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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당들-270화 (270/547)

나의 악당들 270화

막간. 그의 연인들(2)

다이오네아는 그녀 스스로 판단하 기에도 외향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이오네아 오브 베넷’이던 시절 에도 남을 즐겁게 하는 언변을 익히 는 것보단 저택 한구석에 처박혀 물 레 돌리는 것을 즐겼다.

그러한 습성이 왈가닥 사촌들과 대 비된 덕인지 어릴 적부터 현숙하다 는 이야기를 곧잘 들었더랬다.

그녀가 ‘다이오네아 오브 아니그’ 가 되고 난 뒤에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영주관에 숨어 재기를 꿈꾸는 남편 을 뒷바라지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 서, 그녀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 니었다.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귀부인으 로서의 자세’야말로 그녀의 성격에 꼭 부합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조금 변 했다. 귀부인에게 요구되는 미덕만 가지고는 영주 노릇을 할 수 없었던 탓이다.

다이오네아도 이 사실을 잘 알았지 만, 하루아침에 성격을 바꿀 수는 없었다. 백작가의 여식으로 산 18년 과 고지식한 영주의 부인으로 산 5 년은 충분히 긴 세월이었다.

그리하여 다이오네아의 영주로서의 변신은 조금 점진적이었다.

훈련을 받는 병사들을 위무하거나, 외벽 공사 현장을 둘러보거나, 지주 와 상인들을 만나 협상하거나 하는 일은 모두 가신들에게 맡겼다.

영지 대소사를 논할 때도 그녀와 친밀한 핵심 가신 서넛만 집무실로 부를 뿐, 좀처럼 영주관을 나서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귀부인이던 시절엔 종종 영 지의 아녀자들과 어울리곤 했지만, 이젠 그러지 않았다.

물론,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 은 거의 없었다. 장막 뒤의 통치자 라는 게 그리 드문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다이오네아는 임신까지 한 상태였으니.

지금 호출을 받고 집무실에 모인 가신들 중에서도 의구심을 드러내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왕도 쪽에서 흥미로운 소문이 들 려옵니다, 부인.”

가신들 중 제일 먼저 입을 연 자 는 필경사 벨딘이었다.

젊은 청년인 그가 다른 가신들보다 먼저 입을 열 수 있었던 건 노쇠한 톨러미를 대신하여 문장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명분 덕이었다.

“흥미로운 소문이라면?”

“여명의회와 관련된 소문인데, 열 두 대의원이 모두 소집되었다는군 요.” 다이오네아는 고동색 광택이 감도 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배를 어루만 지고 있었다. 풍성한 블리오를 입고 도 배가 부른 것이 조금쯤 티가 났 다.

“열두 대의원이 모두……. 드문 일 아닌가요?”

“16년 만이라고 합니다. 자세한 사 정은 몰라도 보통 일은 아닌 모양인 데,”

벨딘은 다이오네아와 가신들 뿐인 집무실을 괜히 훑어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회의가 끝나고 대의원 넷이 사라 졌답니다.”

“사라져요?”

“예. 뭐, 고위 마법사들이 신출귀몰 하는 거야 크게 이상할 것 없는 일 이긴 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들도 많죠. 하지만 한꺼번에 넷이 나 사라졌다니 의구심이 들지 않습 니까?”

“ O 으......”

—.

턱을 괸 다이오네아는 눈을 반쯤 감고 배를 어루만졌다. 고민을 할 때면 보이는 모습으로, 최근에 생긴 버릇이었다.

“우리 일에 영향이 있을까요?”

“일이라고 하시면……

“마법사요.”

롱빌의 하나뿐인 영지마법사였던 마스터 캐스라이트는 도일 공자의 군대와 맞서던 도중 무너진 문루에 깔려 숨을 거두었다.

그녀와 친분이 깊던 다이오네아는 몹시 슬퍼하는 한편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마법사를 구해야 한다며 가 신들을 볶아대었다.

젊은 필경사, 아니, 문장관 대리 벨딘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 아마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대의원이 넷이나 사라졌으니 휘하의 조직을 단속할 테고, 그러면 이탈자 를 회유하기도 어렵겠죠. 굳이 따지 자면 그렇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

“예. 음, 그게……. 송구한 말씀이 지만, 어차피 현재 롱빌의 사정으로 는 여명의회의 마법사를 구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여명의회는 왕국 전체에서도 마법 의 명가로 꼽히며, 왕실과 긴밀히 관련된 조직이다. 그런 여명의회 소 속의 마법사가 작은 남작령에 투신 할 가능성은 무척 낮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귀를 열어두도록 하세요. 실력 좋은 마법 사를 구할 수 있다면 돈이야 얼마든 지 쓸 수 있습니다. 기사도 마찬가 지. 주인 없는 기사가 있다면 어떻 게든 붙잡아서 데려오세요.”

벨딘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고, 다음 차례는 청지기 에디타였다.

“광산의 채굴량이 큰 폭으로 뛰었 는데, 그중에서도 동의 산출이 두 배쯤 늘었습니다.”

“좋은 일이네요. 연금술사들을 구 한 게 도움이 됐을까요?”

“물론이죠, 부인. 늘어난 양도 양이 지만 질이 아주 좋아진 덕에 이익이 크게 늘었습니다.”

‘연금’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대부 분의 연금술사들은 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흙과 돌 속에서 쓸모있는 광석들을 뽑아내는 일에는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바, 광산을 개발할 땐 연금술사를 고용하는 게 상식이었 다.

에디타는 다이오네아 앞에 양피지 문서를 내려놓으며 주름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급으로 금화를 다섯 장씩이나 주신다기에 배가 아플 지경이었는 데, 지금은 그게 합리적으로 여겨질

중년의 여인 에디타가 ‘이렇게 느 슨해지면 안 되는데 말이죠’ 하고 중얼거리자 다이오네아는 살풋 웃으 며 문서를 살펴보았다.

시월 말부터 지금까지, 두 달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금광에서 얻은 수익이 무려 금화로 700장이다. 물 론 각종 노임과 설비 비용에 더하여 막대한 양의 상납금, 아니, 세금까지 떼면 남는 건 절반도 되지 않을 것 이다.

하지만 그 정도도 조그만 남작령의 수입이라기엔 어마어마한 거금인 건 마찬가지다.

다이오네아의 어두운 녹색 눈동자 가 아미아스에게 향했다.

“광산의 현장 상황은 어때요? 날씨 가 걱정인데, 계속 운영을 해도 좋 을까요?”

“감독관 말로는 광부들은 괜찮은데 물과 식량을 나르는 일꾼들이 아주 고역일 거랍니다. 연금술사들이 작 업장에서 물을 어찌나 많이 쓰는지 하루에 여덟 번은 달구지를 올려보 내야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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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오네아는 재차 문서를 꼼꼼히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눈이 내릴 땐 연금용수 보급을 절 반으로 줄이세요. 연금술사들의 작 업속도는 현장에서 적절히 조절하고 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수익이,”

“광산 개발은 이제 막 시작이에요. 앞으로도 갈 길이 먼데 사람 상해가 며 일을 서두를 필요 없죠.”

다이오네아는 문서를 내려놓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노예상과의 협상은 어떻게 진행되 고 있나요?”

“다음 달까지 젊은 남녀 백 명을 구해준다더군요. 두당 은화 열다섯 닢에 사들이기로 했습니다.”

사제에게 은화 너덧 닢쯤 쥐여주면 아무리 병약한 아이라도 신성력 세 례를 받고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덕분에 숱한 전쟁과 괴물들의 창궐 에도 불구하고 왕국 어디를 가나 사 람은 넘쳐났다.

고작 은화 열다섯 닢에 노예를 살 수 있는 것도 그런 사정 덕분이었 다.

“건강하고 고분고분한 노예들만 받 겠다고도 전했나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하나같이 이 교도나 반역자의 종자들이니 아무리 골라서 사들인다고 해도 다루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죠. 지주들이 잘 달래길 바랄 수밖에.”

다이오네아는 노임을 넉넉히 주며 광부들을 부리고 있었기에, 영지에 서 소작을 부치던 이들 중 대다수가 금광으로 몰려들었다.

덕분에 땅을 놀리게 된 지주들이 불만을 표했고, 다이오네아는 이를 위해 노예를 사들여 지주들에게 싼 값에 대여할 예정이었다.

“수문관은 노예들을 관리할 병력들 을 미리 뽑아두세요. 그리 정예할 필요는 없을 테니 경비대에서 차출 해도 됩니다.”

“예, 부인. 그런데……

아미아스는 잠시 망설이며 옆을 곁 눈질하자, 훈련대장 체스터가 그 시 선을 받고 입을 열었다.

“부인, 혹시 노예 중에 튼튼한 놈 을 몇 뽑아 병사로 쓰는 건 어떨지 요?”

“그건 안 돼요.”

다이오네아는 그녀답지 않게 썩 단 호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노예는 전사가 될 수 없어요.”

“부인,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병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성벽에 허 수아비를 세울 게 아니라면 서둘러 병력 충원을,”

“저와 제 자식, 그리고 영지를 지 킬 군대를 더럽히느니 잠시 성벽을 비워두는 게 나아요.”

체스터는 입을 다물었다. 오랜 가 신인 그도 가끔 깜빡하곤 하지만, 다이오네아는 북부의 변경을 지키는 가문 중 하나인 베넷 백작가에서 태 어났다.

용맹한 기사가 홀로 야만인 스물을 썰어 넘긴 이야기쯤 전설 축에도 끼 지 못하는 곳이 바로 북부다. 그런 곳에서 태어난 다이오네아로서는 병 력 충원을 위해 노예에게 무기를 쥐 여주자는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었 다.

그녀의 상식 속에서 양병(養兵)이 란 제대로 된 인재를 골라 일당백의 전사로 기르는 것이지, 오합지졸을 모으는 게 아니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용병을 고용하 거나 징집병을 쓰고 만다는 게 다이 오네아의 생각이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훈련대장. 봄이 오는 대로 주변 도시로 모병관들을 보낼 테니.”

고개를 숙이는 체스터 옆에서 청지 기 에디타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부인, 예산의 4할 이상을 성벽 보수와 군대 유지에 쓰고 있습 니다.”

“4할? 아직도 절반이 안 되었나 요? 서둘러 기사를 구하던가 병력 모집을 앞당겨야겠네요.”

“예? 아니…… 경비대까지 포함하 면 상비군이 벌써 250명도 넘는데 여기서 더 병력을 늘리다니요. 이렇 게 군대를 많이 거느리는 남작령이 어디에 있답니까, 부인.”

“고작 남작령이라기엔 지킬 게 많 아졌어요. 지킬 이도 늘어야죠.”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영 지의 발전이란 본디 균형을 이루어 야,”

“아니요.”

다이오네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 며 에디타의 말을 잘랐다.

“뮬린 가문과 비슷한 수준의 군대 를 갖추기 전까진 멈출 생각 없어 요.” “부인••••••

“에디타 당신은 불안하지도 않아 요‘?”

“예? 그게 무슨,”

희미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도일이 천 명이 넘는 군대를 끌고 성문 앞에 나타났을 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노예가 되거 나, 감옥에 갇혔어야 해요.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가 뭐죠?”

청지기 에디타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배를 쓰다듬던 다이오네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포이닉스 경 덕이었죠.”

“그런데 이제 그분은 여기 없어요. 바위를 부수는 붉은 곰도, 하늘을 날며 사방을 불태우는 불의 마녀도 없죠.”

“하지만, 부인.”

용기를 내 나선 자는 문장관 대리 인 벨딘이었다.

“가문과 영지는 창칼로만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교를 통한 화합이야말로,”

“대화는 존중하는 상대와 하는 것 이고, 존중은 곧 두려움이에요.”

다이오네아는 온갖 약초를 넣고 오 랫동안 끓여 알코올을 완전히 날린 포도주로 목을 축였다.

“손가락으로 간단히 눌러 죽일 수 있는 개미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있나요?”

“풍차를 짓고, 다리를 놓고, 목장에 소를 채우고, 길을 넓히는 것? 물론 중요한 일이죠. 하지만 대영주의 윽 박지름 한 번에 모든 걸 빼앗긴다면 그것들이 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요?”

그녀는 침묵하는 가신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 다.

“더 보고할 것 없으면 다들 돌아가 세요. 아, 수문관은 남아요.”

가신들이 집무실을 떠나자, 다이오 네아는 아미아스에게 손짓했다.

아미아스가 조심스레 의자에 앉자 구석에 잠자코 서 있던 집사 셀마가 나서 그의 앞에 놓인 잔을 채워주었 다. 다이오네아의 것과 같은, 술 냄 새 대신 약초향이 감도는 포도주였 다.

“사람은 뽑았나요?”

다이오네아는 한 달쯤 전에 아미아 스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렸다.

금광에서 은밀히 빼돌려 채운 다이 오네아의 재산을 헐어, 오직 영주의 명령만을 따를 친병들을 육성하라는 지시.

“예. 나름 강단이 있는 놈들로 뽑 았고, 하나같이 처자식을 영지에 둔 처지이니 배신할 걱정도 없을 겁니 다.”

그 확신에 찬 태도에도 다이오네아 는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성을 우선해서 기르세요. 중요 한 일을 해야 하니.”

“명심하겠습니다, 부인.”

“그리고, 첫 임무를 드릴게요.”

그녀는 집무실 한 구석에 놓인 갑 옷걸이로 다가섰다. 거기엔 아니그 가문의 가보이자 마법의 갑옷인 ‘루 푸스’가 걸려 있었다.

“벌써, 말입니까?”

“급한 일이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에요. 셀마?”

노파 셀마가 아미아스에게 쪽지를 건네는 동안 다이오네아는 천천히 갑옷을 감상했다.

루푸스의 어깨와 목, 허리에 덧대 어진 늑대 털은 까맣게 그을린 상태 였다.

전해 듣기로 어느 강력한 마법사가 불러낸 벼락을 맞은 탓에 이렇게 되 었다는데, 다이오네아는 지금의 모 습이 더 마음에 들었다. 갑옷이 제 주인을 지켜낸 흔적인데, 그것이 아 름답지 않을 리 없잖은가.

“……이게 뭡니까, 부인?”

아미아스는 글씨가 빼곡한 쪽지를 홀긋거리며 물었고, 어느새 눈을 감 은 다이오네아는 비늘과 미늘 사이 에 아련하게 남은 향기를 좇으며 입 을 열었다.

“벨딘이 여러 소문을 취합해 뽑은 위치들이에요. 패(牌) 없는 마법사 가 숨어들었다는 소문이 도는 곳들 이죠.”

마법사는 자연에 퍼진 이차원의 에 너지를 끌어다 쓰는 존재다.

그 때문인지 누군가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여러 이차원들이 중간계 쪽 으로 조금씩 끌려온다는 개념이 정 설처럼 퍼져있었다.

일부 마법사들은 그게 사실이 아니 라고 하지만, 그들이 무어라 지껄이 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법사를 내 심 부정적으로 여겼다. 제 욕심을 위해 세상의 멸망을 불러오는 이기 적인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다.

물론 권력자를 위해 일하거나, 강 성한 조직에 속하거나, 전통 깊은 학파에서 수학하거나 한 마법사들은 이러한 취급에서 제외된다. 실력도 인맥도 부족한 마법사들만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세간의 시선을 피하 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부인, 이걸 왜 저에게.”

“모두 데려오세요.”

아미아스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 가 미간을 좁혔다.

“설마 떠돌이 마법사들을 거두실 생각이십니까?”

“맞아요.”

“너무 위험합니다!”

“걱정 마세요. 대놓고 부릴 생각은 없으니.”

다이오네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였다. 가느다란 손끝이 루푸스의 목 과 어깨,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비밀을 유지하며 보호해 주겠노라 전하세요. 잘 갖춰진 실험실과 안락 한 집을 원하는 이들이 분명 있을 테니.”

“부인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마법사나 귀족, 교회에 발각되었다간……

“걱정 말라고 말씀드렸어요.”

갑옷걸이의 어깨에 코를 묻을 듯 가까이 다가선 다이오네아는 조심스 레 양손을 뻗었다. 눈을 감은 그녀 의 상상 속 감촉은 단단하고 따뜻했 다.

“비장의 수단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법이잖아요.”

“……알겠습니다, 부인.”

실제로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가혹할 만큼 거칠고 차가웠다. 다이 오네아는 슬슬 형태를 갖추어가던 상상이 와르르 무너져 버릴까 두려 워서 얼른 손을 떼었다.

“수문관.”

“예, 말씀하십시오.”

“제네사 소식은 들었어요. 축하해 요.”

아미아스는 주군이 최근 임신한 아 내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얼른 감 사하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곧 수문관도 절 이해하게 될 거예 요.”

“어떤••••••

“당장 내일이라도 집을 잃을 수 있 다는 불안 속에서 자식을 기르고 싶 은 부모는 세상에 없다는 거요. 난 내 자식을 안전하게 키우고 싶어 요.” 천천히 걸음을 옮긴 그녀는 도로 고동색 의자에 앉아서 등을 기대었 다.

“언제 누가 영지를 탐낼까 불안해 하며 자리를 지키느니 차라리 모든 걸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겠어요.”

“부인.”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 자식은 몰 락한 귀족으로 평생을 살게 될 텐 데……

다이오네아는 포도주를 홀짝이더니 살풋 웃었다.

“하, 어쩌죠? 전 그것도 싫은데.”

“수문관.”

“예, 부인.”

“내 자식은 어떤 사람으로, 어떤 영주로 자랄까요?”

어리둥절한 아미아스에게 다이오네 아는 빙글거리며 물었다.

“당신은 짐작하겠죠? 그분을 가까 이에서 보았으니.”

“예…… 예?”

아미아스가 입을 뻐끔거리자 다이 오네아는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이 영지를, 잘 훈련된 군대와 넘 치는 금고를, 그리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를 온전히 내 아이에게 물려줄 겁니다. 그 어떤 웅대한 꿈 을 꾸더라도 그걸 이루는 데에 한 줌 밑천이 될 수 있도록.”

식은땀을 닦아낸 아미아스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눈썹을 타고 흐르 는 식은땀과, 잔불처럼 은은히 빛나 는 그녀의 눈빛 탓이다.

“아이는 아비를 닮아 영웅으로 자 랄 테죠. 그러면 수문관 당신이, 그 리고 당신의 자식이 그 아이 곁에서 함께 영광을 누릴 겁니다.”

“그러니까, 충성을 다하세요.” 순진한 귀부인의 눈이 아니었다. 시골 영주의 그것도 아니었다.

“목숨도 바칠 만큼, 어떠한 의문도 품지 말고.”

새끼를 품은 맹수의 눈빛에 아미아 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거절할 용 기도, 방법도, 이유도 없었던 그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다이오네아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슬슬 낮잠을 자야겠어요.”

그녀의 축객령에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던 아미아스는 얼른 군례를 올린 뒤 집무실을 떠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다이오네아는 서 랍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었다. 그리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벨벳 카 우치에 앉았다.

“오. 새로운 이야기가 있네?”

저 멀리 서북쪽 어딘가의 소식이 담긴 양피지를 훑어본 다이오네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자상한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자아……. 무도한 현상금 사냥꾼 들과 야만인, 그리고 지옥에서 올라 온 무시무시한 악마를 물리친 이야 기야.”

벽난로 근처에 자리를 잡은 다이오 네아는 잠들 때까지 영웅담을 속삭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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