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8/46)

* * *

기조는 그날 이후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집이었지만 그녀의 매끼를 챙겨주는 사람이 다녀가는 덕에 내내 적막하진 않았다. 청소는 보통 그녀 잠든 사이 이뤄졌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람도 없었고 집 밖을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끼니를 챙겨주는 여자는 나이가 제법 있는 중년 여성이었다. 여자는 그녀에게 식사를 챙겨주며 교외로 드라이브나 한적한 영화관으로 외출할 것을 권했다.

원한다면 대표님이 운전기사를 붙여 줄 것이라고 했다. 살살 웃음을 지으며 권유했으나 연조는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집 밖을 나간 사이 기조가 들어올 것 같았다. 어쩌면 잠이 들어 있을 때 그가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기조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는 걸까? 왜? 없어져서 좋은데. 야속하고 괘씸한 마음이 여전했다. 그녀는 남자의 생각을 하는 대신 배를 쓰다듬었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있는지 없는지 느껴지지도 않았다. 모로 돌아누워 기하학적인 문양의 벽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불길함이 가득했지만 받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쩌면 기조일지도 모르고…….

“여보세요.”

-연조야.

“……수영 씨?”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내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여전히 모르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기조가 그녀가 쓰던 걸 버리고 새 휴대폰을 사 줬다지만 수영의 번호라면 외우고 있는 터였다. 연조는 의아함에 입을 뗐다.

“이 번호는 어떻게 알고…….”

-나, 나 지금…….

“무슨 일이야? 무슨,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울음에 젖은 목소리였다. 수영이 떨고 있다는 느낌이 들자 상황을 전해 듣지 못했으면서도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잡혔어. 잡혔어. 그놈들한테…….

“그놈들이라니 무슨 말이야?”

-강기조, 강기조가 나를…….

아연했다. 기조가 왜 수영을 납치한 거지? 연조가 이 집에 있는데. 수영에게 가지 않고 그의 곁에 머물기로 했는데 어째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모르겠어. 나도, 나도 모르겠어. 연조야. 흐윽…….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불안을 증폭시켰다. 연조가 여기 있음에도 수영을 납치했다. 연조가 그를 선택하면 수영을 내버려 둘 것 같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기조는 수영 자체를 싫어했으니 납치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화가 났다. 휴대폰 너머로 낮은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거기가 어디야? 기조도 같이 있어? 바꿔봐.”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수영의 웅얼거림이 멀어졌다. 연조는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가까워지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송연조 씨. 나 기억합니까?

“누구…….”

-기억 안 나요?

사투리가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 낯이 익었지만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머릿속을 뒤집을 때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정, 정 부장님이신가요?”

말문이 더듬거렸다. 연조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갔다. 부산 억양이 섞인 표준어가 귓가를 때렸다. 정 부장이 나직하게 웃었다. 기조의 회사를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기조의 측근 중 하나였다. 부산 억양이 진하게 배 표준어인지 사투리인지 헷갈리던 말을 느리게 구사하던 남자.

기조가 저지른 일이 맞구나.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정 부장은 인천의 한 부둣가를 가르쳐 주었다. 기조가 무슨 일을 계획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수영이 급박한 상황에 빠진 건 맞는 것 같았다. 더는 앞뒤를 잴 여유가 나지 않았다. 연조는 신발을 제대로 신지도 않고 현관문을 나섰다.

붉은 어스름이 덮기 시작한 거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천장의 모서리에 달려있던 초소형 카메라의 렌즈가 반짝였다. 이내 렌즈를 통해 집의 내부를 파악하던 이인혁이 강기조를 돌아보았다.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꼬락서니의 남자가 대마를 담배처럼 입에 물고 있었다. 남자의 눈이 형형하게 타올랐다. 손으로 백색 지포 라이터를 달칵거리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복도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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