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악당들 012화
4. 사우스하버(3)
무릇 양심이 없는 장사치란 도둑놈 이나 사기꾼과 다름없는 법!
인터넷도 없는 세상에서 믿을 만한 상인을 찾는 것은 무지하게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엿 같은 중세시대라 서 경찰도, 검찰도, 금감원이나 공정 위도 없다.
한마디로,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 도 사정(司正)을 해줄 사람이 없다 는 말이다!
유일한 길이라고 해봐야, 도시의 지배자인 성주를 찾아가 사정해 달 라고 사정사정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이방인을 위해 우리 성주 나리께서 대뜸 사정 을 해줄 리가 있겠느냔 말이다.
그러면 대체 이곳, 사우스하버에서 어떻게 뒤통수를 간수한단 말인가?
내 고민을 들은 엘렌은 명쾌한 대 답을 내놓았다.
“기대를 안 하면 돼.”
“ 응?”
심각한 고민에 비해 답이 너무 간 단명료한데?
엘렌과 나는 지금 광장을 지나 교 역소로 향하고 있었다. 하수도에서 쓸 물품을 사두기 위해서였다.
“왜? 어려워?”
음, 녀석의 표정을 보니 인증을 때 리고 싶은 욕구가 치솟는군.
목을 꺾어 올려다보면서도 저렇게 깔보는 시선을 연출해 낼 수 있다 니, 저건 재능이다.
“설명이나 제대로 하고 말해. 기대 를 안 한다니?”
“사람에 기대하지 말라고. 다른 사 람을 다 강도나 살인자라고 생각하 고 행동해. 그럼 편하잖아.”
“…굉장히 극단적이구나, 너.”
끽해야 중고딩, 한창 자라나는 새 싹 같은 녀석이 분위기는 거의 이혼 을 세 번쯤 겪은 아줌마 같다. 이 녀석, 삶이 꽤 고되긴 했나 보다.
어깨를 접어 인파를 가르면서도 나 는 문득 미간을 좁혔다.
“잠깐. 혹시 나도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하고 있는 건 아니지?” 이 썅, 아니, 귀여운 녀석이….
30년 일생 범죄는커녕 벌금, 과태 료 한 번 물어본 적 없는 내게 이 런 대우라니.
“너 진짜 너무한다. 서로 목숨을 빚진 사이인데 너무하는 거 아니 냐?”
“…걱정하지 마. 넌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뭐?”
이런 예쁜 말도 할 줄 아는 녀석 이었구나?
나는 어쩐지 감격스러운 기분에 녀 석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뭘 봐. 길 막지 말고 빨리 가기나 해.”
크, 방금 입술 삐죽거린 건 조금 귀여웠다.
그래. 스킬 좀 못 쓰면 어떠냐? 귀 여우면 됐지.
사실 누구든 의심해 보라는 엘렌의 말이 그렇게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뭐든 경계하고 의심하면 뒤통수 맞 을 일은 별로 없겠지. 근데 그렇게 만 해서 어떻게 거래를 하겠냐고.
그래서 나는 여관을 나서기 전에 이미 다리아에게 상인들의 평판에 대해서 물어본 터였다.
-잡화상은…… 교역소 앞에 있는 ‘오레그’ 할아버지가 이것저것 많이 팔긴 해. 우리 가게도 자주 이용하 거든.
게임과 현실의 차이점이 좀 많아서 걱정스러웠는데 오레그는 그대로였 다.
게임 속에서 오레그는 사우스하버 의 유일한 잡화상 NPC다.
현실에선 오레그 말고도 잡화상이 여럿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문제는 대장간이었는데, 다리아가 잘 모르는 건지 아니면 기억하지 못 하는 건지 낯선 이름들만 말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게, 다리아는 여 관 점원이다. 갑옷이나 무기와 인연 이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리아가 아는 야장들은 끽 해야 경첩이나 자물쇠를 취급하는 정도였다.
물론, 그 야장들도 쇠붙이를 어느 정도 다루긴 하겠지만 내 목적은 새 장비를 사는 거란 말이지.
그래서 잠깐 망설이다가 태연한 어 조로 물어보았다.
-혹시 ‘일튼’이라는 장인은 몰라?
게임 속에서 일튼은 온갖 장비를 사고팔며 수리도 해주는 NPC다.
일반 아이템을 주로 팔지만, 가끔 매직 아이템도 만들어 파는 녀석이 니 현실에 존재한다면 엄청 유능하 고, 그만큼 유명한 녀석일 터였다.
근데….
—일튼... 일튼? 글쎄? 잘 모르겠 어. 뭐, 내가 도시의 모든 사람을 아는 건 아니니까.
이상하다. 왜 모르지?
내 기억이 잘못된 건지, 아니면 게 임과 현실의 차이인지는 모르겠지 만….
일단 유능한 대장장이를 찾는 게 급선무가 되었다. 그러다 영 아니다 싶으면 게임 속에서 일튼이 있던 장 소에 한번 가볼 셈이었다.
어쨌든, 엘렌과 나는 여관을 나온 지 십여 분 만에 오레그의 잡화상점 에 도착했다.
나는 상점 앞에 서자마자 코를 틀 어쥐었다. 꼭 음식물 쓰레기와 흑염 소 탕약을 섞어둔 것 같은 기괴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약초를 달이고 있나 본데.”
본능적으로 코를 틀어쥔 나와는 달 리 엘렌은 코를 씰룩거리며 오묘한 냄새를 음미하고 있었다.
“약초? 어우, 지독한데.”
“마력 재료를 사용한 게 분명해.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아.”
녀석은 그런 말을 남기고 상점 안 으로 쓱 사라져 버렸다.
나도 이 정도 냄새 가지고 엄살을 부리고 싶진 않았기에 뒤따라 들어 갔다.
가게에 들어서니 화로와 풀무, 유 리병, 놋쇠 항아리, 국자 등 잡동사 니가 가득 쌓인 테이블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테이블 곁에는 커다란 솥이 걸려 있었는데, 뭔가 딱 봐도 걸쭉하고 유독해 보이는 액체가 팔팔 끓어오 르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칸칸 이 나뉘어 있는 높은 선반이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음, 고물상 내지는 헌책방 같은 풍경이다.
엘렌과 함께 가게 내부를 구경하고 있는데, 테이블 뒤쪽의 선반 사이에 서 한 노인네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로브를 입고 갈색 모자를 쓴 깡마른 노인이 었다.
“누구야?”
“물건 좀 보러 왔는데요. 오레그 씨 맞으시죠?”
“•••뭐야, 용병이냐?”
“하하, 맞습니다. 뱃고동 여관의 다 리아 양이 추천해 줘서 왔습니다.”
노인을 대할 때는 닥치고 공손하 게, 그리고 웃는 낯으로 대하는 것 이 최고였다.
물론 내가 아쉽지 않은 상황이라면 ‘할아버진 뭔데 초면에 반말을 하세 요?’라고 지껄여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내가 아쉽단 말이지.
그러나 오레그 씨는 내가 영업용 미소를 짓든 말든 경계심 어린 눈으 로 우릴 지그시 살피더니 돌연 로브 를 확 젖히는 것이었다.
“자, 보이지?”
“예?”
오레그 씨는 주름지고 가느다란 손 가락으로 로브 안쪽에 주렁주렁 매 달린 유리병과 구슬들을 가리켜 보 였다.
유리병은 하나같이 불그름하고 끈 적거리는 액체로 채워져 있었고, 유 리인지 수정인지 모를 구슬은 갈색 빛을 띠고 있었다.
“불꽃 나무 기름이랑 폭발 오브다. 개짓거리 하면 이 일대가 날아갈 테 니 그런 줄 알아.”
..•이런 간지 나는 캐릭터였어? 전 혀 예상치 못한 대사인데.
그리고 다리아, 나 좋아하는 거 아 니었나? 이런 미친 사람을 소개해 주다니, 두고 보자….
어쨌든, 나는 질린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표정을 살핀 폭탄마, 아니, 오 레그 씨는 로브 자락을 여미며 질문 했다.
“뭘 사러 왔는데?”
“아, 여기……
나는 품속에서 주섬주섬 천 조각을 꺼내 들었다. 구입할 물품을 적은 것이었다.
오레그 씨는 잠시 천 조각을 살피 더니 하나씩 물건을 꺼내기 시작했 다.
“하수도에 갈 모양이지?”
“아, 네.”
어떻게 알았지 싶었는데, 사실 지 금 도시의 상황을 보면 용병이 랜턴 에 기름을 가득 들고 갈 만한 곳은 하수도밖에 없긴 했다.
밤에 도시 밖을 나간다는 건 미친 짓이니까.
“그럼 랜턴은 황소눈 랜턴으로 가 져가. 하수도 건너편 정도는 충분히 비춰줄 거야.”
“아, 네. 그걸로 주십쇼.”
“랜턴 기름은 두 병이면 충분할 테 고. 횃불은… 젖을 수도 있으니 송 진보단 유황으로 만든 게 낫겠군. 포장을 벗기는 게 귀찮고 빨리 꺼지 긴 하지만 아예 못 쓰게 되는 것보 단 나으니까.”
오레그 씨는 까칠한 말투를 쓰면서 도 세심하게 물품을 골라주었다.
초면에 협박부터 하는 걸 보곤 까 칠한 틀딱이다 싶었는데, 내 오해였 나 보다.
나와 엘렌은 오레그 씨를 도와 가 죽 배낭 두 개에 물품을 나누어 담 았다. 밧줄 뭉치까지 담을 즈음 오 레그 씨가 말했다.
“지도는 지하 2층 것밖에 없다. 1 층은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으니 상 관없고, 3층 아래로는 되도록 가지 마. 위험한 놈들도 종종 나오니까.”
하수도는 캠페인마다 구조가 랜덤 하게 생성되지만, 최소 5층에서 최 대 8층짜리 규모로 형성된다.
그리고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비밀 통로는 하수도의 규모에 따라 3층에 서 6층 사이에 위치한다.
그래서 오레그 씨의 조언은 나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일단 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한 번에 4층까지 내려갈 생각은 없기도 하고. 너무 위험해.
“조언 감사합니다.”
“건량은 여기서 찾지 말고 술 취한 조랑말 주점에 가서 알아봐. 거기서 선원들에게 비스킷을 파니까. 그런 데 이게 끝인가? 약은 필요 없어?”
약이라고? 설마?
“혹시 포션도 있습니까?”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내가 연 금술사도 아닌데 웬 포션을 찾아?”
오레그 씨는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국밥집에서 스테이크를 주문하면 비슷한 반응이 나오겠군. 그럼 그렇 지. 괜히 기대했다.
“그럼 어떤 약이 있죠?”
“어디 보자… 일단 랫맨이 가끔씩 창촉에 독을 바르는 경우가 있으니 해독제가 필요할 거다. 이거면 어지 간한 마비독은 다 해독할 수 있을 거야. 혹시 송장벌레를 만날지도 모 르니 신경독용 해독제도 챙겨가고.”
“신경독이요?”
“…네 녀석, 용병 아니냐?”
오레그 씨의 반응에 엘렌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 옆구리를 찔렀다.
“뱀이나 거미 독 같은 거. 무식한 티 좀 내지 마.”
“모르면 물어볼 수도 있지! 원래 질문을 해야 배우는 법이라고.”
한심하다는 듯 우리를 바라보던 오 레그 씨가 지저분한 테이블 아래에 서 바구니를 꺼내며 말했다.
“지혈제랑 연고도 가져가. 직접 만 든 거지만 나쁘지 않을 거야. 붕대 는 있고?”
“어… 붕대도 주십쇼.”
오레그 씨는 조그만 종이봉투와 도 자기 병, 붕대까지 배낭에 넣어 주 고는 엘렌을 보며 물었다.
“거기 꼬마는 마법사인가?”
“•••관심 꺼요.”
캬, 역시 질풍노도의 사춘기 소녀 란 정말 대단하구만. 저 폭탄마 할 아범에게 이렇게 쿨한 반응이라니.
나는 팔꿈치로 엘렌을 툭 치며 웃 는 낯으로 말했다.
“아하하, 예, 맞습니다. 어려 보이 지만 아주 똑똑한 녀석이죠.”
“......흐 ”
신중한 눈으로 엘렌을 훑어보던 오 레그 씨는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더 니 끄덕거렸다.
“그래, 관심 끄지. 자, 다 해서 은 화 넉 닢.”
“예? 네 닢이요? 뭐가 그리 비싸 답니까?”
이런 미친, 예상한 것보다 네 배나 비싸잖아? 물론 물건이 추가된 게 있긴 하지만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경악한 표정을 짓자, 오레그 씨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럼? 육로도 해로도 막힌 상황인 데 물건이 제값일까? 흥정할 생각일 랑 말고 돈이나 내놔. 아니면 그냥 나가던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걸 어떻게 한다?
게임이 공인한 사우스하버 대표 잡 화상인 데다가, 세심하게 골라주는 걸 보니 그렇게 나쁜 할아버진 아닌 것 같은데… 설마 이거, 바가지 쓰 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엘렌이 불
쑥 말한다.
“그냥 내. 어쩔 수 없지.”
“뭐? 야, 아직도 살 게 얼마나 많 은데……
“그럼 어떡해? 장화 한 켤레 산다 고 필수품을 안 살 수는 없잖아.”
“그렇긴 한데, 내 말은……
나는 오레그 씨의 눈치를 보며 조 그맣게 말했다.
“야, 지금 이게 시세에 맞는 건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확인이라도 해 봐야 할 거 아냐?”
“괜찮아. 바가지면 가게를 통째로 불태워 버리면 되니까. 마침 탈 만 한 물건도 많네.”
“야, 야!”
엘렌은 들으라는 듯 험한 말을 지 껄여대었다.
이 녀석, 왜 괜한 소릴 하는 거야?
이를 들은 오레그 씨는 차가운 미 소를 지으며 엘렌을 노려보았다.
“우리 마법사 꼬맹이는 폭발 오브 가 뭔지 모르나 보군?”
“느그 노친네는 마도구가 뭔지 모 르나 보죠?”
당돌한 엘렌의 대답에 오레그 씨는 딱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둘의 시선이 부딪치며 마치 스파크 가 튈 것 같았다. 나는 당황한 채 둘의 신경전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하, 진짜. 엘렌 이 녀석은 또 뭘 믿고 이렇게 나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