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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79/136)

77화

“다 옛날이야기입니다, 하하. 지금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기호철은 태평하게 웃으면서 말했지만, 더 깊은 진실들을 아는 나로서는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세자빈 저하께서는 호흡 수련에 관한 것을 꼭 재고해 보시길 바랍니다.”

“네!”

호흡 수련을 더 할 수 있고 없고는 지금 하나도 안 중요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운연당의 내 방으로 달렸다. 문을 전부 닫고 안시에게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결계를 치라고 이른 다음, 팔주령을 꺼내 첫 번째 방울을 건드렸다.

다른 한쪽이 엄마가 있는 자미궁에 보관되어 있는 방울.

곧 뭉게뭉게 피어난 연기가 자미궁의 중심부, 엄마가 일하는 방을 비췄다.

[희요야? 무슨 일이냐?]

산더미 같은 두루마리에 파묻혀 있던 엄마가 깜짝 놀라 나를 보았다. 엄마 곁에서 먹을 갈던 엄마의 봉황, 금령도 눈이 커졌다.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하계에 두억시니가 나타났대요! 알고 계셨어요?”

엄마가 옥색 눈을 깜박이더니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역시 알고 계셨네요.”

안도감 반, 답답함 반으로 대답했다. 알고 계셨던 건 다행인데, 이런 큰일을 왜 나한테는 전혀 얘기를 안 해 주신 거지?

나도 모르게 입을 비죽이며 물었다.

“알고 계셨으면, 왜 저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엄마 아빠가 위험할 수도 있는 큰일이잖아요!”

[음…….]

엄마는 난감한 듯 눈썹을 모으고 신음을 흘리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만큼 큰일이기 때문에 일부러 네게 알리지 않은 거란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희요야, 너는 아직 어리다. 무사히 자랐어도 210살이면 겨우 성년 취급을 해 줄까 말까 하는 한참 어린 나이인데, 넌 잠들어 있던 시간도 길고 제대로 자라지도 못했으니 더욱 어리지 않느냐.]

“……그건…….”

내가 풀이 죽자, 엄마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가 부족하다거나 모자란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어린 네겐……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보호받을 권리라니요?”

[어른의 사정이나 책임 같은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세상을 배우는 것과 스스로 자라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아이의 특권 말이다. 아이가 어찌할 수도 없는 일을 같이 고민하게 만드는 건 부모로서 옳지 않단다.]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세자 꼬맹이에게 내 진실을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입을 다물기로 하면서 깨달았던 게 있어서.

‘그때 어른들이 더 크면 얘기해 주겠다고 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했지. 그것처럼, 내가 좀 더 자라야지만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들이 있는 거야.’

나는 내가 다 컸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어른들 눈에는 한참 어릴 테니까. 그리고 실제로도 나는 아직 많은 게 부족하니까. 더 키가 커야 하는 어린애니까.

“……두억시니가 나타난 걸 제가 안다고 해서 엄마 아빠를 도와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괜히 걱정만 하게 될까 봐, 숨기신 거군요.”

[이해해 주니 정말 고맙구나. 숨겨서 미안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엄마가 덧붙여 말했다.

[우리는 두억시니를 계속 주시하고 있고, 대비도 철저히 하고 있단다. 네가 걱정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잊어버리고 편히 지내렴.]

“네에…….”

[이 어미가 옛날에 두억시니를 무찌르고 최고신이 되었다는 것, 알고 있지 않으냐? 네 아비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엄마가 빙그레 웃었다.

[이 몸은 천계의 최고신, 하늘의 군주, 자미궁의 주인, 만신(萬神)의 으뜸, 공과(功過)의 판관, 이치의 주재자이자 천상의 권좌에 앉은 자…… 모든 것의 위에 있는 옥황상제(玉皇上帝)다.]

상제의 관을 쓴 채로 위엄 있는 미소를 짓는 엄마의 모습에서 강렬한 권위가 느껴졌다.

전신에 피어오르는 은은한 빛. 내게는 잘 보여 주시지 않던, ‘옥황상제’로서의 모습이다.

그 모습으로, 엄마가 다정히 말했다.

[희요야, 그런 엄마가 고작 두억시니 같은 것에 애먹을 정도로 약한 신으로 보이더냐?]

마음속에 자라났던 불안감이 사그라드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엄마는 엄청 강하시잖아요.”

[그렇지? 그러니 너는 걱정 말고 편히 인간 생활을 즐기거라. 네가 고민할 건 따로 있지 않니. 그것만 해도 큰 고민인 것을. 알겠느냐?]

“네!”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밝게 웃으며 대답하자 엄마가 귀엽고 기특하다는 듯 나를 보았다.

[그래, 언제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연락하거나 기도하렴.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다른 신들도 언제나 기꺼이 네 기도를 들을 테니.]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엄마!”

나는 홀가분한 심정이 되어 팔주령을 거두었다.

* * *

천명공주의 팔주령과 연결이 끊어지자, 상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희요가 어쩌다 두억시니가 나타난 걸 알게 된 거지?”

곁에 있던 금령이 차분한 음성으로 답했다.

“일월신이 공주마마의 공물을 받았다고 사방팔방 자랑하고 다니지 않았사옵니까. 그때 일로 연결되어 어찌저찌 알게 되신 거겠지요.”

“아…… 그래, 그 여우 요괴가 두억시니가 거느린 요괴 떼에 쫓겼다 했던가.”

상제가 골치 아픈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 두억시니, 그때 운국에서 끝장을 냈어야 했거늘. 때마침 쌓인 업보를 잘도 받아먹고 살아남았어.”

“아무래도…… 공주마마를 되살릴 때마다 늘어나는 업보가 있으니, 어쩔 수 없사옵니다. 애초에 그것이 처음 생겨난 것도 공주마마로 인해……”

“두억시니의 탄생이 공주로 인한 것은 아니지. 사산되려는 그 아이를 업보를 감수하며 되살린 건 나와 훤이니까.”

금령의 말을 막은 상제가 마른세수를 했다.

“전부 우리의 업보다. 그러니 희요가 알게 해서도, 그 애에게 영향이 가게 해서도 안 돼.”

“……하지만 그 두억시니는 공주마마의 존재를 이미 잘 알고 있사옵니다. 사산될 예정이었던 공주마마가 생을 얻는 순간, 그 업보를 통해 그것도 생을 얻었지 않습니까.”

“…….”

“아직은 미약하여 천계를 침범하지 못하니 공주마마를 노리지도 못했지만, 만에 하나 공주마마께서 인간 세상에 내려가 계신 것을 그것에게 들켰다간…….”

“당연히,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지.”

상제가 지그시 이를 물며 말했다.

금령은 그런 주인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금령 또한 주인의 외동딸인 천명공주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자기 목숨 정도는 대신 내줄 수 있을 만큼.

그러나 하나의 주인만을 섬기는 봉황으로 타고났기에, 그녀에게는 상라희요보다 주인인 태상수려가 더 귀했다.

그래서 공주를 위해 상제가 과한 업보를 짊어지는 게 그리 반갑지 않았다.

‘아마 상제 폐하께서는…… 두억시니가 공주마마를 건드리려 들면 무슨 업보를 짊어지게 되든 간에 끼어드시겠지. 하계에 강림해서라도 막으려 하실지도 몰라.’

모시게 된 주인을 따라 여성체인 황(凰)이 된 금령은, 마찬가지로 모시게 된 주인을 따라 남성체인 봉(鳳)이 된 반려 홍예를 떠올렸다.

남편의 주인인 염왕도 상제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공주마마를 두억시니로부터 지켜야 한다. 아무래도…… 가족을 모두 불러서 논의해 봐야겠어.’

금령과 홍예 사이에는 여덟 자녀가 있었다.

봉황은 평생 단 한 번 번식하며, 이후로는 번식 기능을 잃고 주인의 신수로만 산다.

그래서 번식하는 시기에만 봉과 황으로 나뉘고, 그 이전과 이후에는 성별을 따지지 않고 그냥 봉황으로 일관되게 불렸다.

금령은 그 한 번의 기회에 여덟 개의 알을 낳았고, 안시를 제외한 일곱 개의 알은 모두 거의 비슷한 시기에 깨어나 독립한 후 각자 다른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안시만이 몇백 년간 알인 채로 깨어나지 못해 그대로 썩어 버릴 뻔했지만.

‘그 아이는 공주마마로 인해 깨어났고 유일하게 공주마마께 이름을 받은 데다가 아직 한참 어리니, 이번 논의에서는 빼 두어야겠지.’

안시 외의 다른 아이들, 그리고 반려와 함께 의논해서 두억시니를 견제할 방안을 구상해 보아야겠다.

그들은 자유롭게 삼계를 넘나들 수 있는 신수이기에 머리를 맞대면 업보를 최소화하면서 두억시니를 견제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상제께서 지나치게 과한 업보를 짊어지시기 전에…… 어떻게든.’

금령은 결심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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