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46)

* * *

구역질이 났다. 그 새끼의 손가락이 연조의 입술에 닿았다. 눈두덩에 닿았고 긴 머리카락을 스쳤다. 헤집고 지나간 자리가 펄럭이며 가라앉을 때마다 구역질이 났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 그 버러지의 멱을 따고 싶었다. 연조를 만진 손가락을 자르고 눈을 지지고 싶었다. 놈의 존재를 아는 순간부터 충동에 시달렸다. 죽이고 싶다. 놈의 숨이 닿은 연조의 눈두덩을 박박 문지르고 싶다. 연조는 내 건데. 그 여자는 내가 사랑하는데. 그 여자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건 나뿐인데!

그러지 못한 건 그 여자에게 버림받을 것 같아서다. 그 여자가 정말로 등을 돌릴 것 같아서. 그러면 영원히 그녀에게서 사랑을 돌려받을 수 없으니까.

“욱, 우욱…….”

식도를 열었다. 벌린 입에서 허여멀건 토사물이 쏟아졌다. 이물감이 열기를 몰고 식도를 역류했다. 머릿속에 연조가 범람했다. 희고 아픈 얼굴이었다.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발목이 덫에 걸린 것처럼. 그는 가끔 왜 연조에게 상처를 주려고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그를 보길 바랐다. 자극한 만큼 반응하길 바랐다. 울고, 화내다 그가 입술을 겹치면 그대로 그의 목에 팔을 둘러 그에게 용서를 구하라 명령하길 바랐다.

훌쩍이는 여자를 그렇게 어르고 달래다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사실은 내게 너뿐이었음을. 언젠가부터 나를 외면하는 너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얕은꾀를 낸 것일 뿐이라고. 그러면 연조는 언제나 그렇듯 훌쩍이며 칭얼거리다 그를 용서할 것 같았다.

열에 감긴 얼굴이 얕게 떨렸다. 잘못된 일이었다. 그른 선택이었고 동시에 되돌릴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연조가 그를 처음 외면했을 때부터 그녀를 잡고 말했어야 했다. 왜 나를 전처럼 봐주지 않느냐고. 나는 네 연민 따위나 받는 반편이가 아니라고.

울음이 날 것 같았다. 그녀가 처음으로 제게서 시선을 돌리던 날이 떠올랐다. 트라우마로 남겨진 일이었다. 그렇게 버릴 거면 차라리 줍지 말질 그랬나. 누가 먼저 건드렸는데. 누가 먼저……. 너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너 아니었으면. 연조야…….

“하. 흐으윽…….”

생의 모든 흐름이 그 여자를 향해 있었다. 그 여자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 그 여자가 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그는 여전히 잊지 못했다. 어리고 무구한 얼굴. 낯이 발갛게 달아올라 아이들 앞에서 저와의 사이를 부정하던 연조.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젓던 소녀. 연민을 사랑이라고 곡해할 만큼 그는 그 사랑이 좋았다. 분에 겨워야 할 것을 오롯이 제 것으로만 만들고 싶었다. 권력을 쥐게 되면 더는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군림하며 누리게 된 호화를 그녀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으쓱이며 그녀의 우러름을 받고 싶었다. 숨기지 않고, 부정하지 않고……. 그런데 연조가 어땠더라. 모르겠다. 두려웠다. 그녀의 세계에서 부피를 키워갈수록 돌아서는 일이 잦았다. 그래도 적선하는 마냥 연민을 받을 바엔 외면당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돌려세워 시작할 수 있다면 참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계집애가 있었다. 저 좋다고 따라다니는 계집애들은 많은데 유독 그녀를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 계집애가 연조의 질투를 샀기 때문이다. 질투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가 목도한 진실. 그가 터득한 수단은 그 계집애로부터 터득한 것이니까. 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식으로라도 다르게 보이고 싶었다. 나는 네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고. 나는 남자라고……. 오래전부터 바래 온 것은 그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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