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악당들-454화 (454/547)

나의 악당들 454화

66. 은왕자(9)

주위치 테오도라 구엘람흐트 폰 스 트롬.

아빌람버스 공작의 조카인 동시에 라이오넬 3세의 외손녀로, 그 혈통 의 고귀함만으로 따지자면 온 중간 계의 영애들 중에서도 열 손에 꼽힐 만한 여인이다.

부친과 형제들이 정쟁에 휘말려 목 숨을 잃고 본인은 밀라놀의 수도에 위치한 수녀원에 유폐된 탓에, 십대 초반 이후로는 지극히 높은 신분에 걸맞는 부귀영화를 누린 경험이 없 다.

하지만 고위 귀족다운 몸가짐이니, 자연스레 묻어나는 품위니 하는 것 들은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다. 거기에 수녀 생활을 하며 겸손을 배 우고, 기름 부음 받은 성기사라는 타이틀에 어울리는 자비까지 갖추었 다. 아주 약간의 관종 기질과 스릴 을 즐기는 별난 성격을 숨기고 있긴 해도 홈이 될 수준은 절대 아니며

세간에 알려진 바도 없는 듯했다.

한마디로 말해 이 지체 높고, 성스 러우며, 선하고, 아름다우며, 심지어 가슴까지 어마어마, 아니, 이건 아니 고……. 하여튼, 그런 테오도라를 미 워하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 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여기에 서는 엘렌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 여기 있었네. 오래 기다렸어?”

“너! 이 양아치 같은-”

테오도라 공녀가 신성력 없이 발하 는 후광이 어찌나 빛났는지, 경비대 본부의 중정(中庭)에 놓인 나무 의 자에 걸터앉아서는 주변의 초록을 모조리 불태울 기세로 눈을 이글거 리던 엘렌조차 잠시 숨을 삼켰다.

“……이, 분은?”

“초면이지? 테오도라 공녀님이야. 공녀님, 여긴 엘렌입니다. 제가 얘기 자주 했죠?”

서로 처음 보는 얼굴이라 해도 그 이름마저 낯선 건 아니라, 만남을 청한 테오도라는 물론이고 엘렌 역 시도 상대방에 대해 아는 눈치였다.

“드디어 만나보는군.”

먼저 인사를 건넨 건 당연히 테오 도라 공녀였다. 브라이트미어에서 내린 그녀는 기둥에 달린 쇠고리에 고삐를 걸고는 엘렌 앞에 섰다. 그 리고 놀란 기색으로 연한 눈썹을 까 닥이며 미소를 지었다.

“포이닉스 경이 과장하여 말했다고 여겼거늘, 과연 듣던 대로 천사 같 은 용모라 놀라울 따름이오.”

미모를 칭찬받아 기쁜 걸까? 어느 새 두 눈의 불길을 꺼뜨린 엘렌은 잠시 입매를 실룩거렸다.

“빛의 가호가 임하기를. 나는 칼란 다리 교단의 성기사, 테오도라요.”

“……빛의 간성(干城)이신 공녀님 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밝 으신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당분간은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음을 기억한 건지, 아니면 무의식 중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엘렌 은 어색한 표정을 한 와중에도 공손 히 인사를 올렸다.

“저는 라-팔라이스 궁전의 마법사 엘렌이라 합니다.”

“그래, 내가 무어라 부르면 좋겠 소? 엘렌 양? 마스터 엘렌?”

“으음.”

전장에서 엘렌이 ‘감히 내게’ 어쩌 고, ‘하이마스터의 권위’ 저쩌고 하 며 고함을 질러대긴 했지만, 전투로 혼잡스러웠던데다 하이마스터가 정 확히 뭘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리 많지 않았다. 덕분에 녀석이 관 습상 그리고 명목상으로 라-팔라이 스 궁전의 주인임을 아는 외부인은 극히 소수였다.

“……마스터 엘렌이면 됩니다.”

“그래, 그러지.”

테오도라 공녀는 그 소수에 속하지 않는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러자 이번엔 엘렌이 나와 공녀를 번 갈아 살피며 질문했다.

“공녀님께서는 어쩐 일로 이런 곳 까지 행차하셨을까요? 저는 이 자식

- 아니, 포이닉스 경을 기다리고 있 었는데.”

“내가 그에게 만남을 부탁하였소. 마스터 엘렌에게, 정확히 말하면 두 그랜드마스터에게 묻고 싶은 바가 있어서 말이오.”

“묻고 싶은 바라고 하시면.”

“……내밀한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 한 장소는 아닌 것 같군. 괜찮다면 자리를 옮겨서, 두 그랜드마스터도 함께 만나볼 수 있겠소?”

공녀의 정중한 요청에 엘렌은 얼결 에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모습을 보며 난 속으로 안 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았어. 예상대로 테오도라의 아우 라는 엘렌에게도 먹히는구만.

나와 엘렌과 테오도라, 그리고 두 그랜드마스터는 내 침실 한쪽에 놓 인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관료와 깡패, 장교와 하사관 등이 수시로 드나드는 집무실보다는 침실 쪽이 듣는 귀로부터 훨씬 안전하다. 경비대 본부 건물의 가장 높은 층 에, 그것도 빈방들 가운데 자리해서 그런 것도 있고 결정적으로 내 그림 자가 어둠을 두르고 앉아 주변을 살 피기에도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뭐, 내가 테오도라 공녀를 자연스 레 침실로 청하자 엘렌의 눈이 또다 시 불을 뿜긴 했으나…….

“하하— 도끼눈 뜰 것 없소, 마스터 엘렌. 나는 순결의 서약자이고, 포이 닉스 경과는 뜻을 함께하는 동료일 뿐이니까.”

“아, 네? 아니, 아뇨, 전 그런 생각 을 한 게 아니라- 당연하죠, 공녀님 같은 분이 이런 놈을 왜,”

엘렌의 횡설수설에 공녀는 빙그레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런 놈이라니? 전설적인 기량이 나 마르지 않는 용맹을 차치하더라 도, 포이닉스 경은 분명 매력적인 사내요. 대범하고 유쾌한 동시에 아 랫사람을 아끼고 약자를 동정할 줄 아니까.”

테오도라가 망설임 없이 칭찬을 늘 어놓자 엘렌은 ‘누가요? 이 새끼가 요?’하는 눈빛으로 내 쪽을 살폈다. 난 어깨를 으쓱였다.

“뭐하냐? 받아적어라, 좀.”

녀석이 눈빛으로 욕을 쏘아붙이는 사이 테오도라 공녀는 여전한 미소 를 머금은 채 말을 덧붙였다.

“그만큼 매력적이니 약혼녀를 제하 고도 연인을 셋이나 더 거느린 것이 겠지. 범인에게는 도저히 권할 바가 아니겠으나, 포이닉스 경은 충분한 능력을 갖추었으니 약간의, 음…… ‘방종’에 따른 책임도 짊어질 수 있 으리라 믿소.”

공녀로서는 별다른 뜻 없이 성직자 로서 덕담한 것이겠지만, 엘렌은 전 혀 받아들이는 기색이 아니었다. 입 술을 움찔거리고 목덜미가 붉어져선 이쪽을 노려보는 모습을 보니 꽤 열 받은 모양인데…….

나는 위기감을 느끼고 얼른 헛기침 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흐흠, 그랜드마스터 분들도 모셨 으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죠.”

내가 그렇게 말하며 돌아본 것은 일전에 전장에서 처음 만난 두 남녀 였다.

황금빛 갑옷을 입고 도끼창에 벼락 을 감아 내리치던 노년의 마전사, ‘악투피르 올’은 수도승을 연상케 하는 짧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 수수한 차림새와는 달리, 거구 의 노인은 열 손가락이 황금반지로 가득했고 양 손목에는 황금팔찌를 두 개씩이나 끼고 있었다.

그의 옆에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여인은 머리 셋 달린 뱀지팡이를 원 소의 환수들로 둔갑시켜 부리던 마 법사, ‘나샬 안웨이’였다.

까만 두건을 두르고 상반신을 덮는 베일을 걸친 탓에 드러난 것이라곤 곧은 눈썹과 또렷한 콧대 그리고 금 빛에 가까운 밝은 갈색 눈동자뿐이 었지만, 그녀가 미녀라는 데 금화 오백 장쯤은 걸 자신이 있었다.

이 두 그랜드마스터가 전장에서 처 음 나타났을 때는 엘렌을 막아서는 모습에 적으로 오해했더랬다.

이들이 엘렌의 감시 및 호위, 혹은 보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이후 전장을 수습하는 도중이었다.

전투 중 내가 투창을 몇 개쯤 던 졌는데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않더라. 뭐, 정확히 말하면 아예 말 을 붙이지도 않는 것이지만.

테오도라 공녀가 인사말을 건네자 나샬은 눈으로 호선을 그리며 고갯 짓을 했고, 악투피르는 적당히 격식 을 갖춰 답례하곤 곧장 본론을 꺼냈 다.

“묻고 싶은 바가 무엇이오?”

“두 분이 티린 멜을 나서 이 겔란 땅까지 온 목적을 알고 싶소.”

둘러 묻는 것 없이 직구로 던진 말이었다. 그리 귀족적인 화법은 아 니었으나 노마법사는 오히려 편하다 는 듯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게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는 뜻은 아니었다.

“귀하도 예상한 답이겠으나, 우리 가 이곳에 온 건 궁전의 일 때문이 오. 자세한 사정을 외인에게 밝힐 이유는 없으니 이해를 바라겠소.”

“단순한 호기심으로 묻는 게 아니 오. 혹 교단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 는 일로 이곳에 온 것이라면 내가 두 분과, 칼란다리 교단이 라-팔라 이스 궁전과 힘을 모을 수 있지 않 을까 하여 묻는 것이오.” 악투피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엘렌은 슬쩍 미간을 좁힌 채 테오 도라의 의도를 유추하는 눈치였고, 그 반대편에 앉은 나샬은 베일 아래 로 몰래 하품을 하고 있었다.

“……흠?”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여인은, 문득 눈웃음을 짓더니 또 다른 그랜 드마스터와 하나뿐인 하이마스터를 차례로 곁눈질했다. 그러더니 꼰 다 리를 살짝 들어 발끝으로 내 정강이 를 더듬는 것이었다.

내 기억이 틀린 게 아니라면 나샬 안웨이는 나보다 한-참 연상일 터 였다.

그런 누님이 뜬금없이 무슨 짓을 하나 싶어서 가만히 지켜보았더니, 그녀는 한쪽 눈을 슬쩍 깜빡였다. 그리고 어느샌가 하얀 맨살을 드러 낸 발을 허벅지 안쪽으로 천천히 밀 어 넣는 것이었다.

……참, 골 때리는 사람이네.

내가 나샬의 뱀을 닮은 발놀림에 가만히 고소를 머금는 사이, 악투피 르가 침묵을 깼다.

“귀하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일 이 무엇인지 먼저 말해보시오.”

“사정을 밝히고 싶으나 이 일이 외 부에 알려진다면,”

“궁전의 마법사는 입이 무겁소.”

테오도라는 이 대화의 흐름을 이미 예상한 듯 별 고민 없이 답을 내놓 았다.

“죽음의 습지 ‘아사그’에서 마기(魔 氣)를 발견했소.”

“……마기라면?”

“생각하시는 게 맞소. 암흑계에서 흘러든 마력이오.”

“허.”

공녀의 말에 악투피르는 물론, 나 와 엘렌도 놀라고 말았다.

암흑계는 염계, 환계, 명계 등으로 구성된 악의 차원 중에서도 필두로 여겨지며, 낙토(樂士)인 광명계의 대척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암흑계가 중간계를 침식해 가는 것이 다크월드의 메인 시나리 오인 만큼 암흑계의 마력, 즉 마기 가 발견되었다는 건 보통 소식이 아 니었다. 다크월드의 캠페인 중 절반 까지의 주요 사건들이 ‘암흑계의 전 령’으로 인해 벌어졌고, 최종 보스 가 마왕 비슷한 존재인 ‘암흑군주’ 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근데, 아사그라뇨? 그 늪지에 왜 마기가……

난 허리 아래에서 올라오는 감각도 잊은 채 의문을 표했다.

기억하기로, 아사그는 서브 퀘스트 한두 개가 딸린 파밍용 필드일 뿐 메인 시나리오와는 전혀 상관이 없 는 곳이었다. 작정하고 건너뛰면 캠 페인을 클리어 할 때까지 발을 들이 지 않아도 상관 없는 곳이란 말이 그런데 아사그에서 마기를 발견했 다고? 내가 잘못 안 건가? 암흑계 와, 마기와 관련된 사건은 분명 메 인 시나리오밖에 없는데…….

“나도 자세한 내막을 파악하지는 못했소. 다만, 강대한 언데드들에게 조금씩 마기가 깃들어 있었소. 특히 아사그에서도 희귀하다는 시체용을 처치한 뒤 어떤…… 골제 항아리 같 은 것을 찾았는데, 그 안에 적지만 아주 농밀한 마기가 담겨 있더군.”

굳은 표정으로 말을 마무리한 공녀 는 천천히 성호를 그었다.

하, 씨발.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전쟁도 제대로 마무리 안 됐는데 마기는 무슨.

“돌겠네, 진짜로.”

내가 머리를 감싸 쥔 사이 큼지막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던 악투피르 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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