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우리 꼬맹이, 나라도 편들어 줘야지.
“저하가 무섭긴 뭐가 무서워? 난 하나도 안 무서운데. 너 겁이 많구나?”
내 말에 사영준이 굉장히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저 겁 없지 말입니다. 스승님께서도 너는 대가리가 빈 놈이 겁대가리도 없다고 야단이셨지 말입니다!”
저거 엄청 욕 같은데 얘는 왜 이렇게 당당하지?
‘얘랑 비교하니까 안시가 똑똑하게 느껴지네. 아니지, 열 살짜리보다 153살짜리가 똑똑한 건 당연한 거잖아.’
나는 사영준이 알아듣기 쉽도록 고심하여 열심히 항변했다.
“그럼 더더욱 세자 저하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잖아. 저하께서 너한테 일부러 겁을 주려 하시는 것도 아닌데.”
“형님께선 저한테 겁줄 생각이 없으시단 말입니까?”
“당연하지, 저하께서 뭐 하러 젖형제이자 의동생인 너한테 겁을 줘? 안 그래요, 저하?”
나는 세자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세자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사하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부인. 영준아, 겁내지 말거라. 내가 착한 아우인 너를 해칠 리도 없는데 왜 겁을 내느냐?”
“형니임……!”
사영준은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세자를 우러러보았다. 세자가 다정하게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금세 헤벌쭉 웃는다.
‘쟨 단순한 게 장점일지도. 귀엽잖아.’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세자랑 몇 마디 나눈 사영준이 칠렐레팔렐레 나한테 뛰어오더니 내 손을 양손으로 덥석 잡고 아래위로 흔들어 댔다.
“감사합니다, 세자빈 저하! 형님이 저한테 겁주신다고 오해할 뻔했는데, 저하 덕분에 오해를 풀었지 말입니다! 세자빈 저하께선 은근히 좋은 사람이시지 말입니다!”
“어, 으응, 그래.”
평범한 인간 꼬마인 사영준의 뒤로 어쩐지 강아지 꼬리가 미친 듯이 흔들리는 것 같다. 얘한테 붙잡힌 내 손도 그만큼 흔들리는 것 같고.
슬쩍 손을 빼려는데 미동도 안 한다.
‘와, 얘 진짜 힘세다.’
힘 좋은 멍멍이한테 붙잡힌 기분으로 그냥 흔들리고 있었더니 어느새 다가온 세자가 사영준의 손목을 콱 잡아 멈춰 세웠다.
“영준아.”
“예, 형님!”
“착한 아우가 되어야지?”
“예?”
세자가 사영준의 손을 내게서 부드럽게 떼어 내더니, 내 앞을 가리고 서서 꼬마에게 잔소리를 했다.
“빈궁이시라 하지 않았느냐. 네가 그렇게 동네 친구들 대하듯 무례히 대해서는 안 되는 분이시다.”
“예? 저는 세자빈 저하 잘 모셨지 말입니다. 존댓말도 하고, 꼬박꼬박 저하라고 부르고…… 헉.”
의아하게 반문하던 사영준이 세자를 올려다보더니 갑자기 긴장하며 얼어붙었다.
왜 저래? 세자가 뭔가 했나?
하지만 지금 세자는 친절한 투로 조곤조곤 설명하고 있을 뿐인데.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였다. 네가 걸음마를 하는 아기도 아니고 곧 사내대장부가 될 씩씩한 남아인데, 함부로 빈궁의 손을 잡거나 하면 안 되지. 언제나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행동하도록 해라.”
“아, 아, 아, 알겠습니다. 자, 자, 잘못했습니다, 형님.”
“그래, 영준아. 나는 네가 착하고 영리한 아우라고 믿고 있단다.”
“차, 착해지겠습니다!”
세자가 별로 으름장을 놓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사영준은 군기가 바짝 든 병졸처럼 굳어서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진짜 세자가 겁이라도 주고 있는 건가?’
조금 이상하다 싶어서 표정을 보려고 앞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세자가 다정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부인, 손은 괜찮으십니까? 영준이가 힘이 세어서.”
내 손을 살짝 받쳐 들고 이리저리 살피는 소년은 늘 그렇듯 정갈하고 침착한 낯이었다.
이렇게 순둥순둥한 애를 왜 무서워하지? 아깐 가짜 웃음도 안 지었는데.
‘……아하, 세자가 어린애답지 않게 단정한 인상이라, 엄한 표정을 지으면 어른한테 혼나는 느낌이 드는 건가? 얘가 정말 어른스럽긴 하지.’
대충 납득하고 있는데 기호철이 계방에 들어왔다. 그는 연무장에 들어서자마자 세자와 제자를 제쳐 두고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세자빈 저하.”
“네, 스승님.”
“제가 저하께서 설족 혼혈이신 것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하의 체질에 무슨 영향이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으니 되도록 호흡 수련을 그만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기호철이 진중하게 말했다. 나는 당황해서 항변했다.
“하지만 제가 쓰러진 건 호흡 수련 때문이 아닌걸요!”
“설족 특유의 성장통 같은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 말은 곧, 저하께서 보통 사람과 여러모로 체질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런 호흡 수련 같은 것도 조심하시는 게 맞습니다.”
“그치만…….”
“제가 기령검가 출신이라고 말씀드렸지요? 혹시 기령검가에 대해 아십니까?”
“아니요, 잘 몰라요.”
“운에서는 그럭저럭 알려진 검가이지만, 세자빈 저하께서는 잘 모르실 것 같았습니다.”
더벅머리를 긁적인 기호철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기령검가는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아주 큰 검가였고, 저 외에도 무수한 전승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와…… 다음 전승자가 될 영준이밖에 남지 않았지요.”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나요?”
“과거에 큰 요괴와의 처절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 요괴와 싸우려면 특별한 도구를 써야 했는데, 급박한 상황 탓에 제대로 검증을 거치지 못하고 모두가 일단 그 도구를 썼습니다. 기령검술과 그것의 궁합이 나쁜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궁합이 나빴다고요?”
“예, 자세히 설명하기엔 길고 복잡한 얘기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기령검술을 깊게 익힐수록 체질이 조금 변하는데, 그 체질이 도구의 효과와 맞지 않았던 거지요.”
“아, 체질이…….”
“그 결과…… 전쟁이 끝난 후에, 살아남은 기령검가 사람들은 모두 지독한 후유증에 시달렸습니다. 당시에 임신 중이셔서 그 삿갓을 쓰지 않았던 제 증조모께서만 살아남아 기령검가의 명맥을 이으셨지요.”
잠깐만.
삿갓? 방금 삿갓이라고 했지?
“그러니 저하, 체질이 다르다는 건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특히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나 익힌 기술에 따라 달라진 체질이면 새로운 것을 접할 때 배로 조심해야 하지요. 고작 도구로도 한 가문이 멸문에 이르고, 어떤 체질은 남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음식이 독이 되기도 하는데, 호흡 훈련 같은 건 당연히 더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줄줄이 이어지는 기호철의 잔소리를 끊으며 급하게 물었다.
“스승님, 그 요괴와 싸우기 위한 도구라는 게 삿갓이었나요?”
“체질에 따라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기 때문에, 예?”
“방금 말씀하신 요괴와 전쟁을 할 때 써야만 했던 도구 말이에요. 그게 삿갓이에요?”
“아,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전쟁을 삿갓 전쟁이라 부르게 되었지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평에 있는 요괴에 관한 실마리가 툭 튀어나왔다.
‘그 요괴가 김삿갓들의 나라라고 하던 거랑, 삿갓 전쟁이라는 거…… 분명 관련이 있겠지?’
나는 놀라 눈을 깜박이다가, 얼른 말했다.
“그 전쟁에 관한 이야기, 좀 더 자세히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기호철은 약간 당황한 듯했다.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저하. 조정이나 일반 백성과는 거리가 있는 괴력난신들의 전쟁이었고, 끝내 승리하긴 했으나 과정이 끔찍하고 결과도 참혹하여 어린 세자빈께서 들으시기에는…….”
“그래도 운국에서 있었던 큰 사건인 거잖아요. 듣고 싶어요.”
“음…….”
망설이던 기호철이 세자와 사영준에게 번갈아 시선을 주더니, 문득 세자에게 물었다.
“세자 저하께서는 삿갓 전쟁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100여 년 전 괴력난신들이 큰 요괴에 대항해 싸운 전쟁이었고, 많은 괴력난신 분파와 가문들이 그때 희생되었다는 것만 압니다.”
세자가 숨을 고르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바마마께서 그들이 그 전쟁으로 백성 대신 피를 흘리며 나라를 구했으니, 삿갓 전쟁에 참전했던 괴력난신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 후예들을 우대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참으로 어진 가르침이십니다. 이면에서 흘린 피의 가치도 이리 진심으로 알아주시니 괴력난신들이 주상 전하께 충성하는 거지요.”
“하지만 스승님, 저는 그것이 정확히 어떤 전쟁이었는지는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정사(正史)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아서…… 빈궁께서 먼저 나서 주신 이 기회에 저도 제대로 배우고 싶습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십시오.”
와, 세자 꼬맹이는 정말, 이제 겨우 열두 살인데 이렇게 의젓하다니.
‘사영준이 형님 멋져 보인다고 하는 이유를 알겠어.’
반듯한 세자의 태도에 기호철도 크게 감명을 받은 기색이었다.
“세자 저하도 세자빈 저하도 이리 속이 깊고 현명하시니, 정말로 운국의 미래가 밝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러면 오늘은 삿갓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지요……. 영준아, 공부한다고 도망칠 생각 하지 말고 얌전히 이리 와라.”
그는 정자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은근슬쩍 튀려던 사영준의 뒷덜미를 능숙하게 낚아채었다.
철없는 제자를 달랑달랑 들고 옮기며 기호철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정말이지, 두 분의 반의반의 반만이라도 닮아 보는 게 어떻겠느냐? 내 너를 이대로 전승자로 삼아도 될지 걱정이 크다.”
“무, 무사가 용력만 잘 쓰면 되었지 무슨 공부까지 해야 합니까?”
“사람이 몸만 채우고 머리는 안 채우면 짐승이랑 다를 게 무어냐? 아무래도 너한테 교양을 가르칠 스승을 따로 구하든가 해야겠다.”
“예? 교양이 뭡니까? 양을 키우는 방법입니까? 그런 것도 배워야 합니까?”
“……정말 하루빨리 구해야겠다. 정말로.”
기호철이 이를 부득 갈며 사영준을 질질 끌어 정자에 올려놓았다.
세자와 나는 웃음을 참으며 그들을 뒤따라 정자에 올라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