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상태는 양호한 편입니다. 일어나시면…….”
가장 먼저 돌아온 것은 청력이었다. 가물거리는 의식이 현실을 잡아냈다. 뒤틀리고 깨진, 그저 아득하기만 한 그녀의 현실 말이다. 곁에는 기조가 있는 것 같았다. 그와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아 계속 의식이 없는 척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손가락이 반사적으로 꿈틀거렸다.
“연조야. 정신이 들어?”
성마른 음성이 귓가에 꽂혔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눈을 떴다. 기조는 목소리만큼이나 야윈 얼굴로 다가왔다. 연조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곧바로 의사가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정신이 드십니까?”
의사가 물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렸다. 그토록 끊어내고 싶었던 남자가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물이 들어차는 것처럼. 다른 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괴로웠다. 영영 그를 분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입술 끝이 비틀어졌다. 남자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송연조 씨. 대답을…….”
“……괜찮아요.”
윤곽이 희끄무레한 것을 가다듬으려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명확하지 않은 발음에도 의사는 한시름 놓은 듯 한숨을 쉬었다. 침을 삼켰다. 의사가 주의사항을 일러준 뒤 문이 닫혔다. 백열등과 파리한 빛이 어린 창을 보았다. 병원인 것 같았다.
기조가 걸어와 그녀의 옆에 섰다. 연조는 눈을 깜빡이다 손목을 들어 올렸다. 그의 시선 또한 손목에 닿았다. 단단히 감긴 붕대를 보니 몽글거리던 정신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다시 지옥으로 돌아왔다.
“만지지 마.”
감긴 붕대를 더듬을 때였다. 시선을 들었다. 떨고 있는 남자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연조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선을 그었던 자리를 만지작거렸다. 거친 손길이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손가락이 부러질 것처럼 강한 힘이 느껴졌다.
“하지 말랬지.”
“…….”
“그렇게 싫어? 그렇게 돌아가고 싶어?”
“아니.”
갈색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짧은 순간이지만 어떤 희망에 들뜬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현실을 자각한 듯 다시 절망에 빠졌다.
“그럼? 그럼…….”
“그냥…….”
“그냥, 그냥 뭐…….”
“죽고 싶어서.”
“송연조.”
연조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잘 포장된 것처럼 빼입은 슈트가 근육질의 몸을 도드라지게 했다. 그러나 그는 떨고 있었다. 비감에 잠겨 억제할 수 없는 것처럼. 그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며칠 동안 먹지 못한 것처럼 야위었고 창백했다.
“너는 그런 거 느낀 적 없어?”
“…….”
“감정이 피곤하고 지치는 거야.”
“…….”
“이젠 뭔가를 더 느끼고 싶지 않아. 그래서, 그래서 낯설지 않게 되는 거야. 죽음이. 죽는다는 게 두렵지 않게 된 거야.”
대꾸가 없었다. 연조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고 구부러트렸던 손가락을 폈다. 다가오지 못한 채 떨기만 하는 손가락의 끝을 잡았다. 기조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주인 잃은 개처럼 떠도는 그가 가여웠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소회는 들지 않았다.
“나는 사랑이 피곤해.”
“미안해.”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피곤해서…….”
“잘못했어. 연조야. 연조야. 잘못했어.”
그가 무릎을 꿇었다. 무릎이 바닥에 닿자 그의 키는 낮아졌다. 연조는 눈을 깜빡였다. 기조가 사과를 했다. 잘못했다고 했다. 연조는 그가 무엇에 대하여 잘못을 구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기조는 언젠가부터 눈물을 종종 흘렸다. 사람을, 사람의 목숨을, 숨이 살아 펄떡이는 모든 것을 죄 흩쳐 놓는 게 일상인 남자였다.
연조는 대개 그가 두려운 대신 이런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떤 사람이 소중하고 귀해서. 그래서, 그래서 그녀처럼 사랑이 두렵고 그 마음이 지치는 때가 올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 사람이 궁금했다.
“잘못했어. 연조야. 잘못했어. 내가, 내가…….”
손을 들었다. 엄지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는 제게 닿는 손가락에 눈가를 구겼다. 그는 울음을 참았다. 연조는 그를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그가 덜덜 떨며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은 아이 같았다. 연조는 제가 다니는 보육원의 아이들을 떠올렸다. 기조의 회사를 그만두고 수영의 도움으로 입사한 보육원이었다.
가끔 기조를 보고 있노라면 악만 쓸 줄 아는 아이들이 떠올랐다. 외롭고 고독하여 악만 남은 그 아이들. 마땅히 보듬어 주고 사랑하기 위해 그 아이들을 안았지만. 기조는 그 아이들이 아니었다. 결코 같은 대상이 될 수 없다.
“사랑해.”
“그래.”
“정말이야. 연조야. 정말이야. 정말로, 정말로…….”
온몸이 발발 떨렸다. 오한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한기조는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자신이 울고 있는 줄도 몰랐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멱에 칼이 박혀 껄떡였던 놈들처럼. 그저 두려웠다. 그렇게도 두려운데 그는 정확히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도 몰랐다.
“제발.”
“……괜찮아.”
괜찮다고 했다. 사랑한다고 했는데 알고 있다고 했다. 이제는 고백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용서받을 수 없었다. 진심을 게워내도 연조는 모든 것을 안다고 했다. 기조는 오랫동안 사랑해 왔던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망가져 있었다.
“연조야. 나는, 나는…….”
“괜찮아.”
더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어투였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긴 울음이 목구멍에서 비어져 나왔다. 덜덜 떨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애가 탔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었는데.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다가 벌건 눈으로 그녀에게 매달렸다.
“다른 여자는 없었어. 한 번도, 한 번도! 네, 네가 질투하는 걸 보려고! 진짜야. 만난 적 없었어! 그냥, 그냥 네가 지, 지나갈 때마다!”
“기조야.”
악을 지르는 것처럼 고백했다. 고백이 아니라 토해내는 것 같았다. 연조는 말간 얼굴이었다. 지친 것 같기도 했다. 기조는 그 어느 날의 연조를 떠올렸다. 작고, 어리고 사랑스럽던……. 긴 머리를 질끈 묶고 노란 우산을 썼던 연조. 그 어느 날에 그의 틈을 파고들어 금을 냈던 아이. 그의 어둠을 훼손시켰던 아이. 그 금 사이로 내리쬐던 햇살, 빛, 사랑, 첫사랑…….
“괜찮아.”
연조는 그가 훼손한 여자였다. 서서히 말려 죽인 여자였다. 멱을 칼로 후비지 않아도, 명치에 총구를 갖다 대지 않아도. 그는 여자를 죽이고 있었다. 어느 날엔가, 창백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여자가 생각났다. 식사를 하자고 불러낸 다음 다른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 앉았던 날이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여자에게 연조에게 그랬던 것처럼 음식을 잘라 그릇에 덜어주었다. 연조는 그날 한껏 꾸민 상태였다. 긴 머리에 컬을 넣고 프릴이 달린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치장하는 데 시간을 많이 투여한 것임을 알게 해 주었다.
이인혁의 클럽에서 마주했던 여자들 때문이었을까. 연조는 썩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화장이며 공들인 머리가 전에 없이 과한 모습이었다. 긴장으로 얼룩진 눈빛이 어설펐던 것을 기조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기조가 어떤 짓을 했는지도…….
“괜찮아.”
울음을 삼켰다. 차게 식기 시작한 눈물 줄기가 턱 끝에 매달렸다. 용서를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마땅히 그래야 했다. 그런데도…….
“예전부터 너를 좋아했어.”
맥없이 잡힌 손을 놓았다. 가느다란 손이 금방 부스러질 것 같았다. 연조의 시선은 여전히 어두웠다. 사랑을 고백해도 ‘그래.’ 하고 대답하던 그대로. 망가진 여자에게 그의 고백은 그저 너저분한 열거에 지나지 않았다.
열없는 눈빛이 그에게 흘러들었다. 기조는 막막함을 딛을 수 없어 몸을 떨었다. 오르내리는 명치가 갑갑했다. 흉부 속에 총탄이 박힌 것 같았다.
“오래, 오래 좋아했어. 연조야 나는…….”
미칠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차라리 연조가 울고 화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게 왜 이러냐고 발작하듯 화를 냈으면 좋겠다. 제발 그랬으면……. 그는 울었다. 무서웠다. 무서웠다. 무서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매달리고 싶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제발, 제발 뭐든지, 뭐든지 말해줄게. 내가 왜, 왜 그랬는지…….”
연조가 손을 들었다. 각질이 일어난 하얀 입술이 해쓱한 얼굴을 더 아파 보이게 했다. 그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눈 밑을 스치는 걸 느꼈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처음부터 웃을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괜찮아. 기조야. 이젠 괜찮아. 울지 마.”
그녀가 천천히 손을 거두어들였다. 손가락이 구부러지며 동그란 주먹이 되었다. 다 허물어진 여자에게서 거대한 벽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넘을 수도 없고 넘으려고 해서도 안 되는. 그리하여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담장.
“말하지 않아도 돼.”
듣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기조는 입술을 다물었다. 여자는 언뜻 다정해 보였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얼굴이 허옇기만 할지라도…….
“박수영, 데려올게.”
연조가 고개를 저었다. 다급함이 몰려들었다.
“어머니, 아버지 모셔올 테니까. 집으로…….”
“자고 싶어.”
“…….”
“자고 싶어. 기조야.”
연조가 대화를 단절하려 했다.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싶다는 듯 피곤해 보였다. 기조는 얼어붙은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정말 잠이 든 것처럼 그를 의식하지 않았다.
기회를 주면 안 되냐는 말 대신 기회를 얻을 행동을 하려고 했다. 반성하고 있다고 앞으로는 너에게 상처 입히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음 얻기 위해서 뭐든지 하려고 했다. 그녀가 선택한 남자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지만 적어도 그녀가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