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2/46)

* * *

서느런 손가락이었다. 눈 밑의 연약한 살들이 서늘한 온도에 움찔하고 떨었다. 핏방울이 묻은 셔츠 깃은 놀랍도록 빳빳했다. 귀 한쪽이 없는 남자가 그의 등 뒤에서 쌕쌕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핏줄이 선 눈알이 터질 것처럼 확장되어 있었다. 연조는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자각몽인 셈이지만 그녀의 의지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남자가 물었다. 수은처럼 미끌미끌한 얼굴이었다. 기조는 최대한 표정을 누그러트리고 그녀의 어깨를 부드러이 쥐었다. 다정했지만 오금이 저릴 것 같았다. 휘청이며 입술을 달싹이자 겨드랑이에 손이 들어왔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남자는 책망하지 않았다. 언뜻 불쾌감이 비쳤으나 그는 노여워하는 대신 연조를 진정시키려 했다. 사지 중 성한 것이 없는 남자가 끅끅대기 시작했다. 연조는 그의 가슴팍을 움켜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겨드랑이에서 손을 빼내 그녀의 귀를 막았다. 이름 모를 사내는 그에게 가려 보이지 않고 귀는 막혔다.

입 모양으로 그가 속삭였다.

‘나가 있어.’

다정한 눈이었다. 왜 다정한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늘 모든 폭력과 그 폭력이 자아내는 참상에서 그녀의 눈을 가리려 했다. 오만이고 위선이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연조는 그가 좋았다. 사내가 괴물이란 걸 알면서도 좋아하는 마음이 커졌다. 어떤 것이 그의 진심인가 계속 헤아렸던 까닭은 결국은 좋아서였다.

사랑해서. 사랑받고 싶으니까. 그의 다정함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으니까.

눈물을 떨어트리자 그가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부드러운 완력으로 연조를 밖으로 끌어내었다. 끈이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다리가 질질 끌리자 남자가 단번에 그녀를 안아 들었다. 연조의 침입으로 휴식이 주어졌던 사내가 다시 기괴한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연조는 버둥거리며 그에게서 떨어져 나오려 했다.

‘죽이지 마.’

‘안 죽여.’

‘그냥 내보내 줘.’

‘그건 안 돼.’

‘그러지 마. 그러지 마. 제발.’

‘나가. 나가서 잊어.’

‘싫어! 싫어! 내가 봤잖아. 내가 봤어. 내가, 내가! 봤는데 어떡해?’

기조가 입술을 다물었다. 화를 내도 별수 없었다. 연조는 억지를 쓰듯 그의 가슴팍을 움켜잡고 흔들었다.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 했다. 남자는 듣지 않았다. 미친것처럼 굴었다. 주저앉아 이름 모를 사내를 놓아달라고 하자 그는 그녀를 일으키는 대신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닦아주었다.

‘저 사람이 누군지 알아?’

모른다. 몰라도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데 두고 볼 수만 없었다. 그는 연조가 사라지는 걸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내가 왜 여기 왔지? 후회가 들었다. 그래도 울부짖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문득 기조의 눈에 이색이 돌았다.

‘내가 저 사람을 살리면 넌 뭘 해 줄 거야?’

없다. 없었다.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연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는 구김 하나 없는 얼굴로 연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래. 없지. 너는 내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하지 않는데……. 그래도 나는 병신처럼 네 말이라면 들어.’

그가 굽혔던 무릎을 폈다. 위압적일 만큼 커다란 사내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물을 매단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그녀를 덥석 안아 들었다. 손을 말아 쥐고 있는 게 어색해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래. 가끔은 궁금했다. 네가 내 억지를 얼마나 받아줄지. 너에게만 통하는 내 권력이 얼마나 큰지. 네게 한계란 없는 것인지. 나는 오늘도 여기서 그것을 확인하려 했는지 모른다. 어쭙잖게도 이것을 사랑이라고 주워 삼키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놀랐지? 이젠 여기 오지 마. 오면 안 돼.’ 어린애를 달래듯 다정한 속삭임이었다. 꿈인 것을 알면서도 깨고 싶지 않았다. 다정하여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반사적으로 눈이 떠졌을 때 주변에 날붙이 따위의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있었다.

흐리멍덩한 의식 속에서 연조가 처음 본 것은 수영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밧줄에 묶여 있거나 혹은 몰골이 상한 채 쓰러져 있으리라 생각했던 수영은 멀쩡히 살아있었다. 게다가 그녀를 반긴 것 또한 기조가 아니었다.

기조가 아니면 누굴까? 연조는 사내들의 중심에서 서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형사란 남자였고 그의 옆에 히죽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는 기조의 측근이었다. 왜 형사와 기조의 측근이 하나의 무리를 이루며 서 있을까. 짚이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상황이 뒤틀려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연조는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그만둔 채 기조를 응시했다. 기조는 피 흘리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피 흘리는 수영보다 피 흘리는 기조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에게서 시선이 떼이지 않았다.

“강 대표. 저기 봐. 강 대표가 오매불망 사랑하는 임이 당신 보고 있네. 하하. 그래도 죽기 전에 눈은 마주치고 가서 다행이야. 응?”

장 형사가 비열하게 읊조렸다. 낮에도 그는 형사 같지 않았는데 지금은 정 부장과 다를 게 없었다. 연조는 눈을 깜빡였다. 비현실적이었다. 꿈속을 헤집다가 온 것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기조가 무릎을 꿇은 채 머리채가 잡힌 모습은…….

남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정 부장이 평상시 끌고 다니던 사내 하나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기조가 눈가의 근육을 사납게 뒤틀었다.

“건들지 말라고 했어.”

“어이.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장 형사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후렸다. 주먹이 아닌 손바닥이었으나 입술은 매한가지로 터졌다. 정 부장의 측근이라는 사내가 몽롱한 눈을 하고 있던 연조를 일으켜 그들에게로 끌고 갔다. 연조는 무릎이 꿇린 채 눈빛만 형형한 사내를 보았다. 수영만큼이나 상해 있었지만 넋을 잃지 않은 채였다.

그러나 연조는 그가 충분히 위태로워 보였다. 고개를 들어 장 형사를 보았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사내가 연조에게 다가와 그녀의 아랫배를 만졌다. 손을 쳐내려 하자 그녀를 끌고 온 남자가 버둥거리지 못하게 했다.

“미안해요. 연조 씨. 송연조 씨한테 유감은 없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이러는 거예요? 당신, 당신 경찰 아니었어요?”

발음이 풀려 엉성했다. 연조는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기조를 흘깃거렸다. 수영에게 무자비한 발길질을 쏟아낼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경찰이란 사람도 이 순경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정 부장이 부리는 용역 깡패들이었다.

그런 무리에서 중심인 듯해 보이는 남자가 장 형사였다. 연조는 덜덜 떨며 그를 노려보았다.

“예. 맞습니다. 경찰 맞는데. 이제 경찰 안 하려고요. 뭐 안 하고 싶으면 안 할 수도 있잖아요? 우리도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돈도 안 되고 허구한 날 몸으로 구르고. 내 애 밴 여자가 내 앞에서 목이 썰려도 내 손으로 죽일 수도 없는데.”

박 경위……. 뇌리에 스치는 이름이었다. 눈앞의 남자가 유독 반응하던 이름. 여자인 줄은 몰랐다. 임신한 줄은 더더욱. ‘애를 밴 여자.’란 말에 기조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움찔 떨더니 이를 갈았다.

“씨발. 진짜…….”

“몰랐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긴 나도 몰랐어. 나도 나중에 안 거. 알았으면 빠지라고 했겠지.”

“애 밴 여자가 깡패 새끼…….”

“연희도 일이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빠졌을 거야. 조심성 없는 여자는 아니니까. 그런데 네가 조선족 새끼들을 보내서 내 여자 목을 썰었잖아. 그렇게 봐 달라고 했는데……. 이인혁 그 씨발 새끼가 우리 연희를…….”

장 형사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그는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기조가 숨을 고르며 그를 살폈다. 왜 연조를 여기로 데려왔나 생각했다. 처음부터 박수영과 손을 잡았다는 말에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경찰 윗선이 아닌 이상 자잘한 협상은 거절하던 그였다. 단순히 테이블로 이끌기 위해 저지르는 일이 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했다. 낌새를 눈치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별수 없었을 것이다. 연조가 끼지 않았다면 넘칠 정도로 이성적이었겠지.

“너…….”

장 형사를 불렀다. 타협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형사가 아니었고 경찰도 아니었다. 그를 이루는 권위는 경찰 내부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빠개질 정도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정 부장의 똘마니가 연조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챘다.

기조는 튕기듯 일어나 정 부장의 명치에 칼을 박았다. 이미 빠질 만큼 기운이 빠졌는데도 완력이 어마어마했다. 강기조는 도착하자마자 정 부장이 부리는 놈들과 맞붙었다. 기운을 뺄 생각이었는지 장 형사는 처음부터 느긋하게 그들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용역 깡패들의 시체가 부둣가 바닥을 굴렀다. 그는 제 손으로 끊은 놈들의 숨을 헤아렸다. 장 형사의 뒤에는 서너 명의 용역들이 더 기립해 있었다.

정가 놈이 명치에 꽂힌 칼을 보더니 낯을 구겼다. 주먹이 날아왔다. 정확히 광대에 명중했다. 타격에도 그는 칼을 휘둘렀다. 날아오는 주먹이 피해지지 않았다. 몇 번을 더 뒤치락거리다 정가 놈의 무릎을 꿇렸다. 목에 날을 댄 채 호흡을 몰아쉬었다.

장 형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팔목이 썰린 정가 놈은 반쯤 너덜너덜한 제 팔을 보더니 피거품을 게워냈다. 장 형사에게선 반응이 없었다. 그는 그대로 놈의 목에 칼을 박았다. 날은 깊이 박혔다. 그대로 썰자 정가 놈의 몸뚱이에 기운이 흩어졌다. 기조는 놈을 버리고 장 형사를 노려보았다. 연조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놈이 장 형사의 눈짓에 그녀를 넘겨준 뒤 자세를 잡았다.

놈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래. 한 놈씩 썰면 된다. 썰어서 으깨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밟아 놓으면 끝이다. 자주 해 온 일이다. 상해에서도, 홍콩에서도. 그는 오랜 시간 죽음과 마주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견딜 수 있었다. 이깟 너덜거리는 육신 따위……. 연조만, 연조만 내보낼 수 있으면, 그러면……. 틈을 보고 있던 놈 중 비쩍 마른 한 놈이 그에게 덤벼들었다. 잽을 날리며 폼을 잡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그는 코와 인중에 주먹을 박았다. 대문니가 으스러지며 나가떨어지자 다른 한 놈이 다가왔다. 그렇게 두 놈이 뒤로 물러섰다.

숨을 끊어야 했다. 주먹이 아닌 칼. 다시 잽을 날리며 들어오는 마른 놈의 겨드랑이를 벴다. 살이 서걱거리며 잘릴 때마다 환희가 들끓었다. 살생에 본능이 끓어오르는 건 아니었다. 놈들을 모두 해치우면 연조가 여기서 나갈 수 있다.

칼이 박혔던 명치가 다시 훼손되었다. 내장을 끊어 놓으려는 듯 놈들은 같은 곳만 노렸다. 피를 토했다. 머리채가 잡혀있던 연조가 울음을 터트렸다.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고 꾹꾹 눌러 참던 게 이 와중에도 보였다. 살아야 하는데 내가 살아야 너를 내보낼 수 있는데…….

쇠파이프가 무릎을 후렸다. 입술을 질끈 물고 그는 한쪽 무릎을 굽힌 채로 쇠파이프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의 저력에 놈들이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셋 중 남은 놈은 이제 둘이었다. 그는 남은 하나의 내장에 칼을 꽂고 장 형사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웃고 있었다. 기조는 가늠했다. 제 너덜거리는 사지와 값을 다한 내장, 바닥이 난 호흡. 어느 것 하나 남자를 당해 낼 여유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 빌자. 무릎 값을 흥정해 본 적 없는 그였으나 누군가의 목숨 앞에서는 난전의 싸구려 지갑 따위보다 못한 게 그의 무릎이니.

“아이를 밴 줄 몰랐다.”

박 경위를 떠올렸다. 그 여자와 장 형사가 침대를 공유하는 사이인 줄은 몰랐다. 알았다고 해도 별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이를 밴 줄 알았다면,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네 여자인 줄도 몰랐다. 정말이야.”

“구걸할 셈이냐.”

장 형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조는 웃었다. 얼마든지 꿇을 수 있었다. 개처럼 기어라고 하면 길 수도 있었다. 그는 장 형사를 당해낼 여유가 없었다. 그의 숨을 끊을 기력이 된다면. 그렇다면 구걸하지 않았으리라.

“나를 죽여.”

연조가 그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발갛게 상기되어 덜덜 떨고 있었다. 목 근처, 살갗이 상한 자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엉금엉금 기었다. 기조는 웃었다. 다정하게, 부드러이……. 그녀가 제 죽음을 보고도 놀라지 않도록. 마음이 상할 필요도, 그로 인해 긴 시간 아파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내 죽음을 취해라.”

“강기조.”

“대신 내 여자를 살려줘.”

“강기조.”

“제발……이렇게, 이렇게 빌게.”

장 형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말이 없었다. 죽은 연인의 흰 얼굴이 무릎 꿇은 사내 위로 그려졌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오기를 기대했다. 죽은 연인의 배 속에 제 아이가 있었단 걸 안 이후로는 더욱. 강기조는 조악한 자다. 자비 없이 사납고 무도한 자였다. 이 서슬 퍼런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곡소리를 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탈진한 것인지 바닥을 기는 꼴이 가여웠다. 그녀가 마침내 남자의 목에 매달렸다. 가시처럼 마른 팔다리가 헤진 몸뚱이를 안았다. 붉은 핏물이 그녀를 물들였다. 너덜거리는 팔이 그녀의 등을 감싸자 그녀가 손을 들어 남자의 잘린 살갗을 더듬었다. 눈물에 젖은 그녀의 뺨이 핏물에 젖은 남자의 뺨과 닿았다.

장 형사는 자신이 주조한 이 비극의 연인이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 연희가 죽어갈 때를 떠올리자 자신이 무척 자비로운 심판자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죽어가는 여자를 안아주지도 못했으니까. 그에 비해 강기조는 이제 곧 죽을 여자를 마지막으로 안을 수도 있었다.

“강기조.”

울고 있는 여자의 뺨을 닦던 남자가 긴장 속에서 그를 응시했다. 장 형사는 표정을 지웠다. 냉엄한 얼굴에 여자가 그를 끌어안은 뒤 그를 노려보았다.

“너는 내게 얼마나 자비로운 자였나? 너는 내게 얼마나 많은 선의를 베풀었어?”

연희는 죽었다. 살아있더라면 그가 죄 없는 여자를 납치해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그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강기조는 제 피 묻은 손과 죄 많은 삶을 원망하여야 한다. 그의 악으로부터 말미암은 일이 아닌가.

그는 여자의 머리채를 한 손으로 잡아채 목을 젖혔다. 여자를 안고 있던 남자가 헛숨을 삼키다가 토해내며 무릎을 폈다. 비명을 지르는 여자의 목에 칼을 댔다. 강기조의 눈이 형형하게 번뜩였다. 그래. 이거다. 질질 짜며 목숨을 구걸하는 것보다 악에 받쳐 길길이 날뛰다 뒈지는 게 더 재밌다. 물론 그 전에 네 계집년 목이 썰리는 걸 봐야겠지만.

“그 걸레짝보다 못한 몸으로 뭘 하려고?”

장 형사가 읊조렸다. 아직 팔팔한 놈 하나가 강기조의 앞을 막았다. 장 형사의 손짓에 그가 강기조를 제압했다.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이 꿇렸다. 희열이 몰려왔다. 이 순간만을 위해 태어나고 살아온 인간처럼 이제 죽어도 좋을 것 같다.

남녀의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여자는 발그스름한 눈으로 눈물을 떨어트렸다. 흰 뺨에 덕지덕지 묻은 핏물이 차츰 굳기 시작할 때였다. 서늘한 날이 여자의 살갗을 그었다. 길게 그은 자국을 따라 힘을 주려 할 때였다.

탕-

적막한 창고 안을 울리는 소리가 명쾌했다. 그는 오른편 가슴을 뚫은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핏물은 빠르게 번졌다. 그런데도 칼의 손잡이를 잡은 손에는 힘이 풀리지 않았다. 죽는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여자의 목에 칼을 박으려 할 때였다. 탄환이 다리를 뚫었다. 털썩. 마침내 바닥에 무릎이 닿았다. 그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이인혁을 응시했다. 날 선 얼굴이었다. 그의 뒤에는 땀에 젖어 비틀거리는 이 순경과 이인혁이 있었다. 무참한 눈이 더는 순하지 않았다. 더 기대할 것도 없다는 듯 비척거리며 다가오는 놈이 이인혁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인혁이 마지막 방아쇠를 당겼다. 장 형사가 바닥에 쓰러졌다. 흐려가는 시야 속에서 강기조가 제 손아귀에 여자를 앗아갔다. 모든 것에서 연희가 겹쳤다. 매초, 매분. 흘러가는 시간 속 여자의 잔상이 그를 흔들었다.

“연조부터 챙겨.”

“씨발. 어지간하다. 진짜.”

이인혁이 그의 넝마 같은 몸을 보더니 혀를 찼다. 다리를 질질 끄는 연조가 그의 옆구리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기조는 겁에 질린 여자의 어깨를 꽉 안더니 ‘다 끝났어.’하고 작게 속삭였다. 이인혁이 구석에 박힌 박수영을 보더니 어깨에 둘러업었다. 연조를 먼저 데려나가려 했으나 무슨 결심이 섰는지 그녀는 기조의 옆구리를 받친 뒤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인혁은 고개를 젓더니 정신을 잃은 수영을 먼저 차에 태우고 다시 돌아와 기조를 부축한다며 밖으로 나갔다.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구급차를 부르며 그가 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탄환이 공기를 가르며 나아가 물체를 파손시키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시너 냄새가 훅하고 났다. 바닥을 기던 장 형사가 비척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는 품 안에서 총을 꺼내 그들에게 보이더니 창고 벽에 세워둔 시너 통을 몇 개 더 깼다. 시너가 바닥을 물들였다. 그리고 막을 사이도 없이 라이터가 던져졌다.

불길이 피어올랐다. 악에 씐 귀신처럼. 너울거리는 불꽃이 악몽을 기어 다니는 악마 같다고 연조는 생각했다. 시너가 바지춤에 묻은 남자의 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벽을 타고 오르는 불길을 본 그는 귀신처럼 웃고 있었다. 거세게 호흡하던 연조가 기조의 팔을 꽉 잡았다.

불길에 싸인 장 형사가 그대로 다가왔다. 사람 같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이 불길에 휩싸이고도……. 연조는 겁에 질려 주저앉고 싶은 걸 참아내며 그를 흔들었다. 문설주에 불이 붙었다.

기조가 불붙은 사내를 노려보더니 이내 문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불이 붙은 문짝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창고를 집어삼키는 불의 속도는 어마어마했다. 불에 휩싸인 장 형사가 기조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연조를 안고 불붙은 사내를 몇 번이나 피해야 했다.

그동안 불붙은 자재가 무너져 내렸다. 장 형사는 불길과 사투를 벌여가며 달려들었으나 끝내 스스로 무너졌다. 남자가 완전히 쓰러지고 나서는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연조는 불길이 붙은 문을 보며 생각했다.

“기조야 미안해. 나 때문에, 내가, 내가…….”

“연조야.”

기조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의 말을 듣는 대신 심호흡하는 것 같았다. 울음이 났다. 남자는 운신할 힘이 없는 듯했다. 커다란 몸이 무너지며 연조까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핏기가 빠진 얼굴이 희고 아름다웠다.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연조는 웃었다. 눈물이 웃음에 맺혔다.

반질반질한 손톱부터 핏줄이 불거진 손등 그리고 손목에 흘러내리는 핏물이 반쯤은 굳어 비린내가 박혔다. 남자의 손가락이 엷게 떨렸다. 연조는 눈을 감았다.

“만져도 돼?”

가볍게 닿으리라 생각했던 손가락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처럼 덥석 쥐는 일도 없었다. 연조는 울음을 터트렸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이 찾아오니 진심을 가릴 수 없었다. 그럴 열의도 나지 않았다. 내 죽음을 취하고 내 여자를 살려달란 말이 떠올랐다. 그에게 죽음이 그렇게 쉬웠나. 잘리고 헤질지언정 굽히는 일이 없던 남자였다. 연조는 무엇이 그를 삶의 끝자락으로 인도했나 생각했다. 그녀가 미련하게도 붙잡고 있던 어떤 것. 그것 때문이겠지.

볼을 흐르는 눈물에 손가락이 닿았다. 연조는 눈을 가리는 물기를 밀어낸 뒤 침을 삼켰다. 마른 입술 사이 더운 숨이 닿았다. 눈을 뜨고 앞을 보았다.

“사랑해.”

그는 울고 있었다. 언제나 독기로 서느렇던 남자의 얼굴은 그 시절 언젠가 그녀가 사랑했던 소년의 얼굴이었다. 비 오는 날. 우산 하나 없이 찰박이며 운동장을 걸어가던 그 꼿꼿한 소년. 파르라니 아름답던 그 애. 빛살 속에서 눈을 찡그리던 그 애.

내내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어느 남자…….

“사랑해. 연조야.”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연조는 눈을 감고 배를 감싸 안았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짓쳐들어오는 불길 속에서 그는 그녀의 볼을 감싸 쥐었다. 남의 숨을 끊느라 밴 질긴 악취가 코끝을 짓눌렀다. 연조는 이제 그것마저 좋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좋아.”

아니. 나는 너를 사랑해. 너를 너무 사랑해서 죽고 싶었어.

“네가 나를 영원히 증오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증오하지 못해서 나를 증오했어. 입술이 떨렸다. 연조는 내리깐 시선을 들었다. 울고 있던 남자가 웃었다. 입술이 겹쳤다. 미열이 그녀를 데웠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덮었다. 경련하던 심장이 평정을 되찾았다.

싸라기눈이 흩날리던 어떤 밤이 생각났다. 창백한 백열등 아래 피에 젖은 소년, 상처투성이로 다가와 그녀의 입술을 훔치던 어떤 무람없는 소년. 귓불이 뜨겁도록 춥던 바람과 눈의 결정이 눈을 뜨게 했을 때 연조는 제 심장 속에서 깨어나던 생경한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기조야.”

“너를 살릴 거다.”

“기조야.”

“반드시.”

비틀거리며 그가 일어났다. 그는 다 헤진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안아 들었다.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무섭도록 단단한 얼굴이었다. 그는 연조를 바싹 안은 뒤 얼굴을 제 가슴팍에 묻고 하곤 몸을 틀어 문짝에 부딪혔다.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조가 악을 쓰며 가슴팍을 잡아 뜯었다. 다시 쿵-하고 울렸다. 그는 문짝이 떨어질 때까지 부딪칠 모양이었다.

“그만해!”

“…….”

“그만해! 기조야! 하지 마!”

닫혀있던 문에 붙어있던 불이 부딪혀 오는 팔에 이어 붙었다. 불길이 그의 왼쪽 팔뚝을 좀먹기 시작했다. 이어 그의 왼 얼굴에도 닿았다. 연조가 비명을 질렀다. 무너지는 자재와 비명 속에 남자가 다시 한 번 들이박았다. 반쯤 휜 것처럼 보이던 문짝이 밖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연조의 시선은 불길이 좀먹는 그의 왼쪽 얼굴에만 박혀 어느 곳으로도 흩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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