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나는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턱을 받치며 떠오르는 것을 차근히 풀어냈다.
“그럼 죽음을 예감한 순간부터 죽기까지 시간이 좀 있는 게 낫겠네. 그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퍼부으면, 당신도 후련하고 그자도 자기가 왜 죽게 되었는지 잘 알겠지.”
“…….”
“아무래도 독살이 제일 낫겠는데. 단둘이 있는 곳에서 외부의 접근을 차단하고 독을 먹이면 되겠어. 당신은 황제의 후궁이니까 그자와 단둘이 있는 상황은 쉽게 만들 수 있겠지?”
내 물음에 설등화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독만 구해 주신다면, 제가 어떻게든 먹이겠습니다. 입으로라도…….”
“아니, 잠깐, 잠깐만. 황제를 죽이려다 당신까지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당신은 죽으면 안 되지.”
나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무래도 황제를 죽이고 같이 죽을 결심을 한 것 같은데, 그러면 의미가 없잖아!
하늘에서 소화가 슬퍼할 거란 말이야.
“단둘이 있을 상황을 만들라는 건, 그래야 당신이 황제한테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을 테니까 하는 소리야.”
“그러면 독은 어떻게…….”
“먹이지 않고도 중독시킬 수 있는 독이 있어. 만독불침 같은 방어술도 통하지 않는 걸로 말이야. 물론 당신이 그 독에 당하지 않을 방법도 있고, 황제의 사인도 중독이 아니라 심장마비나 발작으로 나올 거야.”
“예? 그런 편리한 독이 있나요?”
“하계에는 없지만, 내겐 있거든.”
생긋 웃어주고 덧붙였다.
“그렇게 복수하고 나면, 당신은 궐을 탈출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면 돼. 탈출 방법부터 새 신분 마련까지 다 내가 도와줄 테니까,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나 생각해 둬.”
설등화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족인 그녀는 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알 테니까.
“진심…… 이시군요.”
“내가 거짓말을 왜 해? 그것도 설족 앞에서.”
“정말로 그런…….”
조금 혈색이 돌아온 설등화가 무어라 웅얼거리며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그러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대가로 제가 무엇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대가는 이미 받았어, 이 육신과 ‘세루화’의 인생을 넘겨받는 것으로.”
“그건 그 아이를 선적에 올려 주시는 것으로 끝난 거래 아니었습니까? 이건 새로운 거래잖아요.”
의외로 예리한 지적이었다. 나는 생경하게 설등화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소화가 마지막으로 부탁했거든.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고.”
“……그 애가요?”
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설등화의 눈가가 부풀었다.
나는 급히 덧붙였다.
“그 말은, 당신이 소화의 미련이란 뜻이야.”
“미련이라니요……?”
“인간 세상에 미련이 남아 있으면 제대로 된 선녀가 될 수 없어. 난 소화를 선녀로 만들어 주기로 했고, 그러니까 당신이 행복해지는 것까지가 내 대가란 말이지.”
설등화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굉장히…… 루화와 제게 유리한 해석이군요. 손해를 보시는 것 아닌가요?”
“손해?”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나처럼 커다란 신이 너희처럼 작고 연약한 인간과 하는 거래에서 수지타산을 따지면 되겠어? 천명공주 체면이 있지. 이런 건 나한테 손해 축에도 못 껴.”
“……커다란…….”
설등화가 말을 되뇌더니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완전히 어린애를 보는 눈이라 나는 강하게 항변했다.
“지금은 네 딸의 몸이라서 작아 보이는 거고! 난 원래 엄청 대단하고 큰 신이라고!”
“부모님께서 루화를 공주님 또래 친구라고 좋아하셨다면서요?”
“그, 그건 내가 나이에 비해 몸이 안 자라서 그래! 그리고 이제 되도록 루화 말고 소화라고 불러! 인간 시절 이름으로 자꾸 부르면 미련 붙으니까!”
“루화를, 아니…… 소화를, 정말 선녀로 만들어 주실 생각이시군요.”
“당연하잖아? 걘 이제 내 권속이야. 상라궁 선적에 오른 내 사람이라고. 나처럼 큰 신은 약속도 지켜야 하고, 자기 사람도 잘 챙겨야 해.”
설등화의 얼굴에 아주 작은 미소가 설핏 어렸다.
“감사합니다. 그럼…… 천명공주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냥 공주라고만 불러. 내 봉호 함부로 부르는 것도 조그만 인간의 혼에는 꽤 부담되는 일이거든.”
“네, 공주님.”
아까보다 훨씬 설등화의 얼굴이 나아졌다. 약간 안도하는데, 그녀가 물음을 던졌다.
“저, 그런데 공주님께서는 왜 루화의 생을 이어받기로 하신 건가요?”
“말했잖아, 인간의 삶이 궁금해서 그랬다고.”
“거짓말이시잖아요.”
“…….”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인간의 삶이 궁금한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라 이건 못 알아챌 줄 알았는데.
설등화가 부드럽게 물음을 이었다.
“말씀하신 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으시지요? 그런 향이 나요.”
“……설족의 능력이란 거, 내 생각보다 대단하네.”
적당히 둘러대진 못하겠구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조그맣게 대꾸했다.
“내 원래 몸이, 많이 아파.”
“네?”
“난 앞으로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거야.”
툭, 진심이 튀어나왔다.
거짓말이 안 먹히지만, 엄마 아빠와 마주칠 일은 없는 하계의 인간.
내게 별다른 정이 없고, 내 말이나 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나약하고 작디작은 인간.
그래서 안시에게도 함부로 밝히지 못한 속내가 쉽사리 나왔다.
“나는 자주 죽었어. 부모님의 힘으로 매번 되살아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야.”
“……죽으셨다고요? 그게 무슨……?”
“죽는 주기는 점점 빨라지고, 되살아나는 건 점점 오래 걸리고. 아마 다음이 마지막일 것 같아. 근거 없는 직감일 뿐이지만, 내 직감은 정확한 편이라서.”
“…….”
“그 마지막이 오기 전에…… 한 번쯤은 건강한 몸으로 살아 보고 싶었어. 엄마 아빠랑 미리 좀 떨어져 있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고.”
“…….”
“그래서 우연히 루화를 만났을 때 기회라고 생각했지.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야.”
설등화가 입을 살짝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녀는 눈물 자국이 여전히 남은 눈으로 한참 동안 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공주님께선 옥황상제와 염라대왕의 따님이시라면서요?”
“응. 그런데 왜 아프냐는 거지?”
“……네.”
“정말 많이 들은 질문이네. 지고한 신들이 왜 하나뿐인 딸 병은 치료를 못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한때 지긋지긋하게 들었다.
상제와 염왕이 치료하지 못하는 병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고 사실 친딸이 아닌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돈 적이 있었다.
네 부모님은 널 사랑하지 않아서 일부러 병을 치료하지 않는 거라고 속살거리며 나를 유혹하려던 잡신도 있었다.
상제와 염왕이 죄를 지어서 딸이 그 업보를 짊어지게 된 것 아니냐고 떠드는 요괴도 있었다.
내가 사실 딸이 아니고 상제와 염왕이 만들어 낸 귀물 같은 거라서 숨겨두려고 병에 걸렸단 핑계를 댄다는 억측도 있었다.
다 헛소리.
소문과 억측은 날 금이야 옥이야 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쑥 들어갔고, 주절거리던 잡신과 요괴들은 부모님과 안시의 손에 갈가리 찢겼다.
이제 선계에선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듣네, 부모님을 슬프게 만드는 말.
“엄마 아빠는 최선을 다하셨어. 나쁜 건 내 병이야.”
딱 잘라 말한 다음, 화제를 돌렸다.
“당신한테 대가를 받을 생각은 없는데,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긴 해.”
왕에게서 받아 온 교서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설등화는 머뭇거리며 내 맞은편에 앉더니 교서를 읽었다.
나는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까닥거리며 그녀가 다 읽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발 흔들면 발목이 아팠는데, 이 몸은 아무렇지도 않아서 이런 사소한 행동이 괜히 즐겁다.
살짝 가라앉았던 기분이 도로 좋아져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왕비는 내가 깨울 거야. 당신은 그냥 치료하는 것처럼 흉내만 내면 돼.”
“그건 공주님의 업적을 가로채는 꼴이잖아요.”
“인간들 사이에서의 업적 따윌 내가 탐낼 것 같아?”
픽 웃어 주고 덧붙였다.
“당신의 업적이 되어야 당신이 운국에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잖아. 당신은 여기 머물면서 익혀야 할 게 있어.”
“무엇을요?”
“황제를 독살하고 나서, 절대 추적받지 않는 방식으로 황궁에서 탈출하는 방법.”
“……네? 그런 게 가능한가요?”
“죽은 사람은 아무도 찾지 않잖아?”
나는 은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죽었다 살아나는 방법을 가르쳐 줄게. 그거 내 특기거든.”
* * *
설등화와 논의를 끝내고 영빈관에서 나오니 김 상궁이 새로운 가마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빈궁 마노라!”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다급히 내 전신을 살폈다.
“소식 들었습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벌써 자객 얘기를 들었어?”
“예, 습격이 일어나 조사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마노라께서도 크게 놀라셨을 텐데,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 그런 거 익숙하거든.”
“예?”
습격당하는 것엔 일가견이 있다.
무지막지한 힘과 드높은 신위를 타고났지만 스스로를 지키기는커녕 자기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병약한 어린애 신세라서.
‘요괴나 잡신들이 군침을 질질 흘리며 몰려드는 탐스러운 먹잇감이었지.’
옥황상제와 염라대왕이라는 최고의 신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키고 있지만, 그걸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서 날 잡아먹기만 하면 단번에 그 신들조차 어찌하지 못할 대요괴가 될 수 있다.
엄마 아빠가 본보기가 되라고 습격한 놈들을 효수하고, 삼족을 멸할 정도로 가혹한 처벌을 내려도…….
욕심에 눈이 뒤집힌 놈들이 계속 나타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하긴 그놈들이 욕심을 자제할 수 있으면 도를 닦았겠지. 삿된 존재로 계속 사는 게 아니라.’
어쨌든 그래서 나는 진짜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별의별 꼴을 다 봤다.
‘평범한 방법을 쓰는 놈이나 약한 놈은 애초에 상라궁의 경계를 뚫지도 못하니까.’
신경질적일 정도로 삼엄한 상라궁의 경계를 뚫고 나를 습격하는 것들은 당연히 그만큼 교활하거나 강한 놈들이었다.
그래봤자 대부분 내 근처로 오기도 전에 선녀들이나 안시 손에 끝났지만.
안시가 봉황답지 않은 성격으로 자라 버린 건 그런 삿된 것들을 상대로 나를 지키느라 겪은 일들 때문이다.
그것들에 비하면 주술 쪼끔 쓰는 인간 자객 정도는 평범하다 못해 진부하지.
일부러 태연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런 건 나한텐 놀랄 거리도 못 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빈궁 마노라…….”
김 상궁이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응? 동정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 밥 먹듯이 습격당하면서 고생하고 자란 걸로…….’
사실 난 고생이라곤 모르고 호강하며 자란 구중궁궐의 금지옥엽 공주지만, 실제 루화는 고생하며 구박데기로 자란 게 맞으니 부정하기도 뭣하다.
딱한 어린애라기보다는 담대하고 강한 인상을 심어 주고 싶었는데 어째 뜻대로 안 된 것 같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어린가?’
이 몸이 다 큰 어른의 몸이었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가여운 어린애로 보이는 건 이제 싫어.’
나는 내심 혀를 차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