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악당들-360화 (360/547)

나의 악당들 360화

61. 전쟁의 기술(2)

하이캐슬은 서부 변경을 지키는 요 새인 동시에 고원 지방의 주도(主 都) 다.

한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최전선에 박혀 있는 건 그다지 흔치 않은 일이다. 이런 곳에 하이캐슬이 서 있는 건, 이 성곽도시의 터를 닦 은 현 변경백의 증조부가 국경을 떠 나지 않겠노라고 패기를 부려댄 결 과였다.

이후 용맹하고 완고한 변경백들이 하이캐슬을 지켰다. 제국의 공격을 받아 불타거나 심지어는 함락을 당 한 적도 있지만, 평화로운 시절엔 교역을 번성시키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밀라놀의 전전대 국왕 -일명 기사왕-은 미테르게란트를 두들겨 팰 때마다 이 하이캐슬을 중 요한 공격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제오레 가문의 사내답게 빼어난 숭 무정신을 자랑했던 전대 왕-일명 준엄왕-은 막대한 금은을 보내어 성곽을 증축하게 했다.

그러니 오늘날의 하이캐슬은 숱한 전쟁과 활발한 교역 그리고 왕실의 투자가 빚어낸 도시라고 할 수 있었 다.

그런 배경을 가진 덕일까, 하이캐 슬은 황량한 고원에 세워진 도시라 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고 위엄찬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는 그 내리막 아래에 높이 7, 8미터, 두께 5미터 정도의 단단한 외벽을 두르고 있었다. 외벽은 타원형에 가

까운 십일각형으로 언덕을 감싸고 있었고, 각 꼭짓점마다 둥글고 뚱뚱 한 보루가 세워진 모습이었다.

외벽과 내벽 사이엔 가파른 경사만 있을 뿐 풀 한 포기 없는 공터였다. 외벽을 넘은 적을 편히 사냥하기 위 한 안배일 터였다.

언덕의 경사 위에 세워진 내벽은 그 생김새가 외벽과 크게 다르지 않 았다. 차이점이라면 외벽처럼 중간 중간 보루를 세운 것에 더해 붉은 점토 기와를 올린 뾰족한 지붕의 궁 탑이 촘촘히 박혀 있는 정도였다.

외벽과 내벽만 해도 그 규모가 어 마어마해서, 울카르 왕자가 이끄는 사천오백 병사들을 모조리 동원해도 저 이중벽을 전부 채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엄청난데.”

난 감탄을 하면서도 기병대의 행렬 을 따라 천천히 바이콘을 몰아갔다.

하이캐슬의 이중벽이 뽐내는 웅장 한 자태와는 별개로, 주변엔 피난민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함부로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

근데 다들 어디로 도망치는 거지. 우리가 못 미덥나?

내 의문에 답하듯, 무거운 표정으 로 피난민 행렬을 돌아보던 울카르 가 입을 열었다.

“라이암 경이 취한 조치일 거요.”

“라이암 경이요?”

라이암 섬머송, 일명 ‘오만한’ 라이 암 경은 울카르의 네 번째 기사다. 그는 원래 오두엔느 항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돌연 어인족 군대가 물러 나면서 하이캐슬로 합류했다고 한 다.

“하이캐슬은 방어에 유리한 도시지 만, 적의 군세는 우리의 세 배에 달 하오. 전투가 격해지면 이중벽을 포 기해야 할 수도 있소.” “그래서 주민들을 내보내는 거군 요.”

“그렇소. 시간을 끌다가 약탈당하 게 두는 것보단 미리 쫓아내는 편이 낫겠지……

들어보니 하이캐슬의 주민들 중 절 반 이상이 이미 피난길에 올랐다고 한다. 떠난 이들은 대부분 농노, 그 중에서도 여자와 노인, 어린아이들 이었다.

상인과 장인들은 아직도 꽤 남아있 다고 한다.

상인들은 가진 물건을 다 털어낸 뒤 도시가 포위되기 직전에 도망칠 심산이겠지. 반면 장인들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해야 하므로 떠 날 수가 없는 형편이다.

“울카르, 울카르 왕자님이다.”

“정말이야…….

몇몇 피난민들이 기병대의 선두로 나선 울카르 왕자를 알아보고 말을 건네왔다.

“전하, 부디 하이캐슬을 수호하여 주시옵소서.”

어느 노인이 기도하듯 읊조리며 고 개를 조아렸다. 울카르는 묵묵히 고 개를 끄덕이곤 고삐를 쳐 그들을 지 나쳐갔다.

“전하, 전하.”

“빛의 주가 그대의 곁에 머무시기 를!”

“울카르 왕자님!”

웅성거림이 커졌다.

울카르는 가라앉은 시선으로 피난 민들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 다. 손을 흔들거나 입을 열지는 않 았다.

이건 내 추측이지만, 울카르는 죄 책감 비슷한 걸 느끼고 있는 것 같 았다. 저들의 평화로운 일상이 파괴 된 것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전쟁을 걸어온 건 제국의 두 선제 후, 스트롬의 아빌람버스와 알첸버 그의 버카드다. 울카르가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의 옆으로 바이콘을 몰아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싶었지만, 이미 성벽 이 코앞이었다.

“-왕자님이다! 울카르 왕자님께서 오셨다!”

“성문 열어!”

외벽의 장대함에 어울리지 않게도 성문은 세 개 뿐이었다. 개중 우리 가 다가선 동북쪽 성문이었고, 문루 에 서 있던 병사들은 은발을 길게 휘날리는 울카르를 알아보았는지 얼 른 성문을 열어주었다.

“주군이 오셨다! 울카르 왕자님께 서 돌아오셨다!”

빠아암-

정오의 쨍한 햇살과 동쪽에서 불어 오는 찬 바람 사이로 낮은 나팔 소 리가 흘러갔다. 귀환한 주군을 환영 하는 걸까, 아니면 여태 잠들어 있 는 도시를 깨우는 걸까.

“울카르 왕자님과 그분의 기사들이 왔다!”

“은왕자와 기병대가 도착했다!”

문루로부터 퍼진 고함은 그들과 이 어진 외벽은 물론이고 내벽에도 전 해졌다. 강을 타고 번지는 잉크처럼, 소요는 사방으로 퍼져갔다.

“잘 오셨습니다, 왕자님!”

“울카르 전하 만세!”

문루 위에서 고함을 질러대는 병사 들 아래로, 짧은 도개교를 지나 내 벽 안으로 들어섰다.

소음이 세상을 채웠다. 순간적으로 귀가 멀어버린 것만 같았다.

병사들은 쇠투구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고, 성가퀴를 치고, 창대로 바닥 을 찍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함 은 기본이었다.

내벽에 둘러싸인 도시도 떠들썩해 졌다. 크고 작은 건물에서 주민들이 쏟아져 나왔고, 폭이 4미터는 될까 싶은 좁다란 길은 순식간에 인파로 가득 찼다. 포목상과 재단사, 대장장 이와 도제, 음유시인과 수도사, 포주 와 창녀, 말 장수와 거간꾼…….

왕자님, 왕자님!

울카르 전하가 오셨어!

우린 살았어, 살았다고!

몇몇 목소리만 간신히 여과해낼 정 도로 고막이 먹먹했다.

주민들도 병사들에게 전염되었는 지,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함을 질러 댔다. 건물에 올라 말린 꽃잎을 뿌 려대는 자도 있었고, 기사와 기병들 에게 다가와 육포며 술병 따위를 건 네는 자도 있었다.

내벽 안에 우뚝 선 세 개의 내성, ‘액소드’와 ‘안갈-비렌’ 그리고 ‘하 이캐슬’에서도 사람들이 쏟아져 나 왔다. 영주와 기사, 사제와 마법사, 장교와 하사관, 집사와 사절, 서기관 과 청지기, 문장관과 필경사…….

기다렸습니다, 전하.

이쪽으로, 바로 회의를 준비하겠습 니다.

칼날 만으로부터 소식이 들어왔습 니다, 전하. 드디어 강철함대가 당도 했습니다.

왕자님, 적이 아사그의 둘레를 정 찰하고 있습니다. 즉시 파스트에 전 령을 보내야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급한 소식을 쏟아 냈다. 온갖 소음으로 공기가 떨리는 가운데, 울카르는 애써 귀 기울이고 고함쳐 답을 내놓았다.

퉁퉁한 에손과 중검사 움베르타가 어디선가 나타나서는 내게 무어라 지껄여댔다. ‘안갈-비렌, 여관, 숙 소’ 어쩌고 하는 것 같은데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먹먹함에 점차 적응해갈 즈음, 나 는 울카르 왕자를 둘러싼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희망과 신 뢰, 존경 등 온갖 밝은 것들로 채워 져 있었다. 특히 몇몇 기사와 장교, 하사관들의 눈에 담긴 것은 차라리 신앙심에 가까운 것이었다.

왕자가 왔으니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듯, 대부분의 사람들 은 근심 걱정을 잊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근심과 걱정들은 빈 땅에 내려앉는 대신 그대로 울카 르의 어깨에 올라타 버렸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분명 저 막중 한 부담감에 짓눌리고 말았겠으나, 울카르 왕자의 어깨와 허리는 여전 히 꼿꼿했다. 솔직히 조금 존경스러 웠다.

진한 남색의 눈동자가 괴성을 질러 대는 사람들을 훑어갔다.

이윽고 왕자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이더 니,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와아아아!

마침내 하나 된 함성이 하이캐슬에 울려 퍼졌다.

도시의 급한 안건들을 처리한 직 후, 울카르 왕자는 서쪽 외벽으로 향했다. 나 역시 전세를 파악해야 했기에 그의 뒤를 따랐다.

걸어가며 에손과 움베르타를 통해 동료들과 다른 부하들의 안부를 확 인하는데,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오랜만이오.”

그는 깔끔하게 정리한 수염과 옆구 리에 낀 화려한 투구가 인상적인 중 년 사내였다.

“아, 라이암 경. 정말 오랜만입니 다.”

“오랜만이라고 하기엔 고작 8개월 만인데……. 그새 많이도 변했구려.”

“하하.”

에손과 움베르타를 뒤로 밀어낸 라 이암 경은 나와 나란히 걸으며 옆에 있는 자들을 소개해주었다.

“소개하지. 이쪽부터 솔튼 경, 스티 에드 경, 볼솜 경, 에드버트 경, 헨 드리 경……

그들은 다름 아닌 울카르의 직속 기사들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나를 위해, 동료들 사이에 안면을 틔워주 려는 라이암 경이 배려였다.

그들은 모두 일곱 번째인 나 이후 에 왕자의 막하에 든 기사들이었다.

나보다 먼저 울카르에게 충성한 기 사가 랭볼트 경 등 여섯 명이고, 고 원을 누비는 기병대에 속해 있던 기 사가 열 명이었다. 그리고 지금 여 기서 또 다른 일곱 명을 만났으니 울카르 왕자의 직속 기사 스물넷, 아니, 나를 제외하고 스물셋을 모두 만나본 셈이다.

“반갑습니다. 경의 위명은 익히 들 었습니다. 정말 키가 크시군요.”

“드디어 뵙게 되는군요. 영광입니 다.”

확실히 내가 유명해지긴 한 건지, 동료기사들은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과 친해져서 나쁠 건 없었기에 적당히 인사를 주고받고 있는데, 울 카르 왕자를 서너 걸음 뒤에서 호종 하던 안키르 경이 이쪽을 흘끔거렸 다. 그러다 영주들과 대화를 나누는 왕자의 눈치를 살피곤 슬쩍 다가오 는 것이었다.

“이거 이거, 내가 한발 늦었구먼. 포이닉스 경을 사교계에 선보이는 건 내가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경은 춤도 못 추면서 웬 사교계 운운이오? 가서 주군의 곁이나 지키 시오.”

“난 덩치가 커서 저렇게 바글거리 는 곳에 못 끼어든다고. 이런 임무 엔 지젤라 경이 제격이지. 저기 좀 봐.” 새매기사 지젤라 경은 여느 때처럼 울카르 왕자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백합 무늬 망토 사이로 칼손잡이를 비죽 내민 채 거기에 양손을 얹은 자세였는데, 체구는 크지 않아도 썩 위압감이 느껴졌다.

어째 그녀의 눈빛이 과하게 날카롭 게 느껴져서 안키르 경에게 물어보 았다.

“……오늘은 유독 심한 것 같은데 요. 왜 저렇게까지 경계를 하는 겁 니까?”

“글쎄? 저분 때문이 아니겠소?”

안키르 경이 가리킨 건 30대 중후 반 정도로 보이는 온후한 인상의 사 내였다. 끝을 길게 늘어뜨린 푸른 샤프롱(Chaperon)을 쓰고 4각 패턴 이 들어간 벨벳 튜닉에 질 좋은 코 트까지 두른 걸로 보아 지체 높은 귀족이 분명했다.

그의 옆에는 얼굴을 빼다 박은 십 대 후반의 소년이 서 있었다. 아마 아들 내지는 조카로 보였는데, 앞선 사내와는 달리 체격이 꽤 크고 가벼 운 갑옷으로 무장한 차림새였다.

“저분이 누굽니까?”

“란드리 변경백이시잖소.”

“……란드리 변경백이요?”

그, 남자 좋아한다는 아저씨?

……어, 내가 좀 편견을 갖고 있었 던 걸까. 전혀 게이같이 안 생겼는 데.

“그 옆에 있는 애는요? 아들 같아 보이는데.”

“변경백 각하의 아들이오.”

“네?”

난 눈을 끔뻑거리다 목소리를 낮추 며 물었다.

“제가 그, 소문을 듣기로는……

그렇게 운을 떼자 안키르 경은 피 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평판에 너무 혹하진 마시오. 변경 백 각하께서는 건실한 분이거든. 아 내를 존중하고, 아들을 아끼며, 딸들 을 사랑하는, 그런 평범하고 좋은 남성이란 말이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 다.

“뭐, 물론 남첩을 몇 명 두고 있긴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소? 내 게 구애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말 마십시오. 경이 구애 를 받는 장면을 상상하게 되니까.”

속이 메슥거려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니 안키르 경은 껄껄 웃으며 어 깨를 두드렸다.

“역겨워도 되도록 티는 내지 마시 오. 특이한 성벽이야 어찌됐건, 이 도시엔 변경백 각하를 존경하는 사 람들이 아주 많단 말이지.”

“네, 조심하죠……. 그럼 혹시, 지 젤라 경이 저러고 있는 것도.”

“각하의 평판 때문이지. 하여튼, 표 정 관리를 못하는 여자라니까. 그래 도 지젤라 경 덕분에 헛소문은 사라 져서 다행이오.”

“무슨 헛소문 말입니까?”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거대한 기 사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주군과 얽힌 그 불쾌한 소문 말이 오.”

“ 아.”

“만에 하나 란드리가 더러운 짓거 리를 하려 든다면, 주군께서 나서기 도 전에 지젤라 경의 칼이 그의 -을 잘라버릴걸.”

그렇게 시시한 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 우린 외벽에 올라섰다.

나로서는 미테르게란트의 군대와 마주하는 첫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