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악당들-156화 (156/547)

나의 악당들 156화

39. 불청객(5)

썩 훈훈해진 분위기를 뒤로하고, 나는 엘렌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녀석은 연분홍빛으로 물든 코끝과 눈시울을 슥,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잘된 것 같아.”

“부니?”

«으 » 흐*

“그래. 착하고 성실한 놈이니 일도

잘할 거야.”

“맞아. 그런데……

순간, 작은 얼굴에 스며있던 온기

며 감동 따위가 싹 증발했다.

“이건 뭐야?”

“……사람한테 ‘이거’가 뭐냐, ‘이

거’가.”

“대답이나 해. 너 설마,”

엘렌이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바라 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뭉치였다.

“설마, 이걸 여기서 재울 생각은 아니지?”

“어, 그게-”

난 준비해두었던 말들을 다시 떠올 리다가 문득 뭉치를 돌아보았다. 녀 석은 침대의 머리맡 옆에 앉아 있었 는데…….

“……근데, 넌 왜 그러고 있냐?”

“어 으.”

뭉치의 모습을 묘사하자면 등은 벽 에, 엉덩이는 맨바닥에, 오른쪽 어깨 는 내 침대에 바짝 붙인 채로 양 무릎을 껴안고 있었다. 그 상태로 손가락은 의미 없이 꼼지락거리고, 흔들리는 눈망울로는 나와 엘렌을 번갈아 살펴보는 것이었다.

“••••••왜요?”

거기에 작고 어눌한 목소리까지.

그야말로, 쭈구리 그 자체……!

“왜겠니.”

“에.”

변이의 저주가 풀리며 뭉치는 멀쩡 하게 생긴 여자가 되었다. 아니, 멀 쩡한 정도가 아니지.

길고 커다란 눈이며 목덜미 근처에 서 찰랑거리는 머리칼, 콧대가 조금 낮아 귀엽게 생긴 코, 조그맣지만 도톰한 입술과 길쭉하고 날씬한 팔 다리,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

이 동네에서는 이질적인 인종이긴 해도 논쟁의 여지가 없이 예쁘게 생 긴 얼굴이다.

“••••♦•후우.”

그렇게 생긴 녀석이 새끼돼지일 때 보다 더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고 있 으니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난 검고 커다란 눈동자를 내려다보 다가 침대보를 툭툭 두드렸다.

“올라와서 앉아. 엉덩이 시리잖아.”

“갠찬슴미다.”

“갠찬슴미다는 개뿔. 불편하게 있 지 말고 올라와서 앉으라니까.”

“에……. 참 갠찬슴미다. 처음 조은 자세임미다.”

“……뭐라는 거야.”

내가 중얼거리며 이마를 짚자 당황 한 표정을 지은 뭉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재성함미다, 앉으께요.”

“아니,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에으, 아니요. 그거 내가, 아니요, 제가, 으, 재성한데, 아니……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엉거주춤 한 자세로 무어라 더듬거리는 모습 이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었다. 녀 석의 당황하여 굳은 얼굴을 보며 난 손사래를 쳤다.

“아니, 뭐라고 하는 거 아니거든? 그냥 편하게 있으라는 뜻이야.”

“에, 저……

“나 화내는 거 아니야. 너 좋은 자 세 해.”

그렇게 말하며 일부러 미소를 지으 니 뭉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렸 다. 그리곤, “네, 감사함미다.”

라고 말하며 원래 있던 자리에 앉 는 것이었다. 예의 쭈구리 자세로

말이다.

아무래도 밀라놀어를 빨리 가르쳐 야겠다.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는데, 어느새 망토를 벗어 한쪽에 접어둔 엘렌이 재차 질문해 왔다.

“그래서 어쩔 거냐고. 저거 여기서 재우게?”

……아, 스트레스가 더블!

난 솟구치는 짜증을 억누르며 아무 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엘렌.”

어?”

“내가, 사람한테 이거저거 하지 말 랬지.”

나직한 말에, 녀석은 잠시 입을 다 물더니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거렸 다.

“……그건, 쟨 돼지였잖아.”

“지금은 아니야.”

“나도 알아. 근데, 음, 나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잖아. 그, 갑자기 동물 이 사람으로 변했으니까.”

“헷갈릴 게 뭐 있어? 눈에 보이는 것부터 사람인데.”

“……난 헷갈려.”

뻔뻔하게 우기면서도 눈치를 살피 는 엘렌을 보니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온다.

“ 엘렌.”

“••••♦♦왜.”

본론을 꺼내려다가, 주눅이 든 녀 석을 보니 달래줘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안아 줄까?”

“••••♦♦응?”

“안길래?”

내가 양손을 펼쳐 보이자 엘렌은 뭉치를 흘긋거리더니 고개를 숙였 다.

“……쟤가 보잖아.”

“뭉치? 참나, 방금 전까진 사람 취 급도 않더니.”

“말했잖아. 이제 사람이니까, 적응 중이라고……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는 녀 석을 일별하곤 뭉치를 돌아보았다.

“뭉치야.”

“에, 네?” “잠깐 눈 감고 있을래?”

“……눈이오?”

“응, 잠깐만.”

내 부탁에 뭉치는 눈을 질끈 감더 니 거기에 손바닥까지 덮어버렸다.

“자.”

양팔을 편 채 이제 됐지? 하는 표 정으로 엘렌을 바라보았다.

잠시 입술을 삐죽거리던 녀석은 곧 내 품에 폭 안겨 왔다.

머리칼이 코끝을 스치니 상큼한 라 임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그 향기 를 만끽하기 위하여, 나는 엘렌의 빛나는 금발을 쓸고 작은 등을 토닥 거리며 심호흡했다.

목덜미에 숨결이 닿았는지 녀석이 움찔 떨었지만, 엘렌은 내 가슴을 더 세게 껴안았을 뿐 별다른 반응은 하지 않았다.

“엘렌.”

« o ” 흐 •

“벌써 몇 번째 말하는지 모르겠는 데, 난 진심으로 걱정돼.”

내 빗장뼈쯤에 얼굴을 묻은 녀석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은 사실상 뻐끔거림에 가까워서, 내 귀 로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한테 친절할 필요는 없 어도, 굳이 적은 만들지 말자.”

“노력하고 있어.”

“말도 좀만 더 조심하고. 응?”

“••••••으응.”

얼마쯤 그러고 있었을까.

내가 어깨를 잡고 살포시 밀어내 자, 잠시 버티던 엘렌은 두어 발자 국쯤 뒤로 물러섰다. 녀석은 파란 눈을 반쯤 내리깐 채로 마른침을 삼 켰다.

엘렌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어렵잖게 눈치챌 수 있었다. 녀석이 뭘 원하고 있는지도 뻔히 보였다.

“ O ” n •

그 기대에 응하고 싶은 마음이 굴 뚝같았지만, 나는 용케 참아냈다.

엘렌의 기대에 발을 맞추다 내 나 약한 자제심이 모래성처럼 무너져버 릴까 두려웠다. 그러면 난 녀석이 기대한 바를 훌쩍 넘어, 파란 눈동 자에 풍덩 빠진 채 며칠이고 헤엄만 칠 거다.

억지로 고개를 돌려 뭉치를 불렀 다.

“……뭉치야, 이제 눈 떠도 돼.” “에, 네…… 손자국이 남은 건지, 뭉치의 양 볼 은 발갛게 물어 있었다.

“ Q ” "司三

엘렌이 또다시 두어 발쯤 뒷걸음쳤 다. 녀석이 지은 조금 아쉬운 표정 을 애써 무시했다.

“엘렌, 네가 좀 돌봐줘.”

“누굴?”

“뭉치 말이야.”

w......o 으

떨리는 손가락을 말아쥔 엘렌이 태 연한 척 팔짱을 꼈다.

“흠, 왜?”

“보다시피 밀라놀어도 서툴고, 상 식 같은 것도 좀 부족한 것 같더라 고. 네가 이것저것 가르쳐줬으면 좋 겠어.”

“……다른 사람한테 맡겨. 난 그런 거 못 하니까.”

“다른 사람 누구?”

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테콰이한테 부탁할 수는 없잖 아. 아미아스네 애들은 딱히 배운 게 없는 녀석들이고.”

“네가 하면 되잖아.”

“누굴 가르칠 정도로 상식이 풍부

한 사람이야, 내가? 사우스하버에서 은화 어떻게 쓰는지 물어봤던 거 잊 었어?”

“그거야 기억을 되찾기 전이었고, 지금은 기억 돌아왔다며?”

……좀 대충 넘어가지, 쓸데없는 부분에서 집요하다니까.

나는 슬쩍 엘렌의 손을 잡으며 어 깨를 으쓱거렸다.

“그, 낮에 말했다시피, 머리가 좀 복잡해.”

“……그 이상한 목소리 때문에?”

“응. 내가 그런 상태인데 선생 노 릇을 할 수는 없잖아.” 손등을 매만지며, 파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응?”

잠시 어물거리던 엘렌은 결국 한숨 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어쩔 수 없지.”

“좋아.”

내가 씩 미소를 지을 무렵,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어, 왔나 보다.”

“……뭐가 와?” “침구. 한 벌 더 챙겨달라고 했거든.” 내가 문을 열어 하녀에게서 이불이 며 베개를 건네받는 동안, 엘렌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왜 챙겨달라고 했는데?”

“그, 바닥에 깔려고.”

내가 침구를 껴안은 채 멋쩍은 미 소를 짓자, 녀석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뭉치를 가리켰다.

“설마, 쟤 정말 여기서 재우려고?”

“응.”

“아니, 왜?”

“잘 곳이 없으니까 그렇지. 헛간이 나 광에서 재울 수는 없잖아.”

“다른 방들도 있잖아.”

“다 찼잖아.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같이 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럼 여관에서 자라고 해.”

“에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애를 어떻게 혼자 보내냐.”

“하.”

엘렌은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 를 홱, 돌렸다.

“ 엣,”

잠자코 쪼그려 앉아 있던 뭉치가 헛숨을 집어삼켰다. 불을 뿜는 시선 이 자신에게 향한 탓이다.

뭉치를 잠시 노려보던 엘렌은 단호 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난 싫어. 방이 넓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셋이서 같이 자?”

“어……. 그게 문제면, 내가 나갈 까?”

“••••♦•뭐?”

녀석의 황당해하는 시선에 난 어깨 를 으쓱였다.

“안 그래도 너, 나랑 방 같이 쓰는 거 불편하다며. 나야 우테콰이 방에 서 자면 되니까.”

“불편하긴, 그게 언젯적 얘기야?

지금은-”

엘렌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헛기침 을 했다.

“크흠, 이젠 괜찮단 말이야. 그냥 쟤만 다른 데로 보내.”

“그건 안 돼.”

“왜?”

“다 큰 여자애가 외간 남자랑 둘이 자면 사람들이 흉봐.”

“그건……

말끝을 흐리던 엘렌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잇, 지금까지는 괜찮았으면서

왜 이제 와서 이러는데!”

아이고, 귀야.

“야, 목소리 낮춰. 밤이잖아.”

“지금 그게 중요해? 왜 이제 와서 이러냐구!”

녀석의 채근에 나는 준비해둔 말을 꺼내 들었다.

“엘렌, 잘 봐.”

“뭘.”

“우리가 방을 같이 썼던 이유가, 총 세 가지거든?”

“……세 가지?”

«으 » 흐*

난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보았다.

“첫 번째는 당연히 네 안전이 걱정 된다는 이유에서였고, 두 번째는 다 른 방을 구하기 어려워서였잖아.”

“그럼 세 번째는?”

“네 다리 때문이었지. 수발을 들어 줘야 했으니까.”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는 녀석을 보며, 나는 애써 웃음을 참 아야 했다.

“크음, 그런데……. 여긴 딱히 위험 요소도 없잖아. 나는 우테콰이랑 같 이 자도 되고, 넌 다리가 멀쩡해졌 으니 수발도 필요 없지. 이제 귀여 운 룸메도 생겼으니까 난 따로 자는 게 맞는 것 같아.”

“……귀여운, ‘룸메’?”

“친구 말이야. 방을 같이 쓸 친구.”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렌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룸메인가 뭔가, 혹시 쟤 말하는 거야?”

“……어. 맞는데.”

“쟨 귀엽지도 않고, 내 친구도 아 니야. 저 정체 모를 여자랑 둘이 자 라니, 미쳤어?”

“음, 그래?”

나는 잠시 눈썹을 긁다가 뭉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뭉치야, 이리 와.”

조용히 눈치를 살피던 뭉치는 기다 렸다는 듯 펄쩍 일어나더니 내 손을 맞잡았다.

엘렌은 어느새 주먹을 말아쥔 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뭉치랑 나는 우테콰이네 방에 껴 서 잘게.”

“ 뭐?”

“셋이서 자는 것도 싫고, 뭉치랑 둘이서 자는 것도 싫다며. 그냥 혼 자서 자. 편하게.”

혼자 부들대던 녀석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을 뻥긋거렸다.

“아니, 난……. 걔만 내보내라니 까.”

“말했잖아. 우리 둘이 방을 쓸 이 유가 이젠 없다니까?”

“ 아니••••••

엘렌은 잠시 어물거리다가 무언가 를 떠올리곤 고개를 들었다.

“그래, 우테콰이 방에도 침대는 두 개뿐이잖아. 거긴 스티드먼이 차지 하고 있을걸?”

“바닥에서 자라고 하면 되지.”

“하지만……. 스티드먼이랑 같은 방을 쓰겠다고? 걘 더럽잖아.”

“스티드먼이? 난 잘 모르겠던데.”

“생긴 것만 봐도 더럽게 생겼는걸. 잘 씻지도 않을 것 같고……

“……말이 너무 심하지 않냐? 그리 고 그놈, 대머리라서 안 씻어도 별 로 티 안 나.” “아, 그런가 시무룩해진 파란 눈동자가 다시 반 짝거렸다.

“맞아. 우테콰이는 아직 아프잖아. 안정을 취해야 되는데 너희 둘이 끼 면 복잡해서 신경 쓰일 거야.”

“네가 언제부터 우테콰이를 신경 썼다고. 부상은 거의 다 나았어. 그 리고, 걔가 그렇게 예민한 캐릭터는 아니거든?”

“그건 그렇지……

또다시 말문이 막힌 엘렌은 재차 눈을 반짝이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래, 이거!”

“……그게 뭔데?”

“네가 듣는 그 이상한 목소리의 해 결책.”

녀석이 내게 건넨 것은 허여멀건 물약이 담긴 유리병이었다.

“혹시……• 밤에 가르쳐 줄 테니 기대하라고 했던, 그거?”

“응, 맞아.”

“……약까지 써야 하는 거야? 대체 뭘 가르쳐 주려고.”

자유롭게 펼쳐지던 상상의 나래를, 엘렌의 말이 막아섰다.

“ 명상.”

“••••••명, 상?”

엘렌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의 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 명상 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게. 내면을 관조하면 목소리를 듣는 이유도 찾을 수 있을 거야.”

“••••••아하.”

에이, 그러면 그렇지. 다른 걸 기 대한 내가 바보다.

그건 그렇고, 명상이라.

흠. 괜찮을 것 같은데?

“근데, 명상이랑 이 물약이 무슨 상관인데?”

“그건 집중의 물약이야. 열화판이 라서 효과는 적은 편이지만, 잡생각 정도는 없애줄 거야.” “……명상 같은 건 스스로 터득해 야 하는 거 아냐? 이런 거에 의존 해도 돼?”

내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엘렌 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의존하는 게 아니야. 시작할 때만 도움을 받는 거지.”

“시작할 때?”

“응. 명상이라는 건 그렇게 쉬운 수련이 아니야. 너처럼 아무것도 모 르는 초심자가 무작정 덤비면 허송

세월만하게 될걸.”

“O 흐” — r그 •

“그걸 마신 채로 내 도움을 받으면 명상이 뭔지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을 거야. 그다음부터는 네 몫 이지만.”

아, 한마디로 체험판이군.

하긴. 같은 길을 걷더라도 이전에 지나가 본 경험이 있다면 여정이 훨 씬 수월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것 도 같은 이치겠지.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불 쑥 말을 꺼냈다.

“근데, 이것도 너랑 같이 잘 이유

는 안 되는데?”

“......어?” “명상을 배우는데 같은 방을 쓸 필 요는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의기양양하던 얼굴이 금세 흐려지 더니, 하얀 손이 서로를 붙잡고 쪼 물거리기 시작했다.

엘렌이 하는 양을 바라보던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 엘렌.”

“ 으응?”

“그냥 셋이 쓸까?” 내 은근한 질문에 녀석은 가만히 입술만 삐죽거렸다.

“왜 그렇게 싫어? 뭉치가 아직 의 심스러워?”

“……그런 것도 조금 있고.”

“그래? 뭉치야.”

잠자코 서 있던 뭉치는 내 호명에 담긴 뜻을 눈치채곤 얼른 입을 열었 다.

“저, 나쁜 짓 안 해요. 맹세할게오”

“정말이지?”

“네, 정말이지, 요……

뭉치의 일관된 쭈구리스러움에 엘 렌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나 는 웃음을 지은 채로 녀석을 살살 달래주었다.

“내가 이렇게 부탁할 테니까, 뭉치 가 적응할 때까지만 같이 지내자. 응?”

내 거듭된 부탁에, 엘렌은 결국 고 개를 끄덕거렸다.

까다로운 척해도 은근히 상대하기 쉬운 녀석이라니까…….

O 己 己룻 ■ •• —■ ■— O •

왈, 왈!

개들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천막 안 으로 파고들었다. ‘랜달의 전사들’의 우두머리인 랜달은 참지 못하고 고 함을 내질렀다.

“이런 X팔, 밖에 아무도 없어! 개 새끼들 좀 그만 짖게 해!”

천막 주변의 용병들이 분주히 움직 였지만, 개들은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숲에 드리운 어둠이 개들의 신경을 자꾸만 건드려댄 탓이다.

“젠장할. 개새끼들도 내 맘대로 안 되는군.”

화살 상자에 걸터앉은 랜달의 주변 에는 사내 셋이 아무렇게나 앉아있 었다. 각자 용병 패거리를 하나씩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들이었다.

그들 중, 예쁘장한 얼굴 때문에 ‘꽃미남’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내가 조소를 흘렸다.

“흐. 개새끼들도 본능이라는 게 있 는 법이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리건?”

“멍청한 짐승도 제 욕심만 채우는 겁쟁이를 알아본다는 소리야.”

“그거 나한테 하는 소린가?” 랜달의 으르렁거림에 리건은 바닥 에 가래침을 탁 뱉더니 실실 웃어 보였다.

“그럼 누구한테 한 소리겠어? 기사 하나에 쫄아서 아랫도리 잡고 튄 새 끼가 너 말고 더 있냐?”

“내가 진짜 기사 하나가 무서워서 튄 줄 아냐, 이 등신아?”

“그럼?”

리건의 반문에 랜달이 비웃음을 흘 렸다.

“흐, 멍청한 새끼. 그 기사는 은왕 자의 부하야. 그놈을 죽였으면 은왕 자의 군대에 쫓기는 신세가 됐을걸.”

“그까짓 은왕자가 뭐라고.”

“그까짓 은왕자?”

랜달이 어이가 없다는 듯 양손을 펴보였다.

“하! 노르만, 마치, 들었어? 그까짓 은왕자라는군!”

노르만이라고 불린 사내는 푹 한숨 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은왕자를 모른다는 건 아니겠지? 리건, 네 녀석은 미테르게란트 출신 이잖아.”

“내 출신이 뭐? 고원의 멍청한 새 끼들 몇 꺾었다고 제국 사람들이 다 벌벌 떨 줄 알았냐?”

“멍청한 새끼들 몇이라고 하기엔 뒤진 놈들 수가 좀 많다고 들었는 데. 요새랑 성이 열댓 개쯤 박살 났 다던가?”

리건이 씨근덕거리며 입을 다물 무 렵, 천막 밖에서 또다시 개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X발! 개새끼들이 한 번만 더 짖으면 모조리 멱을 따버리겠 어!”

랜달이 천막 밖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내지르는 와중에 한 용병이 헐레벌떡 천막으로 뛰어들어왔다.

“ 대장!”

“뭐야?”

“그,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누구?”

랜달의 질문에 젊은 용병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검은 늑대들’이랍니다.”

“……검은 늑대들? ‘그’ 검은 늑대 들‘?”

“예, 그 현상금 사냥꾼들이요. 대장 과 긴히 상의할 바가 있다고 하던 데, 데리고 올까요?”

랜달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른 우두 머리들을 돌아보았다. 우두머리들이 눈짓으로 의견을 나누길 잠시, 랜달 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데려와.”

“옙!”

젊은 용병이 흥분된 기색을 숨기며 얼른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어서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 둘 이 천막에 들어섰다.

한쪽 눈에 가죽 안대를 찬 사내가 천막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랜달이 누구지?”

“나다.”

상대를 가만히 살펴보던 랜달은 이 내 씩, 하고 미소를 지었다.

“대장이 직접 온 줄은 몰랐는데.”

“……날 아나?”

“물론이지. 당신, ‘외눈의 더크’ 아 닌가?”

더크라고 불린 사내는 고소를 머금 으며 천막에 뒹구는 나무상자에 엉 덩이를 걸쳤다.

“맞아. 하지만 대장은 아니지.”

“……대장이 아니라고?” “내려온 지 몇 년 됐어. 그건 그렇 고.”

날카로운 외눈이 우두머리들을 차 례로 응시했다.

“다들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 엿 먹은 놈들로 보이지는 않아.”

“……무슨 소리지?”

“시치미 뗄 것 없어. 다 알고 왔으 니까.”

가만히 더크를 노려보던 랜달이 씹 어 뱉듯 질문했다.

“인간이나 사냥하는 놈들이 개새끼 들 천지인 여긴 무슨 일로 왔지?”

“네가 이미 정답을 말했군.” 이빨이 훤히 드러나게 웃은 더크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사람을 잡으러 왔지.”

그가 꺼낸 것은, 양피지 두루마리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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