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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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조가 돌아누웠다. 여자는 그에게서 자주 시선을 돌렸다. 가끔은 곁에서 숨을 쉬는 것마저 징그럽다는 듯 찡그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표정이 없었다. 무감각하고, 무감정하고. 막을 덮은 듯 희미했다. 언젠가 사라져 버릴 것처럼. 모눈종이를 잘라 엮은 것 같아. 원래는 이러지 않았는데. 원래는, 원래는……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었는데. 짓쳐들어온 여름빛처럼 아프도록 환했는데.

“연조야.”

불러도 답이 없었다. 부름이 있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부르지 않으니까. 영원히 묻어두고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 같으니까. 저를 찾지도 저를 부르지도 않으면 어떡하나. 그를 벗어나 영영 달아난다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끊어 낼 듯 문 이에 핏방울이 묻어났다. 그는 개처럼 연조가 누운 침대를 뱅뱅 돌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담뱃갑을 쥐었다.

식은땀이 났다. 그자가 찾아왔다. 그가 모가지를 제대로 썰지 않은 탓이다. 장 형사 그 개새끼. 씨발. 씨발. 진작 회를 쳤어야 하는 건데! 속으로 욕을 뇌까리던 남자가 라이터를 벽으로 집어 던졌다.

눈 밑이 발발 떨렸다. 세상의 모든 상이 거꾸러진 종처럼 매달려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았다. 주저앉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연조가 남자를 만났다. 그와 사랑을 했고 그와 처음 밤을 보냈다. 연조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를 떠나 다른 남자를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연조에게 처음은 그인 줄 알았다. 아니라면 그여야만 했고. 아니, 아니. 그 전에 아닐 수가 없었다. 연조는 그를 사랑했다. 그 연약한 막 속에도 덧그려지는 괴로움이 사랑의 증명이었다. 그는 그것만을 붙잡고 있었다. 사실 그건 아무것도 아닌데. 부표인 척 보이지만 결코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매번 확인하려 했다.

건드리고 애태워서 어떻게든 반응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괴로우면 굴복하라고. 인정하고 나를 받아 달라고……. 눈을 깜빡였다. 속이 자꾸만 울렁거렸다. 용서받을 수 없으면 어떡하지? 연조가 그 새끼랑 떠나겠다고 하면 어떡해? 입술을 달싹거렸다. 담뱃갑을 놓고 서랍을 뒤적였다.

약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 어딘가 둔 것 같은데. 여기 어딘가 박혀있을 텐데. 씨발 필요할 땐 보이지도 않아! 그러다 그는 제일 하단의 서랍장에서 은색의 네모난 상자를 발견했다.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고 납작한 상자에는 얇고 기다란 막대가 들어 있었다. 대마였다.

달달 떨리는 손가락으로 대마를 입에 물었다. 아득했다. 한심할 정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연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앉지를 못해서 거실을 느리게 돌았다. 멍청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그의 여자는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어느 버러지의 침대가 아닌 그의 침대에서. 예쁘게, 예쁘게.

돌아누웠지.

마른침이 목구멍을 적셨다. 끈적거리는 액체가 입안을 더 버석거리게 했다. 그 버러지가 장 형사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연조는 그와 함께 가지 않았다. 형사가 있는데도 울부짖거나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러면 된 거다. 시간이 지나고 애가 들어서면 그를 받아 줄 것이다. 애가 들어서면 정말로 잘해야지. 아니. 들어설 때까지 잘할 것이다. 애가 태어나면 좋은 아빠가 되어 줄 것이다. 딸이든, 아들이든 아이라면 다 좋아하는 여자니까.

애새끼는 귀찮은데 연조가 낳은 애면 예쁠 거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전처럼 그렇게 쉽게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아이의 아빠니까. 그 애를 내가 임신시켰으니까. 아랫입술을 핥았다. 소파에 앉아 허공을 더듬었다. 연조는 그의 여자다. 의심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연조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부정하려 하지만 연조는 그가 다른 여자와 있을 때마다 아파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아파할 리 없었다. 관심이 없었다면. 그를 그녀의 남자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면……. 질투했잖아. 김예라와 있을 때도, 이름도 모를 여자들을 꾸어다 놓고 애인 시늉을 시킬 때도. 연조는 하얗게 새어버린 얼굴로 서 있었다. 달아나지도 못한 채 그렇게. 그렇게 만들어 버린 자신이었는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가 자꾸만 달그락거리면서 부딪혔다. 이유를 생각하니 턱이 떨려서였다. 추위를 느낀 것처럼 극심하게. 웃음이 나왔다. 머리가 비워지는 것을 멈추고 생각했다. 장 형사를 죽이자. 그리고 그 새끼도 이참에 없애버리는 거야. 어디 겁도 없이 비루먹을 새끼가.

연기를 몇 번 더 들이마셨다. 거꾸로 매달려 있던 종처럼 돌던 세상이 돌아왔다. 문제 될 건 없었다. 연조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다만 인정하지 않을 뿐. 그러나 인정하게 만들면 된다. 곁에서 마음을 보이고 사랑을 주다 보면 언젠가 그에게 돌아올 것이다. 예전처럼 그렇게 예쁘게 웃어 보일 것이다.

자신 있었다. 그는 그럴 능력이 있는 남자였다. 그 여자가 좋아하는 무엇이든 이뤄 줄 수 있었다. 내가 네 남자라고. 너를 한시도 잊은 적 없으며 단 한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노라고. 속삭이며 그녀의 품에 꽃과 다이아몬드를 덕지덕지 안겨 줄 수 있었다.

연조가 어떻게 일그러졌는지 생각했다. 연조가 어떤 식으로 흐느꼈는지. 그녀의 모든 어둠은 그의 그늘로부터 나온 것이다. 돌연 오래전 귓가를 메아리쳤던 여자의 울음이 떠올랐다.

동굴 같은 입속에 처박혔던 그의 성기를 보던 있던 연조. 확장된 동공 안에 그는 성마른 얼굴로 입술을 축이고 있었다. 기조는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억하는 편이었다. 모든 행위를 시작하고 끝낼 때. 연조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어떻게 일그러졌는지. 그가 어떻게 욕망했는지 모두. 귀두를 적시는 계집애의 머리채를 던지고 그녀를 뭉개고 싶었다. 연조에게 허리를 치들게 하고 개처럼 교미하고 싶었다.

그녀를 욕망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위로 해결하기 힘들었다. 연조는 언제나 그의 좆을 빳빳하게 세웠는데 그는 정작 여자를 가랑이 한 번 벌리고 들어가지 못해 이 사달을 냈다. 기조는 박 마담이 엉겨 준 계집애의 입에 좆을 쑤셔 박은 뒤 눈을 깜빡였다.

화류계 계집애들은 주제를 모른다. 부리기 쉽고 처리하기 편해 연조를 얻을 때까지 박 마담이 데리고 있는 계집애들을 데리고 있으려 했는데 번번이 그를 거슬렀다. 박 마담은 이 나이대 계집애들 성질이 원래 이렇다며 눙치려 했지만 그따위 꼬드김에 넘어갈 정도로 기조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이 지나면 어디로든 팔아넘길 것이라 생각하고 계집애의 입에 좆을 쑤셔 박을 때였다. 언뜻 연조와 이목구비가 비슷한 여자는 모든 것이 서툴렀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를 닮아 좆이 쉽게 부풀었다.

연조가 무릎을 꿇고 그의 좆을 물었다고 생각하니 피가 끓었다. 그 도톰하고 발그스름한 입술이 귀두를 핥고 기둥을 빨아들인다고 생각하니 돌 것 같았다. 연조에게 제 좆을 물리고 싶었다. 씨발 그럴 수만 있다면 당장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일 씹어 먹혀도 괜찮은데 연조의 구멍을 박지 못하고 목이 썰리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들끓는 피를 눌러 참으며 문이 철컥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연조에게 남자가 생겼단 걸 알고 있었다.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직장 동료들과 웃으며 나누는 말을 들었다. 코웃음이 나는 동시에 살의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남자를 찢어발기고 싶은데 연조의 웃음은 소중했다. 모처럼 만에 비쳐든 미소에 질투와 서러움이 들어 발발 떨리면서도 그는 침착하게 그녀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했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이내 걸음이 멈추었을 때쯤 기조는 고개를 들어 연조를 확인했다. 고통이 스민 얼굴이 당장 부스러질 것처럼 힘이 없었다. 소리를 지르고 악을 쓰며 달려들 거라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그는 작정하고 다른 여자를 그녀 앞에 선보일 때마다 연조가 발악하며 그의 뺨을 후릴 것을 기대했다. 병신 같은 일이다.

연조는 언제고 그에게 소유권을 주장한 적이 없었다. 마음을 배신했노라 울부짖은 적도 없으며 그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구질구질하게 구는 건 그였다. 연조의 앞에서 벗은 여자의 젖을 만지며 그녀를 우롱하는 일도, 어제저녁 돈을 받고 잠을 자던 여자를 애인인 양 데리고 와 식사를 하며 살갑게 굴던 일도.

애걸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좆이 커지자 입안이 얼얼했는지 계집애가 물었던 것을 놓으려고 했다. 좆을 빠는 건지 침을 묻히는 건지 더럽기만 하던 기분이 연조의 등장으로 더욱 더러워졌다. 기조는 여자의 뺨을 사납게 후렸다.

희게 타들어 가던 연조가 놀라 달려와 여자를 부축했다.

‘내가 다른 계집애한테 좆을 물려도 너는 멀쩡해? 기분이 아주 좋아 죽지?’

비참했다. 뭘 어떻게 해야 그녀가 그를 봐줄까. 그는 얼른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남자로 보이고 싶었고 애인으로 보이고 싶었다. 그녀가 보살피던 병신이 아니라 남자이고 싶었다. 사랑이 아닌 동정을 얻을 바엔 차라리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게 나았다.

연조가 다른 놈의 물건을 받는 걸 보느니 놈을 죽이고 그녀에게 증오를 사는 것이 나았다. 그는 이제 그만 이런 짓을 끝내고 싶었다. 원치도 않는 여자의 젖을 만지며 연조의 경멸을 사고 싶지도 않았고 연조의 경멸 서린 눈을 보며 발정하는 짓도 그만두고 싶었다.

사랑을 구걸하는 일이 이토록 더럽고 야비할 수 있을까. 구걸이 아니라 때때로는 그녀의 숨통을 물어뜯어 내팽개치는 것 같았다. 기조는 울음에 젖은 여자를 당겨 품에 안았다. 이제 그만 인정해. 날 사랑하는 걸 인정해. 연조야. 나처럼 괴롭다고…….

연조는 울었다. 울다가 그를 밀어내며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사랑에 잠겨 죽는 기분이 이러할 것이다.

“후……”

휴대폰을 들었다. 신호음은 길지 않았다. 그는 대마를 대충 던지고는 입을 열었다.

“이 전무 좀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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