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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 올라 정 부장이 가르쳐 준 부둣가로 향했다. 무슨 정신으로 거기까지 간 건지 알 수 없었다. 경찰을 부를 법도 했는데 연조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겁이 났다. 수영이 다칠까 봐 겁이 났고 그 남자가 두려움에 떨며 연조를 부르는 생각을 하자 미칠 것 같았다. 수영이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남자 덧없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면. 기조가 그 남자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면.
수영을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할 수 없다고 못 박았을 때도 그 남자는 웃었다. 아마 사랑했다면 덜 미안했을 것이다. 이용했으니까. 그 남자를 이용했으니까. 그녀가 관심을 보이는 상대에게 기조가 얼마나 잔인하게 구는지 알고 있었다.
여자든, 남자든 좋아하지 않았다. 그나마 여자면 불쾌함을 느끼는 데서 그쳤지. 남자라면 이를 갈며 눈을 부라렸다. 알면서도 수영을 만났다. 그 남자가 어떻게 행패를 부리는지 알면서. 얼마나 많은 피를 손에 묻혔는지 알고 있으면서.
연조는 수영이 사라질 때마다. 아니, 연락을 받지 않을 때마다 10년은 족히 늙는 것 같았다. 기조가 그에게 발정제를 먹이고 여자를 붙였을 때도 불쾌함보다는 안도감이 우선이었다. 언제나 어느 때나. 자신의 안위보다 그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그런데……. 기어코 이 사단을 벌여? 충분히 의심할 수 있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밤. 결국 그를 거부했으니까. 받아줄 용의 따위 없다고 했으니까. 그녀에게 손을 댈 수 없다면 수영은 아니다. 손쉽게 목을 조를 수 있는 상대였다.
택시에서 내려 부둣가 창고 앞에 섰을 때였다. 이마에 맺힌 땀이 관자를 주르륵 흘렀다. 컨버스 운동화의 끈이 풀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을 때렸다. 폐가 찢어지는 고통이 찾아왔다. 택시에서 내려 창고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탓이다.
수영이 죽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혹은 불구가 되어있다면. 기조는 손속이 잔인한 자다. 누구보다 그것을 그녀가 잘 알았다. 사람의 살붙이를 맨손으로 자르면서도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 꼬락서니를 들켜 놀라긴 했지만 부끄러움 따윈 없었다.
연조는 일신 그룹의 본사에 있을 때 몇 번을 보았다. 폭력배들의 일상은 늘 양지와 음지의 중간에 있었다. 서류를 읽다가도 글록을 잡았고 펜대를 굴리다가도 칼을 움켜잡았다. 회사의 가장 아래층에는 지하가 있었다. 창도 없이 빛도 들어오지 않는. 음습하고 음울한 공간의 벽들은 모두 하얗게 마감되어 있고 공간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악행과 폭력들을 집어삼켰다. 소름이 와삭하고 돋았다. 스걱스걱, 잘려나가던 이름 모를 사내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계단을 걸어 내려갔을 때, 그리고 계단의 끝에서 기조와 눈이 마주쳤을 때. 슈트를 빳빳하게 다려 입은 남자의 무채색한 표정. 덩그러니 서서 그를 쳐다보던 연조. 그때 남자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생각했다.
어느 때든 그날을 상기하자면 목이 꺾인 이름 모를 남자보다 그를 등지고 제게 다가오던 기조가 먼저 떠올랐다. 그는 다가와 연조의 눈에 서린 두려움을 녹이려 했다. 다정한 손길, 온화한 미소.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을 들킨 사내가 피울 수 있는 능청 따위들…….
그렇다면 오늘도 기조는 다정하게 눙치려 들까. 희게 질린 그녀의 뺨을 잡고 긴 머리를 쓰다듬을까. 모르겠다. 수영이 죽었다면 연조는 아이를 밴 채로 뛰어내릴 것이다. 손바닥에 닿는 부둣가 창고의 문이 서늘하다.
연조는 천천히 쇠문을 밀었다. 낡은 경첩이 덜그럭거리며 기이이익- 하고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