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악당들 234화
48. 예술가(1)
손끝이 떨렸다.
지원이의 등을 살짝 토닥였다. 녀 석도 어깨를 떨고 있었던 덕에 내 떨림을 감출 수 있었다.
“포이 닉스.”
우테콰이의 목소리였다.
“그 아이는 뭐냐.”
당연한 소리겠지만, 지원이와 나는 한국어로 대화했다. 그러니 다른 일 행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 었다.
W......으 W
......
난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라면 그럴듯한 말로 얼버무리 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럴 수 없었다. 지원이 앞에서 거짓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조카.”
“조카?”
일행의 시선이 내 사촌이자 약혼녀 인 헤일라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원이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한국인 소녀인 지원이를 보고 쌍왕가의 일원이라 착각할 리는 없을 텐데, 헤일라는 조용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때, 내 품에 안겨 있던 지원이가 살짝 고개를 내밀어 일행을 살폈다.
“어, 삼촌 친구들이지? 아니, 직장 동료?”
뭐, 대충 그렇지.”
“흐으응. 그렇구나.”
낯가림이 심한 지원이는 내 옷자락 을 꼭 쥔 채로 일행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꼭 할로윈 같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일행의 이국적 인 외모와 옷차림 등을 살피는데, 거인인 우테콰이나 까칠한 인상의 콜은 좀 꺼림칙한지 얼른 뭉치 쪽으 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눈을 반 짝 빛내는 것이었다.
“대박. 저 언니, 규화 닮았다.”
“규화?”
“응, 투키마 규화. 눈만 살짝 찝으 면 진짜 똑같을 듯.”
투키마? 아, 걸그룹 얘기구나.
TV에서 몇 번 본 것 같은데 구성 원들의 이름까진 잘 기억이 안 난 다. 그러고 보니 뭉치랑 닮은 애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저 언닌 누구야?”
“어, 음, 내 사촌. 아니, 정확히 말 하면 포이닉스의 사촌인데-”
“와. 역시 유전자는 못 속이나 봐. 완전 대존예네.”
호들갑을 떨던 지원이는 헤일라와 눈을 마주치곤 화들짝 내 품에 몸을 숨겼다.
“어흐우, 미쳤다. 방금 눈 마주쳤는 데 심장 멎을 뻔.”
“……오바는.”
“혹시 사진 찍어도 되나?”
“사진?”
“응. 삼촌 친구라며? 안 돼?”
지원이의 뜬금없는 요청에 황당해 하고 있는데, 뒤에서 무기를 내리는 기척이 들려왔다. 말은 통하지 않지 만 아담한 체구의 소녀가 깜찍한 행 동을 해대니 경계심이 좀 풀린 모양 이다.
“어? 어라?”
청치마의 주머니와 스포츠 브랜드 로고가 그려진 힙색을 뒤지던 지원 이는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 맞다. 나 폰 잃어버렸지. 깜빡 함.”
“……어디서 잃어버렸는데?”
“몰라, 기억 안 나.”
녀석은 ‘에이’ 하고 입술을 삐죽이 더니 심술 섞인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근데, 아저씨.”
“ 응?”
“생뚱맞은 세상에 떨어졌대서 걱정 했더니, 아주 호강하시네요?”
“……호강? 누가? 내가?”
“네, 아저씨가요. 아저씨가 이런 기 회 아니면 언제 저런 언니들이랑 말 을 섞어 보겠어요?”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뭐 어때서?”
“그걸 말로 해야 아나? 삼촌 나이 면 자기 객관화 정도는 해야지.”
“뭐?”
내가 헛웃음을 터뜨리자 지원이는 쯧쯧, 혀를 차곤 진지한 얼굴로 조 언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괜히 얼굴 믿고 거만 떨지 말고 발닦개라도 되겠다는 심 정으로 잘해줘. 꾀부리지 말고. 어차 피 삼촌은 멍청해서 밀당 같은 건 잘 못 하잖아.”
“갑자기 뭔 뜬금없는 소리야?”
“새겨들어. 삼촌한테 꼭 필요한 조 언이니까.”
“하, 참.”
어이가 없어서 머리를 쓸어올리는 데, 문득 의문이 든다.
“……그런데, 내가 다른 세상에 떨 어졌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어? 어……
내 질문에 지원이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으, 들었어.”
“누구한테?”
“아, 있어. 비밀이야.”
내 질문을 어물쩍 넘기려는 듯, 녀 석은 내 옷소매를 붙잡고 끌어당기 기 시작했다.
“됐고, 오랜만에 좀 걷자. 이렇게 서 있지만 말고.” “잠깐만, 지원아.”
“아, 빨리!” 녀석은 억지를 부리며 나를 당겨대 었다. 하지만 몸무게가 50킬로에 한 참 못 미치는 왜소한 여자아이가 힘 을 써봤자 얼마나 쓰겠냐고.
“아잇, 왜 이렇게 무거워? 소야?”
그렇게 한참 티격태격하다가 지원 이의 어깨를 잡으며 멈춰 세웠다.
“한지원, 잠깐만.”
“아, 왜? 그냥 좀 걷자니까?”
조카의 심통 난 얼굴을 마주하고, 난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
“누굴 찾으러 가야 해.”
“••••••누구?”
“동료.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내가 짐짓 단호한 표정을 짓자 지 원이는 실망한 눈빛으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는?”
“뭐?”
“나는? 7년, 아니, 8년 만에 만났 잖아. 잠깐 얘기도 못 해?”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 심호흡 을 한 뒤, 딱딱한 턱을 움직였다.
“……너는, 진짜 지원이가 아니잖 아.”
“뭐라고?”
“내 기억 속, 꿈속의 지원이지, 진 짜 한지원이 아니잖아.”
마음을 냉정하게 먹고 말을 뱉었지 만, 지원이의 굳은 얼굴을 보니 나 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간다.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난 지금 해 야 할 일이 있어.”
지원이의 서글픈 표정에 어떤 기억 이 스멀스멀 고개를 치켜든다.
평일의 놀이동산, 폴리스라인, 여자 화장실, 깨진 스마트폰, 한강 고수부 지, 현장 감식 사진.
내 가슴속 가장 깊은 어둠으로 자 리 잡은 기억들.
평소라면 그것들을 떠올리는 것만 으로도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고통스 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기억 만 선명할 뿐 감정은 조금 흐릿했 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다행스러 운 일이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네가……. 그래 도, 지금은 가야 해.”
분명 감정은 흐릿한데, 지원이를 보니 자꾸 가슴이 답답해진다. 몇 마디쯤 더 주워섬겼지만 어떤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였다.
“아, 그만 좀 해!”
지원이는 빽, 소리를 질러 내 지껄 임을 막아섰다. 그리고 양손을 허리 에 얹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까지 찌질거릴 거야? 삼 촌이 잘못한 거 아니잖아!”
“지원아,”
“어차피 마지막은 기억도 잘 안 나 서 원래 무서운 건 없었어. 이제는 한도 없고. 그러니까,”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은 지원이 는 씩씩거리며 재차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 딴 우울한 얘기 좀 꺼내지 마!”
짜증 섞인 고함을 지르는 와중에 녀석의 볼을 타고 반짝이는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 아씨, 이건, 그런 거 아니야.”
불티라도 튄 것처럼 놀란 지원이는 서둘러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이건, 그냥 짜증 나서 이런 거야. 삼촌이 짜증 나서.”
“여자친구는커녕 만날 친구도 하나 없고, 퇴근하면 방구석에 앉아서 게 임만 하고, 악몽 땜에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맨날 회사에서 졸고, 그래 서 또 혼나고. 그러다, 그러다가 끝 나 버린 게 너무, 너무 짜증 나서-”
울먹거리며 말을 쏟아내던 지원이 는 결국 ‘이잉’ 하며 울음을 터뜨리 더니 내 품을 파고들었다.
“……지원아.”
“난, 난 삼촌이, *흐윽* 안 그랬음 했는데, 삼촌은, * 훌쩍* 그냥,”
자신은 열여섯 어린 나이에 삶을 마감했으면서, 모자란 삼촌을 동정 한다. 내 기억대로, 악몽과는 반대 로, 정말 착한 아이다.
무어라 위로를 하고 싶었지만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목구멍을 가득 채운 감정이 쏟아질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래서 나는 지원이의 등 을 말없이 토닥이기만 했다.
내 품에 안겨 한참을 울던 지원이는 울음을 그친 뒤 화장실로 달려갔다.
뭐 때문에 저러나 싶어서 가만히 기다리니, 녀석은 이내 말끔해진 얼 굴로 다시 나타났다.
“……화장 고쳤어?”
“어. 왜?”
“아니, 중학생이 무슨,”
“난 뭐, 영원히 중3이야? 나이로 따지면 벌써 스물넷이거든!”
“으 아
■司三
……스물넷의 한지원이라.
그럼 중학교는 물론이고 고등학교 도 졸업했겠지. 색깔이 별로라며 교 복을 마음에 안 들어 했는데, 고등 학교 교복은 어땠을까.
“저기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엔 대학에 가 서 캠퍼스 라이프를 즐겼을 수도 있 고, 맨날 노래를 부르던 아르바이트 도 실컷 했을 거다.
그리고 또…….
“저기요, 김승수 씨!”
“어, 어?”
“또 우울한 생각 했죠?”
“……아니, 아니야.”
미간을 좁힌 채 날 흘겨보던 지원 이는 문득 내 일행을 살피곤 아랫입 술을 깨물었다.
“아잇, 쪽팔려.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이게 무슨 꼴이야.”
녀석은 그리 투덜거리다가 푹 한숨 을 내쉬었다. 어쩐지 후련함이 느껴 지는 한숨이다.
“자, 그럼 가자.”
“ 응?”
“가자고. 관문으로 안내해 줄게.”
“••••..관문?”
“어.”
“혹시 통로 말하는 거야? 검은 원반 같이 생긴? 그걸 관문이라고 불러?”
“......어어?”
내 질문에 멍청한 소리를 낸 것도 잠시, 지원이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 렸다.
“관문이든 통로든 이름이 뭐가 중 요해? 얼른 따라와. 누가 기다린다 며.”
그렇게 말한 녀석은 나와 일행을 2층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복잡한 길을 지나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3층을 지나 4층에 이르자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지원이는 조금씩 속 도를 늦췄다.
“지원아?”
“……잠깐 헷갈려서 그래. 이쪽이 야.”
정말 길이 헷갈리는 건지, 녀석은 4층을 대부분 돌아본 뒤에야 느릿한 걸음을 멈췄다.
“……대관람차?”
지원이가 멈춰 선 곳은 관람차 앞 이었다. 위쪽 절반이 옥상으로 돌출 되어 도시의 야경을 볼 수 있는 대 관람차 앞.
다른 놀이기구들이 저 혼자 작동하 고 있는 것과는 달리 불이 꺼진 대 관람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려.”
지원이가 컨트롤박스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대관람차에 전원이 들어왔다.
“헤에.”
색색의 불이 켜지자 헤일라와 뭉치 가 눈을 반짝거렸다. 우테콰이와 콜 은 이미 다른 놀이기구들을 충분히 본 탓인지 별로 동요하지 않는 눈치 였다.
그때,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우 테콰이가 불쑥 말을 꺼냈다.
“저 아이. 네 조카가 맞나?”
“……어, 맞아.”
“그럼, 여기가 ‘지구’라는 곳인가.”
“뭐‘?”
깜짝 놀라 돌아보니, 놈은 평소처 럼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강력한 주술사는 대화로 참과 거 짓 구별한다. 아칸쿠 카라멕, 네 말 믿었다. 네 말이 참이라는 뜻이다.”
몇 개월 전, 강력한 영혼주술사인 아칸쿠 카라멕을 속이기 위해서 되 는대로 말을 지껄였던 적이 있다.
카라멕은 말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혜안’이라는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난 내가 지구에서 온 존재라는 것을 밝혀 방심을 유도
했고, 결과적으로 카라멕을 기습하 여 목을 날려 버렸다.
그때 카라멕에게 늘어놓았던 이야 기를 기억하는 건 엘렌과 아탈란테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우테콰이 역 시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군.”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오늘 확실 히 알았다.”
뜬금없이 시작된 우테콰이와 나의 대화에 뭉치는 바짝 얼어붙었고, 콜 은 표정을 굳혔으며, 헤일라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우테콰이가 질문을 해왔다.
“언제부터인가?”
“••••••뭐가?”
“너에게 그 일이 일어난 것.”
난 잠시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며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5월 초, 사우스하버에 도착할 무 렵에.”
“음. 그렇군.”
우테콰이는 예상대로라는 듯 고개 를 주억거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슬쩍 살펴보니, 놈의 얼굴은 여전 히 무덤덤했다.
친구로 여긴 이에게 속았다는 사실 에 대한 분노, 외계의 영혼에 대한 경계 내지는 적개심, 믿을 수 없는 일에 대한 경악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끝이야?”
“ O 으?’’
“그게 끝이냐고.”
“더 필요한 게 있나?”
“아니, 더 물어볼 거 없어?”
내 질문에 우테콰이는 슬쩍 미간을 좁히더니 오히려 반문을 해왔다.
“무엇을 묻나?”
“어? 그야……
“그 일 이전의 너, 나는 알지 못한 다. 그러니 물을 것 없다.”
……이렇게 쿨해도 되나? 얼어 죽 을 것 같은데.
우테콰이가 별것 아니라는 태도로 대화를 마무리 짓자 뭉치는 휴우,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콜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었고, 헤 일라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눈 을 깜빡거렸다.
쿠쿵.
일행에 드리운 정적을 깨듯, 불빛 을 번쩍거리던 대관람차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돼.”
컨트롤박스에서 나온 지원이는 무 언가 가늠하듯 대관람차를 올려다보 았다.
“한, 3분 정도면 되겠네.”
“……고마워.”
“고맙긴.”
힘없이 미소를 흘린 녀석은 텅 빈 통로로 향했다. 저마다 다른 색으로 칠해진 관람차들이 15도쯤 돌아갈 무렵 우리는 탑승구 앞에 도착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을 굳히고 있던 지원이가 입을 열었다.
“삼촌.”
“ 응?”
“언제였더라, 엄마랑 아빠랑 새벽 에 부부싸움을 한 적이 있거든?”
“……매형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내가 깜짝 놀라자 굳어 있던 지원 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심하 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하. 그게 중요하냐고요, 아저씨.”
“ O......”
“당연히 아빤 그런 사람 아니지. 엄마가 하도 이상한 소리를 해대니 까 참다 참다 몇 마디 한 거야.”
“그럼 그렇지. 그러게 왜 새벽까지 안 자고 있었어. 내가 맨날 말했지? 일찍 일찍 좀 자라고. 안 그래도 코 딱지만 한 게,”
“아, 그건 삼촌 때문이고!”
“나? 내가 왜‘?”
“대학 들어가고 나서 바쁘다고 저 녁에 찾아오지도 않았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초딩 땐, 어? 저녁마다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하니까 밤에 꿀잠 잤 지. 근데 삼촌이 대학 가고 나서부 터는, 저녁에 집에만 있으니깐 잠이
안 온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으면서도 은 근히 설득력이 있는걸.
지원이는 무어라 더 쏘아붙이려다 말고 관람차를 살피곤 발을 동동 굴 렀다.
“아잇, 지금 이런 소릴 할 때가 아 닌데.”
«......2”
“하여튼 그때, 엄마가 하는 소릴 들었어.” “무슨 소리?” 녀석은 조급함과 망설임이 혼재된 복잡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리다 가, 마침내 말을 꺼내었다.
“삼촌 얘기.”
“••••••내 얘기?”
“엄마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 라고 했어.”
뭐, 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난 말 문이 막혀 눈만 끔뻑거렸다.
“맘 약한 할아버지 때문에 집안에 원수를 들여왔다고도, 그랬어.”
“그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말했잖아. 부부싸움 하는 걸 들었 다니,”
“개소리하지 마!”
내 갑작스러운 고함에 지원이가 숨 을 삼키며 뒷걸음을 쳤고, 일행 역 시 움찔 물러섰다.
“넌, 넌 내가 만든 지원이잖아. 지 원이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어.”
“아니야.”
“……아니라고? 뭐가?”
“네가 만든 한지원 아니라고, 이 멍 청한 삼촌아. 왜, 왜 소리를 질러!” 몸을 움츠리고 있던 지원이는 북받 치는 설움을 삼키듯 눈을 질끈 감으 며 말을 이었다.
“난 삼촌이 만든 한지원이 아니고, 그냥 한지원이라고.”
“그게 무슨, 너는, 너는-”
말을 더듬거리는 사이 노란색 관람 차가 탑승구에 들어섰다. 관람차의 문은 저 혼자 활짝 열렸고,
우웅.
그 안에서, 검은 원반이 떠올랐다.
그렇게 꿈을 벗어날 통로가 나타남 과 동시에 세상이 무너져내리기 시 작했다.
구구구궁-
저 멀리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도 시의 풍경부터 먼지가 되어 스러져 갔다. 다음은 철골을 연살처럼 엮은 천장이 었다.
“이제 가야 해.”
“잠깐만, 지원아. 그러면 넌,”
“빨리 가라고, 이 바보야.”
지원이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 가슴팍을 밀쳤다. 내가 밀려나는 대 신 팔을 잡아채자 녀석은 버둥거리 며 몸부림을 쳤다.
“포이닉스 님!”
시위에 화살을 메긴 콜이 경계심이 가득한 눈길로 주변을 훑어보며 고 함을 질렀다.
“뭔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고?”
“아무것도 안 나왔잖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되묻기도 전에, 콜이 재빨리 설명을 이어갔다.
“별세계에서의 꿈은, 하나같이 마 지막엔 검게 물든 벽과 마주쳤습니 다. 그 벽이 사라지고 나선 사람이 나타났고, 그 사람을 처치해야 통로 가 나타났습니다!”
과연 그랬다.
교외의 저택에서는 소하, 내가 살 던 동네에선 희원이의 아비와 남편, ASP에선 중대장과 수사관.
말하자면, 꿈마다 일종의 ‘문지기’ 가 있어서 그 문지기를 베어야만 검 은 원반이 나타났던 것이다.
“••••••설마.”
잠자코 서 있던 헤일라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우테콰이, 뭉치, 콜이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짜잔.” 일행의 시선을 받은 지원이는, 얼 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장난스러 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 꿈의 수호자야.”
“지원아, 그게.”
“수호자로서의 명령이야. 당장 여 길 떠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상을 무너뜨리던 바람이 허공에 뭉치더니 일행을 향해 쏘아져 왔다.
땅에 발을 박아넣은 우테콰이, 날 래게 몸을 띄운 뭉치, 별빛 방패를 소환한 헤일라, 억센 손으로 난간을 붙잡은 콜은 마치 속이 빈 탁구공처 럼 바람에 휩쓸리더니 곧장 검은 원 반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말이 있 었어.”
지원이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닦 다가, 이미 터져버린 눈물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나를 올 려다보았다.
“근데 이젠 다 괜찮아졌어. 그치?”
“지원아. 한지원.”
조그만 손이 내 가슴께를 부드럽게 밀쳤다. 난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떠올라 검은 원반 속으로 빨려 들어 갔다.
그 마지막 순간, 지원이의 속삭임 이 귓가를 스쳤다.
애석하게도 그 마지막 속삭임은 세 상이 무너지는 굉음에 집어 삼켜지 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