시선으로 그녀의 빨간 얼굴을 보더니 팔을 뽑아낸 뒤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연조는 맥없이 그의 손에 붙들려 침대에 앉혀졌다.

울음이 멈추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혼곤했다. 피곤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연조는 지쳐 있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잊고 싶었고 또한 잃고 싶었다. 그에 대한 사랑, 번민……. 그로 인해 벌어진 마음을 감출 길이 없기에 몰려드는 괴로움. 연조는 옅게 헐떡이며 그를 응시했다. 눈물이 났다. 그만두고 싶다……. 사라지고 싶어.

진절머리가 났다. 지루하고 지난하다. 첫눈이 오는 날 입을 맞추던 소년에게 사랑을 느꼈던 밤 이래로. 그녀는 오랫동안 고단했다. 멈출 수 있다면 멈추고 싶었고 벗어날 수 있다면 벗어나고 싶었다. 어쩌면 연조는 이제 헤어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조가 그것을 막지만 않는다면……. 그녀를 흔들어 죄 어그러트리지만 않는다면……. 그녀는 남자를 응시했다.

그는 그저 그녀를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왜 울어.”

“…….”

“널 때린 것도 아니잖아.”

“무서워. 네가 이럴 때마다…….”

“널 때리지는 않아.”

“넌 사람도 죽이잖아.”

“너는 안 죽여.”

“너는 살아있는 사람의 눈도 뽑았어. 그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의 동생한테……. 끓는 기, 기름을 붓고…….”

“너한테는 안 그래.”

입을 다물었다. 눈물이 다문 입술 사이에 고였다. 짠맛이 지독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턱을 감쌌다. 좀 전과는 달리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조명 아래 밝은 갈색 눈이 더욱 선명했다. 노여움이 여진처럼 남아있는 눈동자가 그녀에게 들러붙었다. 뺨을 감싼 손이 아가리를 벌린 덫처럼 느껴졌다. 그 덫에 물려 좀처럼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새끼 만나는 거 알고 있어.”

“…….”

“좋은 말로 할 때 헤어지는 게 좋을 거야.”

“…….”

“내가 그 새끼 자빠트리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았다. 연조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울음이 자꾸 나왔다. 침대밖에 없는 침실에 그녀의 울음이 자욱하게 퍼졌다. 기조가 그녀의 옆에 앉아 뺨을 닦았다. 녹진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눈 밑을 닦던 손이 그녀의 입술을 문질렀다.

“연조야.”

대꾸하지 않았다. 답을 재촉하는 부름은 들려오지 않았다. 기운이 빠져 쌕쌕대고만 있을 때였다. 말캉한 살갗이 입술을 덮었다. 연조는 고개가 꺾인 채 묵직하게 내려앉는 숨을 느꼈다. 닫힌 입술을 가르고 혀를 빨아들이는 힘이 무작스러웠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다정했다. 뺨을 잡은 손이 그녀의 어깨를 당겼다. 연조는 넋이 나간 채 눈을 감았다. 입술 전체를 먹으려는 것처럼 고개의 기울기를 조정해가며 혀를 섞으려 하는 움직임이 야릇했다. 두툼한 혀에 감겨 끌어올려 지는 행위가 중력에 의한 움직임으로 느껴졌다. 연조는 쌕쌕이며 손을 뻗어 가슴팍을 밀쳤다. 무른 곳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가슴팍이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도리질을 하며 그를 거부했다. 혀를 빨던 그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주먹을 쥐고 그의 가슴과 어깨 따위를 때렸다. 그가 연조를 당겨 제 허벅지에 앉혔다.

“언제까지 인정 안 할 거야?”

“무슨 말이야.”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아파.”

물린 아랫입술에서 비린 맛이 났다. 점막이 찢어진 것 같았다. 연조는 고개를 들고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증스럽게도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아픈 듯. 그녀에게 상처 입은 것처럼. 기실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았으면서. 남자의 엄지가 그녀의 입술에 스쳤다. 타액으로 범벅된 입술이 뭉개졌다. 눈동자에 홈이라도 파일 것처럼 집요한 시선이 그녀를 꿰뚫었다.

엉덩이와 허벅지에 단단한 허벅지가 느껴졌다. 음부를 스치는 그의 중심이 딱딱했다. 고양된 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별안간 연조의 등이 침대에 닿았다. 긴 머리카락이 이불 위로 흩어졌다.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연조야.”

대꾸하지 않았다.

“연조야.”

혀가 말아 들어 굳어진 것처럼 알알했다. 대답이 없는 그녀를 향해 남자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긴 손가락이 목을 감싼 셔츠 깃을 헤집었다. 뭉툭한 손가락이 쇄골에 닿을 때마다 심장이 기묘하게 뛰었다. 느껍고 징그러운 일이었다.

살결에 밴 체취에 그의 중심이 반응했다. 사선으로 돋아난 쇄골에 입술이 닿았다. 까끌까끌한 수염이 느껴지기 전 혀가 먼저였다. 옴폭한 자리에 입을 맞춘 그가 가슴을 부드럽게 쥐었다. 목덜미를 부드럽게 무는 행위가 야릇했다.

“아. 흐읏…….”

연조는 진저리를 치듯 어깨를 밀어냈다. 칭얼거림 같은 훌쩍임이 낮게 이어졌다.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목덜미를 문 이에 힘이 가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 잠깐……!”

불룩 치솟은 중심이 치마가 말려 올라간 허벅지에 닿았다. 아니. 닿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질러진 것이다. 헐떡이며 그의 목을 긁었다. 남자가 웃음소리를 냈다.

“하지 마!”

울먹이며 소리를 질렀다. 젖을 빠는 것처럼 목을 빨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연조는 벌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턱이 바르르 떨렸다. 자꾸만 호흡이 비트적거렸다. 그녀는 콜록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싫어. 싫어. 왜 네 멋대로야.”

“…….”

“왜 맨날 네 멋대론데.”

“……괴로워?”

남자가 물었다. 연조는 대꾸하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억센 힘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동작이었다.

“그럼 말해.”

“…….”

“날 사랑한다고. 날 사랑해서 괴롭다고.”

“…….”

“나처럼, 나처럼. 매일 괴롭다고 말하라고!”

개암 색 눈동자가 쓰라렸다. 울음에 혀가 아렸다. 연조는 그가 앓고 있는 것인지 제 심장이 알알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늘 혼미했다. 한 번도 분명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모호했고 어느 때나 불투명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선을 그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늘 남자였다. 그러나, 그러나 더는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너 싫어.”

“…….”

“너 좋아했던 게 다 후회될 만큼.”

“…….”

“수영 씨 건들면 죽어 버릴 거야.”

“송연조.”

“거짓말 아니야.”

남자가 일그러졌다. 침대 위를 구르던 손을 말아 쥐었다. 붉으락푸르락해지는 남자를 뒤로하고 침실을 나왔다.

날것

연조는 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가볍게 일그러졌다. 흉측하고 보기 싫은 무언가를 눈앞에 둔 것처럼. 눈앞의 남자와 같이 있을 때 그녀는 자주 일그러졌다. 훼손되어 잘라낸 손가락의 밑동을 느끼는 것처럼 손가락을 말았다가 폈다.

가끔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궁금했다. 그가 어디까지 그녀를 망가트릴 수 있나. 연조는 꽤 오래전부터 자신이 망가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훼손된 채 삶을 이어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래서 죽으려고 한 적도 있었다. 죽지 못했지만. 그녀는 드레스를 입는 아침까지도 언젠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을 기조가 알고 있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기조 본인이 그녀를 망가트리고 있다는 걸. 손을 들어 남자의 콧잔등을 눌렀다. 사색이 되어있던 남자가 그녀의 손가락을 조심스레 잡았다. 연조는 허탈하게 웃었다.

잡힌 손가락을 빼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뜩 긴장한 채 굳은 그의 모습이 어린애 같았다. 거절당할까 봐 발발 떠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녀는 스스로 침실로 들어갔다.

“연조야.”

들리지 않았다. 귓가를 맴도는 소리는 마치 안개를 두른 호수에 돌멩이가 던져지는 소리 같았다. 작고 약하고 쓸모없다. 연조는 더는 그가 애틋하지 않았다. 애틋할 일도 없었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하는 일이다.

누가 누구의 처지를 동정할까. 가진 것 없이 늘 외면받는 처지의 여자가 할 일은 아니다. 이제 와 할 일은 아니지만 종종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기조가 아름답고 가엽고 그래서 아주 쉽게 사랑에 빠졌을 때의 일이다. 그때도 기조는 불쌍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가 아니라 하더라도 얼마 뒤 거부에 권력가인 조부가 찾아와 그를 안전하고 따뜻한 곳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그곳에서 기조는 연조를 기억할 일도 없이 다부지게 자라 지금 보다 더 혹독한 사내가 되었을지도 모르며 그렇다고 해도 연조가 그에게 망가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 일이다.

“할 말이 있어.”

“…….”

침대에 누웠다. 종알대는 소리가 귀찮아 눈을 감았다. 벽이 있는 쪽을 향해 눈을 감으니 그가 다급하게 그녀의 어깨를 돌려왔다. 귀찮아서 눈을 떴다. 무슨 말을 더할지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또다시 일그러진 채였다.

“뭔데?”

“네가 처음이야.”

눈을 깜빡였다. 감이 잡히지 않아 그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씹었던 입술을 뱉어내며 그가 반복했다.

“네가 처음이야. 나한테 여자는…….”

“…….”

“안 믿기겠지만. 끝까지 간 적 없어.”

“…….”

“다른 여자하고 잔 적 없다고.”

대단한 것을 고백하는 것처럼 상기된 얼굴이 이상했다. 진실의 여부를 떠나 왜 그것이 중요한일인지. 어째서 그녀에게 털어놓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여자의 질에 성기를 넣고 흔든 경험이 있다는 것과 아예 전무하다는 것이 어떤 변별력을 가지는 것일까. 어차피, 어차피 그에게는 수많은 여자들이 존재해 왔다. 이제 와 그 여자들의 용도가 애인이 아닌 다른 무엇이라 하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 여자들의 용도가 오직 그녀를 괴롭히고 망가트리는 것이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문제가 아닐까. 그녀들에게도 연조에게도 마찬가지인 일이다.

“정말이야.”

“…….”

“너밖에 없었어. 다른 여자들은 네가. 그러니까, 그러니까 네가 날 봐주지 않아서…….”

어깨를 잡은 손이 질척했다. 긴장이 서린 낯이 완연히 굳어 평소 서려 있던 기운마저 지웠다.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가 늘어놓을 말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더 입술을 떼지 않았다. 연조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알아.”

“연조야.”

“알고 있었어. 네가 네 애인을 안 좋아한다는 거. 목적이 있어서 사귀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어쩌면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표현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

“좋아하는 여자의 뺨을 때리는 남자는 없잖아. 그렇지?”

되묻는 눈이 습윤했다. 기조의 눈썹이 밑으로 내려갔다. 척척한 기운이 내려앉은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길고 두꺼운 손이 마디마디 작고 가느다란 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연조는 남자를 응시했다. 간절한 표정이었다. 꿇고 있는 무릎은 그녀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린 꼴이라 할 말이 나지 않았다. 그가 이런 모습으로 매달리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연조는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신기하게도 그가 바닥을 보일 때마다 일상처럼 행해졌던 폭력이 떠올랐다. 피에 절은 드럼통과 생살이 짓이겨진 톱날. 소유하고 독점하는 모든 것들이 수단 삼은 폭력으로 얻은 것들이었다. 이 남자는 본래 그런 남자였다. 천성이 그랬고 습성이 그랬다.

그러니까 언젠가 연조의 뺨도 갈길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이렇게 매달린다 해도 그 여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더 갈취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지고 그녀에게서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다면 그처럼 매몰차게 변하겠지.

눈썹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살상을 일삼는 남자이니까. 여자 하나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예라도, 그 여자도 명분이야 어떻든 한 때는 그의 여자들이었다. 그 여자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행복한 추억을 쌓았을 것이다. 잠자리를 하든, 하지 않든. 그 시간 속에 진심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과는 상관없이. 그러니까 언젠가 연조 또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너는 뭐든지 쉬우니까.”

“…….”

“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한테도 손이 날아올지 모르잖아.”

“그건!”

“…….”

“아니야. 아니야! 절대로! 내가, 내가 왜 널 때려? 내가 어떻게 너를, 너를……!”

기조가 일그러졌다. 눈동자가 무참하게 떨렸다. 극심한 모욕을 받은 것처럼 창백하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겁이 나서 몸을 뒤로 물렸다. 기조의 갈색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연조의 치맛자락을 움켜쥐려 하던 손이 잘게 떨렸다. 손가락을 말아 주먹을 쥔 남자가 침대 아래로 손을 내렸다.

눈두덩마저 엷은 떨림이 오고 있었다.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물었던 입술을 놓았다. 다시 고개를 든 그가 연조를 응시했다.

“너는, 너는 안 그래. 절대. 절대 맹세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침이라도 맞은 것처럼 굴던 남자가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러고는 어떻게든 표정을 풀려고 했다. 분을 누그러트리고 가다듬으려는 노력이 이상했다. 이럴 필요 없는데. 이렇게까지 애를 쓸 필요 없는 여자였다. 그녀는.

“정말이야. 연조야. 나한테 네가 어떤 존재인데……. 제발.”

“자고 싶어.”

사선으로 꺾었던 시선을 바로 했다. 남자를 눈에 담고 싶지 않아 곧바로 내리깔았지만.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잡으려 하던 남자가 팔을 거두어들였다. 연조는 그가 망설이는 것을 넘어 막연한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근원을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연조는 누구도 해치지 못하는 여자였다. 약하고 맥없는 것을 떠나 무기력했다. 그녀에게는 상대를 뭉갤 수 있는 완력도, 그를 압살할 수 있는 권력도 없었다. 그저 여자였다. 여자로서 별 주목받지도 못했던. 수영이 그녀에게 호감을 품기 전까지 누구도 그녀에게 호감을 품지 않았다. 저질스러운 언어로 그녀를 뭉개며 등급 따위를 매기는 남자들이야 별것도 아니었다. 괴롭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일상이 되어버린 폭력이었기에 그저 수긍했다. 문제는 그 외였다. 수영을 만나기 전까지 저를 좋다고 하는 남자는 없었다.

개인적인 관심도, 호감도. 그를 표현하며 얼굴을 붉히는 남자도. 상관없었다. 연조 또한 교제에 관하여 관심이 많았던 건 아니니까. 수영이 아니었다면 남녀 간의 교접 행위도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수영과 결혼을 결심한 이유에는 그녀를 유일하게 좋아하는 ‘남자’란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을 기조가 알까. 아마 모를 것이다. 알려주고 싶지도 않다. 한기조 같은 남자에게 ‘나는 인기 없는 여자야’란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식사, 식사는 하고 자.”

“안 먹을래.”

베개를 베고 누웠다. 연조는 더이상 내보내 달라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내보내 주지도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여길 나간다고 해도 좋을 것 같진 않았다. 세상에 어떤 시부모가 결혼식 날 납치돼 아들이 아닌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다 온 여자를 며느리로 들일까.

심지어 그 여자는 조폭이 침 발라둔 여자였고 집안에 내장이 흩어진 채 죽은 개 또한 그 여자로 인해 죽은 것이라면? 결혼을 허락할 때 만해도 수영의 부모님은 자신들이 겪은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일들이 연조로 인해 벌어졌단 걸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비밀로 하진 못할 것이다.

돌아간다면 해명해야 했고 털어놔야 했다. 묻지 않는다고 털어놓지 않는 것은 옳지 않았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만이었다. 기조가 저에게 어떤 존재이든 수영의 부모는 그녀로 인해 고통받았다. 엮이지 않았더라면 받지 않을 고통이었다. 죄송했다. 수영이 청혼했을 때 거절해야 했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의 가족이 당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연조 또한 깨끗하지 못한 여자였다.

눈을 감았다. 지분거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의외로 조용했다. 연조는 감았던 눈을 뜨고 기다란 그림자가 서성거리는 벽을 응시했다. 기조는 버려진 개처럼 그녀를 떠돌고 있었다. 엄마의 관심을 받지 못해 주변을 떠도는 어린애 같기도 했다. 이보다 더욱 멀어질까. 겁을 먹은 기미가 자욱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연조는 다시 눈을 감았다.

기조를 보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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