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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당들-48화 (48/547)

나의 악당들 048화

13. 젊은 사자의 군대(3)

“야, 포이!”

꽁무니를 빼는 마적들을 살피던 와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렌? 어디 다친 데 없어?”

“너, 내가 분명히 말했는데 또 혼 자서-”

무어라 씨근덕거리던 녀석은 주변 을 돌아보며 뒷말을 삼켰다.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엘렌 뒤로 루 크 씨와 아르날도 모습을 드러내었 다. 다행히 별달리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한숨으로 화를 삭이던 엘렌은 내 상태를 보곤 하얘진 얼굴로 더듬거 렸다.

“-너, 너 괜찮은 거야?”

녀석이 놀랄 법도 한 것이, 나는 창에 찔리고 화살에 맞아 만신창이 가 되어 있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 상하지 않을 모습이었지만 질긴 생 명력 덕에 아직 버틸 만했다.

‘괜찮겠냐?’라는 말을 삼키며 허벅 지에 박힌 화살대를 부러뜨리곤 포 션을 꺼내려는 엘렌을 만류했다.

“끄응, 됐어. 죽을 정도는 아냐.”

“그래도,”

“됐다니까. 그라니아는? 그라니아 못 봤어?”

내가 두리번거리며 묻자, 옆에서 한 사내가 투구를 벗으며 피식 웃음 을 터뜨렸다.

“하, 전우애가 대단한 친구로군. 다 친 용병은 사제의 천막으로 후송되 었을 테니 걱정 말게.” 방금 나를 태워주었던 바로 그 기 사였다.

나는 금장식을 한 기사가 그의 이 름을 불렀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란델 경. 덕분에 살았 습니다.”

란델 경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 니 쓴웃음을 지었다.

“뭔가 오해를 했나 보군. 나는 기 사가 아닐세. 일개 병사일 뿐이지.”

“•••네?”

기사도 아닌 일개 병사가 판금갑옷 으로 중무장을 하고 말을 탄다고?

내가 이해하지 못한 기색을 보이자 란델 경, 아니, 란델 씨는 이상하다 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칼밥깨나 먹은 용병인 줄 알았더 니, 기사를 본 적이 없나 보군?”

“어, 그게-”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다 들 따라오게. 주군께서 찾으실 테니.”

그렇게 말한 란델 씨는 동료에게 말고삐를 건네곤 걸음을 옮겼다. 그 러자 잠자코 서 있던 아르날이 잽싸 게 다가와 내 왼팔을 어깨에 둘렀 다.

“ 괜찮아?”

“윽, 혼자 걸을 수 있는데.”

“바보 같은 소리. 그러다 상처 덧나.”

괜스레 이쪽을 흘겨보는 엘렌의 시 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르날은 조 용히 속닥거렸다.

“고마워.”

“뭐가.”

“그라니아. 버리지 않아 줘서 고맙 다고.” “고맙긴. 당연한 일을 한 건데.”

“•••낯간지러운 소리를 겁나 자연스 럽게 하네.”

어깨동무인지 팔걸이인지 모를 부 축을 받으며 곁눈질로 주변을 살펴 보는데, 아르날은 씨익 미소를 지으 며 입을 열었다.

“기사들은 저쪽이야.”

“응? 그럼 이 사람들은……

“귀족 나으리들의 가병이거나 뭐 그런 거겠지.”

란델 씨를 제외한 여섯 중장기병은 마장으로 말을 끌고 가 고삐를 걸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모양의 갑 옷을 입고 있었는데, 사슬갑옷 위에 철판 여러 개를 이어붙인 무장을 한 채였다.

기사로 보이는 이는 총 여섯이었는 데, 화려한 망토를 두르거나 방패에 문장을 새겨 넣은 채여서 특히 눈에 띄었다.

잘 살펴보니 중장기병들과는 달리 각자 개성적이고 맵시 있는 판금갑 옷을 입고 있었다.

양손검을 휘두르던 안키르와 터프 한 찌르기를 선보이던 푸른 망토는 역시 기사였다.

그들은 다른 중장기병 내지는 다른 부하들에게 마갑을 두른 말을 맡기 고 주둔지 중앙의 막사로 향하고 있 었다.

기사들의 갑옷을 구경하는데, 오른 쪽에서 불쑥 금색 머리칼이 솟아올 라 왔다.

“포이, 저기 봐.”

“응? 뭘?”

엘렌은 눈짓으로 옆에서 나부끼고 있는 깃발을 가리켰다.

황금사자의 문장을 새긴 깃발이었다.

“여기 왕족이 있는 게 틀림없어.” 나는 그제야 이 장소의 명칭을 기 억해 냈다.

‘왕자의 주둔지’.

이름과는 달리 게임 속에선 여기서 왕자를 만날 수 없었다.

플레이어가 주둔지에 도착했을 때 는 하필 왕자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 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레이어에게 성주의 서신 을 전달받은 건 ‘오만한 라이암 경’ 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이곳은 수도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었다. 고귀한 왕족이 이 렇게 먼 곳까지 군대를 이끌고 오는 경우는 무척 드물 터였다.

아니, 드문 정도가 아니라… 내가 알기로 이런 상황에 처할 만한 왕자 는 하나뿐이었다.

시나리오를 읽지 않은 탓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 짐작이 맞 다면 이 주둔지의 주인은-

“무기를 꺼내시오.”

막사를 지키고 선 병사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나와 일행은 순순히 무장을 해제한 채 커다란 천막에 들어섰다. 천막은 열댓 명의 사내들로 가득 차 있었다.

판금갑옷을 갖춰 입은 기사가 일 곱, 로브를 걸친 마법사가 둘, 원이 덧붙은 정십자를 목에 건 성직자가 하나, 접시처럼 생긴 넓적한 투구를 쓴 병사가 셋, 깔끔한 복장의 하인 이 둘.

천막 안을 재차 둘러보았지만, ‘왕 자스럽게’ 차려입은 이는 없었다.

내가 두리번거리는 모습에 한 기사 가 면갑을 올리며 우렁찬 목소리로 물었다.

“뭘 찾고 있나, 친구?” 그는 양손검을 휘두르던 거구의 기 사였다. 언뜻 봐도 나보다 키가 반 뼘쯤 큰 것 같았고, 옆으로도 상당 히 퍼진 체형이었다.

수염을 지저분하게 길렀고 얼굴엔 흉터가 가득해서 무척 사나운 인상 이었다.

나는 잠시 속으로 말을 고르다가 대답했다.

“이 천막의 주인을 찾고 있었습니 다, 안키르 경.”

내 대답에 안키르 경은 끌끌 웃음 을 터뜨렸고, 아르날은 눈을 휘둥그 레 뜨며 중얼거렸다.

“안키르? ‘거대한’ 안키르?”

“그래. 내가 그 ‘거대한’ 안키르 다.”

안키르 경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아르날이 얼굴을 하얗게 물들였다.

“그, 어…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리.”

“마적들에게 쫓기던 이유나 말해 라, 용병 계집아. 대답에 따라 용서 해줄지 말지를 결정할 테니.”

그렇게 묻는 안키르 경의 눈에는 희미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더러운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도, 소의 것처럼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 였다.

“저희는 사우스하버를 빠져나온 전 령입니다.”

“전령?”

“예. 성주님의 서신을 가지고 왔습 니다.”

내 대답에 푸른 망토를 두르고 있 던 기사가 면갑을 올렸다.

“세이번 백작께서 우리가 온 걸 알 고 계신다고?”

“정확한 정체는 모르지만, 인근 영 주가 보낸 지원군이리라 짐작하고 계십니다, 랭볼트 경.”

“•••나를 아나?”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다부진 체격의 기사는 ‘로어링 웨이브(Roar ing wave)’, 아니, ‘고함치는 파도’ 라는 별명을 가진 ‘랭볼트 얼쇼어’ 였다.

안키르와 마찬가지로 게임 속에서 보인 인상 깊은 활약 덕에 기억하고 있었다.

“랭볼트 경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 이 있어서 짐작했습니다.”

“소문이라.”

“무용이 무척 뛰어나신 분이라 들 었습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인 랭볼트 경은 이내 콧수염을 매만지며 질문 했다.

“•••그럼 이 주둔지의 주인이 어떤 분인지도 알고 있나?”

“대충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내 대답에 천막 안의 분위기가 차 갑게 식었다.

•••뭐지? 내가 말실수를 한 건가?

내심 당황하고 있는 내게 투구에 화려한 깃털 장식을 한 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챙!

“역시 수상한 자로고! 뭣들 하고 있나? 어서 놈을 포박하지 않고!”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당황스러워 서 말도 안 나오네.

그러나 다행히도, 다른 기사들은 팔짱을 끼거나 퍼멀에 손목을 얹은 채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뒤이어 고함을 들은 병사들이 천막 으로 들이닥쳤지만 젊은 목소리가 그들을 만류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하나, 주군-”

“그만하게, 라이암 경. 형님께서 설 마 세이번까지 사람을 보냈겠나.”

“…끄응. 뜻대로 하소서.”

기사를 만류하며 나선 이는 금장식 을 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백발백 중으로 활을 쏴대던 바로 그 기사였 다.

그는 사자의 얼굴을 한 투구를 쓴 채 나를 돌아보았다.

“이름이 뭐지?”

“포이닉스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어깨와 가슴팍에 새겨진 금장식은 수사자의 갈기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다른 기사들과 는 비교할 수도 없이 화려한 차림새 였다.

“포이닉스라. 성은 무어냐?”

“성은-”

포이닉스는 귀족의 서자 아니면 몰 락 귀족의 후예였다. 그러니 성을 가지고 있는 게 당연했지만….

“•••없습니다.”

•••기억이 날 리가 있나.

“흐음. 그럼, 일개 용병이란 말이 냐‘?”

“그렇습니다.”

면갑의 조그마한 틈으로 진한 남색 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묘한 일이야. 한낱 용병 주제에 혈조술을 다룬다니.”

“솜씨도 보통이 아니던데. 기병을 몇이나 베어 넘기더군.”

“그, 운이 좋았습니다.”

황금사자를 흉내 낸 갑옷을 입은 기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다 른 기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찌 생각하시오, 안키르 경. 경이 라면 말을 타지 않은 채 마적을 몇 이나 벨 수 있겠소?”

그러자 안키르는 흉갑을 두드리며

호언했다.

“제 실력을 모르십니까, 주군? 저 따위 조무래기들은 백 명이 와도 문 제없습니다!”

“하하, 경이라면 그리 대답할 줄 알았지. 랭볼트 경은 어떻소?”

질문을 받은 랭볼트는 콧수염을 매 만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형이나 기세에 따라 다를 겁니 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라면 예닐 곱쯤은 쉬이 벨 수 있습니다.”

“예닐곱이라. 동부의 이름난 검사 인 경도 그 정도란 말인가.”

금장식의 기사는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훑어보는 시선이 느 껴지자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기사는 어 깨를 으쓱거렸다.

“이런 실력자를 간자나 암살자로 쓰는 천치는 세상에 없겠지. 안 그 렇소, 라이암 경?”

“•••맞는 말씀이십니다, 주군.”

“자, 그럼… 대답해 보아라, 용병 포이닉스. 이곳의 주인이 누군지 짐 작하고 있다고?”

젠장, 이거 뭐 어떻게 대답해야 되 냐.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기사의 시선 에 담긴 기대감에 결국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왕자 전하.”

“…하하!”

내 대답에 웃음을 터뜨린 기사는 이내 투구를 벗었다. 번쩍거리는 은 발이 목 아래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기사는 실로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사내였다.

곧은 자세에 어울리는 탄탄한 체 격, 가슴께까지 흘러내리는 장발, 길 고 곧게 뻗은 눈썹, 가늘지만 깊은 눈매, 날렵하게 우뚝 선 콧대,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붉은 입술수염도 기르지 않은 탓에 얼핏 중 성적으로 보이는 인상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 다.

대충 영화에서 본 걸 흉내 낸 건 데, 다른 일행들 역시 덩달아 무릎 을 꿇는 걸 보니 틀린 예법은 아닌 가 보다.

일행을 내려다보며, 이십 대 중반 의 왕자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반갑다, 사우스하버의 전령들아.” 낮게 울리던 목소리는 투구를 벗은 덕에 한결 더 맑아진 것 같았다.

문득 올려다보면, 피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덕에 금으로 새긴 갈기는 빛을 잃은 채였다.

그러나 흉갑 위에 내려앉은 기다란 은발은 횃불에 비쳐 어지럽게 번쩍 거리고 있었다.

“나는 밀라놀의 국왕 폐하이신 ‘라 이오넬 3세’의 세 번째 아들, 울카 르다.”

위엄이 넘치는 무장(武裝), 기사들 을 이끄는 용맹, 기이할 정도로 아 름다운 용모와 듣기 좋은 목소리-울카르 왕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 도 능히 마음을 빼앗을 사내였다.

그 기이한 매력 앞에서, 내 몸은 경계심으로 바짝 굳어 있었다.

높은 신분 때문은 아니었다. 주변 을 둘러싼 기사들 때문도, 화살을 맞은 곳에서 올라오는 통증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어색하게 보이지 않으려 애쓰 며 입을 열었다.

“3왕자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 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여섯 번째 챕 터의 보스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개를 들라.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그렇게 말하며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빛나는 미소를 짓는 사내는.

훗날 ‘살육왕’이라 불리게 될 자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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