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이런 일이 이번으로 그치리라는 장담이 없다.
세자 자신의 적을 모조리 뿌리 뽑는다 해도 부인을 노릴 적들이 제국에 더 있을 테니까.
죽을 자리에 어린아이를 강제로 떠밀었던 작자들이, 어찌어찌 그 자리에서 살아남았다고 그 아이를 가만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최선의 방책은 세루화를 궐에서 도망치도록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부인 스스로가 거부했을뿐더러…….
‘그건 싫다. 이제 나는…… 부인께서 곁에 있어 주셔야만 해.’
붙들고 싶으면, 보낼 수 없으면, 목숨 걸고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위기는 언제든 찾아올 테니.
그러므로 소년에겐 힘이 필요했다.
제 부인을 지킬 무기가.
소년의 검은 눈동자에 단단하고 서늘한 결심이 깃들었다.
‘방금 했던 것처럼 해 보자.’
조금 전, 어떻게 불을 껐더라.
불길 속의 세루화를 보자마자 그는 극도로 겁에 질렸었다. 부인이 혹시라도 다칠까 봐.
그러나 두렵다고 주저앉지는 않았다.
도리어 이 무서운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절박해졌다. 자신을 두렵게 만든 것들에게 화가 났다.
그렇게 걸음을 내디디자, 어둠의 그의 뜻대로 움직였다.
‘결국 내 감정이 핵심이다.’
천결우는 표정을 굳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그림자에서 스멀스멀 어둠이 기어올라 그의 손끝을 타고 휘돌았다.
‘어둠을 끌어올리는 건 간단하다. 두려운 상상을 하면 되니까. 문제는 그 다음…….’
세자의 손아귀에서 어둠은 크게 부풀었다가 고삐가 매인 것처럼 짓눌러지길 반복했다. 소년은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두려워하면서도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는 것. 내 안의 공포를 직시하면서도…… 그것이 나를 지배하게 두어선 안 돼.’
극도의 공포는 때로 극한의 용기로 바뀐다. 궁지에 몰린 쥐가 천적인 고양이를 물어뜯을 수 있도록 하는 힘.
세자는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그런 상태로 만들었다.
2년간 늘 휩싸여 있었던 어둠과, 그 어둠 속에서 손을 잡아 주었던 소녀를 동시에 떠올리며.
감정을 부정하지 않는다. 두렵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약한 자신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공포를 용기로 벼려낸다.
‘내가 움켜쥘 무기. 부인을 지킬…… 검!’
그 순간 제멋대로 일렁이던 어둠이 일정한 크기로 안정되었다.
새카만 그림자로 이루어진 환도(環刀).
아직은 단도라고 해야 할 만큼 조그맣지만, 그렇기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쥐고 휘두를 수 있는.
‘이거다. 이 상태를 유지하면 되는 거야.’
소년은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새까만 검을 움켜쥐었다.
스스로의 어둠을 빚어 만들어낸 검은 제 몸의 일부처럼 손아귀에 착 달라붙었다.
천결우는 일렁이는 환도를 쥔 채로 널브러진 방화범들 중 한 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 어둠에 휩싸이면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고 미치거나 죽는다. 만약 완전히 뒤덮는 게 아니라, 일부만 접촉한다면?’
그는 기절한 방화범의 위에 검을 드리웠다. 산 것을 향해 와르르 쏟아지려 드는 어둠을 힘껏 움켜쥐어 일부만 흘렸다.
그러자 칼날에서 어둠이 새끼줄처럼 흘러내려 무사의 이마에 닿았다.
소년은 이를 꽉 물고 그 상태를 유지했다. 잠시 후, 무사가 괴성을 지르며 눈을 떴다.
“으아악! 아아악! 허어억!”
거센 빗소리에 묻혀 무사의 비명은 멀리 가지 못했다.
어둠이 먹물처럼 번지며 무사의 전신을 뒤덮으려 들었다. 무사는 공포에 질려 눈을 뒤집으며 미친 듯이 발광했다.
‘더는 안 돼! 조절해야 한다!’
한 번 번진 어둠은 쉽사리 되돌아오지 않았다. 안간힘을 쓰던 세자는 부인의 말을 되새겼다.
“역시 저하께서 기분이 좋으면 어둠이 안 퍼지는 거 아닐까요? 웃고 계시니 그림자가 얌전하잖아요.”
소년은 의식적으로 웃어보았다. 그다지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올라간 입꼬리가 어색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단청 아래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휘둥그렇게 떠졌던 옥빛 눈동자를 떠올려 본다. 긴 치마 아래로 은근슬쩍 발돋움을 하던 소녀를 떠올려 본다. 무슨 과자를 좋아하느냐고 묻던 재잘거림을 떠올려 본다.
그러자 억지로 지었던 미소가 저절로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변했다.
동시에 무사에게 번지던 어둠이 사그라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악몽에 휩싸여 날뛰던 무사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화사하게 웃고 있는 아름다운 소년을 마주했다.
“네 배후가 누구냐?”
미소 띤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물처럼 서늘하고 차분한 음성이었다.
무사는 멀거니 눈을 끔벅였다.
“무, 뭐?”
“누가 감히 네게 이런 짓을 사주했냐고 물었다.”
“어……?”
무사는 그제야 제 앞에 있는 소년이 세자임을 알아보았다. 자신이 어떻게 작전에 실패하고 붙잡혀 기절했었는지도.
실패했어도 배후를 밝힐 수는 없다. 후환이 두려웠다.
무사는 꾹 입을 다물고 주위를 살폈다. 세자 외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의금부에 끌려온 건 아닌 듯했다.
괴력난신인 그는 몸을 묶은 동아줄을 떨쳐 내기 위해 용력을 끌어올렸다.
전신의 근육이 팽팽해졌으나 동아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평범한 줄이 아닌 것 같았다.
‘이 줄, 대체 뭐야?’
안시가 선계에서 쓰는 오랏줄로 묶어뒀단 것을, 그래서 어지간한 용력으로는 절대 못 푼다는 사실을 무사가 알 방법은 없었다.
무사가 용을 쓰는 광경을 보고 있던 세자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지워지듯 사라졌다.
“말할 생각이 없다면, 말하고 싶게 만들어주마.”
소년이 다시 손을 뻗었다.
무사는 눈을 크게 치뜬 채 소년의 그림자에서 어둠이 일어서 검이 되고, 하얀 손아귀가 그것을 움켜쥐고, 새카맣게 일렁이는 검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칼날을 타고 어둠이 실타래처럼 그의 위로 흘러내렸다. 그것이 가슴팍에 닿는 순간 사방이 어두워졌다.
어둠 속에서 무사는 그 무엇보다도 두려운 광경을 보았다.
누군가가 보여 주는 환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자신에게 가장 끔찍한 악몽을.
“아아아악!”
너무 무서웠다. 너무 무서워서 이걸 보고 있느니 혀를 씹어 죽고 싶었다. 그래, 차라리 죽여줘, 죽여…….
그러곤 거짓말처럼 어둠이 걷혔다.
곱상한 소년이 그림처럼 웃으며 단정한 자태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배후가 누구냐?”
“…….”
무사는 겁에 질려 숨을 헐떡였다.
앳되고 고운 소년의 얼굴이 이제 어린애로 보이지 않았다.
세자가 이런…… 이런 사람이었나?
분명 유약하고 소심하며 다른 사람을 해칠까 봐 극도로 조심하고 있으니, 흑주 같은 건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들었는데.
말이 괴물이지, 벌레 하나 못 죽일 심성의 ‘착한 아이’라 들었는데!
그런데 지금 세자가 작정하고 자신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건,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흑주’ 아닌가?
“아직 대답할 생각이 없나 보군.”
그리 말하며, 소년의 얼굴에서 또다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둠이 피어올랐다. 무사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건 흑주다. 2년 전, 운증루를 지옥으로 만들었다던 그 흑주야. 사람을 미쳐 죽게 만드는…….’
조금 전 사방을 점령했던 악몽이 떠오른다.
자신이 평생 상상했던 모든 최악의 상황을 단번에 경험하는 듯한, 자신의 밑바닥에서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직접 끄집어내 들이미는 듯한, 그런 공포.
흑주 당시 사람들이 왜 미쳤는지 알 것 같다. 스스로 목을 쥐어뜯어 죽은 자가 왜 나왔는지도 알 것 같다.
너무 무서워서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다.
뭉클거리는 어둠을 검처럼 움켜쥔 하얀 손이 제게 다가오는 순간, 무사는 저도 모르게 오줌을 지렸다.
그 꼴을 내려다본 소년이 생글 웃었다.
손아귀에 쥐고 있던 검을 흩뜨리며, 세자가 물었다.
“이제 대답할 생각이 드느냐?”
무사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후가 누구냐?”
“좌, 좌의정, 좌의정 대감입니다! 좌상 대감께서 잠룡당에 불을 질러 세자 저하와 세자빈 저하를 태워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운연당에 불귀신을 부른 것도 너희 짓이냐?”
“예? 불귀신이라니요?”
“아, 그래…… 이쪽은 모르는 거군.”
소년은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무사는 이제 끝났다고 안도했다.
세자가 웃는 얼굴로 말을 잇기 전까지는.
“네가 배후를 정직하게 말한 건지 믿을 수가 없구나.”
“예?”
“진짜 배후를 숨기려고 아무나 댄 것일 수도 있지 않나? 너 같은 놈이 좌상에게 직접 명을 받았다는 것도 믿기지 않고.”
어깨를 으쓱인 세자가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아무래도 다시 확인해보아야겠다.”
소년의 손에 검은 어둠이 피어올랐다. 무사는 새파랗게 질려 고개를 미친 듯이 내저었다.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정말로 좌의정 대감께서!”
“너는 감히 동궁에 불을 지르려던 겁 없는 자다. 내가 그런 자의 말을 증좌도 없이 어찌 함부로 믿겠느냐?”
“제발 믿어주십시오! 주, 중가 상단을 조, 조사해보시면 증좌 같은 건 금방 나올 겁니다!”
“중가 상단?”
“좌의정 대감이 은밀한 일을 맡기려고 키운 상단입니다! 거, 거기서 상단 호위인 척하며 괴력난신 군사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제, 제가 그 상단에서 밑바닥 인생 놈들을 모아 훈련시키는 일을 했어서 잘 압니다! 그런 놈들은 자기들 뒷배가 누군지도 모르지만 저는 정확히 압니다!”
“……뒤에 누가 있는지를 몰라서 실패해도 뒤탈이 없을 놈들이 있는데, 좌의정이 굳이 이런 정보까지 아는 너를 보냈단 말이냐? 실패하면 끝장날 일에? 말이 안 되지 않나. 더 수상하군.”
“이번 일이 중요해서! 중요해서 그렇습니다! 절대 실패하지 않도록 가장 뛰어난 무사를 선발하다 보니 평소에는 나서지 않는 저희들이 선택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