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데…… 꿈속의 여는 여가 아니라 다른 이 같군. 제정신이 아니었어.”
왕이 허탈하게 웃더니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전과는 달리 깊고 예리한 눈빛이 내게 와 닿았다.
“이 차를 만든 게 너라고 들었다.”
“네.”
“어린아이가 재주가 대단하구나. 의원의 제자냐? 아니면 도사? 조금 전까지 함께 있던 여인이 네 스승인 게냐?”
“…….”
아니 이 시아버님이 지금 뭐라는 거야.
황당해서 잠깐 말을 잊었다가,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함께 있던 분은 제 어머니세요.”
“모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있었던 게로구나. 그래서, 네 모친은 의원이냐? 여가 너희 모녀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다.”
왕이 기특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삼켰다.
“어머니께 가르침을 받긴 했지만, 어머니께선 의원도 도사도 아니에요. 평 황실의 귀인이시거든요.”
“평의 귀인이라고?”
왕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옆 나라 황제의 후궁이 왜 운룡궁에 와 있냐는 표정이다.
“전하, 제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시겠어요?”
“……모르겠구나.”
“저는 평의 11황녀로, 이름은 세루화예요. 한 달 전쯤 혼례를 올리고 정식으로 운의 세자빈이 되었습니다.”
“뭐라고? 세자빈?”
“또한 제 어머니는 설족이시고, 저는 설족 혼혈이에요. 전하께선 설족의 능력을 믿고 저희 모녀에게 기회를 주셨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시나요?”
“가만, 잠깐…… 설마…….”
왕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이마를 부여잡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는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듯 당황스러운 낯이 되었다.
“그 상소…… 그래, 여가 그것을 받아들여서…… 마음대로 하라 했었지.”
기억을 더듬는 듯 멀거니 있던 그가 돌연 화들짝 놀라더니 나를 아래위로 살폈다.
“괜찮으냐?”
“네?”
“세자…… 세자 곁에서 밤을 보내지 않았느냐. 다행히 괜찮은 것 같긴 하다만, 어쨌든 지금 세자는…….”
왕이 혼란스러운 듯 마른세수를 했다.
“여가 참으로 제정신이 아니었구나. 어찌 그런 위험한 일을 허가했단 말인가. 그건 국혼이라기보다는…….”
저 반응을 보니, 천명안 없이도 알겠다.
왕은 세자를 죽이려는 의도로 나와의 혼례를 허가한 게 아니었다.
세자에겐 정말로 다행인 일이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무수히 올라간 폐세자 요청을 왕이 계속 묵살하고 있었다고 석란이 얘기해줬으니까.
왕은 무의식중에도 아들을 내치고 싶진 않았던 거다.
혼례야 뭐, 배후의 음모를 모르면 아들에게 나쁜 일은 아니니 넘어간 걸 거고.
나는 내심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선 세자 저하를 사랑하시나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그래도 여전히 세자 저하를 사랑하시나요?”
“당연하지 않느냐? 자식의 허물도 평생 감싸 안을 수 있는 게 아비다. 하물며 그 일들은 세자가 부러 지은 죄도 아닌 것을. 세자는…….”
왕은 재차 마른세수를 하더니,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내 아들은, 저주에 당한 피해자일 뿐인데, 죄인이 되어 끔찍하게 살아왔구나…….”
“……전하, 세자 저하께서 일부러 그런 일을 저지른 게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저하께 일어난 일은 저주가 아니에요.”
“뭐라?”
나는 재빨리 심어를 날렸다.
[안시야, 듣고 있지?]
[네, 공주마마! 소리 새어나가지 않게 막아드리오리까?]
[응. 역시 우리 안시, 눈치가 빠르네.]
[헤헷.]
좋아, 이젠 안심하고.
“설족의 역사에 저하 같은 사례가 전해져 내려오거든요. 저하께선 ‘어둑서니’가 되신 거예요.”
“어둑서니라니?”
세자의 입지를 바로잡기 위해, 나는 몇 가지 계획을 구상했었다.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가장 먼저 알아본 건 인간들이 ‘어둑서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였다.
‘세자의 능력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어야 하니까.’
나는 김 상궁이 가져다 준 왕실 서고의 책들을 뒤져보고, 석란과 설등화에게도 이것저것 물어본 뒤 결론을 내렸다.
인간들은 어둑서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밤에만 나타나는 어둑서니라는 요괴가 있는데, 가까이 가면 위험하다. 내버려 두면 저절로 사라지니 피하는 게 상책이다.’ 정도.
‘이런 상황이면 굳이 세자가 어둑서니가 되었다고 밝힐 필요가 없잖아.’
엄밀히 따지면 어둑서니는 진짜 요괴도 아닌데, 괜히 어둑서니라고 했다가 세자를 요괴 취급받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세자의 힘을 도술의 일종이라고 운연당의 나인들에게 설명해보았다. 만능 핑계 설족을 동원해서.
‘암령술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서 말이지.’
그리고 이 설명은 내 예상보다 굉장히 잘 먹혔다.
다들 세자를 정체불명의 식인 괴물이 아니라 뜻하지 않게 각성한 도술을 조절하지 못하는 괴력난신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거다.
여기에는 어차피 지어내는 거 세자에게 좀 더 유리한 설정을 덧붙인 덕도 있었다.
암령술은 천지신명이 점지하는 아주아주 대단한 능력인데, 너무 대단한 탓에 인간이 받아들이려면 시험을 받아야 한다고 했거든.
‘무당이 신내림을 받기 전에 신병을 앓듯이 말이야.’
익숙한 것으로 비유하면 낯선 일도 잘 받아들여진다더니, 세자가 2년 전부터 지금까지 신병 같은 걸 겪고 있는 거라고 하니까 다들 생각보다 쉽게 납득했다.
‘나 거짓말에 재능이 있나 봐. 그동안은 별로 안 해봐서 몰랐던 거고.’
계속 하늘에서만 지냈으면 몰랐을 사실을 또 하나 알아냈다.
‘역시 인간 세상에 내려오길 잘했어.’
어쨌든 암령술이라는 설명이 잘 먹힌다는 걸 그렇게 확인한 뒤에, 세자의 부모인 왕과 왕비를 상대로는 두 가지 대응책을 세웠다.
우선 두 사람이 세자에게 거부감을 느끼거나 아들을 의무적으로만 대한다면, 흑주의 원인을 ‘암령술’로 설명한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여전히 세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어둑서니’에 대해 자세히 알려준다.
‘부모에게는 자식의 상태를 정확히 알려주어야지.’
아빠가 예전에 지나가듯 하신 말이 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지독하게 앓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픈 원인이 무엇인지 몰라서 너무나 괴로웠다고. 그 시절이 가장 힘들었다고.
그러니까 세자의 엄마 아빠에겐 되도록 제대로 알려 주고 싶었다.
“어둑서니라는 건…….”
내 설명이 끝나자, 왕의 표정은 심각해져 있었다.
“그런 것이 있었다니…….”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암령술’이라고 알려주었어요.”
“암령술? 그건 또 무엇이냐?”
“제가 어머니와 함께 지어낸 도술이에요.”
나는 세자가 어둑서니라는 사실을 숨기고 세자의 능력을 괴력난신의 일종으로 분류하는 게 왜 세자에게 유리한지 설명했다.
암령술이라는 ‘설정’이 얼마나 잘 받아들여졌는지도.
“……세자 저하께선 이제 낮에는 거의 완벽하게 어둠을 다루세요. 고작 한 달 연습한 결과가 이러니, 조만간 밤에도 자유롭게 어둠을 조절하실 수 있게 될 거예요.”
“…….”
“그러면 정말 암령술을 쓰는 도사로서 배척받지 않고 살아가실 수 있겠죠.”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마를 지경이다.
입을 다물고 잠깐 쉬면서 왕의 안색을 살폈다. 왕은 표정을 읽기 어려운 얼굴로 나를 응시하더니, 나지막하게 물었다.
“네가 세자의 연습을 계속 도왔다고?”
“네.”
“나인들에게 암령술이라는 이름으로 세자의 능력을 설명했고?”
“네.”
“그리고 2년간 혼수상태였던 중전을 깨웠고, 여의 광증도 치료했고.”
“어머니와 함께 한 일이에요.”
“……선현들께서 말하기를 인생사 새옹지마요, 전화위복이니, 절망치 말고 이환위리하라더니.”
“네?”
“세자가 어둑서니가 된 것은 재앙이었으나, 그 재앙이 결국 너와 같은 세자빈을 맞이하는 복이 되었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왕이 설핏 미소를 띠었다.
“세자빈.”
“네, 전하.”
“참으로 고맙구나. 우리에게 와 주어서…….”
말끝이 감격한 듯 약간 떨렸다. 왕은 입가를 매만지며 감정을 추스르더니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이거, 제국에도 감사해야겠구나. 이런 황녀를 귀한 줄도 모르고 우리에게 보내주다니.”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세자와 나의 혼례가 제국에 무슨 의미였는지도 깨달은 듯했다.
“세자빈과 설 귀인은 운 왕실을 구한 은인이다. 여가 공식적으로 큰 상을 내리리라. 그리고 그와 별도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하거라.”
왕이 위엄있게 말했다.
말은 딱딱한데, 나를 보는 시선은 아주 익숙하게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예쁘고 기특해 죽겠다는 느낌. 어디서 이렇게 깜찍하고 똑똑한 게 튀어나왔냐 하는 듯한 표정.
많이 본 표정이라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아빠랑 똑같아졌어…….’
어쨌든 계획대로 잘 풀리고 있다. 나는 얼른 말을 이었다.
“저어, 그러면 청이 있습니다.”
“여가 다 들어줄 테니, 당장 말해 보거라.”
“이것을 봐 주세요.”
미리 챙겨두었던 서찰을 꺼내 왕의 서안에 올렸다.
왕이 그것을 집어 봉투를 열었다. 이름이 가득 쓰인 세 장의 종이가 나왔다.
첫 장은 빽빽했고, 둘째 장은 그 반의 반도 되지 않았으며, 마지막 장은 둘째 장보다도 훨씬 적게 쓰여 있었다.
왕은 의아하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흑주로부터 지금까지, 세자 저하께 해를 입었다고 ‘알려진’ 사람들의 이름이에요.”
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