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악당들 518화
67. 아이스보발트의 영주(11)
‘약혼녀들의 저택’ 뒤편에 조성된 정원은 높은 담에 둘러싸인 탓에 어 둡고 으슥한 편이다. 수풀 사이로 흙길이 트여 있기는 하나 너비가 좁 고 풍경이 별 볼 일 없어 근사한 산책로와는 거리가 멀다.
그 한복판에 우뚝 선 형체는 그 윤곽이 워낙 희미하여 보리수나무의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리 없 이 우는 양뿔 호각의 신호에 응해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는, 제 앞에 쓰러져 있는 자를 흘긋 살펴보았다.
기절한 채 ‘하프엘프’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사내. 키는 꽤 크지만 나 이는 기껏해야 1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한마디로, 이자를 조련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문제 있어?”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사연이 궁금할 뿐.”
“사연?”
여인은 의문을 표하는 그림자를 빤 히 바라보았다.
서로를 마주한 둘은 꼭 닮은 차림 새를 하고 있었다. 어둠에 가라앉을 듯 새까맣고 광택 없는 경갑에 갈기 를 두른 두개골 형상의 가면, 그리 고 짧은 망토까지.
다만 사내의 가면이 갑옷과 같은 흑색인 반면 여인의 그것은 귀기(鬼 氣)가 흐르는 백색이었다.
“그런 것까지 말해줘야 해?”
하얀 가면을 통과한 여인의 목소리 는 불쾌한 금속성과 섞여 낮게 깔렸 다. ‘하울링 마스크’에 의해 변조된 기괴한 음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 었다.
보리수나무의 그림자 아래 선 사내 는 그 기괴한 목소리가 익숙한 듯, 별다른 내색 없이 대답했다.
“일언반구의 설명도 듣지 않고 제 자를 들일 수는 없는 노릇. 최소한 이자가 누구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 닙니까.”
“그건 네 일이지. 데려가서 알아봐. 회(會)의 재주도 전수하고.”
“모든 재주를 말입니까?” 잠시 고민하던 하얀 가면의 여인 은,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능과 시간이 허락하는 한.”
그림자에 잠긴 사내, ‘크샨’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허락하시겠습 니까?
“저녁나절에 데려가서 자정쯤 돌려 보내.”
“……허. 아주 바쁘신 몸이로군. 하 지만 그런 식으로는 몇 년간 공을 들여도 경지에 오르지 못할 겁니 다.”
“그래도 서둘러. 떠나기 전에 성취 를 보이고 싶으니까.”
사내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크샨은 천천히 입을 열었 다.
“검주(劍主)님의 뜻이 아니라 방백 의 뜻이군요. 이번에도.”
그림자의 불만 섞인 말에도 파사검 (破邪劍)의 주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게 중요해? 어차피 명령은 내가 내리는 거잖아.”
‘중화’와 ‘운신’의 주술을 번갈아 풀어내며 기절한 에곤을 돌보던 이 오피야는, 라넌과 크샨을 흘긋 살펴 보았다.
동방의 언어를 전혀 모르는 탓에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는 알 수 없었 으나, 둘 사이의 분위기가 그리 살 갑지 않다는 건 쉽게 눈치챌 수 있 었다.
다만 그게 특정한 문제가 생겨서인 지, 아니면 일상적인 모습인지는 이 오피야로서도 알 방법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가 지금껏 본 라넌은 일반적으로 저런 모습이었 다. 고요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과, 나지막하지만 차가운 목소리…….
‘검은 여인’이라 불릴 때도 그랬고, 기이한 가면을 얻은 뒤 ‘백색 밴시’ 니 ‘소리 없이 걷는 여인’이니 하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고선 더욱 심해 졌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지만, 간혹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킬 때면 위협적인 존재감을 뿌 리곤 했다.
그런 라넌이 어디선가 불러온 하수 인들, 일명 ‘가면 쓴 그림자들’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은 본디 은밀하기 짝이 없어 아이스보발트의 고위 관료 중에서도 존재를 아는 자가 드물 정도로 비밀 스러운 집단이었다.
그러나 귀족과 지주들의 봉기를 진 압하고, 방백령 전역에 걸쳐 정보망 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알음알음 그 존재가 알려졌다. 정확히 말하면 기 괴한 가면을 쓴 자객, 세작, 정보원 들에 대한 소문이 퍼진 것이다.
결국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존재들이 됐으나, 일반적인 영민들 사이에선 이 은밀한 집단이 실존하 는지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했다. 불길하고도 흥미로운 이 야깃거리들이 대개 그러하듯, 가면 쓴 그림자들에 관한 뜬소문은 왕성 한 생명력으로 덩치를 불려갔다.
‘약혼녀들의 저택’에 처소를 두고 있는 이오피야에게조차 가면 쓴 그 림자들은 낯설고 꺼림칙한 존재들이 었다. 그래서 그녀는 에곤의 상태가 호전되었음을 확인하고는 라넌 뒤편 으로 슬쩍 물러나 버렸다.
“……받들겠습니다. 명령이라 하시 니.”
나지막이 대답한 크샨이 뒤쪽을 향 해 손짓했다.
그에 응하여 담벼락 아래의 어둠이 꿈틀대었다. 까만 얼굴, 아니, 갈기 없는 흑색 가면을 쓴 인영 둘이 몸 을 일으켰다. 그들은 에곤을 짐짝처 럼 챙겨 들고는 반대편으로 사라졌 다.
“물러나기 전에, 검주님께 보고드 릴 바가 있습니다.”
“보고?”
“왕도에서의 정보망 확충에 대한 보고입니다.”
크샨은 원래도 크지 않던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둘 사이에 오가는 언어와 주변의 상황을 감안하면 엿들을 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건만, 그림자는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보고 드린 대로 은행을 중심 삼아 기존 정보망을 보강하고 있습니다. 3개소를 목표로 귀를 심는 중이며, 개중 ‘볼고론 대성당’은 여유자금을 십분 활용한 덕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반면 왕궁과 ‘여명의 전당’은 검주께서 예상하신 대 로……
크샨의 차분한 목소리에 라넌은 묵 묵히 귀를 기울였다. 가끔 확인 삼 아 질문을 하기도 했으나, 주는 내 용 숙지를 위한 경청이었다.
몇 발쯤 물러나 있던 이오피야가 보기에, 둘 사이의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든 것 같았다. 라넌은 의외의 집중력을 발휘했고, 크샨은 그런 태 도가 썩 흡족한 눈치였다.
왕도의 정보망 구축에 대한 보고를 마무리한 크샨은 덧붙이듯 말을 이 어갔다.
“그리고, 거슬리는 소식이 있습니 다. ‘미드아일’에서 온 첩보인데,”
“……미드아일?”
“예. 미드아일은 초승달 군도의 중 심에 해당하는 섬으로-”
“알아. 가봤어.”
크샨의 설명을 중간에서 끊은 라넌 은 이바일 후작을 떠올렸다. 강력한 저주술사이자, 동해의 수호자라 불 리며, 알파드 가문의 주인이었던 자.
초승달 군도의 대영주였던 이바일 후작은, 이름을 얻기 전의 라넌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기 이한 저주를 쏟아내었고, 침실에 숨 어든 암살자는 작은 멧돼지로 변이 되고 말았다.
“……님. 검주님?”
“아. 응.”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라넌의 시선이 재차 크샨에게 향했다.
그는 의문을 표하는 대신 여상스레
보고를 이어갔다.
“첩보라고 말씀드렸지만, 기실 목 격담에 가깝습니다. 강력한 무예를 갖춘 일행이 미드아일에 나타났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거슬려서 말입니 다.”
“……거긴 초승달 군도야.”
“그야 그렇지요.”
초승달 군도, 그중에서도 미드아일 은 반세기 넘게 광명교 세계와 동방 사이의 교역을 중개하며 부를 쌓은 도시다. 오가는 상품과 사람이 많은 만큼, 동방의 무인이 초승달 군도에 나타나는 건 흔한 일이었다.
“헌데 소식을 상세히 확인해 보니, 아무래도 그 일행 중에 제무종(諸武 宗)의 일원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 았습니다.”
그 기원은 장생(長生)을 추구하는 수행자들과 고원을 떠돌던 승려들이 우연히 무리를 이룬 것이었으나, 아 주 오랜 세월이 흐른 끝에 동방에서 가장 명성 높은 무문(武門)으로 변 모한 집단.
라넌이 침묵으로 흥미를 드러내자, 크샨은 여전히 작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전형적인 동방인의 이목구비에 둥 글게 말아 올린 머리카락, 회색 로 브처럼 보이는 낡은 의복, 두꺼운 기둥을 수숫대처럼 부수는 발차기. 마지막을 제외하면 그리 특별할 것 도 없겠으나, 이것들이 모두 조합되 었으니 당연히 제무종을 의심해야 합니다.”
“일진을 찾으러 온 걸까.”
백색 가면의 여인이 혼잣말처럼 중 얼대자 흑색 가면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높지만, 의문스러 운 부분이 있습니다.”
“말해봐.”
“일련의 사건 끝에 은왕자와 ‘파천 신승(破天神僧)’이 사라진 지 벌써 일 년하고도 10개월이 지났습니다. 소식이 전해지고, 판단을 내리고, 행 동에 나서기까지 시간이 걸리긴 했 을 것이나-저들이 자랑하는 전설적 인 집법당주가 실종되었는데 제무종 이 이제야 반응했다니. 아무래도 수 상쩍은 측면이 있습니다.”
“뭘 의심하는 거지?”
“무검회(無劍會) 아니면 달리 무엇 을 의심하겠습니까.”
“그 유명한 파천신승이 검주님을 쫓아 서부 대륙까지 왔습니다. 무검 회와 제무종이 손을 맞잡고 수작을 부리는 중이었다는 증거지요. 그 연 대가 지금은 끊어졌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썩 단호한 말투와는 달리, 크샨이 지금 품고 있는 건 얼룩진 의혹일 뿐 구체적인 내용도 이를 뒷받침할 근거도 없었다.
라넌은 침묵을 지켰다. 여느 때와 같이 적당히 흘려들을 셈이다.
크샨은 동방에 뿌리를 둔 비밀결 人}, 삼검회의 중역이다. 본류 내지는 먼 친척뻘인 무검회를 향해 편집증 적이기까지 한 경계심을 내보이는 건 당연했다.
꾸며낸 과묵함과 우러난 귀찮음 사 이 어딘가에서, 라넌은 문득 가장 아끼는 친구가 언젠가 부하에게 했 던 말을 떠올렸다.
“……주의가 필요한 일이야. 일단 네게 맡겨둘게.”
크샨은 침묵으로 의아함을 드러냈 다.
하긴, 그녀가 파사검주로서 ‘은행’ 에서 차출한 조직원들을 관리하는 건 늘 그의 몫이었다. 이제 와 맡겨 두겠다느니 뭐니 하는 것은 새삼스 러울뿐더러 조금 우습기도 했다.
어쨌든, 라넌이 기대한 반응은 아 니었다. 그녀는 가면 속으로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했다.
“할 말 더 있어?”
“아닙니다. 이상입니다, 검주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백색 가면의 여인은 휙 돌아섰고, 흑색 가면의 사내는 담벼락 아래로 사라졌다.
라넌은 마음 같아선 저택 꼭대기로 곧장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귀찮 은 혹을 떼어내는 게 먼저였다.
평소처럼 호기심이 잔뜩 묻어나는 눈빛으로 자신을 살피는 이오피야 를, 그녀는 가면도 벗지 않은 얼굴 로 돌아보았다.
“순찰 시간이야.”
“어, 네? 이런……. 벌써 시간이.”
라넌이 살피는 건 길거리의 행인들 이 아니라 귀족과 부호와 고위 관료 들이다. 깊은 밤, 저택의 심처를 거 닐다 보면 쓸 만한 이야기를 주워듣 기 마련이었다.
사실 아이스보발트에 온 뒤, 라넌 이 직접 ‘순찰’을 한 횟수는 두 손 으로 꼽을 만큼 적다. 파사검주라는 이름 하나에 고개를 조아리는 암살 자가 수십 명인데, 그녀가 왜 도둑 의 수고를 들이겠는가.
다만 그녀가 오랫동안 써먹은 이 핑계는 사용한 기간에 비례해 충분 한 설득력을 얻었다. 이오피야는 아 쉬운 듯 입술을 오물거리다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품을 빌릴 수 있을까요?”
“오늘은 싫어.”
“얌전히 숨어만 있으면요? 고개도 안 내밀구.”
“싫다고 했잖아.”
단호한 거절에 어린 주술사의 얼굴 이 흐려졌다.
자그만 짐승의 몸으로 세상을 구경 하는 건 이오피야의 몇 안 되는 취 미 중 하나였다. 그녀는 새하얀 날 다람쥐로 둔갑하여 힘껏 내달리는 기수의 어깨 위에 앉거나, 한가로이 산책하는 행인의 망토 자락에 매달 리기를 즐겼다.
그런 이오피야에게 라넌은 단연 최 고의 탈것-아니, 유희의 매개였다. 라넌은 날개 달린 고양이처럼 지붕 위를 노니는 존재였고, 그런 그녀의 옷자락에 매달려 있노라면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감각을 맛볼 수 있었다.
이오피야는 못내 아쉬웠다. 상대가 조금만 둔했더라면 몰래 따라갔을지 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녀가 알 기로 이 도시 안에서 라넌의 감각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 다.
“잠시 만요, 라넌 씨. 그럼,”
저택 옆 샛길을 지나 대로로 향하 려는 라넌에게, 이오피야가 망설이 며 입술을 떼었다.
“‘동화’는-” 성큼성큼 걸어가던 그녀가 주술사 를 휙 돌아보았다. 꺼림칙한 감정이 잔뜩 묻어난 얼굴이 가면에 가려진 건, 이오피야의 정서를 위해 다행스 러운 일이었다.
“그걸 왜 물어? 허락할 거라고 생 각해?”
“그. 어쩌면요.”
“멍청이. 되겠냐?”
라넌이 단 한 번 경험해 본바, 주 술에 이끌려 타인과 감각을 공유하 는 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 다. 오직 자신에게만 허락된 특권을 도둑맞는 기분이라고 할까.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는지, 라넌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훔쳐보는 것도 안 돼. 걸리면 눈 알을 팔 거야.”
“ O ”
“포이랑 헤일라도 마찬가지야. 소 름 끼치는 짓을 하면 너도 소름 끼 치는 짓을 당해. 알겠어?”
“……소름 끼치는 짓이라뇨. 저는 그냥.”
“ 그냥?”
기괴한 가면이 코앞까지 다가와 변 조된 목소리를 그르렁 토해내자, 이 오피야는 ‘아니에요……’하고 중얼거 리더니 억울하다는 듯 입을 합 다물 었다.
혹을 떼어낸 라넌은 주택가 사이에 맺힌 그늘을 맴돌다가 약혼녀들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정문으로 들어서는 대신 외 벽을 타올랐다. 2미터 남짓한 간격 으로 그어둔 미세한 홈을 짚고 디디 며,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 6층에 위치한 자신의 방에 도착했다.
걸쇠만 얹어둔 창문을 열고, 푹신 한 융단을 깐 방에 들어서고, 두꺼 운 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쳐 계단 쪽으로 고개를 내밀 때까지, 그녀는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았다. 차라리 마법에 가까운 정숙함이었다.
‘ 으?’
실눈을 뜨고 후각에 집중하던 라넌 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쫓는 건 향기였다. 은근히 달군 팬 위에 신선한 견과류가 한 줌 뿌려졌을 때처럼, 고소하고 싱그 러운 동시에 어쩐지 포근한 느낌마 저 드는 체취…….
라넌은 계단을 따라 위아래로 진동 하는 향기에 잠시 심호홈을 했다. 그러길 잠시, 그녀는 홀린 듯 7층으 로 걸음을 옮겼다.
엘렌의 방은 이 거대한 저택에서 가장 호화로운 공간이었다. 어찌 보 면 당연한 일이었다. 엘렌은 자신의 방이 다른 곳보다 격이 떨어지는 걸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라넌은 엘렌이 최근 즐겨 쓰는 찔 레장미로 만든 향유의 진한 향기 속 에서 다른 냄새들을 구분해 냈다.
온갖 약초와 정향 따위의 향기는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 명확했으므로 곧장 무시했고, 노릿한 탄내는 조금 의아하긴 했으나 관심을 둘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정인(情人)의 향기를 쫓아 침실에 들어선 라넌은, 정사(情事)의 흔적 으로 가득한 침대 앞에서 미간을 좁 혔다.
엘렌은 솜이불을 목 아래까지 곱게 덮은 채 누워 있었고, 그 옆자리엔 흔적과 향기만 남아 있었다.
라넌은 잠든 연적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엉망진창으로 붙어 있는 얼굴과 거기 떠오른 표정 이 어찌나 아니꼬운지. 부아가 치밀 어 오르기는 해도 살심이 일지는 않 는 걸 보면, 나름대로 정이라는 게 쌓이긴 한 모양이다.
쯧, 뭉치는 작게 혀를 차고 방을 나섰다. 정인의 향기가 그녀를 계단 아래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