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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 꿈이란 것을 알게 된 이유는 자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자살에 실패한 것을 알게 된 이유는 기조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고. 예라가 칼을 주었다. 일신의 자유를 위해 도울 수는 없지만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도울 수 있다고 했다. 시구가 따로 없었다. 연조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연예인 지망생이라고 하더니 언변이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연조는 웃었다. 예라는 그 웃음의 저의를 헤아리는지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연조는 빠르게 웃음을 거두었다. 그리고 여자를 보았다. 예라를 보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녀는 기조의 팔을 꼭 안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날 저녁 거울을 뒤집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보지 않았다. 밤마다 앓았던 것 같기도 했고 정신이 혼미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질투가 났지만 싫지는 않았다. 연조는 예전부터 그랬다.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대상을 좋아하는 것이다. 질투하지만 싫어하지는 않고 그렇게, 그렇게……. 기조에게 그랬던 것처럼. 기조를 질투했지만 좋아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호기심이 일었고 질투가 났고 그래서 그가 알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위로가 되었다. 그런 모호한 감정에 위로를 받았다. 사랑했다고 하면 비참할지 모르니까.
기조는 아름다운 남자다. 입술 끄트머리에 난 자상 정도야 걸림돌이 되지 않을 만큼.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런 남자를,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그녀를 아주 오래도록 무참하게 했다. 연조는 예라가 내민 칼을 꼭 잡았다. 날은 차갑고 손잡이는 움켜쥐기 좋을 정도의 길이와 부피였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낯설지 않았다. 살해당하는 건 무섭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두렵지 않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그러할 것이다. 예라가 뒤돌아 나갔다. 연조는 혼자 침대에 앉아 우두커니 칼을 내려다보았다.
죽음이 낯설지 않게 된 이유와 시기를 생각했다. 모호한 일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자연사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병을 앓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고.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먼저 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어느 틈인가는…….
이쯤이면 되려나?
동맥을 끊으려면 이쯤이어야 할까. 언젠가 나래의 병원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나래는 간호사였다. 근처 식당에서 김밥 두 줄과 국수 두 그릇을 시키고서는 스테인리스 컵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 ‘동맥이 잘린 환자를 본 적이 있어?’ 하고 물었다. 나래는 아무 말 없이 반찬 통에서 단무지를 꺼내 담았다. 연조는 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나래는 듣지 않은 척 젓가락을 들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건데 사람의 손으로는 어지간해서 동맥을 끊을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동맥은 아주 깊이 있어서, 그러니까 훼손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있는 게 동맥이라서. 그러면 기조는 얼마나 힘이 센 걸까. 그 남자는 남의 손목을 아주 손쉽게 꺾고 자르는 남자였다.
기조라면 제 손으로 직접 동맥을 자를 수 있을까? 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가능하다면 연조의 손목 또한 손쉽게 끊어 죽음의 가파른 능선 위로 데려다줄 것이다. 날을 손목 위에 댔다. 선득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파헤치듯 정맥을 잘라 짓이겨 놓으면 죽음에 다다를 것이다.
그러면 더는 괴로울 필요가 없고 감정에 지칠 필요 또한 없다. 눈을 뜬 아침에 기조를 생각할 일도, 기조가 준 아픔에 대하여 번민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자유로워지니까.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테니까.
욕조에 물을 받았다. 차오르는 미온수를 바라보며 몇 번이고 손목에 날을 갖다 댔다. 할 수 있을까? 이제 그런 의문은 들지 않았다. 막다른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에게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용서받는다 하더라도 예전 같지 않을 것이고.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납치된 것은, 그런 것은……. 더는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 연조는 아무것도 아닌 여자였다. 하물며 목숨을 걸 만한 사람도 아니다. 모두가 정상적으로 연애하고 결혼하는데. 그 사람만, 그 사람만…….
욕조에 발을 담갔다. 쾌적한 온도였다. 심란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물속에서 꼼지락대며 허공을 더듬었다. 기조를 만나지 않았다면 자살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기조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래. 이게 맞는 말이다. 그 남자를 만나서 죽고 싶은 게 아니다. 그 남자를 좋아해서 자살하고 싶은 것이지.
날을 세웠다. 끊어내듯 힘을 주었다. 생살이 잡아 뜯기는 감각이 몰아쳤다. 반복해서 자를 때 남자를 생각했다. 엉킨 핏줄을 뽑아내 팽개치듯. 자르고, 자르고, 또 잘라서. 그를 제게서 완전히 분리해낼 때까지.
시선을 내리깔았다. 홍화를 으깬 양 벌건 욕조가 보였다. 그제야 어질함이 몰려왔다. 칼을 쥔 손에 힘이 풀렸다. 기조가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