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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봉된 서류의 입구를 갈랐다. 사진 몇 장과 빳빳한 서류가 한 부 들어 있었다. 박수영이 나타나 그의 안전가옥을 헤집은 뒤로 이인혁이 알아본 것이었다. 사진 속에는 장 형사가 국회의원과 접선하는 모습이 인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몇 장은 박수영과 접선하는 모습이었다.
봉투를 던지고 서류를 들췄다. 국회의원은 장 형사의 처남과 같은 대학을 나온 남자였다. 그리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서류를 덮어두고 시선을 들었다. 턱을 더듬으며 버석한 입안을 달랬다.
이인혁이 쏟아낸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기조는 그저 들었다. 믿지는 않았다. 연조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말. 저주에 가까운 폭언들. 그럴 리 없다. 연조는 그를 사랑했다. 그가 허리를 감았을 때 얼굴을 붉혔다. 키스할 것처럼 입술을 가까이하자 시선을 내리깔며 눈 끝을 떨었다.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잘해주면. 그러니까 이번에 제대로, 정말 제대로 진심을 전하면 그를 받아줄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사랑했다고. 비가 내리는 운동장에서 네가 말을 건넨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대표님.”
익숙한 부름이 그를 깨웠다. 창틀 위로 어스름이 내린 방안에서 연조가 뒤돌아 누운 모습을 그리던 기조가 고개를 돌렸다. 연조에게 붙여둔 가드였다. 불길한 예감이 급습했다.
“저, 저 사모님께서…….”
가드의 낯이 창백했다. 한순간에 악귀처럼 일그러진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드가 입술을 발발 떨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목에 칼이 들어온 것처럼 구는 모습이 기조의 심기를 더욱 사납게 했다.
“말해.”
“카, 칼을. 칼을……. 그러니까 칼로 손목을…….”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밀치듯 가드를 넘어트린 기조가 바를 나섰다.
여자는 도화지처럼 하얀 얼굴이었다. 야위고 성말라 꼭 지푸라기처럼 마른 게 가시처럼 눈 안에 박혔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마른 편이긴 해도 적당히 살집이 있었고 볼 선은 동그랬다. 기조가 기억하고 생각하는 모습은 늘 그 무렵의 연조였다. 나이를 먹어도 연조는 그처럼 환하고 예뻤다. 이토록 처량하지 않았다.
비뚤비뚤 그은 손목이 맥없이 놓여있었다. 이를 아득 씹은 기조가 눈을 감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손목을 그었다. 욕조에서. 미온수로 가득한 욕조에는 여전히 붉은 피가 일렁이고 있었다. 기조는 차마 그것을 보지 못해 덜덜 떨었다.
피라면 종이에 박힌 활자처럼 익숙한데. 연조의 몸에서 새어 나왔다는 말을 들으니 머리가 어질했다. 종잇장에 손톱 밑이 잘려도 종일 아프다고 앓던 연조였다. 손목을 그었을 때. 아니 손목을 긋기까지…….
‘내가 송연조였으면 너는 진작에 멱이 따였어.’
이인혁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잠식했다.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결코,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연조는. 아랫입술을 축였다. 목이 자꾸만 말랐다. 맥이 엇박자로 거푸 뛰었다. 이인혁이 연조였다면 그의 목을 잘랐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연조는 이인혁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래서 제 손목을 그었을까.
그의 목은 그을 수 없으니 제 손목을 자르려고 했을까. 죽으려고? 죽어서, 죽어서 그의 앞에서 사라지려고?
“하.”
눈을 깜빡였다. 자꾸만 아물거리는 시야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보상할 수 있었다. 박수영보다. 연조가 선택한 그 새끼보다 그가 나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했지? 왜, 왜……. 두려워하지 않았지?
“연조야…….”
대답이 없었다. 여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뒤돌아 누워 그를 보지 않는 것보다 지금이 더욱 무서웠다. 기조는 이따금 그녀가 두려웠다.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강한 두려움이 맹렬하게 그를 물어왔다.
그런데도 그가 다른 남자와 하루를 보내고 귀가할 때는 두려움보다 노여움이 치솟았다. 반항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여자와 있는 그의 모습을 본 연조가 그의 질투를 얻기 위해 그따위 볼품없는 놈과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그를 두고 박수영 같은 놈과 만날 리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럴 줄 알았다면 아예 접근을 막았을 것이다. 아예, 아예 도화선이 될 싹을 자르는 게 옳았다. 아니. 아니다. 이게 아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너는, 너는……. 불이 붙은 심지처럼 숨이 타들어 갔다.
눈을 깜빡였다. 각질이 일어난 작은 입술은 핏기라곤 없었다. 그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가 이렇게 망가트렸다고 했다. 눈이 아물거렸다. 굵고 뜨거운 무엇인가 눈 안쪽에서 움직였다. 배출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것이 밖으로 새어 나오는 순간부터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지탱하는 힘을 잃을 것 같았다.
입술을 씹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어떻게 해야……. 어떻게, 어떻게…….
“이것…….”
시선을 들었다. 가드가 내민 것은 하얀 수건에 쌓인 칼이었다. 수건을 헤집었다. 기조의 눈빛이 식었다.
“잭나이프입니다.”
과도가 아니었다. 그는 결코 이런 것을 집에 둔 적이 없었다. 하물며 연조가 이것을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런 물건이라고는 본 적이 없을 테니까.
“그 계집애 어디 갔어?”
“사라졌습니다.”
“…….”
“식자재를 구한다고 해서 데려다주었는데……. 기필코, 기필코 동행했습니다! 감시를 벗어난 것…….”
“찾아.”
가드가 마른침을 삼켰다. 뱀처럼 서느런 눈이 우물처럼 빛났다.
“죽이지 말고 데려다 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