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6/46)

* * *

‘연조는 당신을 사랑하길 거부합니다.’

펜션에서의 일을 기억하느냐고 묻는 박수영이 말했다. 놈은 연조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얼굴을 마주 볼 때마다 그녀가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곤 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조는 절실했다고 했다. 만남이 이어지길 원하는 것은 놈이 아닌 그녀였고 놈은 그런 그녀를 버릴 수 없었다고 했다.

연조가 절실했던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를 벗어나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기고 싶었던 까닭. 그를 벗어나 달아나려고 했던 까닭. 그녀를 그렇게 몰아붙인 것은 그였다.

“연조야.”

흔들리는 차 속에서 그녀는 창밖을 더듬고 있었다. 병원에서 보름이 흘렀을 때 연조는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부모님과 함께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했으나 연조는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이 있는 집으로 가지 않으려고 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독립을 했으니 본가에는 그녀의 방이 없어진 지 꽤 오래였다. 그러고 보면 연조는 가족과 썩 친한 편은 아닌 것 같았다. 퇴원하기 얼마 전 처음으로 찾아왔던 그녀의 여동생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여동생을 보자마자 낯빛이 어두워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연조는 동생을 싫어했다. 연조의 동생 또한 그녀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친근한 척 굴었지만 어려워하는 게 느껴졌다. 나이를 꽤 먹었음에도 본가에서 사는 여동생을 생각하면 집안 내에서 연조의 위치나 입장이 어떤지 대강은 짐작이 갔다. 울음을 훌쩍이긴 하지만 큰딸과 데면데면하던 모친. 냉담한 얼굴로 고개 돌린 딸의 눈치를 살피던 부친.

연조는 그 집에 가기 싫은 것이다. 제게 붙잡혀 있는 내내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지만 실은 핑계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부모님의 자택을 제외하면 연조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결혼식 전 신혼집으로 쓰려 했던 그녀의 오피스텔은 그의 손에 정리되었고 수영은 현재 본가에서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연조가 돌아갈 곳은 하나였다. 그녀는 그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이제는 그를 거부하지도 않았다. 무채색 한 눈동자가 허공을 더듬었다. 기쁨도, 슬픔도 느낄 수 없는 여자는 허기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가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개

연조는 배를 만지고 있었다. 자궁에 아이가 있다고 했다. 그렇게나 해댔으니 애가 생기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기쁘지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사실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기조조차 기뻐하는 내색은 없었다. 남자는 놀라지도 않았다. 계획대로 되었는데도 만족감을 내비치는 일이 없어 병실은 침묵만이 켜켜이 쌓였다.

수영을 볼 낯이 없어 그를 앞에 두고도 울먹였다. 기조에게 겁이 질려 멱살을 잡지 못한 엄마는 내내 그를 노려보며 울음을 참다가 만약 이 일이 은조에게 생겼다면 자살했으리라는 말만 번복했다. 그런 엄마에게 정이 떨어지는지 아빠는 병실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세포에 지나지 않은 태아를 찍은 사진을 두고 기조와 마주 앉았다. 아랫배를 만지며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는 희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응.”

“생각해봐.”

“별로…….”

그녀는 손목에 감긴 붕대를 만지작거렸다. 고개를 들어 수영이 비워둔 자리를 쳐다보았다. 전날 저녁 병실을 나간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빈자리를 바라보는 연조에게 기조의 손이 닿았다. 피하지 않되 반응하지 않았다.

“성별은 모르지?”

“아직. 아직 그만큼 자라지 않았대.”

연조가 묻고 기조가 답했다. 그 대화가 그들을 여느 부부처럼 느껴지게 해서 기조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이에게 관심을 붙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적어도 연조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그러면…….

“딸이었으면 좋겠어?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연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조는 답을 바라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아의 사진을 보던 연조가 흰 입술을 달싹거리다 나직하게 내뱉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고개를 들었다. 열없이 중얼거린 연조가 태아의 사진을 곱게 접어 서랍 안에 넣었다. 가슴이 찢겼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었다. 총을 맞은 것처럼 뻥 뚫린 심장. 발밑이 꺼진 가운데 느리게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연조야.”

“그냥. 그냥 그렇게 생각한 거야. 별거 아니야.”

연조는 제 말을 정정하고 싶은지 몇 번의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그것을 관두고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그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결혼을 약속한 것은 아니었다. 식을 올리자거나 혼인신고를 하자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다만 그토록 그가 원했던 것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같이 사는 것. 그들은 이제 아이까지 생긴 마당이었다. 먼저 그의 집에 돌아가자고 했지만 연조는 부부가 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를 떼겠다는 말도 없었지만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설마 낙태를 원하는 걸까. 그래서 그런 말을……. 그녀의 말 한마디. 모호한 감정 표현 하나에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갔다. 도저히 의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연조야.”

“미안해. 그 말은 잊어.”

“어떻게 잊어. 아이를, 아이를…….”

연조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강제로 임신시켰지. 그녀를 강제로 안았기 때문에 생긴 아이다. 원하다면 아이를 제거할 생각이었다. 모든 것이 엎질러진 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회를 얻고 싶었다.

“내일이라도 수술 날짜 잡을 수 있어. 아니, 지금이라도…….”

“죽이는 거 싫어.”

돌아누운 연조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죽이는 거 싫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야. 그냥 그런 것일 뿐이야.”

“낳기 싫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미 생겼잖아.”

“없애면 그만이야. 너 좋을 때 다시…….”

“없애는 거 싫다고 했어.”

“연조야.”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핏발이 흉흉하게 선 눈이 그를 노려보았다. 매달린 눈물이 아슬아슬했다.

“너 때문에 생겼어! 너 때문에! 나는 아이 낳기 싫다고 했는데. 나 닮은 애 싫다고 했는데! 그런데 이미 생겨버려서. 그래서, 그래서…….”

연조가 울었다. ‘나 닮은 애는 싫다.’란 말만 머릿속을 뱅글뱅글 돌았다.

“너 닮은 게 어때서.”

연조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홀로 울음을 진정시키려 몇 번 침을 삼키더니 다시 돌아누웠다. 기조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제 앞에 세웠다.

“말해.”

“뭘?”

“너 닮은 게 어떻단 거야.”

“싫다고. 끔찍하니까. 나는 내가 싫은데 내가 어떻게 나 닮은 애를 좋아해? 내가 어떻게 엄마가 될 수 있어? 보고 싶지도 않아. 나 닮은 내 새끼는. 그런데 너는 그렇게 애가 좋아? 나 닮은 애가 보고 싶어?”

“…….”

“내가 왜 좋은데?”

연조가 울었다. 그악스러운 울음소리 대신 발간 눈이 형형했다. 말라붙은 윤곽에 입술이 씹혔다. 그는 다가가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눈물 찍힌 뺨이 형편없이 야위었다.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더듬었다.

“네가 나를 사랑했으니까.”

“그런 적…….”

“그럼 왜 사랑한 것처럼 굴었어? 왜 날 건드렸어? 고작 동정이면.”

낯이 굳었다. 화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따금 과거를 생각하면 죽을 것 같았다. 그를 훼손했던 여자였다. 파훼였고 파벽이었다. 그렇게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새어들지만 않았어도.

“그럭저럭 살고 있었어. 병신 소리 듣고 살아도 진짜 병신 같지 않았다고.”

붕대가 감긴 손목을 잡았다. 때때로 분했다. 이 여자에게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린 시절 노모에게 맞고 사는 불쌍한 애 하나 살펴 준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것을 알고 나서도 잊지 못했다. 발버둥 치며 바락바락 여기까지 기어 왔다.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지옥으로 던진 조부가 생각났다.

이만큼 먹이고 키워줬으니 증명할 때가 되었노라. 노인은 피도 눈물도 없었다. ‘실패는 한 번으로 족하다. 증명되지 않은 패를 투자할 만큼 남은 수명이 긴 것도 아니야.’ 고르지 못한 숨과 함께 쟁쟁 울리는 노인의 음성이 질겼다.

조부가 한국에서 뿌리내린 일신 그룹은 중국 흑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이었다. 듣기로는 삼합회에서 갈라져 나온 일파 중 하나라고 들었으나 그 실체를 목도한 일은 없었다. 그 무렵에는 조직에서의 위치나 입장을 생각하지 않았다.

상해로 유학을 떠날 무렵에는 그저 모든 게 짜증스러웠다. 유학이 아닌 유배나 다름없다고. 연조가 있는 한국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적출’과 다름없이 느껴졌다. 학교를 자퇴한 이후로는 직접 대면한 일도 없으면서. 사람을 붙여 사진으로만 보는 게 다였으면서. 그가 보지 못하는 사이 연조는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될 것 같았다. 그러니 명령이 아닌 권유였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그만큼 기조는 조부에 관해 안일했다. 그러나 조부는, 아니 강근영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중국 흑사회의 전반을 휘두르면 살아간 자였다. 한국으로의 귀화 또한 반출이 아닌 확장이었으며 거세지는 경찰 당국의 감시를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였다. 영국인 부친에 중국인의 피가 섞인 한국인 어머니. 아내는 한국인 교포. 어느 땅에 씨를 뿌릴지는 온전히 경제적인 가치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일가의 족적과 유산에 대하여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 도착한 상해는 아귀 소굴과 다름없었다. ‘네 가치를 증명해라.’ 추상적인 말이었다. 의무를 수행할 것에 지시도, 명령도 없었다. 그는 말 그대로 버려지다시피 내던져졌고 조부의 보호 없이 땜빵을 치며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아마도 1년을 그렇게 보냈을 것이다. 상해 지부에서 말단 조직원으로 생활한 것. 지부를 관리하는 중간 보스는 그에게 아무런 사적 감정 없이도 매질할 수 있는 자였다. 분을 이기지 못해 주먹질하는 인간이 아니다. 기조가 쓰임새를 못 할 때 기대한 바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 그는 거꾸로 매달린 채 채찍질했다.

홍등가를 관리하고 도박장의 일꾼들을 부리며 중국어를 습득한 것은 그때였다. 밥 먹는 것처럼 사람을 죽였다. 살인이 도살처럼 느껴진 것도 그 시절이었다. 아침을 먹기도 전 피를 보고 나면 입맛이 가신다. 지금이야 밥만 잘 처먹지만 그때는 그래도 사람다운 구석이 있어 사람을 신원불상의 시체로 만들고 나면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1년을 넘기며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았다. 멱이 썰리고 머리통이 깨져도 사람은 산다. 그는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 육신이 아닌 정신이라는 생각을 했다. 연조를 생각하는 것.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는 것. 그 여자 앞에 번듯하게 설 수 있는 날을 꿈꾸는 것.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여자가 나를 근사한 남자로 바라보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 여자를 오롯이 소유할 수 있게 되면 얼마나 행복할까. 더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텐데……. 연조를 생각하면 머리맡이 을씨년스럽지도 않았다. 잭나이프로 목을 썰 때 묻은 피도 소름 끼치지 않았으며 때때로 찾아드는 오한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연조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 여자를 얻기 위한 수단이 그를 추악하게 만든 것이다. 차라리 병신으로 살다 병신으로 죽었으면 제 발치에 매달린 악행은 소산의 과정을 거칠 일도 없이 파생되지도 않았을 텐데.

“너한테 나는 그 반반한 얼굴로 교실 뒷구석이나 뒹굴던 그놈하고 다를 바 없었겠지.”

연조가 희게 질렸다. 기조는 조악한 미소를 입가에 물었다. 파리한 낯에 박힌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기조는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등판에 새긴 문신을 새기며 박희준을 생각했다. 박희준이 어디서 뭐 하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놈의 상판과 오금을 지리며 바닥을 기던 모습은 여전히 생생했다.

놈과 그가 연조에게는 같은 놈이었으리라 생각하니 피가 식었다. 입술에 칼자국이 났을 때도 조부가 탐탁지 않아 하는 문신을 새겼을 때도. 늘 그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곱상하게 생긴 사내가 되고 싶지 않다. 놈과 같은 꼬락서니로 연조 앞에 서고 싶지 않다. 창백하던 피부를 태우는 일에 열심히 인 것도 마찬가지였다.

연조는 그의 흰 피부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게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싫었다. 연조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주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는…….”

“사람을 왜 헷갈리게 해.”

“내가, 내가 언제? 나는…….”

연조의 눈 끝에 눈물이 매달렸다. 기조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다 느리게 운을 뗐다.

“나는 그게 사랑인 줄 알았잖아.”

“…….”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고.”

눈물이 고인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기조는 부드러이 입을 맞췄다. 각질이 일어난 하얀 입술은 달콤하고 말랑했다. 야윈 몸이 바르르 떨며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기조는 그녀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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