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46)

* * *

연조를 가둔 펜트하우스의 가장 끝에는 라운지 바가 있었다. 소수 정원제였고 회원이 아니면 예약도 걸 수 없는 바였다. 강 대표. 그러니까 강근영의 호적에 입적되기 전 ‘한기조’였던 남자는 바의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까이 가지 않아도 대마 냄새가 코끝에 진동하는 것 같았다. 이인혁은 낯을 굳히지 않기 위해 심호흡한 뒤 그의 앞에 앉았다.

“장 형사가 몇이나 깔아 놨어?”

“몇이나 깔아 놨을 거 같아?”

“너랑 말장난할 기분 아니니까 바로 말해.”

“왜 또 지랄이야. 너 좋아서 이 사달 벌였으면 좋아 죽어야지.”

“이인혁.”

“그럼 연조 걔가 좋아서 환장이라도 할 줄 알았어? 예전처럼 기조야. 기조야 하면서 좋아서 울어댈 줄 알았어?”

이인혁이 비틀린 얼굴로 물었다. 다가오는 직원을 향해 대충 손짓했다. 그는 5분 후 보드카 두 잔을 올려둔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뒤틀었던 근육을 바로 한 뒤 매끈하게 웃었다. 남자를 향해 보드카를 밀었다. 그는 다만 노려볼 뿐이었다.

족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개새끼가 한 번 미치면 답도 없어서 눈이 돌았다면 가만히 앉아있을 놈이 아니었다. 예전처럼 바닥에 내팽겨진 채 이라도 몇 개 나가서 임플란트할 생각을 하고 있었을 텐데. 웬일로 가만히 앉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걔는 결혼할 남자도 있던 애야.”

“…….”

“예전하고 안 같다고. 왜 자꾸 예전 소리를 해. 씨발. 솔직히 애도 아니고 누가 너 같은 짓 하는데 좋아하냐고. 미쳤냐? 진짜?”

“…….”

“좋아하면 그게 병신이지.”

이인혁이 뇌까리듯 읊조렸다. 차마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입술만 씹었다. 이인혁은 본인을 아주 잘 알았다. 멀쩡하게 살 수 있었는데. 새 아버지가 좆같고 그 새아버지 돈만 보고 재혼한 모친이 좆같기는 해도 영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더랬다. 한기조와 좀 친하긴 했어도 한기조 따라 뒷세계에 들어갈 정도로 친한 것도 아니었고. 그만한 의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진해서 한기조의 뒤를 따랐다. 마침 새아버지가 부리는 오지랖과 훈육을 가장한 자질구레한 폭력이 엿 같던 시점이기도 했다. 그래도 언제든 다시 나올 수 있었는데 부득불 나가지 않고 이 판에 남아있었던 것은 그저 적성에 맞아서다. 적성에 맞는 일 굳이 그만둘 필요가 있을까.

이인혁은 그래서 깡패가 되었다. 제정신이 아니란 걸 안다. 그런데 아니어도 한기조보다는 정상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새끼는 진짜 좀 많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좋아하면 좋다고 말하면 될 것을.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다른 여자랑 좋다고 붙어먹었다. 그러고선 그 여자가 괴로워하는 것을 사랑의 증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받는 애정에 빌붙어 살았다. 애정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들. 솔직히 그의 눈에는 송연조의 미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주워 먹는 것이다. 아. 다시 생각해도 병신이다. 진짜 한기조 너는……내가 생각해도 밥맛이다.

“내가 송연조였으면 너는 진작에 멱이 따였어. 씨발. 하는 발상도 꼭 지 같아서는.”

한숨을 쉬었다. 짜증 나서 내질렀기는 한데 좀 무서웠다. 은근히 막말도 잘 받아주는 편이긴 한데 송연조에 관한 일이라면 모르겠다. 방금 내지른 말을 후회하며 주워 담을 연구를 할 때였다.

“그래서.”

“뭐? 뭐가 그래서야. 그냥 그렇단 거지.”

“네가 송연조였으면 내 멱을 땄다고?”

“씨발. 그게 그러니까 내 말은…….”

“멱을 따면 날 용서해 줄 거 같아?”

“……뭐?”

“내가 멱이 따여 주면 송연조가 용서해 줄 것 같냐고.”

남자가 되물었다. 조명 아래 밝은 색깔의 눈이 음울했다. 그러나 기기한 열망으로 뒤덮여 간절해 보였다. 그러나……. 이인혁은 우두커니 쳐다보는 남자를 향해 운을 뗐다.

“아니.”

바랄 걸 바라야지. 모가지를 썰었으면 썬 것으로 끝나야지. 뭔 용서야. 용서는. 코웃음도 나지 않았다. 그 짓거리를 받아줄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막말로 송연조가 좋아했던 거면 좋아했던 거다. 지금 와서는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연조는 나를 사랑해.”

“들어본 적이나 있냐.”

“…….”

“걔가 너 좋아한다고 한 적이나 있어? 걔는 너 새파랗게 어릴 때도 좋아한다고 한 적 없잖아.”

목이 탔다. 저 말도 안 되는 망상을 자근자근 밟아 주고 싶었다. 그 같잖은 연애 놀음한다고 별 시답지도 않은 짓거리에 동참해 주는 것도 한두 번이다. 한기조. 아니 강기조지. 강기조는 매일같이 그렇게 여자를 꾸어다 두고 송연조의 관심을 받아내려 했다.

처음에는 애잔했다. 그런데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아니. 병신 같았다. 멀쩡한 새끼가 깡패질 하는 법도 없다지만 그런 깡패 새끼도 자기 여자는 애지중지였다. 그런데 이 새끼는 무슨 생각인지 좋다 못해 죽을 것 같다는 여자의 멱을 쥐고 숨을 조였다. 그따위로 망가트린 뒤 무릎을 꿇으면 뭐 하나.

강기조의 명령을 수행한 것은 언제까지나 그것이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납치하는 코미디 따위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수면제를 먹고 늘어진 여자를 업어 오면서도 그는 등에 업힌 여자가 강기조를 사랑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짓을 한 남자를 사랑할 여자는 없으니까.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송연조가 강기조를 말려 죽이는 모습을 보면 꽤 통쾌할 것 같았다.

“……날 좋아해. 아니. 좋아하는 건 아니더라도 내게 마음이 있어. 그렇지 않다면.”

“뭐 그래. 솔직히 좋아할 수도 있다고 치자. 그래도 나는 용서 못 할 거 같은데?”

이인혁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불빛이 그린 음영이 강기조의 얼굴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이인혁은 그의 눈동자 속에서 가시조차 세우지 못해 허덕이던 여자를 생각했다. 그는 송연조가 어떤 여자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녀는 보스의 여자였다. 조직이 섬기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였고 그가 얻지 못해 애가 닳은 상대였다. 그리고 인혁에게는 동창이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했으니 동창이랄 것도 없나. 어쨌든 그랬다. 상해에서 돌아와 그녀의 자취를 뒤지던 중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무렵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초등학교를 다닐 때 송연조와 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송연조는 확연히 차이 났다.

어릴 때는 곧잘 웃고 떠들던 애였다. 학급에서 반장을 자주 하기도 했고. 누구하고든 쉽게 친해지는 아이였다. 확실히 이목구비가 미인은 아닌 편이었는데 구김살 없이 웃는 모습이 또래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솔직히 말해서 성장한 연조는 꽤 예뻤다. 다시 만났을 때도 꽤 눈에 도드라지는 미인이라고 생각했었다. 주관적인 견해가 아니라 사실 있는 그대로가 그랬다. 자신을 뭉개며 비하하느라 자기 혐오증에 걸려서 그렇지. 뼈대가 야물어지며 변한 이목구비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봐도 미인에 속했다. 다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인혁은 송연조가 웃는 모습을 떠올릴 수 없었다. 어릴 때는 그토록 구김 없이 웃던 애가 고교 시절에는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우중충한 얼굴에 또래 여자애들의 견제를 받느라 기를 펴지 못했다. 아마도 그 시절 그 성격이 어른이 된 뒤에도 쭉 이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재회했을 때……. 이인혁은 송연조를 몰랐다. 그러나 상대를 알지 못해도 추려낼 수 있는 것이 세상에는 있었다. 송연조의 인생은 강기조와 엮이며 나락으로 떨어졌다.

“강 대표. 아니, 기조야.”

“…….”

“내 생각에 걔는. 아니, 연조는 말이야. 너 만나고 나서 인생이 좆된 거 같아.”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남자의 음영이 구겨지듯 일그러졌다. 강기조는 대개 무감정했다. 느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자가 무얼 느끼는지도 알지 못했나.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나는 연조 걔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지만. 내가 걔 오빠라면 네 새끼를 젓 담을 것 같거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송연조하고는 아무 상관없었다. 학교를 다닐 때 친하지도 않았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데면데면한 사이를 넘어 이젠 아주 일방적인 미움까지 받게 생겼다. 그래도 이인혁은 연조를 이해했다. 그 여자가 가여웠다.

그 여자는 눈앞의 남자를 사랑함으로써 생의 대부분을 잃은 여자였다. 불철주야 첫 연애를 감시하는 강기조로 인해 벌어진 참사 같은 것 말고. 자존감, 자존심. 자기애. 그녀가 잃어버린 것들이란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데 사랑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래서긴 뭘 그래서야. 그냥 그렇다고.”

짜증이 났다. 이인혁은 눈썹 사이를 더듬었다. 짜증 날 일은 많았다. 윗선을 어떻게 구워삶은 건지 송장 하나 치르고 나서는 아주 기고만장해졌다. 인천항에 들이닥친 경찰들을 생각하며 눈썹을 문지를 때였다.

“연조…….”

“그냥 걔 좀 내버려둬. 이제 와 걔가 너 좋다고 매달릴 일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대꾸가 없었다. 욕이 비어져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고개를 드니 남자가 백지장처럼 하얘진 낯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남자의 피부가 원래 흡혈귀처럼 새하얗단 것을 기억해냈다. 그래. 너도 그 병신 짓을 참 오래 했지. 그만두기 쉽지 않을 거다. 담배를 지져 껐다. 갑갑했다.

“임신시킬 거야.”

“퍽이나 좋아하겠다. 걔가 애 돌볼 정신머리는 있을 거 같냐?”

“…….”

“그만하라고. 박수영인지 뭔지. 너 싫어서 다른 놈하고 결혼하려고 했던 애야. 진짜 모르겠냐? 걔는 너 좋아해도 너하고 같이 살 마음이 없다니까? 그런 애 데리고 지금 뭐하는 짓이야. 그냥 내보내 줘.”

“…….”

“넌 걔 보기 부끄럽지도 않냐?”

답답해 소리를 질렀다. 꿈쩍도 하고 있지 않던 남자가 입술 끝을 비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알아봤자 소름만 끼칠 것이다. 그간 강기조가 한 짓을 생각하면 속이 뒤집어지는데 송연조는 오죽할까.

“난.”

조가비처럼 닫혀있던 입술이 둔탁한 울림 같은 단어를 뱉었다. 인혁은 눈썹을 모으며 귀를 후비적거렸다.

“연조 마음 배신한 적 없어.”

“어. 씨발. 참 잘도 그랬겠다.”

“정말이야.”

“나한테 고해 성사해 봤자 뭐가 달라지냐. 그리고 솔직히 누가 믿냐. 걔 앞에서 오만 짓 다 했는데. 너 숙자 벗겨 놓고 걔 가슴 주물럭거렸다며. 민식이한테 다 들었어. 그딴 발상부터 넌 존나 아웃이야.”

인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벗어두었던 재킷을 집어 든 뒤 소파에 올려두었던 서류 봉투를를 던졌다. 강 회장이 쓰러지기 전부터 잡지 못했던 군기가 지금 들 리 없었다. 그래도 강기조가 조직을 이어받은 후부터는 나름 깍듯해지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정작 강기조는 그가 방자하게 굴어도 제 기분이 상하지 않는 한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이인혁은 장 형사의 최근 행적을 찍은 사진과 그의 뒤를 봐 주는 윗선에 대한 서류를 건넨 후 뒤를 돌았다. 이젠 모르겠다. 어차피 송연조가 저하고 특별한 사이인 것도 아니고. 그냥 알아서 하겠지. 뒤를 돌려는데 눌러두고 있던 말이 튀어나왔다.

“너 걔하고 잘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냐?”

이인혁이 익숙하게 대마를 무는 그를 본 뒤 한숨을 푹 쉬었다.

“약 좀 끊어.”

남자가 비스듬히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이인혁이 더 못마땅하다는 듯 낯을 찌푸렸다.

“잘하고 싶었으면 태닝 같은 거 하느라 시간 보내지 말고 잘해주기나 하지 그랬냐. 백날 피부 태워봤자 그 노고를 송연조가 아냐?”

기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인혁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겼다. 강기조는 사랑하는 여자가 제게 관심을 주지 않는 이유를 이상하게 해석했다. 대체 왜인지. 제 피부가 하얀 것 때문에 연조가 싫어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곱게 생긴 이목구비를 증오에 가깝도록 싫어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연조가 곱상하게 생긴 저에게 괜한 피해 의식을 느끼며 그를 피한다고 생각하자 그는 어떻게든 사내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몸통을 키우고 가슴팍을 두껍게 하면 해소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하여튼 사고방식이 신기했다. 뭐, 어찌 되었든 저하고는 상관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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