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악당들 311화
56. 변경으로(4)
이 세상에 떨어진 뒤 줄곧 떠돌아 다녔지만 이번처럼 쾌적한 여행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사우스하버에서 롱빌로 향할 땐 마 적 떼를 포함한 온갖 도적과 괴물들 의 습격에 시달렸고, 이후 왕의 기 수들이 다스리는 지방인 트로셔를 지날 땐 지나치게 삼엄한 경비로 인 해 큰 불편을 겪었다.
기스톨 지방이야 흡혈귀 소굴이었 으니 따로 언급할 것도 없고, 세테 니오라 수도원으로 이어지는 가도 역시 괴물들이 출몰해대서 꽤 고생 을 했더랬다.
반면 이번엔 정말 아무런 불편도 없었다. 괴물이나 도적은커녕, 여행 에 방해가 될 만한 요소 자체가 전 무하다고 할까.
한 번은 상선과 마주쳤는데, 이쪽 선단에 걸린 아리아가 가문 문장을 보곤 얼른 돛을 접고 강가에 배를 붙이더라. 그리고 우리 쪽이 지나가 는 동안 얌전히 정박해 있다가 시야 에서 사라질 즈음에야 조심스레 돛 을 펴는 것이었다.
처음엔 뭘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는 데, 이후에 만난 다른 배들 역시 마 치 짜기라도 한 듯 똑같이 행동하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저게 이 동네 의 암묵적인 룰인 듯했다.
첫날 저녁엔 어느 강변 마을에 들 렀는데, 선발대가 미리 조치를 해뒀 는지 촌장과 마을 유지들은 물론이 고 근방을 다스리는 남작까지 부두 로 나와 에아본 후작을 기다리고 있 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잔치가 벌어 졌다. 풍족한 음식과 술은 기본에, 남작이 특별히 섭외한 유랑 악단이 공연까지 선보였다.
앤트럼 지방의 향토주는 훌륭했고 신선한 재료로 만든 요리는 만족스 러웠으며 음악도 그럭저럭 들을만했 다. 다만 이런 지출이 마을에 부담 이 되는 건 아닐까 싶어 조금 찝찝 했다.
강과 숲을 끼고 평야에 자리 잡은 마을이니 재정 사정이 마냥 나쁘진 않겠으나, 그래도 평범한 농촌인 건 변함이 없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삼백에 이르는 인원을 대접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그러나 난 이내 찝찝함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 진 에아본 후작이 올해부터 5년간 마을의 세금을 면해주겠노라 선포한 것이다.
남작을 포함한 영민들은 그 화끈한 처사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세금 면 제 5년이면 오늘 들인 비용을 메꾸 고도 거스름이 넉넉히 남을 터였다.
후작으로서도 딱히 무리를 한 것 같진 않았다. 앤트럼 지방엔 크고 작은 마을이 여든 개도 넘게 있고, 여긴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 많은 마을에서 걷는 세 금을 모두 합쳐도 가문 소유의 무역 회사가 거두는 수입에 미치지 못한 단다. 한마디로 이 마을에서 바치는 금화 열댓 장 정도는 후작에겐 없어 도 그만인 푼돈이라는 소리였다.
새삼스럽지만, 과연 영주란 제 영 지에서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특히 에아본 후작은 아리아가 가문 이 200년간 쌓아온 역사에 힘입어, 이 앤트럼 지방에서는 왕 이상 신 미만의 절대자였다.
그런 존재의 호의와 배려 속에서 이어지는 여행에 불편이 있을 리가 없었다. 최고급 가이드를 낀 호화 코스를 따라 관광을 하는 기분이 들 지경이니 말 다했지, 뭐.
이러한 감상이 나만의 것은 아닌지 다른 일행들 역시 여유를 만끽했다.
후작의 강권에 못 이겨 선두 선박 에 탄 나와는 달리, 나머지 일행은 모두 세 번째 배에 탑승했다. 그래 서 가끔 선미에서 그쪽을 살피면 뭐 가 그리 즐거운지 저들끼리 낄낄대 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우테콰이는 낚싯대를 만들어 뱃전 에 드리웠는데, 불과 한 시간 만에 송어나 잉어 등을 대여섯 마리나 낚 아 보였다. 대충 만든 조잡한 낚싯 대로 어떻게 저런 퍼포먼스를 보이 는지 모르겠다.
배가 마을에 정박할 때면 내기를 겸해 수영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말총머리 프리츠와 퉁퉁한 에손, 육손이 미텔먼, 초장이 골만 등이 나섰지만 돈을 가져간 건 중검사 움 베르타였다. 하긴, 초승달 군도 출신 으로 거친 파도에 연마된 그녀를 산 골짜기 촌놈들이 당해낼 수 있을 리 가 없었다.
헤일라는 여행에 나선 지 불과 사 홀 만에 후작부인 파나벨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파나벨 말로는 이렇게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는 처음이라는데, 난 헤 일라가 후작부인 앞에서 입을 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지라 그저 의문 스러울 따름이다. 대체 무슨 재주를 부린 거야?
그러는 동안 난 엉뚱하게도 오스 백작, 그러니까, 에아본 후작의 어린 손자와 조금 친해졌다.
계기는 별것 아니었다. 뱃전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데 조부 에게 괜한 트집이 잡혀 혼이 난 뒤 시무룩해 있는 오스를 발견했고, 먼 저 말을 건 게 친해진 계기라면 계 기였다.
먼저 말을 건 이유는……. 한국으 로 치면 이제 고딩이나 되었을 소년 이 백작이니 대영주의 후계자니 하 는 짐에 짓눌려 있는 모습이 안타까 워서 였다.
내가 여상스럽게 말을 걸자 오스는 당황과 경계가 반반씩 섞인 얼굴 더 듬거렸지만, 이내 에아본 후작의 가 르침을 떠올렸는지 가슴을 펴고 여 유로운 척 인사를 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나름대로 흥 이로웠다.
어느 정도 짐작한 바지만, 오스는 고귀한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겸손 하고 선량한 성품의 소년이었다.
자신은 검술이 형편없어서 명성 높 은 기사인 내가 부럽다는 식으로 말 을 하는 걸 보면……. 음, 순진하다 고 할까, 아니면 좀 맹하다고 할까. 후작이 그를 답답해하는 이유를 대 충 알 것 같았다.
뭐, 불과 2년 전까진 그저 그림 그 리기를 좋아하는 귀족 소년이었다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또, 개인적으론 그 모습이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다 큰 어른인척하는 오만한 소년보단 좀 멍청해 보이긴 해도 순수함을 품은 소년 쪽이 인간 적으로 끌리는 것이다.
오스 백작도 나와의 대화가 싫진 않은 눈치였다. 예의를 갖추긴 했지 만 동생 내지는 조카를 대하듯 이야 기를 건네는 내 모습에 금세 경계심 을 풀고 편하게 말을 하는 걸 보면 확실했다.
물론 그 대화가 그리 길게 이어지 진 않았다. 오스는 후계자 교육을 위해 에아본 후작 옆에 붙어있어야 했고, 난 뱃멀미를 앓는 뭉치를 돌
봐야 했기 때문이다.
최근 레벨이 32까지 오른 덕분에 난 혈조술에 더욱 능숙해졌고, 이에 따라 상처를 돌보는 능력도 늘어났 다.
하지만 멀미는 조금 다른 문제였 다. 겉에 상처가 난 것도, 내장 어 딘가가 상한 것도 아니니 딱히 처치 를 해줄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끙끙대 는 뭉치를 곁에서 간호해 주는 것뿐 이었다. 그나마 내가 가만히 머리를 매만져주면 녀석도 조금쯤 안정을 되찾곤 했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테오도 라 공녀에게 도움을 구했다.
수도사제 오칸을 두고 굳이 공녀를 청한 까닭은…… 뭐, 눈이 환해지는 미녀를 두고 냄새나는 중년 아저씨 를 부를 이유가 없어서였다.
어쨌든, 뭉치를 살펴본 테오도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평범한 멀미로군. 특별히 해줄 수 있는 건 없겠어.” “그렇습니까?”
“그렇소. 적어도 내가 알기론 어지 럼증을 덜어내는 기도문 같은 건 없
거든.”
기껏 청을 받아 건너왔는데 이대로 진단을 끝내기엔 민망했는지, 테오 도라는 애매한 얼굴로 말을 보탰다.
“이 냄새만 어떻게 하면 조금 나아 질 것 같은데.”
“냄새 말입니까?”
“음. 멀미란 감각과 관련된 증상이 라, 시야를 가리고 익숙한 냄새를 맡는 게 진정에 도움이 될 거요.”
그러고 보니 선실에 감도는 냄새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선박용 역청이 뿜는 매캐한 기름 냄새와 선창에 쌓인 짐에서 비롯된 눅눅한 먼지 냄새, 그리고 물비린내 가 은은하게 뒤섞여 미미하지만 불 쾌한 악취가 났다.
“익숙한 냄새라……. 어떤 게 있 지? 뭉치야, 차라도 끓여줄까?”
얼굴이 창백해진 뭉치는 대답 대신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 원숭이처럼 눈을 꼭 감 은 채 내 몸을 타고 오르는 것이었 다.
“••••••뭐해?”
“익숙한, 냄새요.”
뭉치는 내 허리를 다리로 감고 내 목덜미엔 코를 푹 묻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우흐으으-’ 하고 바 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힘이 풀렸는지 도로 침대로 흘러내 리려는 뭉치를 팔로 받쳐주는데, 어 째 굳은 시선이 느껴졌다.
“공녀님?”
“……포이닉스 경.”
테오도라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나 와 뭉치를 번갈아 살폈다. 그리고 잠시 말을 고르다 어렵사리 입을 열 었다.
“음, 그, 경은 헤일라 양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 하지 않았소?” “ 아.” 다 큰 여인네가 임자 있는 남자에 게 매달려 있는 모습은, 근 12년간 수녀 및 성기사로 살아온 테오도라 에겐 조금 충격적인 광경이겠지.
“보시다시피 이 녀석은 이방인입니 다. 먼 동방에 있는 윤국(倫國)이라 는 곳에서 왔죠. 대륙에는 친척은커 녕 지인 하나 없는 몸인데, 어떻게 인연이 닿아서 저를 친오빠처럼 따 릅니다.”
“……음, 사정이 딱하긴 하지만-아무리 그래도, 헤일라 양이 불쾌해 하진 않겠소?”
“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헤일라는 그런 애가 아닐뿐 더러- 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그 녀와 제가 약혼을 한 건 가문의 결 정이지 저희의 의사와는 관계가 없 는 일이었습니다.”
“귀족가의 혼사란 무릇 그런 것이 아니오?”
“어, 그렇긴 한데……. 어쨌든 말이 약혼한 사이지, 저와 헤일라는 그냥 동료 관계입니다. 사촌이기도 하고 요.” “사촌이라고? 사촌 간에 결혼을 약 속했단 말이오? 그런 말도 안 되 느 ”
놀란 듯 입을 반쯤 벌린 것도 잠 시, 그녀는 ‘음’ 하고 침음하더니 연 한 금발을 쓸어넘겼다.
“아니, 아니오. 내가 실례를 저질렀 군. 친족 간의 결합이라는 것이 여 염에선 터부시되는 일이나 귀족들 사이에선 가끔 있는 일이었지. 성직 에 몸을 담은 지 오래라 괜한 망동 을 벌였소.”
“괜찮습니다, 공녀님”
이해했다는 투의 말과는 달리, 테 오도라의 녹색 눈동자는 혼란스러움
으로 가득 찬 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품에 안겨있 는 뭉치를 둥기둥기 달래었다. 내 쇄골에 코를 박은 녀석은 가끔 어깨 를 부르르 떨다 탁 늘어뜨렸다. 안 정을 찾아가는 나름의 과정이겠지.
“공녀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금방 괜찮아지는군요.”
“……음, 다행이오.”
“배웅을 해드려야 하는데, 간만에 찾은 안정이라 깨울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오. 난 신경 쓰지 마시오.”
혼란을 수습하고 선실을 나서려던 테오도라는,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공녀님?”
“그게.”
주저하던 공녀는 내 거듭된 질문에 간신히 품고 있던 질문을 내놓았다.
“일전의, 그 계시 말이오.”
“계시? 성자께서 남기신 계시 말씀 이십니까?”
“그렇소. 혹시…… 그 계시를 다시 견식해 볼 수 있겠소?” 난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 였다.
“네, 뭐. 가능합니다. 안 될 건 없 죠.”
“……정말이오?”
“예. 원하신다면 당장에라도-”
“에? 아니아니, 당장은 아니오.”
공녀는 황급히 양손을 휘적거렸다.
그리고 이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 었다.
“내게도 준비가 필요하니까.”
“준비, 말씀이십니까? 어떤.” 테오도라는 대답 대신 해맑게 웃어 보였다. 눈부신 미소에 잠시 입을 벌린 사이, 그녀는 선실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