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염왕은 총괄 선녀를 짐짝마냥 들어 올리고 노호처럼 뛰쳐나가려 했다.
편지를 내려놓은 상제가 날카롭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훤!”
염왕이 움찔 멈춰 서서 상제를 돌아보자 그녀가 혀를 찼다.
“당신이 그 기세로 찾아가면 갓 선동이 된 그 어린애가 참으로 멀쩡하겠습니다. 죽여 놓고 시체에 물을 작정입니까?”
“…….”
“성질 좀 죽여요.”
“……미안합니다. 희요가 지금 어떤 상황일지 걱정이 된 나머지, 이성을 잃었습니다.”
염왕이 시근거리며 총괄 선녀를 내려놓았다. 상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훤, 저도 아득하고 초조합니다. 희요가 하계라니요? 그것도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그러니까요! 수려, 희요가 어떤 고초를 겪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렇게 아픈 걸지도 모르지요!”
염왕은 초조하게 방 안을 이리저리 오가며 말을 쏟아 냈다.
“귀하고 고결한 것들만 먹고 입던 우리 공주님이 하계라니요. 나쁜 기운에 오염되어 앓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디서 미천하고 삿된 것들이 감히 우리 희요를 건드리고 있을지도……!”
염왕의 전신에서 시커먼 살기가 먹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희요를 건드린 놈이 있다면 그게 누구든 갈기갈기 찢어 열탕지옥에서 8000년쯤 끓여 버리겠다는 기세였다.
상제는 염왕의 기세에 눌려 오들오들 떠는 총괄 선녀를 자신의 신력으로 보호하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훤, 우리 딸은 누구보다 영리하고 착한 아이예요.”
“당연하지요. 우리 공주님처럼 똑똑하고 지혜롭고 순수하고 사랑스럽고 예쁘고 영특하고 선하고 의젓한 데다 귀엽기까지 한 아이는 하늘부터 땅 밑까지 뒤져도 없을 겁니다.”
“네, 그리고 이건 그런 희요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한 일이지요. 누가 납치한 것도, 사고로 일어난 일도 아니고.”
“…….”
“저도 놀라긴 했지만…… 우리 같은 편지를 읽었잖아요. 희요가 아무 생각 없이, 우리가 얼마나 걱정할지 고민해 보지도 않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것 같던가요?”
“…….”
“희요를 믿는다면, 뒤집어엎고 데려오기 전에 그 애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아보고 이해부터 해 주어야지요.”
상제가 쓴웃음을 띠었다.
“건강하게 낳아 주지도 못했는데, 아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지지해 주지도 못하면 우리가 어찌 부모라 하겠습니까?”
“……수려.”
“훤, 저는 희요가 원한다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게 해 주고 싶습니다. 아픈 몸으로 투정도 잘 부리지 않던 아이가 처음으로 벌인 일탈 아닙니까?”
상제는 편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넣으면서 부드럽게 덧붙였다.
“물론, 감히 우리 희요가 하려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는지는 확인해 봐야겠지만요.”
“……!”
“아이가 걸을 길에 돌부리가 보이면 미리 뿌리를 뽑아 잘 다져 두는 것도 부모의 일 아니겠습니까?”
딸내미 앞에 뭐든 거슬리는 게 보이면 으깨 버릴 기세로 상제가 온화하게 웃었다.
“우리 따님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꽃길만 걸어야지요.”
염왕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당연하지요! 역시 부인이십니다!”
지켜보던 선녀들은 새삼스레 저들이 천계와 명계를 통틀어 제일가는 팔불출 부부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옥황상제가 염라대왕보다 좀 더 침착한 것처럼 보여도, 방식이 좀 다를 뿐 결과적으로 천명공주 문제에는 앞뒤 안 가리는 점이 아주 똑같았다.
‘솔직히 공주마마께서 조금만 버릇없는 아이였어도 천계나 명계나 곡소리 여럿 났을 텐데.’
‘두 분이 부리시는 온갖 극성을 대부분 공주마마께서 직접 막으시니까…….’
‘정말이지, 우리 공주마마가 현명하고 다정하고 사려 깊고 사랑스러운 분이셔서 정말 다행이야!’
선녀들은 자신들도 심각한 팔불출이라는 점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상제가 총괄 선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공주를 찾기 전에, 우선 네가 아는 것을 모두 말해 보거라. 공주가 맡기고 간 아이에 관한 것부터.”
* * *
설등화와 함께 왕비를 치료할 날이 정해졌다.
이달 그믐날.
꽤 여유 있는 일정이었다.
설등화에게 길일을 잡아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날짜를 최대한 늦추라고 한 보람이 있다.
‘그믐날은 음기가 강해서 진짜로 저승에 가기 좋은 길일이기도 하고.’
그때까지 나는 매일 설등화를 만나 복수 계획을 다듬고 내 ‘죽었다 살아나는 방법’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세자랑 어둠 다루는 연습도 해야지.’
그 외에 비는 시간에는 잘 먹고 잘 자고 산책을 열심히 할 거다. 건강하게 쑥쑥 크고 싶으니까.
‘좀 더 몸에 익숙해지면 무술 같은 것도 배워 볼 거야!’
하지만 다음 날 내가 먼저 하게 된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하룻밤 사이 일곱 명이나 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예, 그렇습니다. 넷은 앓아누웠고 셋은 다리가 부러지거나 팔이 부러져서…….”
김 상궁이 쩔쩔매며 설명했다.
밤사이에 빈궁에 배정된 나인 중 7명이 갑작스럽게 다치거나 앓아누웠다고.
“죄송합니다, 마노라. 대체할 사람을 바로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연유인지…….”
나는 뒷목을 잡았다가,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아냐, 괜찮아. 원인을 알 것 같으니까.”
“예?”
보나마나 천벌이었다.
나한테 불순한 의도를 품고 빈궁에 지원한 인간들이 7명이나 되었던 모양이다.
‘하긴, 좌의정 쪽 끄나풀도 있을 거고, 루화 암살 배후도 아직 못 찾았고, 그냥 설족 혼혈이나 제국 출신인 게 꼴 보기 싫은 사람도 있을 거고…….’
따져 보니 그나마 김 상궁이 수완이 좋아서 7명에서 그친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아니, 근데 배정된 첫날부터 무슨 짓을 하려 했길래 바로 천벌을 받아?’
그냥 못된 생각만 하고 행동까진 안 갔는데, 연약한 인간이라 거하게 천벌을 받은 건가?
어쨌든 이거 그냥 두면 안 되겠네.
“김 상궁, 이미 빈궁에 배정된 나인들이랑 추가로 배정될 나인들까지, 지금 전부 안마당에 집합시킬 수 있어?”
“가능은 합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내 사람이 될 사람들은 내가 직접 골라내야겠다 싶어서.”
다른 일을 하기에 앞서서, 내 집 단속부터 해야겠다.
* * *
운연당의 앞마당에 30여 명의 나인이 모였다.
‘의외로 되게 적네. 음, 상라궁이랑 비교하면 안 되겠지.’
상라궁에서 일하는 선인은 대충 오천 명쯤 되었고, 내 가까이에서 일하는 선녀만 추려도 천 명이 넘었다.
솔직히 생각보다도 너무 적어서 놀랐지만,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 안 되니까 확인도 금방 끝나고, 좀 더 꼼꼼히 살펴볼 수 있겠어.’
잠깐만, 그럼 이 적은 숫자 중에서 7명이나 불순한 마음을 품었단 말이야?
‘루화 앞날이 암울한 징조로 가득했던 이유를 알겠네.’
내가 대청마루에 올라서자 김 상궁이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 주목! 빈궁 마노라께서 납시었다!”
“운연화소(雲煙化霄)! 세자빈 저하를 뵈옵니다.”
나인들이 처음 듣는 말을 외치며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저게 무슨 뜻이지?
의아한 티가 났는지 김 상궁이 옆에서 설명했다.
“운에서 빈궁 마노라를 뵐 때 정식으로 올리는 인사말입니다.”
“인사말?”
“운국에서는 구름을 노니는 용이 주상 전하를 상징하고, 용이 노니는 구름 가득한 하늘이 왕비 전하를 상징합니다.”
김 상궁이 바로 위의 단청에 새겨진 구름과 용 무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에 따라 세자 저하는 아직 지상에 계신 ‘잠룡’, 세자빈 저하는 훗날 구름이 되실 연기라는 뜻에서 ‘운연’이라 칭합니다.”
“아, 그럼 운연화소란 건 세자빈이 무사히 구름으로 피어올라 세자의 하늘이 되길 바라며 하는 말이겠구나.”
“정확하십니다.”
김 상궁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감탄 섞인 어조로 덧붙였다.
“마노라께선 참으로 영특하십니다. 운과 평이 같은 천하어를 쓴다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고, 글자도 다른데…… 운에서 태어나 자라신 아이보다도 훨씬 더 능숙하신 것 같습니다.”
그거야 하계의 인간들이 쓰는 천하어가 원래 천계에서 유래한 말이니까. 태곳적 마고할미께서 인간들에게 하늘의 말과 글을 전해 줬거든.
좀 변형이 일어났다고 해도, 신인 내겐 운국 말이나 평국 말이나 똑같이 자연스럽게 들린다. 다른 나라 말들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신들이 어느 나라 인간의 기원이든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거다.
‘그러고 보니 세루화가 일단 평 출신이니 앞으로도 이걸 신기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겠네.’
잠깐 고민했지만,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그래.”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것도 아니고, 평범한 아홉 살도 조기 교육 빵빵하게 받으면 가능한 일이잖아?
“대단하십니다, 마노라.”
김 상궁이 손녀가 천재라는 것을 깨달은 할머니 같은 얼굴로 나를 봤다.
어째 좀 부담스러워져서 얼른 나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모두 아직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다들 고개를 들고 나를 봐.”
내가 명하자 나인들이 주저주저하며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대부분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천명안을 열었다.
‘원래 한 인간을 깊게 들여다보는 힘이지만.’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 상세히 보진 못해도 여럿을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다.
“……!”
“꺅!”
“윽…….”
여파를 30여 명이 나누어 받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비틀거리는 인간이 속출했다.
‘인간들은 확실히 선인보다 약하다니까.’
나는 난리가 나기 전에 열었던 천명안을 재빨리 닫았다.
찰나에 쏟아져 들어온 정보로 살짝 현기증이 일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주무르자 안시가 심어로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괜찮으시옵니까?]
[응, 뭐, 이 정도는.]
[하지만 원래 육신으로 이런 짓을 하셨다간 일주일은 앓으셨을 것이옵니다!]
[이 몸은 건강하니까 괜찮아.]
[……그 육신은 그렇다 쳐도, 안시는 천계에 두고 오신 공주마마의 옥체가 걱정이 되옵니다. 정말 괜찮은 것이옵니까?]
아마 별로 안 괜찮겠지.
내가 하계에서 힘을 쓰고도 멀쩡한 건 부담이 전부 내 원래 몸에 가해져서 그런 거니까.
근데 뭐…… 그 몸은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몸인걸.
‘아마 이 몸보다 천계의 내 몸이 먼저 수명이 다하지 않을까?’
대신 부담을 짊어지고 있던 본래 몸이 죽으면, 이 몸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내가 얼마나 살 수 있으려나? 그것도 잘 모르겠네. 신들 수명은 저승 명부에도 안 쓰여 있어서.’
그래도 그 유리 같은 몸을 자꾸 움직이는 것보단 이 몸으로 지내는 게 훨씬 오래 살겠지?
정말 마지막이 다가올 것 같으면 하늘로 돌아가서 엄마 아빠와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음, 그러려면 천계 몸 상태를 종종 확인하긴 해야겠어.’
나는 진심을 숨기고 안시에게 다른 말을 했다.
[그 몸은 잠들어 있을 테니까 좀 무리해도 금방 회복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