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악당들-154화 (154/547)

나의 악당들 154화

39. 불청객(3)

사자 헤핀이 엉덩방아를 찧자, 탁 자에 앉아 이쪽을 구경하던 도일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아쉽군!”

그는 술로 목을 축이며 고개를 끄 덕 거렸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이건 좀 너 무했어. 상대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말투나 표정을 보아, 헤핀의 속임 수가 통하지 않으리라는 걸 예상했 다는 눈치다.

……갈수록 빡치는 새끼네.

“킬리안 경. 치우십쇼, 저놈.”

“예, 공자님.”

킬리안 경은 나나 다이오네아 쪽으 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저 도일 의 명령대로 반쯤 기절해버린 사자 헤핀을 홀 밖으로 끌어낼 뿐이었다.

“에셀다 경. 이제 경의 차례요.”

잠자코 선 중년의 여기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 나올 뿐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트리스탄 백작님의 기사, 에셀다 호 튼입니다.”

“……명성 높은 기사분을 뵙게 되 어 저도 영광이에요.”

“부군께선 좋은 지휘관이었습니다. 운만 따라줬다면 역사에 이름을 남 겼을 겁니다.”

뜬금없는 애도였다.

에셀다 경은 언뜻 봐도 공치사 같 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물 이었기에, 다이오네아는 약간 의아 한 표정을 지었다.

“남작님과 아는 사이셨나요?”

“물론입니다, 부인. 함께한 전투가 일곱 번이니, 전우라 칭해도 무방하 겠지요.”

다이오네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 거렸지만, 여전히 얼굴 가득 경계심 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셨군요. 감사한 말씀입니 다만, 방금 전에 겪은 일이 있어 경 과 함께 남작님을 추억하기는 어렵 겠네요.”

“저도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 니었습니다.”

험상궂은 인상의 여기사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트리스 탄 백작님께선 롱빌의 미래에 관심 을 가지고 계십니다.”

앞뒤 없는 돌직구에 다이오네아가 당황한 얼굴로 나와 가신들을 흘긋 거렸다.

난 가만히 그녀와 눈을 마주쳤고, 다이오네아는 작게 헛기침을 하곤 꼿꼿한 자세로 반문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 요. 계약에 관한 이야기라면 방금 보셨다시피,”

“계약이 아니라 상속에 관한 이야 기입니다, 부인.”

“……상속이 요?”

“뮬팅엄에서 파악하기론 말로리 남 작은 자식도, 형제도, 사촌도 없습니 다. 맞습니까?”

에셀다 경이 말을 하는 동안, 나는 얼른 벨딘에게 다가가 속닥거렸다.

“벨딘.”

“포이닉스 경‘?”

“가서 법전 가져와.”

“법전이 라됴?”

“왕국의 상속법에 대해 나와 있는 법전 가져오라고. 지금 당장.”

“……아.”

젊은 필경사가 조용히 홀을 떠나는 동안 다이오네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알기론, 그런데요.”

“혈족 내에 계승권자가 없을 경우, 주인 없는 영지는 영지를 수여한 주 군에게 환수됩니다. 알고 계십니 까?”

“그런.”

다이오네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가신들을 살폈다. 그러자 문장관 톨 러미가 굳은 표정으로 나섰다.

“그런 조항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 다. 하지만 남작님의 죽음이 확인되 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상속을 논 하다니, 어불성설입니다.”

“흐흐, 늙은이가 또 함부로 입을 놀리는구나.”

실실 웃고 있던 도일이 술잔을 매 만지며 말을 이었다.

“냉정히 생각하시오, 다들. 말로리 남작은 아누파드들이 떼 지어 다니 는 산속에서 실종되었소. 그분의 죽 음을 확인하려면 산야의 분변을 뒤 적거려야 할거요.”

“……저, 가, 감히-!”

톨러미의 주름진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행동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건 다른 가신들 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도일은 백작의 아들인 데다 가 어쩐지 영리해 보여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이다. 괜히 말다툼을 하 다 그의 의도에 휘말릴까 걱정하는 것이겠지.

……뭐, 이건 다 핑계고. 그냥 다 들 겁을 먹은 거다. 에셀다 경을 홀 긋거리는 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느그 주군 개똥 됐음’ 하는 모욕 은 김승수의 상식으로도 분노할 만 한 것이었다. 근데 그 가신이라는 놈들이 이걸 참아? 다들 밸도 없 나?

나는 주먹을 부들거리고 있는 훈련 대장 체스터를 곁눈질하곤 살짝 속 삭였다.

“가만히 있을 겁니까?”

“……내가 무얼 하겠습니까, 경. 저 자는 귀족이고 난 한낱 군인인데.”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저걸-”

“자존심은 아무것도 지켜주지 않습 니다.”

끄응, 답답하구만.

나는 한숨을 삼키며 벨딘이 가져온 법전을 살피기 시작했다. 전공 책은 우스울 정도로 엄청나게 크고 두꺼 웠지만, 책갈피가 잘 정리되어 있어 상속법에 관한 부분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헛수고할 필요 없소, 포이닉스 경. 법조문을 왜곡하는 ‘치졸하고 질 떨 어지는 사기’는 없을 테니까.”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하는 것 만큼 짜증 나는 일이 없죠. 저는 그 저 대비를 할 뿐입니다.”

“하, 꼼꼼하시군. 기사답지 않게 도.”

만면에 비웃음을 띤 도일이 팔짱을 낀 채 다이오네아를 돌아보았다.

“영주의 유고 시, 가문 내의 적법 한 계승자를 찾을 때까지 그 배우자 나 지정된 가신이 대리할 수 있습니 다. 하지만 그 상태로 500일이 지나 면 반드시 새 주인을 찾아야 하죠. 가문원이나 혈족이 아니더라도 말입 니다.”

도일이 읊은 내용은, 내가 막 훑고 있는 부분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 었다.

“500일은 지옥과도 같은 세월이 될 것입니다, 부인. 어마어마한 금은 을 채무변제에 써야 할 테고, 그게 성공한다 한들 500일, 아니, 480일 쯤 후에는 권좌에서 내려와야 하죠. 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제가 모르는 가문원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술을 몇 잔이나 퍼먹었음에도 도일 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는 양아치같이 굴던 태도는 잠시 접어 둔 채, 진심 어린 조언자의 얼굴을 흉내 내고 있었다.

“하지만 왜 부인께서 그런 고통을 감내해야 한단 말입니까?”

“전 말로리 남작님의 부인으로서,”

“오- 제발, 부인.”

한숨을 내쉰 도일이 안타깝다는 듯 탁자를 두드렸다.

“부군께서 그리 좋은 남편이 아니 었다는 사실은 마르바 지방에서 모 르는 이가 없습니다. 사내구실도 제 대로 못 하는 주제에 툭 하면 부인 을 매질한다는 소문은 저도 여러 차 례 들어본 바 있죠.”

다이오네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옷자 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 분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겁 니까? 대답해보세요, 부인. 부군께 서 당신을 웃게 만든 적이 있기는 합니까?”

다이오네아는 이제 눈까지 질끈 감 아버렸다. 도일은 술을 들이켜 입술 을 적시더니 나직이 말을 이었다.

“상속 절차를 즉시 진행하시면 부 인께 주어진 채무액 중 이자 전액과 원금의 반액을 탕감해드리겠습니다. 행복을 찾아 떠나십시오, 부인.”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소득 없이 법전을 덮으며 앞으로 나섰다.

“행복을 찾아 떠나라? 말씀은 번지 르르 하지만, 결국은 영지도 없이 그 어마어마한 거금을 절반이나 갚 으란 뜻 아닙니까?”

“포이닉스 경은 나와는 전혀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추시는군.”

도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빙글거 렸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빚을 절반이나 탕감해주겠다는 자비로운 제안을 그 렇게 왜곡하시면 쓰나.”

“까놓고 말해서, 자비를 베풀겠다 는 뜻은 아니잖습니까.”

“……허, 그게 무슨 소리요?”

“금은을 써서 500일이라는 시간을 사고, 거기에 더해 엉뚱한 상속자가 나타나 영지를 채갈 위험성도 예방 하겠다는 거겠죠. 아닙니까?”

도일은 가만히 미소를 짓더니 양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경의 의견은 존중하오. 하지만, 나름 부인 의 형편을 고려한 제안이니 이를 알 아줬으면 좋겠군.”

“형편을 고려했다니, 그게 무슨 뜻 입니까?” “부인께는 아주 매력적인 선택지가 있거든.”

매력적인 선택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다이오네아 를 향해, 도일이 속삭이듯 말을 건 넸다.

“노던셔로 돌아가십시오, 부인.”

노던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가만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더니, 필경사 벨딘이 까치발을 들어 귓속 말을 해왔다.

“부인의 친가가 있는 곳입니다.”

“•‘••••친가?” “베넷 가문이라고, 북부에 있는 유 력한 백작가입니다.”

“백작가라니, 처음 듣는 얘긴데.

“부인과는 사이가 썩 좋지 않거든 요. 거의 버려지다시피 롱빌로 오신 터라.”

도일의 설득이 이어졌다.

“제이-리 백작님께선 올봄에 작고 하셨습니다. 셰이 백작님께서 노던 셔의 새 주인이 되셨죠.”

“부인을 사랑해마지않던 사촌이 고 향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셰이 백작님이라면 몇 푼 안 되는 빚 따위야 기꺼이 갚아주실 테죠.” 다이오네아가 침묵을 이어가자, 그 녀를 흘긋거리던 도일은 아랫입술을 핥았다.

“겨울의 퍼스 강이 그리도 아름답 다지요? 눈 덮인 산 사이로 뻗은 얼어붙은 강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 사가 하찮게 보인다고 들었습니다.”

“부인께서도 어린 시절에 그 풍경 을 구경해본 적이 있으시겠죠?”

“저는,”

다이오네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진녹색 눈동자가 불빛에 물들어 진 한 주홍색이 되어 있었다.

“저는 눈을 싫어했어요.”

“……음, 그러셨군요. 그러면,”

“저는 다이오네아 아니그에요. 다 이오네아 베넷이 아니라.”

그녀는 여리면서도 강한 사람이었 다. 다른 이에게는 별것 아닐 수도 있는 의무감 내지는 죄책감을, 다이 오네아는 무겁게 받아들였다.

“제게는 영지와 가문을 지킬 의무 가 있어요.”

미소를 짓고 있던 도일의 입매가 굳어졌다.

“죄송해요, 도일 공자님. 제안은 받 아들일 수 없겠네요.”

다이오네아의 단호한 말에, 도일이 소리 없이 욕설을 지껄였다.

“크흠. 부인의 선량함에 대해서는 자주 들어봤지만, 이렇게……. 고집 이 세실 줄은 상상도 못 했군요.”

그는 푹 한숨을 내쉬더니 홀 한쪽 에서 숨죽이고 있던 누데인족들을 돌아보았다.

“결국, 이 방법까지 써야 하나.”

도일이 자신들을 바라보자 누데인 족 노인 둘의 얼굴이 환해졌다.

“델오토.”

“예, 공자님. 기다리고 있었습니 다.”

원로 중 하나가 아탈란테를 돌아보 며 눈짓을 했다.

아탈란테가 아무런 반응도 없자, 델오토라고 불린 원로가 얼굴을 와 락 찌푸렸다.

“아틸리아!”

작은 호통에, 아탈란테는 내 쪽을 흘긋거리곤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홀의 테이블 위에 웬 마대를 뒤집어 내용물을 내놓는 것이었다.

투둑.

그것은 한 쌍의 부패한 머리통이었 다. 얼마 전, 그라두일 아래의 숲에 서 사냥한 트롤의 머리통…….

“이건?”

지독한 악취에 다이오네아가 미간 을 찌푸리며 의문을 표하자, 아탈란 테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수렵제의 성과물입니다.”

“……수렵제는 끝났어요.”

“상태를 보면 아시겠지만 이 트롤 들은 사냥한 건 2주 전으로, 수렵제 기간에 얻은 성과물입니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다이오네아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외지에서 사 온 물건이 아니 라는 증거가 있나요?”

“증거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안타깝지만,”

“대신……. 증인이 있습니다.”

아탈란테는 조용히 나를 돌아보았 다. 그녀와 도일을 번갈아 보던 나 는 그제야 상황을 눈치채고 입을 벌 렸다.

“아틸리아, 너……

“미안해, 닉스. 널 속이려던 건 아 니었어.”

“아니, 대체 왜 이런.”

아탈란테의 호박색 눈동자에 우울 한 빛이 떠올랐다.

“누데인족이 영주가 되는 건 불가 능해.”

“……씨족의 정착지 얘긴? 거짓말 이었어?”

“아냐. 다만, 이런 조그맣고 북적거 리는 영지는 우리 씨족을 모두 받아 들일 수가,”

이어지던 그녀의 말을, 원로 델오 토가 호통을 쳐 끊어버렸다.

“아틸리아! Qiam baelmik!”

“Feqot antizr!”

아탈란테가 인상을 찌푸리며 받아 치자,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이 두어 차례 오갔다.

이내 얼굴이 시뻘게진 델오토가 옷 깃 안쪽에서 웬 펜던트를 꺼내 들었 다. 그러곤 그걸 쥐며 무어라 으르 렁거리자, 아탈란테는 주먹을 하얗 게 쥐며 입을 다물었다.

“……아틸리 아?”

이를 악물고 있던 그녀는 이내 주변 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부인. 그리고 공자님. 본의 아니게 추태를 보였습니다.”

아탈란테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 을 이었다.

“그 트롤들은 그라두일 산자락에서 발견한 놈들입니다. 가만히 두었다 면 언제고 롱빌에 해악을 끼쳤겠 죠.”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여기 있는 포이닉스 경이 이를 증 명해줄 겁니다. 당시 함께였거든요.”

아탈란테에 이어서 다른 이들의 시 선도 모여들었다. 헛웃음을 삼키는 나에게 그녀가 속삭여왔다.

“어서 대답해줘, 닉스.”

“아틸리아.”

“네가 대답을 해주면, 우리는 뮬팅 엄 근처에 있는 장원을 살 권리를 얻어.”

아탈란테를 빤히 마주 보았다. 간 절함이 가득 담긴 눈동자.

결국 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 제가 증인입니다.”

아탈란테는 눈을 감았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가신들을 돌 아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놈들, 그라두일 산자락 아래에 서 잡은 놈들이 맞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지기 에디타가 입을 열었다.

“부인, 영지에는 더 이상 현상금을 치를 여력이,”

“돈은 필요 없소.”

에디타의 말을 끊은 건 누데인족 원로 델오토였다.

“점수만 주시오.”

“……어, 어.”

벨딘이 주변을 돌아보며 눈치를 살 피자, 델오토가 다이오네아를 올려 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저희는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부 인.”

“……정당한 요구, 라고?”

“예. 롱빌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 알 카다리 씨족은 전사를 열이 나 잃었습니다. 허니 대가를 요구하 는 건 당연한 권리입니다.”

다이오네아가 내 쪽으로 시선을 주 었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 었다.

아탈란테와 나는 거래를 했고, 그 녀가 수렵제에 우승할 수 있도록 도 왔다.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리라 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어쨌든 그들 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었다.

나는 물론 가신들마저 침묵한 가운 데, 델오토가 도일을 돌아보며 고개 를 숙여 보였다.

“공자님. 트리스탄 백작님의 신하 되는 자들이 식언을 하고 불의를 저 지르려 하고 있습니다. 지켜만 보시 겠습니까?”

델오토의 물음에 도일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야 없지. 당신의 영지 안 에서 불의가 저질러진다면, 아버지 께선 기꺼이 팔을 걷고 나설 걸세.

내 장담하지.”

“감사합니다, 공자님. 이 은혜는 언 젠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뻔한 연극에 담긴 선명한 함의를 눈치챈 다이오네아는 벨딘을 돌아보 았다.

“……저 누데인족 전사가 점수를 받으면 어떻게 되죠, 벨딘?”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부인.”

필경사 벨딘은 품속에서 점수표를 꺼내 들더니 이내 탄식했다.

“867점이 되는군요.”

“순위는요?”

“……우승입니다.”

“ 아.”

다이오네아가 이마를 짚자, 원로 델오토는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아틸리아.”

“Qiam tha.”

아까부터 가만히 서 있던 아탈란테 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도일을 가리 켰다.

“……수렵제의 우승자로서, 도일 뮬린 공자님을 말로리 남작의 양자 로 지명합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문장관 톨러 미가 빽 고함을 질렀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다른 가신들도 덩달아 언성을 높이 자, 원로 델오토가 냉소를 지었다.

“하! 그대들이 혐오해 마지않는 누 데인족 대신 젊고 잘생긴 귀공자를 지명해주었는데, 무엇이 불만이란 말이오!”

“백작의 아들이 남작의 양자가 되 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잖소!”

“흥, 말로리 남작이 생전에 내건 조건에는 그에 관련된 언급이 전혀 없었소. 뒤늦게 딴말을 할 셈이오!”

“도일 공자께서 남작님의 양자가 된다는 건, 남작부인의 양자가 된다 는 뜻이기도 한데, 이게 말이나 되 는 소리요?”

“안 될 건 뭐요?”

“도일 공자께서는 올해 스물다섯이 시지 않소! 부인보다 두 살이나 많 단 말이오!”

“그게 왜? 밀라놀의 귀족가문들 사 이에선 가끔 있는 일이 아니오!”

요란스러운 언쟁 와중, 도일이 폭 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한참을 이어진 웃음소리에 홀이 조 용해질 무렵, 그는 불쑥 몸을 일으 켰다.

“새로운 성으로도 모자라, 어리고 아름다운 어머니까지 얻게 되다니.”

흐흐, 어쩐지 구슬프게 이어지던 웃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재밌군. 즐거운 일이야.”

도일은 차갑게 얼어붙은 얼굴로 다 이오네아를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군요.”

“노던셔로 떠나거나, 나를 아들로 맞으시오. 부인께 주어진 선택지는 그게 끝이오.”

도일의 차가운 시선이 가신들을 훑 었다.

“아니, 아니군. 세 번째 선택지가 있지.”

“……세 번째 선택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벨딘에게 도 일의 시선이 꽂혔다.

“보름 후에 도착할 군대에 비참하 게 짓밟히는 거지.”

“군대라니, 그게 무슨.”

“스무 명의 기사들이 천 명도 넘는 병사들을 이끌고 올 것이오. 잔인무 도한 파괴술사들은 덤이고.”

얼어붙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도일 은 코트 자락을 펄럭거리며 돌아섰 다.

“가시죠, 에셀다 경. 저들끼리 궁리 할 시간은 줘야지.”

도일과 에셀다 경이 홀을 떠나자, 누데인족의 원로들도 그들을 따라갔 다.

“닉스……

“아틸리아.” 내 복잡한 표정에 아탈란테는 쓴웃 음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아랫입술 을 하얗게 깨문 그녀는 발을 끌다시 피 하며 걸음을 옮겼다.

불청객들이 떠난 직후, 트롤의 머 리통들이 탁자 아래로 굴러떨어졌 다. 이어지는 지독한 적막.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X나 꼬이네, 진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