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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당들-451화 (451/547)

나의 악당들 451화

66. 은왕자(6)

“우오오오오!”

“삼왕자 전하 만세-!”

울카르 왕자의 승리 선언이 전해지 자 병사들은 미친 듯 환호했다. 반 면 난 소리를 지르기는커녕 두 발로 서 있을 기운조차 없었다.

“……하. 죽겠네, 진짜.”

불길과 강물과 시체와 피와 먼지로 온통 엉망이 된 전장을 뒤로하고 오 륙십 미터쯤 바이콘을 몰았다. 놈도 어지간히 지쳤는지 털레털레 걷는 게 비루먹은 나귀 같다.

내가 내려선 곳은 아침이슬을 촉촉 이 머금은 벌판이었다. 맹렬한 전쟁 의 화마도 봄의 들녘을 모두 집어삼 키지는 못한 모양이다. 색색의 꽃잎 과 잔풀은 코끝을 스치는 탄내가 잊 힐 만큼 싱그러웠다.

푹신한 들판에 털썩 주저앉았다. 병력수습이고 전장 정리고, 다 때려 치우고 퍼질러 자고픈 마음이 굴뚝 같다.

물론, 과한 욕심이었다.

“포이-”

가장 먼저 나타난 건 줄곧 근처에 은신하고 있던 뭉치였다. 녀석은 살 벌하게 생긴 가면을 손에 달랑거리 며 달려와 곧장 내 품에 뛰어들었 다.

“고생했지. 다친 덴 없고?”

“없어, 말짱해요!”

먼지를 한껏 뒤집어쓴 뭉치에게 ‘피곤해서 기절할 것 같으니까 좀 떨어져 줄래?’ 따위의 말을 지껄일 수는 없었으므로, 난 웃는 낯으로 녀석을 맞이했다.

“후으움……

뭉치는 내 울대 아래에 깊이 얼굴 을 묻었다.

작은 박스에 앉은 고양이처럼 둥글 게 말린 몸에서는 진한 과일 내음이 났다. 나는 긴 들숨으로 향기를 한 껏 머금는 한편, 아기의 그것처럼 말랑말랑한 볼살을 만지작거 렸다.

“피곤하지? 다 끝났으니까 한숨 자.”

“여기서요?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뭐야.”

“헤-”

뭉치는 황송하다는 듯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다가 빵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 더 꽉 안아주면 안 돼요? 포옥, 하게.”

“포옥, 할 거야?”

“네.”

마주 웃으며 주문한 대로 해주었더 니 녀석은 자그맣게 웃음소리를 홀 렸다.

가슴 한쪽이 따뜻해진다. 굳은 어 깨가 조금 풀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귀염성 넘치는 첫 번째 손님과는 달리, 다음으로 몰려든 건 시커먼 덩치들이 었다.

“우하하, 나으리!”

“승리입니다, 포이닉스 님! 우리가 이겼다고요!”

데르비쉬와 골만, 에손 등을 필두 로 열댓 명의 친병이 피칠갑을 한 채 달려왔다.

놈들의 발치로 찐득한 개흙과 덩어 리진 재가 마구 튀기는 모습에, 난 애써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 잠깐. 다들 강물로 좀 씻 고 오든가 할래?”

“예에?”

아랫입술이 쪼개져 피를 질질 흘리 던 도넬이 툴툴거렸다.

“아니, 간만에 뵈었는데 반갑지도 않으십니까? 전투도 이겼는데』

“당연히 눈물 나게 반갑지. 다들 고생했을 테니, 일단 좀 쉬어. 회포 는 나중에 풀자고.”

우다다 달려온 덩치들은 어째 시무 룩한 기색으로 저들끼리 눈을 마주 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승리의 환호 가 금세 그치고 죽은 전우를 위해 내는 울음과 고통에 터져 나오는 신 음이 들판을 뒤덮자, 친병들은 조금 애매한 얼굴로 돌아섰다.

“……컨휘어 쪽으로 갈까?”

“그러실까요, 누님? 아까 보니 우 리 대장님,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 이시던데.”

“그래 뭐, 가자. 우리 애들도 적잖 이 죽었을 테니 포장이나 잘 해주자 고.”

육손이 미텔먼과 중검사 움베르타 등의 동의를 얻은 데르비쉬가 고개 를 까닥거리자, 친병들은 달려온 길 을 거슬러 우르르 몰려갔다.

방금 막 커다란 피딱지가 떨어진 눈썹을 살살 문지르며 난 부하들이 향하는 쪽을 살펴보았다.

베테랑 컨휘어가 하사관 고트롭, 야경꾼 딜런 등의 도움을 받아 백 명 남짓한 병력을 수습하고 있었다. 전투 중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두 성직자, 수도사제 오칸과 성당기 사 카바르는 사병들 사이를 오가며 치료의 권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말총머리 프리츠와 쇠뇌수 기돈을 포함한 나머지 친병들은 울카르 왕 자의 직속병들과 함께 포로를 잡아 들이고 있었다.

두 선제후에 충성하는 제국기사나 가병 등이야 두말할 것 없이 포박을 해야 했다. 세뇌와 요술을 통해 노 예 신세가 된 이교도 전사 및 마법 병들 역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포박할 필요가 있었으나, 그 수효가 무려 삼천에 이르렀기에 일단은 순 위가 밀린 상태였다.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고 엎드려 있 는 노예병들을 보고, 푹 한숨을 내 쉬었다.

“••••••어휴.”

생각해 보니 저건 내가 처리해야 할 문제 같은데. 저 많은 노예들을 다 어쩐다.

“포이닉스!”

세 번째로 등장한 것은 지옥불길채 찍을 상체에 휘감은 우테콰이였다. 어지간한 장한의 팔뚝보다 두꺼운 쇠사슬은, 불이 잦아들긴 했어도 여 전히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이를 맨어깨에 이고도 놈은 태연한 낯으 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 왔냐?”

“음!”

김을 뿜는 쇠사슬은 둘째치고, 몸 여기저기 새긴 상처들이 꽤 고통스 러울 텐데 우테콰이는 이를 훤히 드 러내며 웃었다.

“대단한 일을 했다. 온 땅을 걷는 전사의 손자와 그의 손자, 또 그의 손자가 네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당연하지. 뭐, 어디 서명이라도 해 줄까?”

“서명?”

“어. 나중에 손자 생기면 물려줘. 엄청 좋아할걸.”

내 뻔뻔한 얼굴에 놈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필요 없다. 내 손자는 할아비면 충분하다.”

“그야 아직 모르는 거지, 지금 어 떻게 아냐?”

“나는 안다. 너만 모른다.”

“지랄. 내기할래?”

“어머니의 대전사는 내기 피하지 않는다. 하지만 너에게 걸 것이 있 나?”

“있지, 왜 없어.”

“없다. 너에게는 탐나는 것, 가치 있는 것이 없다.”

“가치 있는 것?”

근처에 주저앉은 바이콘의 안장에 서 물주머니를 꺼낸 우테콰이는, 정 수리에 물을 한껏 끼얹으며 대답했 다.

“나에게는 거짓 없는 온다위, 철쭉 같은 에니엔다 있다. 누구보다 곱고 똑똑한 카에피야 있고, 끝없이 베푸 는 어머니도 있다. 너는 없다.”

“……처자식이야 그렇다 치고, 엄 마 없다고 까는 건 좀 선 넘은 거 아니냐?”

“너에게도 어머니 있다. 어머니는 모든 인간 사랑한다.”

“참나. 뜬금없이 무슨 전도를 하고 앉았어.”

난 손을 휘휘 내젓다가 문득 질문 했다.

“쟨 어떻게 된 거야?”

우테콰이는 내가 가리킨 방향에서 루얀 남작을 발견하고는 얼굴에 묻 은 물을 털어내며 말했다.

“문신? 내가 새겼다.”

“그 문신, 아무나 막 쓸 수 있는 거였어?”

“아무나 아니다. 고귀한 신분의 소 년은 어머니의 선택을 받아 전사가 되었다.”

어린 남작은 처음 등장했을 때와 같은 활기로 전장을 싸돌아다니고 있었다. 부하들을 몰고 포로나 전리 품 등을 확보하고, 이따금 다른 지 휘관들과 의견을 나누다가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참, 어지간히도 팔팔 한 놈이다.

“쟤한테 문신을 새긴 게 어머니의 뜻이라고?”

“소년 전사가 문신을 원했다. 새긴 것 나고, 힘 불어넣은 것 어머니다. 결국 모두 어머니 계획대로 되었 다.”

“그래도 그렇지, 루얀 남작은 광명 교도잖아?”

“어린 신, 마음 좁다. 어머니는 아 니다. 믿지 않는 전사에게도 힘을 준다. 어머니는 마음이 넓다.” 귀가 솔깃해지는 소리에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그럼 나도 새겨줘. 그 화살 막는 거.”

“너에게?”

놈은 으핫하- 하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안 된다. 필요 없다.”

“필요 없긴 개뿔. 나도 갑옷 좀 벗 고 다녀보자.”

“네가 필요 없는 것 아니라, 어머 니에게 필요 없다. 너에게 힘 주지 않는다.”

“……시발, 겁나 단호하네.”

내가 작게 툴툴거리자, 줄곧 유쾌 한 어조로 말하던 우테콰이가 팔짱 을 끼며 표정을 바꾸었다.

“수에아탄의 형제들은, 알첸버그의 포로들은 이제 어떻게 되나?”

“아, 그거.”

난 왼 팔뚝을 들어 보이며 모호한 표정으로 답했다.

“일단 목줄을 빼앗아오긴 했는데 말이지……

꿈의 영지에서 사벨라드 방백이 부 리던 영혼들을 약탈한 뒤 곧장 깨달 을 수 있었다. 노예들에게 드리운 목줄을 부수는 건, 빼앗기보다 훨씬 더 어려우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여기 담긴 지배력이 워낙 강력해 서,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도 생각처럼 쉽지가 않아. 목줄을 부수 겠답시고 힘을 썼다간 영혼까지 통 째로 갈려 버릴 것 같거든.”

«......으 ”

......’司三

“게다가 알첸버그 놈들, 비약이랑 주문으로 세뇌를 엄청 철저히 했더 라. 별 준비 없이 지배에서 벗어나 면 공황이나 심각한 우울증 같은 걸 로 고생할걸.”

우테콰이는 잠자코 턱을 문지르다 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계획이 있나?”

“어, 글쎄……. 일단 약이고 주문이 고 효과가 다 떨어질 때까지는 데리 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분명 이오피야가 방법 안다. 칸자 이니까.”

“그래, 나중에 한 번 상의해 보자 고. 말 나온 김에 가서 처제 좀 챙 겨.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 같던 데.”

“••••••음?”

그늘진 얼굴을 하고 있던 우테콰이 가 쌍꺼풀 없는 눈을 크게 홉떴다.

“이오피야 여기 있나?”

“어. 저기, 강 건너 어디쯤 있을

걸.”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터진 노성 이 고막을 세차게 두드린다.

“lya, oron de’at! 이오피야, 머리 녹아버렸다!”

“으악, 씨발!”

나는 물론이고, 내 품속에서 몸을 말고 있던 뭉치도 깜짝 놀라 앉은 자리에서 한 뼘쯤 튀어 올랐다.

“이 미친놈아, 귀청 떨어져!”

“이오피야 정말로 여기에 있다? Athar Marta- 나 믿을 수가 없다! 왜 데리고 왔나!”

놈이 펄펄 날뛰는 모습에, 난 어이 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염병, 내가 걔를 억지로 끌고 왔 겠냐? 노예병들을 직접 보고 싶다는 데 뭘 어떡해?”

“그 솜씨로 싸움터 나온다? 이오피 야, 덜 자랐다! 성인식 거둔다!”

“아니, 야. 그게 아니라-”

내가 이오피야에 대해 무어라 변호 해주기도 전에, 얼굴이 시뻘게진 우 테콰이는 휙 돌아서서는 강 건너편 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이오피야! Amuba fae suri!”

먼젓번의 포효가 신음하는 전장을 뒤집어 깨웠다면, 이번에는 저 멀리 강물에 파문이 번질 지경이었다.

물론 입 밖으로 볼멘소리를 내는 자는 없었다. 검은 안광만 없을 뿐 사실상 광폭화한 것이나 다름없는 우레거인에게 시비를 걸 만큼 간이 큰 사람은 드물었던 탓이다.

반쯤 달리듯 강을 건너간 우테콰이 앞에 프리츠와 골만 등 친병들이 이 오피야를 ‘모셔다’ 주었다.

“Dorwa tasard kanzai uzun’ne darriwi! Ur’ne gawnma?”

“Gu, guit amuba. Rec’ne-”

“Lunt, th’ol lorphia! Orrendae!”

방금까지 이오피야의 치료를 받던 사병들은 우테콰이가 성큼성큼 다가 오자 겁먹은 양 떼처럼 흩어졌다. 프리츠 등에게 붙들리다시피 하여 끌려온 이오피야가 창백한 얼굴로 무어라 변명했으나, 우테콰이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그녀를 붙잡아 다 볼기짝을 치기 시작했다.

물론 전력으로 치는 것 같진 않았 다. 진심으로 때렸으면 그대로 엉덩 이가 터졌겠지.

“Amuba, futmak- Amuba!”

적당히 힘을 뺀 게 분명한데도, 아 이의 몸통만 한 우테콰이의 손바닥 이 판초를 두드릴 때마다 상당히 경 쾌한 소리가 났다. 성난 형부에게 애원하던 이오피야는 얼마 안 가 잉 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난 슬그 머니 고개를 돌렸다.

절대 귀찮아서 이러는 건 아니다. 그저 가족 간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을 뿐이다.

네 번째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은 검은 융단을 타고 비실거리듯 날아 오던 엘렌도, 평소보다 더 하얀 안 색의 헤일라도, 무구를 모두 내던져 반쯤 헐벗은 꼴이 된 아탈란테도 아 니었다.

“지쳐 보이는군.”

“네. 죽겠습니다.”

일단의 기사들을 뒤로하고, 울카르 왕자는 푹 한숨을 흘리며 말에서 내 렸다.

“경의 전과에 대해서는 상세히 들 었소. 내가 면목이 없어질 지경이더 군.”

“진짜 기다리다 죽을 뻔했습니다. 뭐하다 이제 오셨습니까? 머린 또 왜 그러시고요?”

왕자는 여느 장교나 하사관들만큼 이나 짧아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파스트에서 일전을 벌이던 중에 ‘점착화염’ 주문에 당했지. 지젤라 경의 검이 한 호흡만 늦었어도 얼굴 가죽이 몽땅 녹았을 거요.”

명백한 치하의 말이었으나, 뒤편에 시립하고 있던 여기사는 그야말로 울기 직전의 얼굴이었다. 왕자의 아 름다운 머리칼을 잘라버린 것에 대 해 죄책감이라도 품은 것일까.

“그럼, 파스트와 운파스트는 되찾 은 겁니까?”

“파스트는 열하루 전에 수복했소. 운파스트의 잔적도 며칠 내에 몰아 낼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 프릭스 변경백을 도와 적의 군세를 한 번 깨뜨린 뒤 곧장 남하해 온 탓에 정 확한 소식은 모르겠소.” 옆자리에 풀썩 주저앉는 왕자에게 난 툴툴대며 불만을 표했다.

“그러게 계획을 좀 알려주시지, 전 왕자님이 오실 줄 알고 여기까지 나 왔다가 아주 피똥을 쌌습니다.”

“그건 나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 소.”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볼에 묻은 재와 흙먼지를 장갑으로 털어 냈다.

“다만, 경에게 미리 계획을 일러주 기엔 변수가 너무나 많았다고 말해 주고 싶군. 드리시르 가문과의 연대 역시 그중 하나로, 마지막까지 확신 하지 못한 일이었소.”

“확신하지 못하다뇨?”

“솔직히 난 드리시르의 배신을 걱 정하고 있었소.”

“예?”

왕자의 나지막한 말에 나는 작게 입을 벌렸다.

“거, 제가 잘은 잘 모르지만, 프릭 스 변경백 정도면 나름 대영주 중의 대영주 아닙니까? 그의 가문도 백 년 넘게 왕가에 충성해 왔다고 들었 는데.” “범상한 인간관계가 흔히 그렇듯, 왕가에 대한 충성이니 가문 간의 신 뢰니 하는 것도 일방적이지 않소. 왕가는 변경의 위태로움을 알고도 요지부동인데, 제후가 왕국을 위해 칼을 들기를 바랄 수 있겠소?”

울카르 왕자는 더러워진 장갑을 벗 어 바닥에 툭 던졌다. 아름답고 중 성적인 얼굴과 달리, 그의 오른손은 흉터와 굳은살로 가득했다.

“드리시르가 내게 손을 내민 것은 온전히 행운이었소. 아빌람버스 공 작이 내 죽음에 대한 소문을 열성적 으로 퍼뜨려 준 덕에 큰형님께서 예 상보다 빠르게 군대를 일으켰지. 프 릭스 변경백이 기어코 창을 거꾸로 쥐기 직전에 말이오.”

“하……

왕자의 판단이 옳다면, 아빌람버스 공작은 제 꾀로 전쟁을 말아먹은 꼴 인 건가.

“그리고, 아이스보발트의 일도 큰 변수였소.”

“……아이스보발트의 일 말입니까? 어떤 거요?”

울카르 왕자는 빙그레 웃어 보였 다.

“야음을 틈타 침입한 뒤 성문 하나 를, 문루까지 아주 통째로 파괴했다 고 들었소만.”

“아, 예. 그랬죠.”

아이스보발트를 공략할 때, 깡패 부두목이었던 젓갈 장수 데오젠과 내통하여 성벽을 넘었더랬다. 그리 고 내가 여기저기서 깽판을 놓는 사 이 아탈란테가 ‘공허의 구’로 서문 을 날려 버렸지.

“근데 그게 왜 변숩니까?”

“왜 아니겠소. 성문이 날아간 탓에 아이스보발트에서 공성할 생각을 접 은 게 아니오?”

“……뭐, 그것도 영향을 끼치긴 했 죠.” “경의 성격상 아이스보발트를 버리 고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소. 내 명 령도 있었거니와, 기껏 점령한 성을 내주는 것도 경에게는 어려운 일이 잖소.”

“••••••그쵸.”

“결국 앞으로 나와 요격을 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겠더군. 그래서 아이스보발트의 성문 하나가 날아갔 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남하해 온 거요.”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왕자는 아찔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일전에 서신을 보내두긴 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워낙 상황이 많이 바뀌어서 경이 그대로 받아들일지 의문이더군. 그러니 별수 있나. 죽어 라 달릴 수밖에.”

“서신이라면?”

“‘샛길의 전서’로 답서까지 보냈잖 소. 기억 안 나시오?”

그 순간, 난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장 최근, 3월 마지막 날에 세 줄짜리 서신을 받았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브리스트 첫째 3만.

-황금상의 안부.

-잔치는 마당에서, 4월 중순. 비질 해 둘 것.

첫째와 둘째는 왕자의 출병에 대한 알림과 황제의 소식에 대한 물음이 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결전의 날을 정하는 내용이었고.

“오늘이 며칠이죠?”

“4월 7일, 아니, 날이 바뀌었으니

8일이오.”

“8일이면…… 중순은 아니죠?”

울카르 왕자는 대답 대신 나지막이 웃기만 했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소. 결국 경은 최선의 판단을 내렸고, 그 덕분에 우리는 역사에 남을 승리를 거뒀잖 소.”

“……놀리시는 겁니까?”

“천만에. 절대로 아니오.”

왕자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 다.

“어쩌면 내가 없었어도 이 전쟁은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르오. 그러나 경이 없었다면 절대 그러지 못했을 것이오.”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겸양 의 말을 늘어놓기도 전에, 울카르 왕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 전투마 에 올라탔다.

“……어디 가시려고요?”

“동쪽으로.”

왕자는 태양을 둥진 채로 씩 미소 를 지었다.

“아리아드 경을 데리러 가야 하거 든. 금방 돌아오리다.”

그는 잠시 숨을 돌린 사백여 기병 만을 이끌고 동쪽으로 떠났다.

하이캐슬과 마주한 제국의 변경 요 새이자, 오브도르프 지방의 주도인 ‘불푸르트’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건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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