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3/46)

* * *

“당신……!”

병실을 지키고 있던 박수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췌한 얼굴에 형형한 기운이 파리했다. 기조는 그를 의식하지 않았다. 연조는 잠들어있었다. 종일 자고도 다시 잤다. 어젯밤 저녁 박수영이 연조의 부모님을 호출하고 새벽부터 정오까지 딸의 침상을 지키던 연조의 부모님은 잠시 집으로 돌아갔다.

연조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극구 그들의 거동을 말리는 태도가 눈에 거슬렸다. 다시 나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가족의 얼굴을 보기 싫어하는 여자를 향해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그제야 화다운 화를 냈다. 그리고는 죽은 듯이 잠을 잤다. 박수영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그녀를 지켰다. 씨근덕대며 그를 노려보는 눈이 더는 가소롭지 않았다. 이 볼품없는 남자가 그의 사랑이 선택한 남자였다.

“너는 연조의 어디가 좋아?”

나직하게 물었다. 분으로 벌벌 떨던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돌아오지 않는 답을 두고 연조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연조의 어디가 좋은지 말할 수 없었다. 말하기 시작하면 백일의 밤을 지새워도 모자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랑에 처음 빠진 순간은 기억했다. 그녀에게 설렜던 날도 잊지 않고 있었다.

“연조가 나를 위해 화장을 한 적이 있어.”

“무슨…….”

“머리에 컬을 넣고 분홍색 립스틱을 입술에 발랐더라. 손톱이 그 날따라 둥글었는데 가게에서 정돈한 것 같더라고. 머리는 미용실에서 방금 했는지 약 냄새가 옅게 났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딱딱한 대꾸였다. 기조는 웃었다. 그날 연조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에 대해서 곱씹었다. 낯설고 어설픈데 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고 생각하니 저리도록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런 날의 오후를 그가 망쳤다. 기꺼이 모두 으스러트려 놓았다.

“너는 연조를 사랑한 순간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뒤를 돌았다. 남자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노여워 일그러졌던 얼굴을 폈다. 감정에 매몰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해서 죽고 싶었던 날들이 있나?”

“그럼 당신은요?”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기조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박수영이 연조를 사랑하는 것은 진심이다. 그가 준 모욕과 경멸을 심장에 새기고도 연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무거운 사랑이다. 그래서 더욱 그를 죽이고 싶었다. 그를 죽이고 그 사랑을 죽이면 흔적이 남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매일이 그래.”

이로 씹어 잘라내듯 뇌까렸다. 수영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이내 조소가 배어들었다.

“믿기지 않네요. 연조에게 그런 짓을 하고도 매일 죽고 싶었다니. 당신한테 사랑…….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지만. 당신의 그 같잖은 놀음이 사랑이라고 하니 사랑이라고 칩시다. 연조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압니까?”

수영이 울었다. 눈물에 젖어든 눈이 발그스름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울음을 삼켰다.

“연조를 사랑하느냐고요? 사랑한 순간을 기억하느냐고요?”

“…….”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데 연조가 아파한 날들은 모두 기억에 남네요. 뇌리 속에서 잊히지 않습니다. 웃으면서도 우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연조를 포기하지 못하겠습니다. 차라리 당신이 아니었으면.”

수영은 침을 삼켰다.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연조를 사랑하는지 물었다. 그것을 묻고 싶었던 건 수영이었다. 눈앞의 남자야말로 연조를 향한 사랑이 의심되는 남자였다. 그간의 행적, 그간의 몰염치. 사랑이라 해도 사랑의 자격을 운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당신이 아니었으면 보내주었을 겁니다.”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저와 결혼하려 했던 연조의 마음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면 연조와 함께하려 했던 제 마음은 사랑인가?

“당신이 아닌 다른 남자였다면 보내줬을 거라고요. 그런데 당신이니까. 당신이니까 나는 포기 못 합니다. 당신이 연조에게 어떻게 구는지 알고 있는데. 연조가 아픈 게 누구 때문인데! 이렇게, 이렇게 데려가서 다시 아프게 할 거면서……. 내가 그걸 아는데. 내가 그걸 다 아는데 어떻게 포기합니까!”

울음이 병실을 메웠다. 껍질이 허옇게 말라붙은 수영의 입술이 눈물로 젖어들었다. 그는 주먹을 그러쥐고 있었다. 기조는 한 점 일그러짐 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나직하게 운을 뗐다.

“그렇군.”

낮은 목소리였다. 수영은 묶이지 않은 상태에서 남자와 독대하는 것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늘 독대할 때는 몰골이 비참했다. 발에 차여 피떡이 되었거나 피떡이 되기 직전이었다. 오늘 죽으리라는 생각이 들 때야 멈췄던 폭력이다. 연조와 처음으로 간 펜션에서도 그랬다.

“나는 네가 아닌 다른 누구여도 연조 양보 못 해.”

“그럴 거면, 그럴 거면…….”

수영이 맥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기조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가 폈다. 방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였다. 수영이 그를 붙잡았다.

“펜션. 기억하십니까?”

뒤를 돌았다. 기조는 고개를 처박고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비감에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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