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와 나의 반쪽
시희는 뱁새를 닮은 귀여운 아기였다. 눈망울은 맑고 깊으며 매듭지은 꼬리는 붓끝으로 다져 올린 양 새침했다. 피부는 보얗고 숭숭 난 머리털은 솜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웠다. 엷은 윤곽이 그리는 많은 부분이, 틈새와 틈새를 잇는 작은 공간이 모두 기조를 닮았다. 야위고 잗다란 뼈마디부터 동그란 얼굴을 채운 이목구비들까지 전부. 기조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면 꼭 시희처럼 생겼을까?
기조는 분명 우락부락한 남자인데 그를 닮은 딸은 버찌 열매처럼 작고 앙증맞다. 포대기를 안고 길을 건너고 있으면 그녀와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는 모든 사람이 시희를 힐긋거렸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도 그랬다.
아빠를 닮았는데 정말 아빠와 닮지 않았구나.
그게 무슨 말일까? 하지만 시희는 정말로 그랬다. 반달 모양으로 붙은 투명한 손톱까지 기조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지만 정작 그 애를 보고 있으면 누구도 그런 차갑고 서늘한 남자를 떠올리지 못했다. 연조는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시희가 아름다운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 * *
“이거 연희가 태국에서 사 온 거래.”
“망고?”
“건조한 건데 엄청 맛있대.”
포장을 뜯고 기조에게 하나 건넸다. 기조는 살짝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연조는 그의 입에 한 조각 물려 놓고는 식탁을 떠났다. 기조는 습관적으로 그녀 뒤에 졸졸 따라붙었다. 화장실까지 엄마를 쫓아오는 세 살배기 어린아이 같았다.
티브이를 켜지 않고 조용히 잡지 책을 들 때였다. 기조가 슬쩍 잡지 책에 손바닥을 올렸다. 연조는 작게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저녁이면 기조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귀가한 뒤에는 무조건 자신과 놀아야 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안 된다. 꼭 제게만 박아두고 있어야 했다. 물론 시희와 놀아주는 것도 안 된다.
아직 아기인데. 아기라서 엄마든 아빠든 꼭 한 사람은 필요한데 그는 연조의 곁에 붙어있어야 하므로 무슨 일을 하든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시희를 보고 있을 테니까 넌 시희 젖병 좀 씻어.’
라고 말을 했을 때가 떠올랐다. 기조는 컴컴한 눈을 하더니 다음 날 당장 가사 도우미를 구했다. 덩달아 보모까지 구하려 들어 말리는 데 꽤 진을 먹었다. 육아와 살림은 거드는 손이 많아질수록 좋은 법이라지만 연조는 제 영역에 사람을 들이는 일이라면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사실은 내키지 않는 편이라고 해야 옳았다. 게다가 이맘때쯤의 여자들은 친정엄마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았다. 친정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의 여자들도 육아 카페에서 보았다. 하지만 연조는 특별하게도 친정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에 속했다.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찍고 시희를 낳은 뒤 식을 올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엄마와 가까워진 적이 없었다. 식을 올릴 무렵에도 그랬다. 사실은 몇 번이고 엄마가 연락한 적이 있지만 길게 통화하지 않았다.
동생 은조와도 마찬가지다. 연조와 만나면 은조는 늘 멋쩍은 얼굴로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부러 지금에 와서 가까워질 필요 없었다.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식을 치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사실은 반쯤 그렇게 치르기도 했다. 참석자는 아빠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아이를 낳으면. 특히 딸을 낳으면 여자는 엄마를 바라보는 마음에 무궁무진한 감정이 피어오른다고 했다. 그런데 연조는 언제나 똑같았다. 엄마가 가엾지도, 또 특별히 밉지도 않았다. 이제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미움이 미움인 줄도 모르고 서러워 굳은 그대로였다. 이제 와 특별히 미련 가질 일도 없는 사인데.
시희가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아니. 이 애가 연조에게 ‘엄마’ 하고 작게 옹알거리려 하고 나서부터는……. 때때로 무언가 잘못된 거 같다는 느낌도 든다. 시희의 작은 손이 그녀의 심장을 움켜잡고 쥐어짠다는 생각. 딸의 작은 손톱으로는 그녀의 무엇도 흠낼 수 없는데. 이미 생채기가 생긴 것처럼 따갑다.
어쩌면 그래서 시희를 오래 마주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해?”
그녀의 허리를 안은 기조가 조심스레 묻는다. 나란히 앉은 것으로 모자라 엉덩이와 허벅지를 빈틈없이 붙인 기조는 집요하도록 허리며 어깨 따위를 쓰다듬으며 묻는다. 잘생긴 얼굴에는 영락없이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연조는 조용히 눈을 깜빡이다가 손을 들어 잔해처럼 남은 화상 자국을 더듬었다.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말끔히 치료된 반쪽 얼굴이다. 시희가 태어날 때까지 그 꼴을 하고 있으려면 집을 나가겠다고 으름장을 몇 번 놓았더니 해외에서까지 치료진을 데리고 와 표피의 그을은 흔적을 지워버렸다.
“아무 생각도 안 해.”
“…….”
“정말이야. 여기 남은 자국이 있나 없나 보고 있었어.”
기조의 입술이 옅게 비틀렸다. 서느런 기운이 느껴지는 미소에 연조는 손가락을 떼어냈다. 연신 얼굴을 더듬다가 떨어지는 손가락이 낙엽의 조각 같았다. 기조는 맥아리 없이 떨어지는 손가락을 잡아 꾹 힘을 주었다.
“거짓말 아닌데.”
연조가 느리게 읊조렸다. 기조의 눈은 더 밝아지는 일도 어두워지는 일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에 들어앉은 퀴퀴한 어둠들. 시희를 바라보는 연약한 시선. 부러질 것 같은 그 이음새들…….
“있잖아. 아빠가 시희 입히라고 신발이랑 바지 사주셨어. 볼래?”
화제를 전환하려 애써 밝은 얼굴을 한 연조가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서 슬쩍 손을 빼려 하는 연조를 눈치챈 기조가 손에 힘을 풀었다. 연조는 거실 한편에 두었던 쇼핑백을 들고 와 기조 앞에 보여 주었다.
“백화점에서 사셨대. 아빠 동료분이 추천해 주셨다나 봐. 엄청 유명한 브랜드라는데…….”
쇼핑백을 풀고 안에 든 물건을 주섬주섬 꺼냈다. 내복이며 신발, 파스텔 빛 바탕에 딸기 모양이 도트무늬처럼 프린트된 원피스와 항아리 모양의 앙증맞은 바지까지. 꽤 여러 장을 꾸러미로 선물한 것 같았다.
“이거 엄청 귀엽지?”
동그랗게 주름이 잡힌 바지는 진한 나무색에 통이 넓은 바지였다. 연조는 바지를 들어 보이며 귀엽다고 웃었다. 기조는 굳은 얼굴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화사하게 웃는 연조의 뒤로 시희의 작은 칭얼거림이 들렸다.
* * *
시희는 놀라울 만큼 조용한 애였다. 아기인데도 잘 울지 않았다. 아기라면 모두 예민하고 섬세할 줄 알았는데 시희는 정말로 순했다. 기조는 문득 연조도 이렇게 잘 울지 않는 애였는지 궁금했다. 연조는 어땠을까.
연조는 이렇게 작고 어린 아기일 때 얼마나 예뻤을까. 시희를 보다 보면 그것만 궁금했다. 시희가 연조의 어디를 닮았는지. 그가 지금까지 확인하기로는 귓불과 콧등, 도톰한 윗입술이 연조를 닮았다.
뼈마디가 좀 더 여물어지면 연조를 더 많이 닮을까. 연조를 닮아야 했다. 연조를 닮지 않으면 그에게는 무의미한 아이였다. 자식에게 값어치를 매긴다는 게 얼마나 형편없는 짓거리인지 알면서도 기조는 딸의 마디 하나하나에 값어치를 매기고 있었다.
연조를 닮지 않은 부위는 사랑할 필요가 없다. 작은 능선, 그 능선의 굴곡. 모체를 따라 휘어진 부위만이 그에게 가장 사랑스럽다.
“아빠가 미남이어서 그런가. 우리 공주님도 정말 남자 여럿 울리고 다니게 생겼어요. 응? 그렇죠? 우리 공주님.”
등을 토닥이는 보모의 손이 온화했다. 입꼬리를 점잖게 내버려 두면 날카롭기 이를 데 없는 사내라 누구도 쉽게 말을 붙이지 못하는 기조였다. 오수에 빠진 연조를 두고 보모는 기조의 눈치를 보다가 딸의 칭찬으로 적막한 분위기를 깨려 했다.
딸의 칭찬만큼 분위기를 눙치기 좋은 방법도 없으니. 시시때때로 시희를 그렇게 칭찬하곤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쁜 아기는 처음 봐요. 총수님도 그러시죠?”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만큼. 그리하다 보면 시희가 얼마나 그를 빼다 박았는지 알게 된다. 그는 그저 ‘연조의 아기’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아이를 두고. 사실은 별 소용도 없는 자식을 낳았다고 그렇게…….
연조가 이 애를 볼 때 얼마나 아픈 눈을 하는지 안다. 가랑이를 벌리고 정을 싸지른 뒤부터. 그리 버겁게 씨를 싸질러 임신시켰는데. 정말로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낳았는데. 그는 여전히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던 연조를 기억했다.
사람을 묶어두고 생살을 찢는 짓이라면 수도 없이 한 기조였다. 그런데 배 속에 담고 있는 애를 낳겠다고 무슨 짓거리들을 저지르는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기억 속에 연조는 끔찍할 정도로 창백한 얼굴로 울고 있었다. 그의 소매를 붙잡고 살려달란 말을 반복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처음으로 오금이 저렸다. 잘못돼도 한참이나 잘못됐는데 연조의 부모라는 작자들은……. 들뜨고 해사한 얼굴이었다. 병동 벽에 커다란 몸을 기대고 있는 이인혁마저도 느긋한 얼굴이었다. 간신히 밖으로 나와 떨리는 손을 주먹 쥔 기조 앞에서 담배나 한 대 하러 가자는 놈을 사납게 노려봤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부터였나. 그때부터 시희를 좋아할 수 없었나? 모르겠다.
시희를 봤을 때, 그러니까 이인혁의 멍청한 얼굴을 주먹으로 친 뒤 꼬박 하루가 지났을 때. 시희는 그저 연조의 아기였다. 연조가 쑥쑥이라고 태명 지은 아기. 입에 붙지 않아 그는 ‘아기’라고만 지칭했던 그의 자식.
그의 자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바라보는 눈길마저 건조했던 아이. 이젠 입에 발린 말조차 그를 닮았다는 말이 듣기 싫었다. 그는 보모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녀의 품에 안긴 시희는 이제 막 4개월에 접어드는 아기였다.
눕혀 놓으면 눕혀 놓은 대로 누워 있다가 손발을 꼬물거리며 방긋방긋 웃었다. 유치가 나지 않은 입술에 고사리 같은 주먹을 갖다 대며 춥춥 빨았다. 토실토실한 뺨에 연하게 나는 젖내가 달콤했다.
우두커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사랑이 생길 수 없는 아기였다. 사랑해야 하는데 시희가 태어나던 날 밤이 너무 악몽 같아서. 아득하기만 해서. 그에게는 조그마한 기쁨조차 없던 밤이었다. 양수가 터진 저녁부터 연조가 비명을 내내 지르던 자정과 새벽. 새하얗게 물들던 머리와 졸아드는 기도. 넥타이를 연신 풀며 답답한 속을 풀려고 했지만 거세게 맥 치던 심장은 결코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삐걱거리는 그를 돌려세워 상태를 살핀 것은 의사였다. 호흡 때문인지 낯이 창백하다며 그를 살핀 의사는 담배를 물려 하는 그를 저지하고 공황이 온 것 같다는 소견을 내렸다. 시희가 태어나던 밤은 그랬다. 기쁘지 않았다. 사람을 수십씩 썰고 토막 내 공구리치던 인간이 애 하나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공황이 찾아온 밤이었다.
그러니 시희를 좋아할 수 없었다. 들뜬 얼굴로 손녀를 반기던 시희의 외조부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아내를 끌어안고 울음을 참았다. 그저 딸이 태어난 것일 뿐인데. 아내가 찢어지게 울었다. 그녀가 죽어가는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워서. 차라리 그의 나와바리를 먹으려 껄떡대는 종자나 짭새면 그의 힘으로 연조를 구할 수 있는데 그 날 자정, 그를 위협하는 이는 시희였으므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미워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시희는 그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대표님 저, 제가 무슨 실언이라도…….”
소파에 앉아 어둑한 시선을 보내고 있으려니 보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려움이 먼지처럼 낀 보모는 온화한 얼굴의 중년 여자였다. 다년간 이 직종만을 고집해 온 노련한 여자라고 들었다. 여자에게는 악의가 없었다. 현상 그대로를 읊는 것은 죄가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애는 아이 방에 가서 보세요. 아이 엄마 잠귀가 예민합니다.”
“예.”
보모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안고 사라지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딸은 보모에게 얌전히 안긴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 방이라고 만들어둔 침실의 문이 닫혔다. 원목으로 만든 아기 침대와 요람, 서랍장과 모빌로 채운 아기방은 딸이라는 확정을 받았을 때부터 부지런히 채우기 시작한 방이었다.
하나하나 연조가 고른 것들이고 그는 채워지는 것을 우두커니 보기만 한 방. 딸아이를 위한 방인데 그는 여전히 제게 자식이 생겼단 것조차 믿기지 않는다. 마른 얼굴을 몇 번 문지르다가 침실로 들어갔다.
유원지에 가기로 했던 오늘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가늘었던 빗줄기는 정오를 넘길수록 세차게 흩어졌다. 새벽녘 잠자리를 뒤척이던 연조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가 궂은 날씨를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모처럼 만의 외출을 기획하던 기조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상태로면 시희 데리고는 못 가겠다.’
그럼 시희를 두고 가면 되지. 목 끝까지 치받은 말을 삼키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기조는 피곤해하는 연조를 다시 눕힌 뒤 그 옆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희가 칭얼거렸다. 다시 일어나려는 연조를 눕히고 보모를 호출했다.
주말에는 부르지 않기로 연조와 말을 맞췄는데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은 연조를 보면 호출할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연조는 네가 보면 되는데 왜 고용인을 괴롭히느냐는 눈을 했다. 기조는 그 시선을 피하며 시희가 있는 침대로 걸어갔다.
4개월이 지났지만, 그는 딸의 울음을 해석하지 못했다. 연조의 말로는 배가 고플 때와 기저귀가 젖었을 때의 울음이 미묘하게 다르다고 했다. 기조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고양이도 아니고 왜 울음소리가 다르지? 그는 시희를 안아 들며 어색하게 팔을 흔들었다. 시희는 안긴 자세가 불편한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시선을 맞추지 않는 아빠를 보며 보채던 시희가 기침을 했다. 덩그러니 침대에 앉아 부녀를 보던 연조가 걸어와 아기를 안아 들었다.
아기를 안아 드는 손길에는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서느런 얼굴로 핀잔을 주는 일도 없었다. 연조는 이미 그가 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딸을, 시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육아를 거드는 일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그는 부유했으므로 도우미라면 얼마든지 고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주중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부리기 위해 가사도우미를 둘씩 두었다. 모두 이 일이 손에 익은 사람들이었다. 시희를 좋아하진 않지만 잘 키우고 싶은 건 맞으니까. 주말에도 시희를 돌볼 수 있는 보모를 구하려 했다. 연조가 반대하지 않았다면 지금 부른 보모 외의 다른 사람을 한 명 더 구했을 것이다.
보모가 집으로 도착할 때까지 시희를 안은 연조의 곁을 서성거렸다. 연조는 화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속으로 또 무얼 삼키는지 몰라서 두려웠다. 보모는 비 때문에 차가 막혔다며 15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입주를 생각해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조가 말없이 시희를 어르고 있는 시간 동안 그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보모는 알 수 없었을 테니. 그는 얼른 아이를 눈앞에서 치우고 싶어 보모를 침실로 들였다. 연조는 화사한 얼굴로 여자를 반겼다. 둘은 한참이나 궂은 날씨와 도로 사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보모가 시희를 안고 나가자 연조는 잠을 더 자겠다며 침대에 누웠다. 기조는 돌아누운 아내를 바라보다가 끼니답지 않은 끼니를 챙겨 먹고는 다시 그녀의 옆에 앉은 참이었다.
“몇 시야?”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는지 연조가 눈을 떴다.
“두 시 다 돼가.”
“점심은?”
“먹었어. 배고파?”
“아니. 별로.”
“뭘 좀 먹자. 나가서 먹을까? 냉장고에 반찬도 부실해. 시켜 먹기 좀 그러니까 나가서 먹자.”
눈두덩을 손등으로 닦으려 하는 연조의 손을 잡아 내린 뒤 직접 눈을 문질러 주었다. 연조는 얌전히 그의 손길을 느끼다 말고 눈을 떴다.
“비도 오는데 뭘…….”
“야외서 먹을 것도 아니잖아.”
“시희랑 이모님만 남겨두기도 좀 그래.”
연조가 몸을 일으켰다. 기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눈을 본 연조가 잠시 시선을 내리깔더니 다시 대답을 고쳤다.
“그래. 그럼 나가자.”
* * *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분명 차를 끌고 나올 때만 해도 굵기가 잗다랗더니 근교의 드라이브를 계획하고 운전대를 잡자 미친 것처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엔진 후드를 때리는 요란한 빗줄기를 보던 연조가 입술을 뗐다.
“시희를 왜 싫어해?”
차창을 때리는 사나운 빗줄기와 달리 내부는 안락했다. 작은 소음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차체는 크고 넓었다. 연조는 대꾸하지 않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시희는 네 아기잖아. 너를 많이 닮았어.”
“…….”
“게다가 착하고. 너를 좋아해.”
연조는 딸을 떠올렸다. 시희는 착한 아이였다. 세상에 난 지 4개월밖에 안 됐지만 정말로 착했다. 단순히 순해서가 아니다. 시희는 아빠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미워하지 않았다. 엄마니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시희가 기조를 사랑한다는 걸. 그리고 어쩌면 아빠를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자신의 어떤 구석에서 그런 선량하고 아름다운 조각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일까. 연조는 결코 갖지 못했던 사랑과 이해를 시희는 갖고 있다.
“기조야.”
“모르겠어.”
안면을 매끈하고 단단한 재질로 포장한 것 같은 남자가 낮게 대꾸했다. ‘싫어하지 않아’ 라거나 ‘아니야. 좋아해.’라고 대답할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그런 이유로 연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조가 시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장 처음부터 지금까지. 기조의 많은 부분이. 아니. 그가 보여주는 행위 하나하나가, 그 짧지 않은 순간들이 하나의 결론을 만들었다.
‘기조는 시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딸에게 보이는 모든 것이 ‘유감’으로 밖에 비치지 않는다. 연조는 눈을 깜빡였다. 어째서 시희를 사랑하지 않을까. 시희는 그녀보다 그를 더 많이 닮은 아이인데. 심지어 어린 시절의 연조처럼 못생긴 얼굴도 아닌데.
부모라면 잘난 자식이든, 흠이 난 자식이든 함함하다고 했다. 그런데 연조의 엄마처럼 자식이 모가 나면 정을 붙이지 못하는 부모도 더러 있었다. 믿기지 않게도 그랬다. 그런데 시희는 정말로 예쁜 아기였다. 미워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회피하듯 고개를 돌리는 게 이해 가지 않았다.
“시희가 쑥쑥이일 땐 좋아했잖아.”
침침한 목소리로 그를 어르듯 달랬다. 기조는 다시 입을 꾹 다문 채 빗길을 뚫고 지나가는 데 집중했다. 연조는 그를 바라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시희를 가졌을 때를 되감았다. 아이를 원한 것은 기조였다.
아이가 있어야만이 그녀를 묶어둘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 속에는 제 자식을 향한 부성애는 없었다. 그러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막상 태어난 자식에게 애정을 보이지 않는 것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시희가 배 속에 있을 때는 곧잘 애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이렇게 회피성 성격 장애가 찾아온 사람처럼 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배를 안기도 했고, 얼른 보고 싶다며 입술을 맞추기도 했다. 그러니 갑작스레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기조 본인조차 알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시희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말이다.
“나는 당연히 네가 제일 좋아할 줄 알았어. 너는 처음부터 아이를 원했으니까. 나보다 네가 더 많이 사랑해줄 줄 알았는데…….”
연조는 입을 다물었다. 말하다 보니 이상한 모양새가 되는 것 같았다. 부모란 한결같이 자식을 사랑해야 하는데 서로가 가진 사랑의 함량이 더하고 덜하고를 논하고 있으니. 시희에게 미안했다.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연조는 주먹을 꾹 말아쥔 채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시희를 사랑했다. 사랑하는데 가슴이 아팠다. 왜 아픈 건지 알 수 없었다. 시희가 그녀를 닮지 않아서? 아니면 시희가 딸이어서? 시희가 아들이면 그 애를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시희가 그녀를 빼닮으면 지금과는 달랐을까.
지금까지 생각한 적도 없는 가정들이 튀어 올랐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이다. 배 속에서부터 아이가 그녀를 닮지 않길 원한 건 연조였다. 게다가 아들이기보다 딸이길 원했지 않나. 모르겠다. 시희는 부족함이 없는 아이다.
문제가 있다면 연조에게 있었다. 연조가 모자라서. 시희는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그 애는 그저, 그저…….
“시희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볼이 뜨거운 건지 눈물이 뜨거운 건지. 입술 사이 고이는 눈물은 온기를 품고 있었다. 연조는 참지 못해 들썩거리며 울었다. 시희를 생각하면 괴로웠다. 생채기에 소금을 뿌리듯 따끔거렸다.
“……좋아하지 않는 거 알아.”
차가 멈추었다.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지 않고 곧장 레스토랑이 위치한 빌딩 앞에 선 세단이 차분히 직원을 기다렸다. 회전문을 밀고 나온 젊은 남자 직원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차의 문을 연 직원이 기조에게 키를 건네받은 뒤 우산을 건넸다. 기조는 보닛을 둘러 조수석으로 건너가 문을 열었다. 연조의 발이 바닥에 닿을 때쯤 우산을 펼쳤다. 연조는 흥건한 볼을 문지르며 그의 옆에 섰다. 익숙하게 허리를 감아 안은 기조가 그녀를 레스토랑 안으로 에스코트했다.
* * *
레스토랑은 한가했다. 당연했다. 출발하기 전, 전부 비워달라고 했으니까. 사실 대충 유원지를 들른 뒤 여유롭게 식사를 할 생각이었기에 비서를 시켜 레스토랑을 비우라 해두었다. 시희를 보모에게 맡기고 오든, 데리고 오든 주변을 비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빗물에 어깨가 젖은 카멜 코트를 매니저에게 맡긴 뒤 돌아보는 연조에게 의자를 빼주었다. 연조는 실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낙숫물을 바가지째로 들이붓는 것 같은 창밖을 내다보던 연조가 창틀 가까이 옹기종기 앉은 관상식물에 시선을 돌렸다.
기조는 코스 요리를 시킨 뒤 단조로운 표정을 한 아내를 바라보았다. 처음 데이트를 했을 때, 연조는 이 레스토랑에서 가격을 지불하겠답시고 지갑을 꺼내 든 적이 있었다. 그러다 심사가 뒤틀린 기조의 눈총을 받았고 둘의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비틀려 버렸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아무것도…….”
연조가 희미하게 대꾸했다. 기조는 불씨에 타들어 가는 성냥개비처럼 그녀를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전주로 진줏빛 샴페인이 나왔다. 한 번 머금으면 입안에서 스파클링이 톡톡 튀는 논 알코올 샴페인이었다.
처녀 시절에도 알코올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던 연조의 입맛에 맞춘 선택이었다. 몇 모금으로 가볍게 식전주를 비운 둘은 시금치 수프와 트러플 오일 향이 나는 관자 요리를 먹었다. 시희를 임신한 순간부터 부쩍 식욕이 마른 연조를 생각하면 식전주를 단번에 먹어치우는 연조는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기조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식기를 들었다. 관자를 다음으로 그들은 오븐에 조리한 민어와 흑소의 등심을 조리해 레드와인 소스를 곁들여 아티초크와 함께 낸 메인 요리를 먹었다. 연조는 한입씩 부지런히 음식을 씹어 넘겼다.
모두 풍미가 좋은 식재료들이었다. 식욕이 돋는다기보다는 먹어야 한다는 일념 아래 씹어 넘기는 맛들이 나쁘지 않았다. 임신하고 나서부턴 식욕이 줄어들어 뭘 먹든 모래 씹듯 퍽퍽했으니까. 입덧이 심한 편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지도 않았다.
“맛있어?”
“응.”
조각조각 자른 등심 스테이크의 마지막 한 점을 입에 넣었을 때였다. 기조가 물었다. 그의 얼굴은 차 안에서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연조는 우물거리고 있던 스테이크를 삼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기조는 다른 대꾸 없이 와인을 들었다. 붉은 귀부 와인이었다. 마른 입술 안으로 흘러드는 붉은 와인이 새삼 달고 감미로워 보였다. 연조는 망설이다가 손을 뻗었다.
“나도 마실래.”
“시희에게 젖 먹이고 있잖아.”
“한 모금 정도는 괜찮을 거 같은데.”
뻗은 손이 무색하게 기조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버를 불러 논알코올의 와인을 한잔 더 부탁한다고 한 뒤 그녀의 손에 물잔을 쥐여주었다. 잠시 기다리란 뜻이었다. 연조는 그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이럴 때면 시희를 영 좋아하지 않는 건 또 아닌 것 같다. 아이를 안아 드는 손길이 어색해도 아빠는 아빠라고 그리 생각하고 싶었다. 아마도 오늘 칭얼대는 시희를 안는 그의 눈빛을 마주하지만 않았어도.
아니, 그에 밴 감정만 읽지 않았어도 편할 대로 생각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연조는 직원이 내어 온 붉은 와인을 응시했다. 알코올이 함유되어 있지 않은 와인은 과일 맛만이 풍성했다. 한 모금 한 뒤 잔을 내려놓은 연조는 디저트로 나온 셔벗을 먹었다.
가파르게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비강을 흐르는 한 오라기 숨소리가 선명했다. 보모의 품에서 잠이 들었을 시희를 생각했다. 오늘은 시희를 위해 유원지라도 가볍게 거닐 생각이었는데…….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얽힌 남자는 표정이 없었다. 속에서 딱딱하게 굳은 응어리가 지렛대에 푹 하고 찔린 기분이었다. 잠잠한 물의 표면에 돌을 던지는 기분으로 입술을 열었다.
“시희를 왜 싫어해?”
“싫어한다고 한 적 없어.”
“좋아하지 않는다며.”
“그래.”
“기조야.”
“시희는 아기일 뿐이야. 나한테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좁혀진 눈썹 사이가 씰룩거렸다. 정제되지 못한 감정들이 마구잡이로 날뛰기 시작했다. 화내고 싶지 않은데 화가 났다. 그를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연조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말라붙은 입술이 움찔거렸다. 게워내지 못한 감정의 편린들이 마구잡이로 뒤엉키고 뒤엉킨다.
“그렇게 마음대로……!”
불거진 목소리가 레스토랑을 울렸다. 가쁘게 숨을 내쉰 연조는 더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대로 내달렸다. 타고 올라온 엘리베이터를 대신해 비상구 계단을 이용했다. 따라잡히기 싫어서였다. ‘연조야!’ 하고 따라붙는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속을 묵히느라 비좁아진 기도에 불이 붙는 것 같다. 잔여물처럼 남은 귓가를 벅벅 긁었다. 눈물이 났다. 빗물이 쏟아지는 한가운데 선 연조가 내지른 걸음을 멈추었다.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쏟아지는 비에 옷이 젖었다.
기껏 차려입고 나온 니트 원피스가 엉망이 되었다. 숨을 내쉬다 말고 속이 뒤집어졌다. 허리를 꺾고 구역질을 했다. 속에 담아두었던 음식물이 역류할 때마다 입을 틀어막았다. 기조가 먹여준 것을 게워내고 싶지 않았다.
기조가 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소중했다. 시희도 그랬다. 시희가 그녀를 닮지 않았더라도 시희는 그녀의 딸이었다. 그녀의 조각이었다. 그들이 만든 결실이었다. 그런데도 둘 중 어느 누구도 그 애를 사랑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데, 사랑할 수 없는 건……. 그런 건 무슨 해괴한 비극일까. 시희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데 연조는 그 애의 작은 얼굴을 두 눈에 담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그 애를 담은 망막이 시렸다. 배 속에 이고 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막상 태어나 마주 보니 걷잡을 수 없이 커다란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엄마하고 달라. 나는 엄마처럼 내 딸을 키우지 않아. 정말로 아껴 줄 거야.’
그래. 그리 마음먹었던 순간이 있었다. 그리 마음먹었던 순간부터 이토록 형편없이 어그러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부담감이 그녀를 이렇게 망쳤을까. 그리 마음먹었던 이유조차 불순하여 의심해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이젠 나도 모르겠어.’
입을 틀어막고 명치를 움켜잡은 연조의 등에 익숙한 체온이 닿았다. 연조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옆을 응시했다. 우산을 쓰지 않은 기조가 그녀의 가붓한 몸을 안고 있었다.
“토해.”
“길 한가운데잖아.”
굳이 말하자면 레스토랑의 뒤편이었다. 풀이 난 흙도 아닌 시멘트로 깨끗이 덮은 공간에 속을 게워내라니. 그런 추잡한 짓을 저지르고 싶진 않았다.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려니 기조의 팔이 그녀를 이끌었다. 둘은 결국 다시 레스토랑 안으로 돌아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에서는 산뜻한 장미 향기가 났다. 비치한 디퓨저에서 흘러나온 향이었다. 화장실로 들어간 연조는 그대로 게워냈다. 두 눈에 괸 눈물과 코끝에 맺힌 물방울 따위가 꼬락서니를 더욱 우습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비에 온몸이 젖은 채로 레스토랑 화장실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람. 머리가 멍해졌다. 일순 머릿속을 채운 열이 살갗을 홧홧하게 데웠다. 변기 커버를 잡고 일어나려 하는 연조를 기조의 팔이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반쯤 남편의 품에 안긴 채 질질 발을 끌고 나갔다.
“미안. 정말 미안해. 기조야. 내 생각해서 나왔는데 내가…….”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감정의 건더기도 느껴지지 않은 낯이 딱딱했다. 다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알코올을 섭취한 것도 아닌데 모든 게 조절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섧게 울기 시작했다.
“너까지 이러면 어떡해. 너까지 이러면…….”
“이리, 이리 와.”
“너까지 이러면 어떡하냐고!”
“그만, 그만 집에 가자. 연조야.”
머리를 도리질했다. 이 꼬락서니로 들어갈 수 없었다. 연조는 헐떡이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입술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시희에게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할 거야. 나는.”
“알아.”
“알면 다야? 너는 아빤데? 내가 네 딸을 사랑하는 척만 해도 상관없다는 거야?”
“무슨 상관이야! 나한테는 너만 중요한데!”
기조가 소리쳤다. 거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정말로 그밖에 중요한 것은 없다는 태도였다. 연조는 제 맥없이 늘어진 팔을 붙잡은 남자를 망연히 쳐다보았다. 울컥, 울컥 새는 울음이 산발적으로 흩어졌다.
“나는, 나는…….”
“네가 네 엄마처럼 되어도 상관없어. 나한테는 너만 소중하니까. 네가 시희를 영영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어. 네 사랑 안에 사랑은 없고 사랑을 흉내 내는 껍데기만 있다고 해도 개의치 않아. 정말이야. 나는 이렇게 생겨 먹은 놈이라, 강제로 임신시킨 자식에게도 책임감을 느끼지 못해.”
기조가 서느런 미소를 베어 물었다. 연조는 말을 잊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남자의 입술이 연조의 목덜미를 찾아들었다. 하얀 목을 핥은 남자가 움푹 팬 쇄골에 연거푸 입술을 맞추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 괜찮다고 해주고 싶었다. 엄마가 될 필요가 없다고. 원치 않는 너를 강제로 어미를 만든 내가 너에게 그런 가당치 않은 부역을 안기고 싶지 않다고.
애초에 갓난아이를 사랑할 만큼 녹록한 인간도 아니었다. 어차피 사랑하기 위해 갖고 싶었던 자식도 아니었다. 자식을 빌미로 얻고 싶었던 바가 뚜렷했다. 연조를 그런 식으로라도 가질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연조야.”
“나는…….”
“네가 망가질까 무서워.”
* * *
종일을 앓았다.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려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서랍장에 구비해둔 약을 먹고 기조에게 안겨 흐느끼듯 울었다. 진득하게 흐른 땀이 기조의 가슴팍을 축축히 적셨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시희는 사랑하기 위해 가진 아이가 아니라고 말한 기조를 죽이고 싶었다. 뺨을 후리고 목을 할퀸 뒤 눈앞에서 치우고 싶었다.
그러나 연조는 그를 밀어내고 할퀴는 대신 몇 번이나 울면서 다시 말하라고 했다. 시희는 사랑하기 위해서 가진 아이가 아니라는 말. 그보다 더한 모욕은 없으니까. 제발, 제발…….
그렇지만 기조는 대답을 고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한 번쯤 거짓말을 해볼 법도 한데 쓸데없이 완고했다. 그래서 또 죽이고 싶었다.
‘시희는 내가 사랑받고 싶어서 가진 아이야. 그밖에 목적은 없어.’
그러니 사랑하지 않아도 마음이 불편할 일은 없다. 그런 말이었다. 연조는 억을 쓰며 울다가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열을 앓으며 헐떡거리다가 그의 품을 파고들었고 정신을 차릴 때쯤이면 다시 그를 노려보며 밀쳐냈다.
그렇게 지내기를 사흘이 흘렀다. 열이 가신 건 정확히 사흘하고 반나절이 되었을 때였다. 볕이 고르게 내리쬐는 오후. 연조는 오도카니 딸을 안은 남편을 보고 있었다. 연조에게 잘 보이기 위해 딸을 안아 보이는 게 아니라 주중에 부르는 보모가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였다.
아침에 잠시 출근했다가 연조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들어온 남자는 묵직한 차콜 그레이 색의 클래식 슈트 차림이었다. 빈틈없이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가 옹알거리는 딸을 안은 채 연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진맥진하여 쳐다보려니 딸기색 내복을 입은 시희가 손가락을 쪽쪽 빨며 시선을 둥글리고 있었다. 연조는 웬일로 아이를 안고 있느냐는 눈을 했다. 기조는 살짝 낯을 구기더니 이내 다림질한 것처럼 낯을 폈다.
“시어머니가 쓰러지셨다고 잠시 병원에 다녀온다고…….”
“아.”
“두 시 안으로 돌아온다고 하더라.”
“그래서 일부러 온 거였어?”
“그때 동안은 누가 보고 있어야지.”
눈을 깜빡였다. 연조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다가 자리서 일어나기 위해 비척거렸다. 이리 달라는 듯 팔을 뻗자 그는 두 발자국 걸음을 물렸다.
“불편할 거야.”
“좋아하는데.”
“네가.”
“…….”
“시희하고 있는 거 불편해하잖아.”
“연조야.”
굳어진 사위 속에서 시희가 작게 옹알거렸다. 연조는 남자의 짙어지는 눈빛을 겁 없이 받아냈다. 손을 거두고 있지 않자 남자가 다시 입을 뗐다.
“그 정도까진 아니야.”
“슈트 구겨져.”
“상관없어.”
“나 이제 괜찮아.”
채근하며 시희를 받아들려고 했다. 빗속에서 그런 말을 들은 이후로는 기조와 시희를 한 공간에 두고 싶지 않았다. 기조가 시희를 모질게 대할 것 같다거나, 괜스러운 이유로 위협할 것 같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서슴없이 범법을 저지른다 한들 시희의 아빠가 아닌가. 시희는 그의 딸이다. 그 애를 사랑할 수 없어 회피할망정 그 애를 학대하거나 방치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법 안정적인 자세로 딸을 안고 있던 기조가 연조의 옆에 앉았다. 시희를 안으려 연조가 다시 손을 내밀자 그는 그것을 거둔 뒤 제 허벅지에 딸을 앉혔다.
연조의 눈이 남편의 품에 안긴 딸을 좇았다. 잔디처럼 숭숭 난 머리털이 구름 조각처럼 보드라웠다. 그녀의 아이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점심은?”
“열은 좀 어때?”
거의 동시에 터진 질문이 한 데로 엉켰다. 연조는 시선을 들어 남자를 응시했다. 빗어넘긴 머리 아래 반듯한 이마와 매끈한 이목구비가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얼굴이었다. 누가 보아도 젖먹이 딸아이를 둔 아버지로 보지 않을 얼굴이었다.
물이 오를 만큼 오른 한창때의 남자. 왕성히 내뿜는 성적 매력만큼 한창때의 청년으로 볼 얼굴이었다. 얽죽얽죽한 화상을 달고 다녔을 시절에도 여자들의 요요한 시선을 받던 기조였다. 이 매끈한 상판이 여자들을 얼마나 달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시희를 안고 있는 것보다 옆구리에 여자를 낀 모습이 어색함 없이 잘 어울렸다.
“괜찮아졌어.”
“샌드위치랑 커피로 대충 때웠어.”
“제대로 먹지 그랬어.”
씁쓰름한 얼굴로 대꾸하자 기조는 고개를 저었다. 연조는 신물처럼 밀치고 올라온 감정을 가리려 고개를 숙였다. 딸의 통통한 배를 문지르는 기조의 손이 가볍게 그러쥐어졌다.
“연조야.”
“넌 아빠보다 남자가 잘 어울려.”
“연조야.”
“시희를 애써 사랑할 필요가 없다고 그랬지? 흉내만 내도 좋다고.”
“…….”
“나도 그래. 기조야. 나도, 아니 우리 모녀도 너한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사람.”
거칠한 목소리였다. 쇳조각의 끝을 더듬는 것처럼 날카롭고 서늘했다. 연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윽고 끊겼던 말이 이어졌다.
“……돌아버리게 하지 마.”
* * *
갑작스레 시어머니가 쓰러져 병원을 다녀온다던 보모는 두 시를 넘기기 전 돌아왔다. 기조는 그때까지 연조의 옆에서 딸을 안고 어르며 시간을 보냈다. 아마 30분 정도 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연조는 왠지 그 시간에 좀먹힌다는 기분이 들었다. 시희가 울고 보채서 기조가 싫은 내색을 보이면 어떡하지. 기조가 시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그가 아이를 향해 작은 적의를 내보일 때면 가슴이 철렁거렸다. 그 자신조차 완벽히 딸을 사랑할 수 없음에도 그랬다.
기조가 시희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시희는 파란 염료 통에 절어진 것처럼 푸르렀다. 그러다 금방 익은 사과처럼 발갛게 변했다. 의사가 시희의 탯줄을 자르겠냐고 기조에게 물었을 때 기조는 얼이 나가 있었다.
결국, 탯줄을 자른 건 의사였다. 2m에 달하는 키에, 군살 하나 없이 근육으로 다져진 남자가. 그 커다란 덩치의 건달이 딸아이 하나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해 어지럼증과 구역질을 호소했다고 들은 것은 그 날 자정이 꼬박 지나고 나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조가 시희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을 몰랐다. 들뜬 얼굴을 가장하느라 근육을 이완하는 남자가 어색해 보이긴 했지만, 진이 빠져 그렇겠거니 싶었다. 회피가 잦아지고 시희를 보는 얼굴이 늘 어둡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마도 시희가 태어난 지 한 달째 되는 무렵이었을 것이다.
“저녁을 안 먹었다고 들었어.”
“잔다고…….”
“아주머니가 죽 끓여놨어. 일어나. 좀 들고 자.”
“별로 안 당겨.”
이불을 들춰내는 손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화내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뭣 때문에 이렇게 열이 뻗쳤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감정이 실린 손짓에 기조의 낯이 굳었다. 눈 밑이 따끈해졌다. 현관을 가로지르는 기조의 발소리. 이제는 그녀의 남편이 된 남자의 걸음 소리와 체취만으로 맥이 널뛰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윤곽이 뚜렷해지고 자는 척 눈을 감은 그녀의 앞에 익숙한 향수의 향이 진하게 맴돌 무렵 콧등이 시큰거렸다. 연조는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문 채 눈을 깜빡였다. 결국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덮어두고 지내다 보면 모두 해결될지도 모르는 일을 두고 또 망쳐버렸다.
“사람 돌게 하지 말라고 했어.”
“너야말로……!”
턱을 쳐들었다. 눈가가 젖었다. 뭉개지는 눈살과 흐트러지는 호흡이 끔찍했다. 씨근댈 때마다 불쑥 치솟는 열이 단전을 치고 나갔다. 발끝까지 뿌리내려지는 열기에 연조는 입술을 달싹였다. 불현듯, 그의 솟아오른 바지 앞섶이 보였다.
당황하여 어물거리고 있으려니 팔뚝이 잡혔다. 으스러질 정도로 강한 힘이 나란한 어깨에 실렸다. 연조는 당혹감에 남자의 가슴팍을 밀쳤다.
“뭐, 뭐 하는 거야!”
“하고 싶어서.”
“지, 지금 왜…….”
“하고 싶어. 안 한 지 좀 됐잖아.”
탁한 음성이 욕정에 말라 있었다. 놀라 다물어지지 않는 입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연조는 놀라 움찔 떨면서도 그를 피할 수 없었다. 두툼한 가슴팍에서 손을 떼 그의 어깨를 밀 듯이 떼어내려 했다. 남자는 밀려나지 않았다. 연조는 가쁘게 호흡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혀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다물어버릴 생각이었다.
“혀 빨고 싶어.”
더운 숨이 인중과 윗입술에 닿았다. 옅은 소름이 턱을 타고 목줄기를 스쳤다. 말랑한 혀가 연조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을 싣자 색정적인 숨결이 더욱 짙어졌다. 정중히 입술이 열리길 기다리며 아랫입술을 혀로 문지르던 남자가 얌전한 두 입술을 베어 물고 질척하게 빨기 시작했다.
“응, 음……으응…….”
가냘픈 비음이 길게 흘렀다. 어깨를 붙잡은 손에 맥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팔뚝을 쥐었던 손이 부드러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처녀 시절에도 작지 않던 가슴이 풍만하게 영글어 있었다.
기조는 언제나 그녀의 가슴에 밴 젖내가 달다며 좋아했다. 연조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의 얄쌍한 허리를 안고 가슴에 코를 비비는 남자를 보고 있노라면 기묘한 감정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시희처럼 작지도 않은데, 시희를 닮아서 그런가. 예쁘고 어린 기조를 가여워하던 시절처럼 그를 안고 어르고 싶었다. 연조는 언제나처럼 그녀의 가슴을 잡고 진하게 키스해 오는 남자의 목에 팔을 걸었다. 기어코 입술 안을 비집고 들어온 남자가 난잡하게 혀를 얽어 왔다. 타액이 빨리며 치열과 연구개가 쓸리는 감각이 야릇했다.
입안을 묵직하게 채우는 말랑한 살덩이와 높은 체온. 목젖을 간지럽히는 숨과 체취가 발끝까지 찌릿거리는 감각을 선사했다. 제게 목을 감은 연조가 마음에 든 건지 잘생긴 얼굴에 만족감이 스쳤다.
얇은 파자마 속을 파고들지 않고 그대로 움켜잡은 채 살살 젖꼭지를 굴리던 남자의 손이 과감하게 앞섶을 벌리고 손을 집어넣었다. 커다란 손이 함지박을 엎어 놓은 것 같은 가슴을 손안에 넣고 조물거렸다.
말랑말랑한 가슴을 갖고 노는 게 재밌는지 한동안 옷을 벗기지 않고 가슴을 주무르는 여유를 부린 기조가 몹시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손.”
두 팔을 들어 올리란 뜻으로 읊조린 주문에 연조는 순수하게 따랐다. 저항 없이 제게 끌려오는 여자가 귀엽다는 양 기조의 입술이 연조의 볼에 닿았다. 파자마가 벗겨진 연조는 가슴을 고스란히 내보인 채 남자가 하는 것을 오도카니 지켜보았다.
기조의 손이 공기 중에 도드라진 젖꼭지를 문질렀다. 젖무덤을 배회하며 젖꼭지를 튕기다가 꼬집는 손길에 얌전히 모은 가랑이 사이가 움찔거렸다. 구멍에서 찔끔찔끔 흘러나오던 애액이 쉬지 않고 줄줄 흘렀다.
구멍에 힘을 줄 때마다 음부 전체가 뜨뜻한 열에 잠식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 으응…….”
가느다란 교성을 흘린 연조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기조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은 벗지도 않은 채 연조만 벗겨 놓은 남자는 허리에 덮인 이불을 발끝까지 젖힌 뒤 그녀의 나신을 감상했다. 좀체 먹지 않는 게 습관이라 임신 중에도 다소 마른 체구를 유지하고 있던 연조는 시희를 낳은 뒤로는 마론 인형처럼 바짝 마른 모습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가슴은 붓고 엉덩이는 통통해져 그나마 살이 붙은 부위라면 가슴과 엉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리도 예전보다 조금 굵어진 것 같다고 불평을 늘어놓긴 했는데 기조가 보기엔 다리는 그대로였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게 도리어 예전보다 야윈 건 아닌지 염려가 될 정도로 말라붙은 상태였다.
“기조야…….”
젖꼭지를 꼬집어 늘이던 손가락이 잘록한 허리에 앉았다. 연조는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시희를 안고 있던 30분 동안에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슈트의 각을 유지하던 남자였다.
손목에 찬 1억 원에 상당하는 시계부터 맞춤 주문으로 날렵하고 늘씬한 몸을 감싸는 슈트까지. 완고하면서도 금욕적인 인상의 남자가 아랫입술을 혀로 슬쩍 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조는 터질 것 같은 물건을 쳐다보다 말고 두툼한 허벅지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기립한 양물의 선단이 두툼했다. 연조는 넋이 나간 얼굴로 더듬다가 손목이 붙잡혔다. 시커멓게 깔린 욕정이 선득했다. 6개월 만인가.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육욕을 포착한 것. 수시로 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던 양물이었다. 걸신들린 것처럼 외음부를 핥으며 가랑이 사이를 범하려 들어 괴롭던 신혼.
배가 부풀어 제대로 결혼식도 치르지 못하고 신혼집에 들어앉아 서투르게 치대오는 기조의 육욕을 받아내느라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던 날이 떠올랐다. 선단이 조붓한 안을 가르고 들어올 때마다 자궁을 압박하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는 의사의 조언에 기조는 한동안 화장실에서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연조가 두 손을 내밀자 완력을 실은 손이 날아 들어와 그녀를 침대에 쓰러트리고 두 다리를 모으게 했다.
단정히 모은 다리 사이에 양물을 끼우고 피스톤질을 하는 그를 보며 괜스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입으로 해줄까?”
해끗한 얼굴로 물었다.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풀어졌다. 연조는 그것을 허락으로 알고 그의 지퍼를 내렸다. 앞섶을 터트릴 듯 부어오른 양물은 거근이었다. 병원에서 의사에게 그런 권고를 들은 이후로 입이든, 뭐든 양물을 내부로 들이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충동적으로 물은 일이 부끄러워 낯을 붉혔다. 하면 뭘 얼마나 잘한다고. 이런 분야에 날고 기는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한 걸까.
“해준다며.”
우두커니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그가 조급한 낯으로 채근했다. 연조는 꺼떡거리는 거근을 응시하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 나 잘 못하는 거 알지?”
자신이 없어 쪼그라드는 목소리로 읊조리니 그가 입꼬리를 미끄러트렸다.
“네 입술만 빨아도 발정하는 나야.”
한숨처럼 느린 속삭임에 연조가 발그레 붉힌 시선을 떨어트렸다. 방망이처럼 기다란 물건을 손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귀두는 이미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부드러운 표피를 느리게 쓰다듬은 그녀가 입을 벌려 크게 물었다.
“음!”
허벅지가 긴장으로 빳빳이 굳는 게 느껴졌다. 입안을 그득 채우는 부피에 눈이 질끈 감겼다. 눈으로 보기에도 굵다란 물건은 입안을 내어주었을 때 더욱 크게 느껴졌다. 버거움에 입안이 아렸다.
“움직여. 움직여줘. 연조야.”
간절하게 닿는 속삭임에 연조가 천천히 머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혀로 귀두를 굴리며 춥춥 소리가 날 때까지 빨았다. 기다란 선단을 앞뒤로 쓸며 아래 묵직한 주머니를 매만졌다. 쇳소리가 섞인 것 같은 비음이 다문 입술 사이로 거칠게 으스러졌다.
“하아. 으!”
쾌감을 이기지 못한 그가 연조의 머리채를 잡았다. 연신 빨아들이며 머금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던 연조가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상기된 얼굴이 외설적이었다. 시희의 아빠로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그래. 젖먹이. 갓난아기인 시희의 아빠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남자였다.
꿀렁거리며 목구멍으로 들어온 체액을 느낀 연조가 턱을 떨었다. 기조는 아내의 머리채를 잡고 앞뒤로 왕복시키던 손을 놓은 뒤 입안에서 물건을 빼냈다.
“삼키지 않아도 돼. 뱉어.”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니 연조가 그것을 뱉지 않고 다만 입을 벌렸다. 붉고 미끄덩한 혀 안에 남은 정액을 본 기조가 그것을 긁어내려 손가락을 넣자 연조가 잽싸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뭐하는 거야.”
“반은 삼켰어. 삼키는 거 좋아하잖아.”
“누가 그래.”
“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연조는 남편을 들여다보았다. 두 볼에 어린 홍조가 소년 같았다. 단정히 빗어 넘겼던 머리카락은 이마를 반쯤 가린 채 흐트러져 있었다. 머리로 이마를 가리니 괜스레 더 어려 보였다.
“넌 정말 아이 아빠하고는 안 어울린다.”
“…….”
“나쁜 뜻으로 하는 말 아니야.”
“맞아.”
연조가 뒤늦게 해명하려 입을 뗄 때였다. 기조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조의 손을 완전히 감싸고도 한참이나 남는 커다란 손이 그녀의 부푼 가슴을 움켜쥐며 새카만 얼굴로 다가왔다.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까칠한 턱이 쇄골을 덮은 부드러운 살갗을 뭉개고 가슴골을 문질렀다. 연조는 가느다란 비음을 내며 몸을 뒤틀었다.
“맞는 말이야. 나는 젖먹이 애의 아빠가 되기엔 너무 난장맞을 놈이야.”
“아흐응…….”
가볍게 골반을 뒤틀며 몸을 뒤로 물리자 쇳덩이처럼 단단한 몸이 그녀를 내리눌렀다. 젖무덤을 둥글리며 젖꼭지를 튕기던 손이 음부 사이로 미끄러졌다. ‘젖었어.’ 축축한 외음부를 만진 그가 웃음 섞인 속삭임을 흘렸다. 간신히 진정되었던 얼굴이 다시 벌겋게 물들었다. 그의 손이 통통한 음핵을 문지르며 어깨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입안을 범했던 성기가 회음부에 비벼졌다. 연조는 그 감각에 덜덜 떨며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애액이 새는 구멍 안이 옴찔거렸다. 구멍 안이 가려운 걸까. 배꼽에 딱 달라붙어 기립해 있던 거근이 떠올랐다. 입안이 말랐다. 뜨거운 안이 갑갑하게 느껴져 음부에 힘을 줄 때마다 구멍이 옴찔거리며 물을 흘렸다.
“넣어, 넣어줘. 응, 흣.”
엉덩이를 뒤틀었다. 음모가 비벼지는 외음부가 미칠 것 같았다. 열을 타고 운반되는 짜릿한 감각이 그녀를 달뜨게 만들었다. 기둥으로 엉덩이골 사이를 비비던 기조가 낮게 웃음을 터트리며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아흣!”
연조가 날카로운 교성을 내며 가슴을 흔들었다. 한 번에 두 개를 집어넣은 남자가 미끌거리는 구멍 안을 출납하기 시작했다. 6개월 조금 넘었나. 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 기조는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안을 풀기 시작했다. 연조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이 여자의 안에 알알이 깔린 욕정을 알았다. 발정하면 얼마나 예쁘게 우는지. 그를 보채고 채근할 때 얼마나 예쁘게 교성을 내지르는지. 시희를 임신해서 좋았던 것 중 하나는 그녀의 둥근 배가 제 판판한 아랫배에 닿을 때 느껴지는 오르가슴이었다.
제 좆으로 범해 배가 부푼 여자를 다시 범해 구멍 안에 엉망으로 싸지르는 것. 방망이 같은 물건이 구멍을 망가트릴 것처럼 헤집으며 벌건 음순과 음모를 정액으로 젖게 할 때. 부푼 배를 감싼 손등에 입을 맞춘 뒤 다시 한번 범하는 것이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쾌감에 젖어 흐트러진 여자를 내려다볼 때가 떠올랐다.
“네 말이 맞아.”
“기, 기조야……!”
할딱이는 여자의 구멍 안에서 손가락을 뺀 뒤 양물을 밀어 넣었다. 연조의 눈이 커다래지며 입을 벌렸다. 좁은 내부를 가로지르며 가붓한 몸을 안았다. 머리끝까지 치받은 열이 뭉글거렸다.
“갓난애의 아빠가 되기엔 너무 음란하거든.”
“아! 아! 아흑!”
교성이 산발적으로 흩어졌다. 뿌리 끝까지 밀어 넣었던 양물을 빼며 천천히 피스톤질하기 시작했다. 침대에 널브러진 손이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들어 목에 두르게 했다.
“이렇게 야한 아빠가 어디 있겠어.”
“으응, 으응 기조야. 잠깐, 아! 잠깐 흑!”
연조가 개구리처럼 벌린 두 다리를 모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가느다란 다리까지 제 어깨 위에 올린 뒤 용두질하기 시작했다. 도리질하던 연조가 앙알대며 할딱거리기 시작했다.
“앙, 아아! 아흐으! 응, 응! 아…….”
“이렇게 야한 엄마도 세상 어디에 없지. 응?”
연조가 울음을 터트렸다. 자지러지는 것을 막으려 입을 다물려 해도 기조가 손가락을 입에 넣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연조는 그의 팔뚝을 긁으며 구멍을 찢을 듯 부딪히는 양물을 느꼈다. 안을 가득 채우는 성기의 부피가 미칠 듯이 좋았다.
가려움과 갑갑함이 동시에 사라졌다. 그녀는 힘껏 안을 좁히려 애를 썼다. 땀을 이마에 매단 남자가 허리를 튕겼다. 연조는 그를 끌어안고 반쯤 젖은 신음을 내질렀다.
“네 남자인 게 잘 어울려. 이렇게 야해 빠진 인간은…….”
“기조야, 기조야. 흐윽, 제발…….”
근육으로 빵빵한 가슴팍에 말랑한 가슴이 맞닿았다. 매끄럽고 따뜻한 피부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연조는 시희의 아빠보다 제 남자인 게 좋다는 말을 곱씹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6개월 만의 첫 관계는 길고 질척했다. 집이 복층인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시희를 안은 보모가 침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연조는 그의 품에 안겨 자지러지면서도 시희를 떠올렸다. 시희. 시희……. 우리 딸.
* * *
돌아오는 일요일은 볕이 따뜻했다. 먹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푸르고 높았다. 연조는 떠다니는 뭉게구름을 가리키며 시희에게 ‘저건 구름이야. 우리 시희를 닮았어.’ 하고 속삭였다. 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까르르 웃으며 동그란 손을 폈다 쥐었다를 했다.
나름 자랑이라고 엄마 앞에서 잼잼을 하는 게 귀여워 볼에 여러 번 입을 맞추었다. 설탕에 절인 버찌 열매처럼 귀여운 딸. 우리 시희. 연조는 고개를 들어 유모차를 묵묵히 끄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저번 주 일요일 유원지를 가지 못하는 바람에 기분이 엉망이었던 하루를 떠올렸다. 시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색하게 기조는 그 이후로도 아빠로서의 일을 충실히 하려 했다. 이를테면 시희의 기저귀를 간다거나 내복을 입히는 일. 젖병을 삶고 시희를 안는 천을 세탁하는 일. 보모가 가르치는 일 중 어느 하나도 빠지지 않고 소화하려 했다.
그 일을 잘하는 것과 무관하게도 말이다.
“내가 안을게.”
볕이 강해 송글송글 맺히는 땀을 본 기조가 시희를 안겠다고 했다. 연조는 고개를 저었다. 시희가 그녀의 품에서 행복하게 웃는 게 좋았다. 어느 때면 시희를 보는 게 아프다가도 또 어느 때는 마냥 좋았다. 원래 이런 건가.
바람이 불었다. 종아리 사이를 스치는 하늘색 원피스가 하느작거렸다. 시희는 연조의 소매에 달린 작은 프릴을 갖고 노는 중이었다. 얼마 전 아빠가 사준 항아리 모양 바지와 노란 색 상의를 입은 시희는 TV에 나오는 아기처럼 귀여웠다. 긴 속눈썹에 뽀얀 피부. 볕을 받아 다갈색으로 빛나는 검은 머리. 여름에 열린 열매 같은 우리 딸…….
빈 유모차를 끌던 기조가 진한 가을볕에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내리쬐는 볕을 막기 위해 시희의 머리 위에 손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둘은 이름 모를 무성한 넝쿨 식물로 뒤덮인 터널을 걸었다.
식물의 녹음 향기가 짙푸르게 났다. 터널 끝에서 둘은 아이를 번갈아 들며 사진을 찍었다. 미관을 생각하여 색의 배합과 진열에 신경 쓴 화단 앞이었다.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길을 걷는 내내 꽤 더워 그런지 차가운 게 먹고 싶었다. 회오리 감자와 함께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함께 파는 행상을 본 연조가 기조를 보았다. 꽤 지친 얼굴로 중얼거리는 아내를 본 기조가 시희를 받아든 뒤 유모차에 앉혀 놓고 대답했다.
“무슨 맛으로 먹을래?”
“저거 보라색. 블루베리 맛인가?”
색색별로 팔고 있는 아이스크림 중 하나를 가리켰다. 기조는 고개를 끄덕인 뒤 행상 앞으로 갔다. 연조는 잠시 숨을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튀어 오르는 분수의 물줄기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가족, 연인, 친구……. 유리 자갈이 부딪히는 것처럼 튕기는 웃음소리가 행복으로 가득했다.
유모차 안의 딸을 들여다보았다. 긴 속눈썹에 닦아내지 못한 꽃가루가 자그마하게 붙어있었다. 연조는 허리를 숙여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팔랑거리는 꽃가루를 훔쳤다.
“저기…….”
고개를 돌렸다. 연조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휴대폰을 내미는 학생들을 응시했다. 꽤 여럿이 온 것인지 등 뒤에서 사복을 입고 기다리는 남녀 무리가 보였다.
“저기, 저희 단체 사진 좀 찍어 주시면…….”
“아. 네.”
딸의 눈두덩을 훔치던 연조가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앳된 얼굴에 싱글벙글한 기운이 감돌았다. 연조는 조각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학생들을 본 뒤 유모차에 볕이 닿지 않도록 조정했다.
“엄마 잠시 다녀올게.”
유리알 같은 눈이 뛰룩뛰룩 굴렀다. 연조는 화단 옆에 유모차를 세워 놓고 조각상 앞으로 걸어갔다. 대여섯 무리의 학생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포즈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조는 몇 번 셔터를 누르다가 조각상이 나오지 않은 걸 확인하고 멀찌감치 물러나 몇 번 더 찍었다.
대충 찍어도 군말은 없을 테지만 왠지 제대로 찍어주고 싶었다. 학창시절의 추억은 소중한 법이니까. 괜히 교복을 입고 껄렁하게 복도를 휘젓고 다니던 기조가 생각났다. 그 무렵의 기조는 얄밉기 이를 데 없는 애였다. 연조는 셔터를 누르며 지나간 시절의 남편을 떠올렸다.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두면 좋을걸. 기조는 고등학교를 다니다 말아서 졸업앨범에 사진이 실리지 않았다. 유원지며, 놀이공원이며. 그 시절에는 제대로 데이트를 다닌 곳이 없어 사진 하나 간직하지 못했다.
연조는 괜히 그때가 생각나 더 열심히 찍어주었다.
“감사합니다.”
휴대폰을 내밀었던 학생이 다시 휴대폰을 돌려받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사진첩을 확인하고 표정을 구기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이 들었던 연조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마침 기조가 기나긴 기다림 끝에 아이스크림을 받아오고 있었다. 연조는 유모차를 세워두었던 화단으로 갔다.
“시희야. 엄마 왔어.”
다정한 말씨로 딸을 어르려 할 때였다.
두 손을 벌려 엄마를 반길 줄 알았던 아기가 사라져 있었다.
* * *
빈 유모차가 휑뎅그렁했다. 연조는 눈을 깜빡여 두 시간 전 일어났던 일을 되새겼다. 딸을 감싸고 있던 유모차는 여전히 텅 빈 채였다. 연조는 제게 없는 아기의 감촉을 되감았다. 포근하고 말랑한, 달콤한 젖내와 아기의 살에 밴 파우더 향기. 목과 엉덩이를 받쳐 안을 때마다 기대오는 아기의 동그란 머리통.
할딱이는 숨소리, 벙긋한 입술……. 다시, 다시 안을 수 없다면. 아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다시 만날 수 없다면……. 아, 아, 그러면 어떡하지. 그렇게 되면……. 턱이 덜덜 떨렸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피어나는 땀이 살아 움직이는 생물 같았다.
“연조야.”
오금이 후들거렸다. 기조는 곧바로 경찰서로 가지 않았다. 그는 빈 유모차를 보더니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연조는…….
“토할 것 같아? 머리가 어지러워? 응? 병원에…….”
“아, 아기는? 시희는, 시희는 어디 갔는데. 아직도, 아직도…….”
“괜찮아. CCTV 확보…….”
“뭐가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너는 뭐가 괜찮은데! 너는 하나도, 하나도!”
기어코 무릎이 무너졌다. 다시 무너지는 것이다. 다시, 다시……. 주저앉은 채 벌벌 떨었다. 젖은 눈가가 다시 적셔졌다. 연조는 시희가 사라졌던 순간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나씩 떠올리노라면 온몸이 깨질 것 같았다.
비어있던 유모차. 그것만이 선명히 남아 있는 잔상이었다. 뛰어온 기조가 어떻게 연조를 달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잡힌 팔뚝과 어지러이 흘러나오는 말들. 잗다랗게 잘린…….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시희였다. 간신히 기어 엄마를 찾아 헤매는 애를, 그런 애를……. 그래. 그런 애가 혼자 사라질 수 있을 리 없었다. 연조는 미친 것처럼 떨었다. 덜덜 떨며 남편에게 매달렸다. 창백해진 남편은 어디론가 전화했고 곧이어 그들은 어디론가 이동했다.
연조는 제가 뭘 말하는지도 몰랐다. 사진을 찍어줬는데, 그 애들은 학생이었고……. 우리 시희는 걷지를 못해. 우리 시희는 말도 못 하는데……. 시희, 우리 시희.
“너는 걱정도 안 되지? 그렇지?”
“연조야.”
“시희를 좋아하지 않잖아!”
“아니야. 연조야. 그게…….”
“이거 놔!”
우악스럽게 그를 밀쳐냈다. 가쁘게 숨 쉬며 그를 노려보았다. 사시나무 떨리듯이 온몸이 떨렸다. 식은땀이 나자 속이 울렁거렸고 곧장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가물거리며 흐려지는 시야를 몰아냈다.
“시희는 너를 좋아하는데. 정말로, 정말로…….”
그 애는 이상하게도 아빠를 좋아했다. 늦은 시각, 퇴근하는 기조를 반기는 것은 늘 시희였다. 연조는 시희가 옹알거려서. 환희에 차 아빠의 걸음 소리에 옹알이를 하면 그제야 일어나 그를 반겼다.
그런 애였다. 그렇게 조막만 한 애라도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 애의 사랑에는 털끝만 한 불순함도 없었다. 아기니까. 그래 어쩌면 아기라서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그래도 시희 찾아줘. 시희 찾아야 해. 우리 시희…….”
울부짖으며 무너졌다. 그의 어깨에 매달려 무슨 말을 뇌까리는지도 몰랐다. 기조의 팔이 그녀를 받아냈다. 기조는 아내의 손과 다름없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낚시바늘의 촉을 움켜쥐어도 미미한 떨림 하나 없는 손이 병에 걸린 양 떨리고 있었다.
시희의 이름은 ‘사랑’이란 뜻이다. 기조가 지었고 연조가 뜻을 붙였다. 시희의 ‘시’는 베품, 그리고 ‘희’는 기쁨이다. 그들 부부가 오랫동안 어긋나, 서로에게 각인되기를 슬픔과 그리움이어서. 다시 말하면 우리 시희는 오직 기쁨이기만을 바라서. 그들 부부에게는 새로운 기쁨. 새로운 사랑. 그 자체이니까.
시희가 배 속에서 한참 발을 구를 때 지은 이름이라 그들에겐 시희가 태어나기 전부터 익숙한 이름이기도 했다. 한데 막상 시희가 태어났을 때. 연조가 너무 오랫동안 힘겨워해서 기조는 그만 그 애를 다른 이름의 멍울로 되새겼다. 연조가 그 애를 보며 까닭없이 슬피 울 때마다 기조는 연조의 아기집에 시희를 만든 것을 후회했다.
어쩌면 영영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희는 그의 오랜 잘못 중 하나로 여겨지며, 그와 그녀의 멍울로만 존재할 것이라고. 그런데 그때도 시희는 그의 기쁨이 되고자 유치가 나지 않은 입을 벙긋거리며 두 팔을 파닥거렸다.
시희는 사랑이 아닐 수 없었다. 시희는 기쁨으로만 가득 찬 존재이다. 그는 부정하고자 했던 바를, 아이가 태어나고 4개월. 거스르기도 부끄러운 시간을 거슬렀다. 연조의 슬픔을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아악!”
날카롭게 울리는 비명이 귓가에 흩어졌다. 칼을 쥔 여자가 눈을 번득거렸다. 기조는 애써 피를 털어내며 눅눅한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시희가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울지 마. 우리 딸…….”
아이를 달래기 위해 속삭였다. 머릿속에 고인 말. 울고 있는 딸을 잃은 뒤부터는 내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던 한 자락. 속삭임. 우리 딸. 우리 시희. 연조가 낳은 나의 아이……. 그래서 우리 딸이란 말만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우습게도 그랬다. 기조는 자장가처럼 가느다란 음을 넣어 시희를 달랬다. 울지 마. 울지 마 우리 딸. 우리 시희…….
시희가 아빠를 알아본다면, 아빠의 걸음 소리만 듣고도 두 팔을 날개처럼 파닥거리는 애라면, 아빠의 위로를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는 엷게 미소 지으며 와앙 하고 우는 어린 딸을 바라보았다.
확보한 CCTV 속에서 어린 시희를 안고 가는 여자를 추적할 수 있었다. 빗질하지 않은 긴 머리. 목이 늘어난 니트. 수척하고 창백한 안색을 지닌 여자였다. 경찰의 말로는 인근에 사는 주민인 것 같다고 했는데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아이를 잃은 여자일까? 두 눈 속에 얽힌 감정은 난잡했다. 그는 제 손을 베고 지나간 칼을 응시했다.
서툴게 쥔 칼은 식칼이었다. 그래서 경계하지 않았다. 벤 살갗이 익숙하게 아렸다. 그는 시희만을 보았다. 어린 딸 또한 그의 피를 보았을 것이다. 그 순간 시희에게는 누구의 피도 보여주지 않기로 기조는 다짐했다.
시희의 인생에서 그늘은 없으리라고.
어떻게 만든 아기인데. 어떻게 얻은 연조의 아기인데. 시희가 어떤 애인데…….
“이리 줘요.”
“내 딸이야! 우리 애라고! 미친, 미친 새끼. 미친, 죽일…….”
지껄이는 모든 말에 욕설이 섞여 있었다. 입으로 무엇을 내뱉는지도 모르는 여자가 벌벌 떨며 식칼을 치켜세웠다. 피부가 누런 여자는 화장기 없이 수더분한 얼굴이었다. 형형하게 박힌 눈 또한 정신이상자 특유의 광기만 아니라면 순한 눈이었다. 그래서 완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방언처럼 욕설을 내뱉던 여자가 눈에 띄게 불안한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대치 상태가 길어지자 비명을 치며 달아나기 바쁘던 사람들이 카메라를 켜고 그들을 찍기 시작했다.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경찰차가 유원지를 통과하고 있다는 말이 들렸다.
여자 또한 들었는지 시희를 더욱 꽉 안은 채 번득거리는 눈을 내돌렸다. 달아날 기미가 보이는 것이다. 길게 상황을 끌고 싶지 않았다. 여자가 달아날 구멍을 살피고 있는 동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악! 놔!”
칼을 쥔 손을 제압한 뒤 시희를 안은 팔을 뜯었다. 여자가 발광을 하며 그를 떨쳐내려 했다.
“기조야!”
헐떡이며 달려온 연조가 그를 불렀다. 뒤늦게 쫓아온 경찰이 개입을 알렸다. 시희가 자지러지며 열이 오른 얼굴로 목을 꺾었다. 그는 악착같이 들러붙는 여자를 떼어낸 뒤 시희를 안았다. 부어오른 얼굴의 연조가 연방 고꾸라질 것 같은 얼굴로 달려왔다.
내팽개쳐진 여자가 숨을 헐떡이며 바닥을 굴렀다. 기조는 뒤돌아보지 않고 연조를 안았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연조야.”
“기조…….”
꺄아악- 다시 한번 비명 소리가 흘렸다. 연조에게서 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을 빙 둘러싸던 사람들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기조는 비명이 흩어지기 전 제게 달려드는 여자를 목격한 뒤 연조를 밀쳤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칭얼거리는 시희를 가리며 등을 돌렸다.
칼은 정확히 어깨뼈에 꽂혔다. 정신이상자의 힘이 이렇게 좋나……? 푹- 하고 꽂힌 칼이 꽤 깊이 박혔다. 기조는 살의가 끓는 눈으로 여자의 목을 틀어잡았다. 그리고 단박에 조였다. 여자가 호흡을 껄떡거리며 부들거렸다.
“으, 으리 아, 아…….”
거품을 게워내는 입에서 절룩거리는 신음과 함께 아이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기조의 손에 일순 힘이 풀렸다. 여자는 더 저항 없이 눈을 감았다. 머리가 휙 꺾인 여자를 보며 기조는 여자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뒤늦게 찾아온 경찰이 어깨에 박힌 칼과 팔을 타고 흐르는 피를 바라보았다. 기조는 그제야 몰려오는 현기증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 * *
그래. 시희는 사랑이다. 그 애는 축복이었다. 그에게 연조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천사였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시희야 미안해. 미안해. 시희야. 어지러움에 가물거리던 시야가 선명해지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그로부터 기조가 깨어난 것은 반나절이 지나고서였다.
“기조야. 기조야. 괜찮아? 응?”
연조는 아직도 핏물이 튄 원피스를 갈아입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망막에 어린 아내의 윤곽을 확인한 뒤 묵직한 몸을 일으켰다.
“안 돼. 지금 일어나지 마.”
“괜찮아. 이 정도는 별것…….”
“싫어! 내가 못 보겠어.”
연조가 훌쩍였다. 서럽게 붉어진 눈두덩이 왠지 모르게 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조의 아버지마저 빈말로 그녀를 닮았다고 하지 않은 시희인데. 단풍 모양의 작고 앙증맞은 손가락마저 그를 닮아 속이 쓰리던 시희인데.
그런데도 훌쩍이며 눈가를 붉히는 모습만은 연조를 닮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쑥쑥이하고 닮았네.”
“무슨…….”
오랜만에 나온 태명에 연조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기조는 매시근한 몸을 다시 자리에 눕힌 뒤 연조의 발그스름한 눈두덩을 쓸었다.
“우는 얼굴.”
“아…….”
“아까도 그랬어. 그래서 못 보겠더라. 칼에 벤 것보다 시희가 우는 걸 더 못 참겠어.”
연조가 입을 다물었다. 기조는 다시 울음이 끓는 하얀 얼굴을 바라보다가 팔을 벌렸다. 연조의 일그러진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기조는 그녀가 제게 파고들기까지 기다렸다. 눈물을 슥슥 닦은 연조가 기조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울지 마.”
“…….”
“아파.”
“흐윽…….”
연조의 마른 등이 들썩거렸다. 기조는 차분히 등을 토닥이며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연조야. 네가 울면 아파. 어릴 때부터 그랬어. 그래서 시희가 우는 것도 못 참겠어. 시희가 너를 울리는 것도 못 참고.”
“시희는, 시희는.”
연조가 고개를 들었다. 기조는 쓰리게 웃었다. 연조의 젖은 입술이 파드득 떨렸다.
“내가 잘못해서 그렇지?”
“아니야.”
“내가 시희가 태어나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네가…….”
연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조는 눈을 깊게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는 일어나 연조를 안았다. 자식을 사랑하는 데 한 점 불순한 감정이 없어야 한다는 연조였다. 엄마처럼, 그녀를 길렀던 여자처럼 모르는 사이 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언제나 경계하는 일은 그런 일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희에게 나쁜 엄마가 되고 싶지 않은 것. 시희가 오직 기쁨만을 베풀 듯. 연조는 시희에게 오직 사랑만을 베풀고 싶었다.
“연조야.”
“시희가 날 힘들게 만든다고 생각해서…….”
연조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기조는 물끄러미 여자를 응시했다. 그 모습도 시희를 닮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딸의 작고 사소한 모든 버릇이 연조를 닮은 것 같다. 기이하게도 생김새는 기조를 닮았는데 사소하고 자잘한 모든 행위가 연조를 닮아 있었다. 그는 입술을 말아 올렸다. 짙은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지금도 시희를 사랑해, 연조야. 시희가 어렵지만. 너와 시희를 위해서 목숨도 내어줄 수 있어.”
불안하게 흔들리던 연조의 눈이 단단해졌다. 탁한 빛이 휘돌던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창백해진 연조에게서 빠른 호흡이 쌕쌕 새어 나왔다. 기조는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다 말고 젖은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볼 전체를 감쌌다.
“너의 아이니까.”
“…….”
“너를 닮은 내 반쪽이니까.”
너와 나의 반쪽이지. 시희는 우리 모두의 반을 갖고 태어났지. 그러니 우리 부부의 기쁨이고 사랑이다. 당연한 사실임에도 기조는 부풀어 올랐다. 연조의 축축한 눈동자가 그의 입술에 닿았다. 둘은 곧 입술을 겹쳤다. 말캉한 내벽을 따뜻한 혀가 쓸고 지나갔다. 연조는 그의 목을 깊이 끌어안았다.
“사랑해.”
입술이 잠시 떨어진 사이 연조가 속삭였다. 기조는 그녀의 등을 꽉 끌어안으며 그녀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셨다. 딸에게서 나던 달콤한 젖내와 포근한 파우더 향기가 그녀에게서도 꼭 같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