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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되었을 무렵 박수영이 찾아왔다. 남자는 꾀죄죄한 모습으로 병원 복도를 뛰쳐나왔다. 그는 울었고 연조는 울지 않았다. 수영이 그녀의 뺨을 쓸었다. 남자의 손등이 하얀 뺨과 턱에 닿았다. 연조는 그가 제 손을 잡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기조와 함께 있을 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연조가 반응하지 않았다. 대상이 누구라 하더라도 감정의 동요가 없는 것이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더는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기조는 파동 없이 잔잔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마모될 수 없을 만큼 작아진 모래알을 보는 기분이었다. 라이터를 달칵거리던 이인혁이 그를 흘긋거렸다.
“용케도 살려둔다 했더니.”
빈정거렸다. 떠보는 척 말을 걸었지만 남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담배를 내밀었다. 무반응이었다. 인혁은 고개를 돌렸다. 덜컥 겁이 났다. 매끄럽고 단단한 외관이 그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숙자라도 산 채로 데려와야 했는데 계집은 죽고 말았다. 도망치다 죽은 게 아니라 이미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리다. 이인혁은 그를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시신을 발견할 무렵 연조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죽은 채였어. 칼을 줬을 때 이미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겠지. ”
숙자에 대해서 생각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얼굴을 훼손하려 했을 때. 무슨 일인지 그때 기조는 여자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다. 숨을 붙여 둬도 사지 멀쩡하게 붙여두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선택한 것은 사지를 불구로 만드는 것이 아닌 여자의 얼굴을 망치는 것이었다. 이인혁은 여전히 그 일이 소름이 돋았다.
일신이 윗선과 접촉하며 로비한 상대들의 리스트를 가지고 경찰과 접선하려 했던 여자였다. 목적이 모호하든, 분명하든. 강기조는 저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자는 살려두지 않았다. 여자에게 목숨을 살려둘 만한 이유가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2년 전 클럽의 일로 그녀의 마음이 상했다고 한들. 그리하여 강기조를 몰락시키고 제 발목을 묶은 빚을 탕감하고 싶었다고 한들. 강기조가 그를 헤아릴 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술집 작부에게 꿈같은 허상을 불어 넣은 것 또한 그가 아니었다. 연예인 지망생이라느니 조직의 여자가 되어 뒷골목의 실세가 될 거라느니. 모두 그녀가 집어삼킨 헛꿈들이었다. 강기조가 그녀를 애인이랍시고 끼고 다닌 것은 그가 오랫동안 염원했던 어떤 여자를 얻기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수단이었고 방법이었다. 만남조차 그리 삭막하지 않았나. 텐프로니, 어쩌니 떠들어 대도 강기조에겐 그저 술집 작부. 그 이상의 의미는 지니지 않았다. 그러니 웬 술집 작부가 제 뒤통수를 치기 위해 조직의 기밀을 내돌렸단 것에 어떤 연민을 가질 수 있을까.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 매혹적인 몸매, 태도. 그 모든 것이 기조에겐 연조를 자극할 수단밖에 되지 않은데. 저 혼자 핑크빛 열기에 감싸여 헛다리를 짚다가 인생을 말아먹었다. 2년 전 클럽에서 호되게 혼이 났으면 주는 돈 받고 나가떨어졌어야지. 무모했다.
“듣고 있어?”
채근했다. 남자는 병실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인혁은 입을 다물고 박수영과 송연조를 응시했다. 솔직히 왜 송연조가 박수영과 결혼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저 좋다고 미치는 남자를 자극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보복심인가. 그럴 거면 좀 더 번듯한 놈을 만날 것인지……. 괜히 씁쓸함이 밀려왔다.
“연조 부모님은……. 야. 그만 좀 쳐다봐라. 창문 깨지겠네.”
인혁이 핀잔을 주었다. 기조는 들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간호사가 복도를 지나가며 인혁을 응시했다. 날 선 눈이 그가 문 담배에 닿았다. 그는 담배를 바닥에 지져 끄며 박수영과 연조를 바라보았다. 싫을 만했다. 남자라면 콧물을 찔끔찔끔 흘리는 어린애도 연조에게 닿는 걸 싫어했으니까. 얼마나 피가 거꾸로 치솟을까. 웃음이 나왔다. 박수영은 제 애인의 볼을 쓰다듬다 그녀를 끌어안고 펑펑 울고 있었다.
초라한 손끝이 여자의 등과 어깨를 쓰다듬었다. 이인혁은 기조를 곁눈질했다. 벌건 눈이 가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한껏 올라갔던 인혁의 입꼬리가 돌아왔다. 남자는 정말 어떻게 될 것처럼 떨고 있었다.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때로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세상에는 있어 그는 어린애처럼 어찌할 바 모르고 있었다.
돌연 그가 자리를 벗어났다. 인혁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 마른세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