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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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병원을 퇴원하고 연조는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너르고 아득한 공간으로 그의 아이를 임신한 채. 연조는 부모님을 보지 않겠다고 했다. 그 말이 영원을 기약하는 선언인 것 같아 그녀의 모친은 울음을 터트렸다. 병원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평범한 연인처럼 교외를 드라이브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이었다. 연조는 숙자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기조는 그녀의 죽음을 전하고 싶지 않아 하루를 보내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자주 배를 쓰다듬었다. 전에는 보인 적이 없는 행동이라 마음이 쓰였다. 아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것을 생각하면 두렵고 또 두려웠다.

연조는 물이 맺힌 남자의 등을 응시하고 있었다. 척추를 따라 똬리를 튼 뱀은 뱀이 아니라 이무기라고 했다. 인위적으로 태운 거뭇한 피부에 검은 이무기의 형상이 또렷하다. 연조는 시선을 끌어내렸다. 붕대를 감은 손목이 한 줌이었다. 나무 둥치를 뒹구는 꺾인 가지처럼 마른 손목을 쳐다보았다.

배 속에 애가 생겼다. 그토록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생기지도 않는 애가 단번에 들어선 것이다. 연조는 기쁘지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혹을 떼어내듯 떼어낼 수 있다지만 아이는 혹이 아니다. 그렇게 떼어내고 나면 살아가는 나머지 시간 동안 자궁이 아플 것 같았다.

가지런히 발을 모으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잘록한 허리와 대비되는 너른 어깨가 도드라졌다.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말을 붙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변을 빙빙 도는 어린애처럼.

연조는 그가 어린 사내아이 같다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 성년이 되기 몇 해 전의 소년도 아닌 사회화 교육이 필요한 어린아이.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돌아누워 이불을 쥐고 벽을 더듬을 때였다.

상처 입은 흔적을 보이지 않으려 머뭇거리던 남자가 그림자를 드리웠다. 연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으려니 물기를 채 닦지 않은 남자가 제 옆자리를 메운다. 익숙하게 허리를 감으리라 생각했으나 그 이상의 행동은 없다.

“연조야.”

“헷갈리게 한 적 없어.”

“…….”

“내 탓 하지 마.”

냉랭한 음성이었다. 어둑한 방안을 가르는 목소리가 잔인했다. 죽을 것 같았다. 제게 아무런 해악도 끼칠 수 없는 여자인데 그 여자가 제 목을 쥐고 심장을 자근자근 밟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잘못 없어.”

“…….”

“그냥 도와줬을 뿐이야. 그걸, 그걸 네가 오해했잖아.”

대꾸하지 않았다. 돌아누운 여자의 등이 시리고 차가웠다. 처음으로 울고 싶었다. 제발 이렇게 몰아붙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안 되겠지. 안 될 일이었다. 그렇지만 궁금했다. 그걸 알고 나면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조 또한 일어나 그를 마주 보았다. 밤기운이 선명해 그가 보이질 않았다. 정맥을 짓이긴 자리가 아팠다. 그녀는 이불이 젖도록 손바닥에 땀을 흘렸다. 마른 지푸라기처럼 건조한 음성이 그녀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한 번도…….”

“…….”

“정말로, 정말로 한 번도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

기조가 물었다. 연조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번번이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고 했었다. 실은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일인데. 그는 철석같이 그를 믿고 있었다. 어느 날 사라졌다가 어느 날 다시 나타난 남자였다. 연조는 어린 시절에도 그를 알 수 없었다. 그의 행적과 본질을 알아도 덮어둔 날이 많았다. 그리고 지금은…….

“네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어.”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연조는 이불을 잘근잘근 주물렀다. 사랑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한 적 없어.”

“…….”

“한 번도.”

“…….”

“한 번도 나한테 남자인 적 없어.”

“그래?”

“응.”

들려오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연조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 표정 없이. 아무 감정 없이. 그저 피곤하다고만 생각하면서. 자세히 보니 그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연조는 그것을 꼭꼭 씹었다.

저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구나. 구김 한 점 없이 굳어져 있던 남자가 입술을 몇 번 오므렸다가 폈다. 반복하는 행위 속에서 아픔이 여실히 보였다. 그는 울고 있었다. 창에서 바람이 새는 일도 없는데 서늘했다. 밤 사위라 어둠마저 차갑고 냉혹한 것일지도 모른다. 연조는 마른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소리 없이 울던 남자가 낯을 일그러트렸다. 고르지 못한 호흡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눌러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는 듯 그는 떨고 있었다.

“내가 착각했었던 거구나. 그저 너는 내게 친절한 것일 뿐이었는데.”

“……그래.”

“미안해.”

기조가 사과했다. 물기가 묻어난 목소리였다. 그 또한 처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장막 같은 어둠 속에서 어린 시절 기조가 그려지는 듯했다. 연조는 아무 말 없이 그가 이을 말을 기다렸다.

“그래도 사랑해.”

“…….”

“어쩔 수 없어.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게 내 일생의 반이었거든.”

“…….”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만두지 못하겠다.”

그가 웃었다. 엷은 윤곽이었으나 입가에 그려지는 미소가 반듯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거리며 방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연조는 그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그를 쳐다보다가 맺힌 줄도 모르고 맺힌 눈을 닦았다. 그리고 습관처럼 왼편 가슴을 꾹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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