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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당들-447화 (447/547)

나의 악당들 447화

66. 은왕자(2)

내가 두 함대-아일란트의 쇠비늘 함대, 서던쇼어의 강철함대-의 지원 을 업고 칼날만을 넘은 게 3월 9일 의 일이다. 그로부터 닷새 뒤에 선 제후군이 국경의 요새 도시인 하이 캐슬을 점령했고.

이에 왕도의 ‘누운 사자’가 무거운 엉덩이를 떼었다.

왕태자이자 왕국의 재상인 자카리 스는 제국의 선제후들이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한 작년 10월 이후 근 반년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제 이복동생이 불구가 되고 그 군대 역시 짓뭉개졌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울카르가 빼앗긴 고 원을 되찾아 명성을 드높일 심산인 것이다.

미테르게란트의 황제도 움직였다.

내가 이끄는 일천여 군대가 앙스트 와 오브도르프를 휘젓던 3월 하순, 루일릭스 2세는 남방 원정을 위하여 집결시켜둔 대군을 동쪽으로 휘몰았 다. 제국 영토를 범한 침입자들을 쫓아내고 위세 높은 두 선제후에게 서 이권을 뜯어내는 게 목적일 것이 다.

두 거인의 움직임에, 아빌람버스 공작은 병력을 넷으로 나누었다.

고원 북쪽에 자리한 지방인 운파스 트를 차지하고자 나아간 병력이 이 천오백, 앤트럼으로 통하는 동쪽 길 목을 틀어막은 부대가 일천, 고원의 잔당을 청소할 겸 하이캐슬에 남은 게 천오백이다.

그리고 나머지 육천여 대군은 이틀 전인 4월 5일에 이 회랑지대에 모 습을 드러내었다. 황제가 끼어들기 전에 나를 쳐부수고 앙스트와 오브 도르프를 수복하기 위해 회군한 병 력이 다.

호프컨 성백이 이끄는 선발대의 피 해를 포함하여, 회군한 선제후군은 지금까지 천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 었다.

심대하기 짝이 없는, 어지간한 군 대는 지리멸렬하고도 남았을 피해 다. 그러나 스트롬 가문의 정예와 알첸버그의 이교도 노예군단을 주축 으로 한 적군은 흩어져 도망치기는 커녕 동요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 았다. 여전히 아군을 압도하는 머릿 수와,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수뇌부들 때문일 것이다.

“하이캐슬이 함락되기 직전, 저희 는 헤일라 아가씨를 따라 아사그로 향했습니다.”

멀미에 비틀대는 헤일라를 영리한 셰아에게 도로 떠맡기는 내게 베테 랑 컨휘어가 보고를 이어갔다.

“그리고 테오도라 공녀께서 정화한 좁은 길을 따라 젤른트리로 넘어왔 습니다.”

그것도 잠시, 그는 전장을 둘러보 더니 얼굴을 굳혔다.

“……설명을 늘어놓을 때가 아니군 요. 일단 전열부터 가다듬어야겠습 니다. 여차하면 퇴각해야 하니.”

“퇴각이라고?”

“가까스로 시간을 맞추긴 했지만, 드리시르의 ‘엘모어 강 함대’에 실 어 온 병력은 고작해야 칠백 남짓입 니다. 여기 있는 병력과 합쳐도 저 만한 대군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합 니다.”

그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데, 헤일라는 찌푸린 눈을 깜빡대면 서도 내게 웬 물약병을 건넸다. 물 약에 대한 설명은 엑엑대며 헛구역 질하는 헤일라 대신 그녀의 팔을 붙 들고 있던 셰아가 해주었다.

“얼른 드세요, 리안 웰에서 구한 ‘마력회복의 물약’이에요.”

리안 웰의 연금술 길드에서 주황이 끼와 딱총나무 꽃 따위를 써서 만들 었다는 진귀한 물약이다. 단숨에 마 시니 심장이 조금쯤 적셔지고 사지 로 뻗은 핏줄에서 혈기가 찰랑거리 는 기분이다. 요구르트 병보다 조금 큰 용기에 금화 열두 장이라는, 그 돌아버린 값이 마냥 바가지는 아니 었던 모양이다.

난 물약병을 비운 뒤 컨휘어에게 되물었다.

“퇴각하라는 건, 왕자님 명령이야?

잠깐, 그러고 보니 왕자님은?”

“삼왕자 전하께서는 따로 움직이고 계십니다.”

“따로‘?”

“하이캐슬에서 물러난 이후 전하께 서는 일부 기병들을 이끌고 북쪽으 로 향하셨습니다. 프릭스 변경백이 서신으로 요청한 바에 따라 그를 돕 고 원군을 받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는 컨휘어의 설명을 한쪽 귀에 매단 채 모여든 병력의 선두로 나아 갔다.

스티드먼과 미라, 시모스는 얼떨결 에 다른 친병들과 합류했다. 나나 녀석들이나 여유롭게 회포를 나눌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집결! 아군과 합류해 방진을 강화 한다!”

하이캐슬에서 잡다한 지휘관 노릇 을 하던 내게 울카르 왕자가 붙여준 하사관, 사나운 머르그의 목소리였 다.

그의 구령에 ‘케이보르’에서 징집 한 사병 마흔 명이 강물과 개흙을 찰박이며 우르르 달려갔다. 머르그 는 그새 내 주변 상황을 파악했는 지, 항병을 이끄는 하사관 고트롭과 나란히 서 있었다.

낯익은 놈들이 그 무리에 합류했 다. 창잡이 맥케이그, 쇠장갑 타가 트, 뼈갑옷을 걸친 키건, 털보 헨리 크, 주정뱅이 오브린, 도허티와 에톤 형제 등 나름 고참에 속하는 용병들 이 사병 사이에 섞이며 전열을 강화 하는 것이다.

“그다음엔?”

“전하께서는 드리시르 가문에 빌린 함선을 엘모어 강을 따라 내려보내 셨고, 저희는 거기 탑승했습니다. 상 황에 따라 나리를 지원하라는 게 안 키르 경과 저희에게 내려진 유일한 명령이었기에 이곳에서 합류한 겁니 다.”

“그래서 왕자님은 어디에 있는데?”

“파스트로 진격하던 적군을 프릭스 변경백과 함께 격파하셨다는 소식이 담긴, 닷새 전에 받은 서신이 마지 막이었습니다.”

“……젠장.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 가고 있는 거야?”

머리와 온몸이 무거워진 와중에 눈 앞까지 흐려지는 기분이다.

내 답답함과는 별개로, 거센 물결 을 타고 나타난 지원군은 강기슭을 채운 제국군을 분쇄하며 맹위를 떨 쳤다. 컨휘어의 말대로 그 규모는 고작 칠백 남짓에 불과했지만, 하나 같이 역전의 용사라 칭할 만한 정예 들이었기에 그 충격력은 정말 대단 했다.

“모두, 돌겨억!

강가의 돌밭에 머리를 처박은 함선 에서, 어느새 ‘흰 목동의 정강이뼈’ 를 갈무리한 안키르 경이 난간을 박 차며 뛰어내렸다. 그의 키만큼이나 길쭉한 양손검을 들었는데, 퍼멀에 주황빛 마력을 흘리는 큼지막한 보 석이 달린 걸로 보아 일종의 마법검 인 것 같았다.

“화이트스톤의 안키르가 왔다-!”

포효와 함께 땅을 향해 그어지던

칼날이 별안간 빛을 뿜었다.

키우웅!

양손검의 날카로운 칼끝이 닿기도 전에, 칼날이 머금은 주황빛 오라가 그에 맞서는 병사를 짓뭉갰다. 덕분 에 반사적으로 장창을 치켜든 노예 병은 머리와 몸통이 완전히 으깨져 양팔과 양다리를 사방으로 흩뿌렸 다.

“으, 하!”

개흙 섞인 들판에 착지한 안키르 경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빠르고 기민한 몸놀림을 뽐내며 칼 을 휘둘렀다.

콰곽!

“끄억,”

“공격! 달라붙어라!”

마력이 주입된 양손검은 보이지 않 는 힘의 파장을 뿜으며 칼날에 스치 는 모든 것을 찢고 부수었다.

어느 지휘관의 외침에 노예병들이 개미 떼처럼 덤벼들었다. 그들이 날 이 뭉툭한 믹서기에 갈린 토마토 같 은 꼴이 되기까지는 채 두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뭣들 하고 있어, 이 돼지 새끼들 아! 빨리 따라붙어!” 투구 대신 파란 두건을 두른 왕자 의 하사관, 아니, 왕자의 장교가 된 길버트가 안키르 경에 이어 개흙을 디디며 빽 고함을 질렀다.

안키르 경이 타고 있던 기함을 포 함해 세 척의 함선에서 이백 명이 훨씬 넘는 병사들이 구르듯 쏟아져 나왔다.

사슬갑옷에 둥근 쇠투구 등 익숙한 무장을 한 울카르 왕자 직속의 정예 병이 백 명 남짓. 나머지는 그에 못 지않은 무장을 한 아비든과 오든록 두 지방의 병사들이었다.

“이쪽으로! 방패벽을 세워라!” 그들로부터 조금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큼직한 원방패를 든 병사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팔뚝보다 조금 길쭉한 검을 높이 쳐들고 부하들을 호령하는 여인은, 북방에서 온 ‘방 패처녀’ 그라니아였다.

“방패, 들어!”

“방패- 벼억!”

한때 용병으로 고용되었으나 은왕 자의 눈빛에 홀려 친병으로 신분을 바꾼 전사들이다. 그들이 강기슭 한 켠에 두터운 벽을 세운 채 도끼와 칼로 방패를 두드리는 시이, 또 다 른 함선들이 병력을 토해냈다.

“이럇-I”

웬 기수가 방패벽 뒤로 내려서더 니, 기도인지 명령인지 모를 오만한 외침을 내질렀다.

“빛의 주인이여, 모든 물의 지배자 여! 땅의 어머니와 하늘의 아버지 여! 누구든 좋으니, 나에게 끝없는 가호를!”

빛나는 장검을 치켜든 채 고래고래 고함치는 기수, ‘붉은 용’ 루얀 남작 에게 이백 명이 훨씬 넘는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소가죽 갑옷과 중쇠뇌 로 무장한 델리로드의 병사들 그리 고 토세스 남작 등이 이끄는 앤트럼

의 병사들이었다.

“공격 준비! 우리를 불멸로 이끌 영광이 바로 코앞에 있다!”

루얀이 어둠을 떨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삐를 쳤다. 발굽마다 날개 를 단 듯 네 발목에 긴 털이 자란 백마는 질척한 땅을 반쯤 날듯이 오 가며 제 주인의 위용을 뽐냈다.

“내 찬란한 영광을 나눠 받고 싶다 면, 죽기 살기로 따르라!”

만으로 열셋,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중학생에 불과했을 어린 소년은 뒤 도 돌아보지 않고 고삐를 쳤다. 온 벌판을 태우고 뒤집을 기세로 활개 를 치는 우테콰이나 오라를 머금은 양손검으로 적들을 주스로 만드는 안키르 경의 뒤를 따르는 대신, 편 제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부대들 을 향해 덤벼들었다.

노예군단에 섞여 있는 궁수들이 화 살을 쏘자, 무모한 소년은 가슴을 활짝 열어젖혔다. 하지만 그렇게 쏘 아진 서른 개도 넘는 화살 중 그의 호리호리한 몸에 적중하는 것은 단 한 발도 없었다. 루얀의 양손의 손 등에 새겨진 ‘장막의 가호’ 문신이 화살을 모조리 튕겨낸 덕이다.

“……저게 왜.” 내가 놀라든 말든, 백마를 탄 소년 남작은 회색 바람을 휘감은 오른팔 로 빛나는 장검을 휘둘렀다. 그를 겨눈 장창들이 와르르 옆으로 치워 지자, 백마는 단숨에 병사들을 넘어 뜨리며 난장을 피워댔다.

“공겨어 억!”

“우와아아아-!”

어린 귀족이 선보인 놀라운 돌격 에, 앤트럼의 병사들은 용기백배하 여 함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작은 해일이 되어 대군의 한쪽 귀퉁이를 허물어뜨렸다.

“……나도 나서야겠는데.”

바이콘의 고삐를 고쳐 쥐며 중얼거 리자, 베테랑 컨휘어는 얼른 내 앞 을 가로막았다.

“나리, 전열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퇴각을 하든 계 속 맞서든, 아군이 분투를 벌이고 있는 지금 재정비를 해야 합니다!”

“네가 하면 되잖아.”

“••••••예?”

“네가 나 대신 하라고. 물러서든 버티든, 한 번 더 휘저어야 뭐라도 될 것 같으니까.”

“아니, 나리-”

나는 그가 뭐라 항의하기도 전에 고삐를 쳐 앞으로 튀어 나갔다. 때마침, 밤하늘을 밝게 수놓던 마 법사들의 전투가 끝났다. 전신을 노 랗게 물들인 거구의 노인과 뱀 대가 리들을 부리던 젊은 여인은 어디론 가 사라져 버렸고, 그들에 맞서던 엘렌은 잔뜩 지친 기색으로 땅에 내 려앉는 중이었다.

“스티드먼, 미라, 시모스! 엘렌 챙 겨!”

내 목소리에 다른 친병들과 뒤섞여 적들을 베어 넘기던 세 남녀가 화들 짝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비틀대는 검은 융단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달 려가는 人}이, 프리츠를 비롯한 다른 친병들이 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빠진 자리는 머르그와 고트 롭이 이끄는 백여 명의 병력이 대신 했다. 항병들이든 케이보르의 징집 병이든 그리 수준 높은 병사들은 아 니었지만, 강변의 제국군은 이미 대 다수가 지리멸렬했기에 마무리 청소 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나리!”

“이대로 튀는 겁니까? 한바탕 더 해야죠!”

말총머리 프리츠와 중장병 데르비 쉬 등 내 친병들 중에서도 특히 뛰 어난 실력과 장비를 갖춘 놈들을 쭉 홅어본 뒤, 난 피식 미소를 지었다.

“좋아. 원하는 놈들만 따라와.”

강 너머를 향해 내달리는 바이콘 뒤로, 십여 명의 친병들이 따라붙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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