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강신은 가장 쉬운 기술입니다. 그저 신께 몸을 맡겨 버리면 되니까요. 동시에 가장 어렵습니다. 오로지 신께서 허락하시느냐 마느냐가 성공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무당이 강신을 성공하는 경우는 정말 드뭅니다.”
‘그럼 이거 나한테는 그냥 제일 쉬운 기술이잖아.’
백탐솔은 담담히 설명을 이어 갔다.
“또한 강신은 무당의 기술 중 가장 위력적인 기술입니다. 신께서 인간의 몸을 빌려 본연의 신력을 발휘하는 것이니, 인간이 직접 하는 것보다 위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몸에 신을 불러들이는 일이라서, 엄청나게 위험한 거죠?”
“그렇습니다. 신께서 빙의만 하시고 인간의 몸을 직접 움직이지 않는 경우인, ‘접신(接神)’ 상태일 때는 그나마 괜찮지만, 완전한 빙의가 이루어진 ‘강신’ 상태에선 무당이 신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기도 합니다.”
백탐솔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덧붙였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무당은 강신이 아닌 접신까지만 하길 원하지만, 신께서 그걸 반기질 않으십니다.”
그렇겠지. 바쁜 와중에 신이 하계의 인간 몸에 내려온 거면 직접 움직여서 후딱 해치우고 싶지, 답답하게 빙의한 채로 훈수만 두려 하겠어?
“그럼 지금부터 구체적인 강신 방법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선…….”
그 수업에서 일단 강신 이론은 다 배웠다.
‘강신이라.’
나는 이미 세루화의 몸에 빙의해 있는데, 이 상태로 천명공주의 강신을 진행하면 어떻게 될까?
이미 강신한 거랑 다름없는 상태인데, 뭔가 변화가 있을까?
‘좀 더 배우고, 백탐솔이 보여 주기로 한 실제 강신도 보고 나서 시도해 보려 했던 건데…….’
어둑서니를 먹니 어쩌니 하던 그슨대의 말이 떠오른다. 날 붙잡으려다 줄줄이 끌려온 우의정네 쌍둥이들도.
초조해진다. 그 애들이 나 때문에 다치기라도 하면…….
‘시간이 없어. 지금은 뭐든 해 봐야 해.’
나는 얼른 제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을 감고 양손을 맞대었다.
백탐솔의 무속 수업에서 배운 대로 기원, 신께 바라는 마음을 손끝에 담는 상상을 한다.
모은 양손을 따라 기도하는 마음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하늘에 닿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본다.
저 하늘 위에 있을 나 자신, 천계와 명계의 공주이자 큰 신에게.
‘천명공주 상라희요.’
원래 무당은 기원의 응답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 춤을 춘다고 했다. 신에게 바치는 춤이자, 신을 몸에 받아들이기 위한 춤을.
나는 응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릴 수도 없었다.
내가 바로 천명공주니까.
하늘에 있는 내 몸뚱이는 의식이 없어서 응답 같은 걸 할 수 없거든.
‘응답을 기다리는 대신에 내가 할 일은.’
기호철의 호흡 수련에서 배운 대로 호흡을 고른다. 조금 더 날카로워진 기감으로…… 원하던 것을 찾는다.
신력을 쓸 때는 굳이 노력할 필요도 없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보이던 것. 본체의 안정을 위해 부모님과 약속하며 무의식적인 신력 사용을 막아 두어 보이지 않게 된 것.
옅고 긴 호흡을 내뱉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모은 내 손끝에서 희미하게 일렁거리는 줄이 보였다.
내 목숨줄.
‘세루화’의 몸과 이어진 줄이 아니다.
‘상라희요’의 몸과 영혼을 잇는 줄.
천계의 내 몸과 하계에 있는 내 영혼을 이어 주는 줄.
삼도천에 떨어진 망자가 되었을 때는 아주 선명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망자가 아닌 데다 신력을 쓰지 않고 있어서 흐릿하다.
‘그래도 기감만으로 보이는 게 어디야.’
그림자 속이라서 팔주령의 방울 간 통로는 열리지 않아도, 목숨줄은 끊어지지 않는다.
목숨줄이란 혼과 몸의 연결선. 생명이 유지되는 한 세상 무엇보다 질기고 강력하게 유지되는 선이니까.
‘내 건 좀 누덕누덕하긴 하지만.’
까마득한 위로 희끄무레하게 뻗은 목숨줄을 모은 양손으로 살며시 감싸 쥐었다.
신과 이어진 줄을 쥐고 다시 기원한다.
‘내려와, 천명공주.’
이건 사실 기원이 아니다. 내 영혼이 내 몸에게, 내 신력에게, ‘천명공주’라 이름 지어진 신에게 내리는 명령.
‘내 신력 내놔!’
강하게 바라자 곧바로 목숨줄이 떨렸다.
‘온다!’
줄을 타고 폭포수처럼 신력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익숙하고 어마어마한 신력.
‘역시 이 상태로 강신을 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강신은 그냥 평범히 내가 내 신력을 끌어다 쓰는 것과 별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통제 불능의 힘이 노도처럼 흘러들어 온다.
이걸 가지고 할 수 있는 건…… 막아 둔 천명안을 뜨는 거나 천벌이 발동하게 하는 것, 혹은 막무가내로 사방에 뿌려 폭발시키는 정도다.
그러니까 원래 내가 내 신력을 쓰는 수준에서 변함이 없단 소리다.
‘신이 직접 신력 쓰는 게 강신이랬으니 이렇게 될 거 같긴 했어. 애초에 내가 신력을 제대로 못 쓰는데 나를 강신했다고 갑자기 잘 써지는 게 이상하지.’
조금 실망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라 당황하지는 않았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신력을 받아들이지 않고 돌려보낸다. 그러자 내 신력은 자연히 다시 천계의 내 몸으로 되돌아간다.
몸과 영혼 사이에서 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목숨줄을 혈관 삼아, 피가 흐르듯 신력이 나와 하늘의 내 몸 사이를 돈다.
‘세루화 몸에 빙의한 직후랑 거의 똑같은 상태네.’
천벌이 자동으로 떨어지고 천명안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던 빙의 초반의 상태.
이 상태로 신력을 쓰면 부담이 전부 하늘의 내 몸으로 간다.
그래서 엄마 아빠의 도움으로 이 흐름을 막고 신력을 쓰지 않기로 했지.
강신하니까 이게 다시 흐르네.
‘그럼 자, 여기서…… 무당의 기술을 써 본다면?’
예민해진 기감에 내 안에 있는 목숨줄이 느껴졌다.
이 몸과 내 영혼을 잇고 있는 ‘세루화’의 목숨줄. 외부로 뻗을 이유가 없어 내 몸 안에 얌전히 잠들어 있는 것.
‘이걸 꺼내야 해.’
무당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목숨줄을 끄집어내어 신이나 귀신에게 잇는다.
그게 바로 빙의다.
내가 배운 인간 무당의 지식에 명계와 천계의 지식을 대입해 보면, ‘무속’이란 제 목숨줄을 다루는 기술에 가까웠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건드릴 일이 없고, 혼수상태일 때나 몸 밖에 나오는 목숨줄을 스스로 꺼내는 것.
‘인간들이 원리를 아는 채로 이걸 다루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지만…… 결국 무당들은 춤이나 굿 같은 수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목숨줄을 움직이는 거야.’
무당의 체질? 신을 담을 그릇?
그건 곧 목숨줄이 잘 빠져나오는 체질이고, 정신을 잃기 쉬운, 혼이 몸에 잘 안 붙어 있는, 기절하기 쉬운 인간이란 소리였다.
‘본래의 혼이 몸에서 잘 빠져나가니 다른 신이나 귀신을 몸에 담을 수 있는 거지. 목숨줄이 덜렁거려서 뭐라도 담아 누르지 않으면 신병을 앓게 되는 거고.’
비울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인간의 무당이었다.
그렇게 보면 ‘세루화’가 탁월한 무당의 자질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세루화는 원래의 혼이 사라진, 사실상 완전히 빈 그릇이니까.
그러니 보통 무당이 무무를 추거나 굿을 하며 무속의 기술로 반쯤 정신을 놓아야 가능한 ‘그릇 비우기’를,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내 의지로 할 수 있다.
……할 수 있겠지?
솔직히 이거 다 무속 배우면서 내가 세운 가설이라서.
실전은 처음이다.
‘몰라, 해 보자. 일단 목숨줄을 꺼내는 것부터.’
그슨대가 애들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좀 겁이 난다고 망설일 여유는 없다.
‘……나는 저승을 수없이 들락거려 봤고, 210살이나 먹은 큰 신이고, 옥황상제와 염라대왕의 외동딸인 천명공주야.’
그러니까 목숨줄 잡아서 꺼내는 정도는 하나도 안 무서워. 안 무섭다고. 하나도 안 아플 거야.
나는 입술을 꾹 문 채 손을 움직였다.
* * *
“먹어, 먹어 봐야지……. 성공하기만 하면 강해질 거야. 강해진다.”
중언부언하는 기괴한 음성과 질질 끄는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괴물이 오고 있다.
천결우는 한껏 숨을 죽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정신을 차렸을 때, 소년은 아주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갇혀 있었다.
그게 부적을 덕지덕지 바른 강철 뒤주라는 건 부수고 나온 뒤에야 깨달았다.
천결우는 자신이 베어 버린 뒤주의 파편을 흘깃 보았다.
‘쇳덩이로 만든 뒤주. 부적까지 여럿 발라 둔 걸 보면, 틀림없이 위험한 무언가를 가두기 위해 만든 도구다.’
이걸 뭔지도 모르고 베어 부쉈다니.
새삼 어둑서니라는 게 쓰기에 따라 얼마나 강력한 무기가 되는지 느꼈다.
“저하께서 만들어 내신 그 암령검(暗靈劍)은 강대하고 순수한 기운의 결정체입니다.”
“경지에 이른 무사가 검에 두르는 검기(劍氣)에 대해 아시지요? 검기를 보다 날카롭고 정순하게 다듬어 고정한 것을 검강(劍罡)이라 부릅니다.”
“저하의 암령검은 검기를 초월하여 검강에 비견되는 힘입니다. 고작 열두 살의 나이에 이런 위력의 무기를 쓸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기연이자 기적입니다.”
기호철의 극찬이 떠올랐다.
그러나 세자는 방심하지 않았다.
이 검을 들고도, 기호철과의 비무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공격을 성공한 적이 없으므로.
“저하께선 아직 약하십니다. 경험도 기술도 부족하시지요. 그러니 절대로 방심하셔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강한 무기를 쥐고 있다 해도, 적에게 닿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는데 섣불리 행동해선 안 돼.’
저런 강철 뒤주에 그를 가둬 놓았다는 건, 그가 기이한 힘을 가졌다는 걸 적도 알고 있다는 뜻.
‘일단 적의 정체부터 확인한다.’
천결우는 암령검을 고쳐 쥔 채 대들보에 좀 더 바싹 달라붙었다.
그가 뒤주를 부수고 나온 곳은 작은 방이었다. 창밖은 온통 괴상한 그림자로 가득했고, 문은 잠겨 열리지 않았다.
문을 부수고 나가려는 찰나 비정상적으로 예민한 소년의 귀에 괴물의 소리가 들렸다.
세자는 즉시 대들보까지 뛰어오른 뒤에, 어둠을 끌어올려 전신을 덮었다. 그리고 조용히 괴물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부인께선 무사하실까?’
기다리며 떠올린 생각에 심장이 바짝 졸아든다.
얼른 부인을 찾아야 하는데. 이런 기괴하고 끔찍한 곳에서 작고 여린 소녀가 어떤 고초를 겪고 있을지 걱정이 되어 미칠 것 같다.
‘……급할수록 침착하게.’
천결우는 이를 악문 채 암령검을 꾹 쥐었다.
질질 끄는 발소리가 아주 가까워졌다. 잠긴 문 바로 앞에 도달한 괴물이 중얼거리며 문고리를 잡았다.
“어둑서니, 어둑서니를 먹으면 내 그림자에 도움이 되겠지. 도움이 될 거야. 예전에 봤던 어둑서니는 너무 크고 무서워서 도망쳤는데, 인간 꼬마 어둑서니는, 작고 안 무서웠어. 안 무서워. 먹을 수 있어…….”
세자는 숨을 멈추고 눈을 치떴다.
‘저것이 어둑서니를 안다고?’
그는 저것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저것은 그의 정체를 안다.
천결우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철컹,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