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7/136)

85화

문 안으로 들어온 건 미역 줄기 같은 것을 전신에 뒤집어쓴 거구의 인간형 괴물이었다.

일어서면 대들보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큰 덩치였는데, 양손이 바닥에 끌릴 정도로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어 낮은 문을 쉽사리 통과해 들어왔다.

괴물은 뒤집어쓴 것들 때문에 손끝과 발끝만 겨우 보였다. 주름지고 새까맣고 굵은 털이 숭숭 난 피부에 검고 기다란 손톱 발톱이 나 있었다.

‘저 손……!’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세루화의 발목을 움켜잡고 잡아당겼던 그 기괴한 손이다.

‘부인을 납치한 게 저놈이구나.’

세자는 이를 꽉 물었다.

당장이라도 뛰어내려 가 저놈의 목에 칼을 대고 부인을 어디다 두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저게 얼마나 강한 요괴인지도 모르는데, 어리석은 짓이다. 심지어 저놈은 내가 어둑서니인 것을 알고 있지 않나.’

소년이 아이답지 않은 참을성을 발휘하여 분노와 초조감을 억누르는 사이, 방 안에 들어온 그슨대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부서진 뒤주의 파편을 돌아보았다.

걸을 때마다 그것의 온몸에서 거뭇한 것들이 줄줄 흘러내렸다.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미역 줄기 같은 게 아니라 새까만 그림자였다. 여러 겹의 그림자를 깃털처럼 전신에 덮고 있는 기괴한 모양새다.

“없다…… 없다? 어디 갔지, 분명 여기에 가둬 놓았는데. 이거 튼튼한 건데, 이걸 부수고 나왔다고? 이걸 부쉈어?”

그슨대가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리며 뒤주 파편을 뒤적거렸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자 그것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디 갔어? 어둑서니 어디 갔어?”

늘어진 해초 같은 그림자들 사이로 그슨대의 시뻘건 눈이 형형하게 번뜩였다. 그것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방 안을 살폈다.

“어둑서니, 인간 어둑서니. 어디 갔어? 어디 갔어? 사지를 찢어 먹을 테다. 찢어 먹을 거야. 머리를 뽑아 으깨 버려, 으깨 버린다……!”

그슨대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눈을 희번덕였다.

세자는 대들보 위에서 숨을 멈춘 채로 좁은 방 안을 뒤지는 거대한 요괴를 내려다보았다.

‘저 요괴…… 엄청나게 강하다.’

등줄기를 따라 솜털이 죄다 일어섰다.

소년에게는 저 요괴의 정체를 알아볼 지식이 없었다. 그러나 어둑서니가 된 소년의 몸은 저것이 얼마나 강한 요괴인지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이제 막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평범한 소년의 힘으로는 한 방도 버티지 못할 거다. 그렇다면 어둑서니로서의 힘을 쓴다면?

‘……모르겠어.’

어둑서니로서의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천결우는 아직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완벽히 손에 넣지 못했다. 그가 다룰 수 있는 건 방대한 어둠이라는 빙산의 일부에 불과했으니까.

게다가 소년은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공격해 본 것도 저번에 방화범을 잡아 심문했을 때가 처음이었으니.

그러니 지금 저것과 싸우는 건 하책 중의 하책이다.

‘들키면 안 돼.’

소년은 주변의 그림자에 제 어둠을 섞어 전신을 뒤덮었다. 어둠의 일부가 되어 가만 엎드린 채 기다렸다.

“어둑서니 없어, 인간 어둑서니!”

분노한 그슨대가 사방의 세간살이를 때려 부쉈다.

세간이라 해 봤자 낡고 삭은 문갑이나 텅 빈 책장 정도였지만, 전신을 뒤덮은 그림자가 펄럭일 정도로 날뛰는 요괴의 압박감은 대단했다. 좁은 방이 온통 요괴로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다.

‘……제발 그냥 나가기를, 흡!’

저것이 포기하고 떠나기를 기다리던 세자는 일순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슨대가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던 허리를 쭉 펴면서, 그림자로 뒤덮인 머리가 대들보 옆으로 쑤욱 올라왔기 때문이다.

‘……!’

소년은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몸을 움츠렸다. 제 위를 뒤덮은 어둠이 제발 서까래의 그림자처럼 보이길 빌었다.

불을 땐 아궁이처럼 벌겋게 빛나는 괴물의 눈구멍이 대들보 위를 슥 훑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새빨갛게 번뜩이는 눈알이 그를 똑바로 응시한다.

아니, 그저 대들보 위를 보고 있을 뿐인가?

‘들켰나?’

천결우는 식은땀이 흠뻑 배어난 손으로 암령검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지금이라도 먼저 쳐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겹겹이 늘어진 그림자 사이로 괴물의 커다란 입이 낭떠러지처럼 벌어지더니 끔찍한 악취가 풍겨 왔다.

“없어, 없다……!”

괴물은 고개를 홱 돌리고 허리를 도로 낮췄다.

“어디 갔지? 인간 어둑서니, 어디로 갔지? 사지를 찢어, 머리를 으깨어, 눈알을 뽑아 먹을 테다, 먹어 버릴 테다!”

그슨대는 쉼 없이 중얼거리며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갔다. 질질 끄는 소리와 끔찍한 말들이 점차 멀어졌다.

살았다.

소년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도 한참 기다렸다가, 고양이처럼 조용히 아래로 뛰어내렸다.

겁먹은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그의 두려움을 받아먹은 어둠이 몸 주변에서 술렁이며 맴돌았다. 주인을 물어뜯을 기회를 노리는 맹수처럼.

세자는 가슴을 움켜쥐고 심호흡을 하며 공포심을 내리눌렀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사탕을 문 것처럼 사랑스럽던 소녀의 미소를 떠올렸다.

세루화가 그에게 만들어 준 화사한 기억들 중 한 조각.

“그러면 행복을 머금고 있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같이 맛있는 거 많이 먹어요.”

달콤한 기억을 떠올리자 가짜로 지었던 미소가 진짜 웃음으로 바뀐다. 겁에 질려 떨던 심장이 점차 안정되며 부풀어 올랐던 어둠이 얌전히 발아래에 깔렸다.

‘……부인께서도 여기 어디에 갇혀 계신 거겠지?’

세자는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부인을 찾은 뒤에, 여길 어떻게 탈출할지 궁리하자.’

그슨대가 박살 낸 문틈으로 고개를 내미니 그림자가 안개처럼 깔린 복도가 보였다.

천결우는 조심스럽게 복도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얌전하던 그림자들이 꼬리를 밟힌 독사처럼 솨아악, 소년을 향해 몰려들었다.

“……!”

그는 반사적으로 어둠을 일으켰다. 발치에서 장막처럼 솟구친 어둠에 그림자들이 뱀처럼 내리꽂혔다.

그것은 바다에 던져진 물방울처럼 일어선 어둠에 그대로 녹아들어 사라져 버렸다.

‘이게 무슨 조화지?’

그슨대의 본질에 대해 잘 모르는 세자는 의아해서 고개를 기울였다.

밤의 어둠 속에서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빛 없는 밤은 그림자마저 삼켜 버리기에.

따라서 일반적인 어둑서니와 그슨대는 완벽한 상하 관계였다. 그림자가 아무리 발악하더라도 어둠에 뒤덮이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소년은 그런 원리를 알지는 못했으나, 복도를 가득 채운 그림자가 제 어둠 앞에서 맥을 못 춘다는 사실은 금세 깨달았다.

‘그렇다면…….’

세자는 어둠을 휘감고 암령검을 앞세운 채 복도를 걸었다.

몇 발짝 떼면서 덤벼드는 그림자를 죄다 흡수해 버리자, 용기가 생겼다. 그는 곧 달리기 시작했다.

‘다들 어디에 있는 거지?’

부인, 그리고 우의정의 손주들.

소년은 복도를 달리며 기감을 일으키고 어둠을 퍼뜨렸다. 이러면 지나치는 방을 들어가지 않고도 안에 인기척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곧 그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이 저택…… 미로 같군.’

꽤 긴 거리를 달렸는데 일직선으로 뻗은 복도가 끝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큰 저택이라 해도 이 정도 뛰었으면 모퉁이가 나올 법도 한데.

‘대체 여긴 어디란 말인가?’

심각해진 소년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민하는 와중, 등 뒤에서 쉬싯,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세자는 반사적으로 돌아서며 암령검을 뽑아 겨누었다. 요즘의 검술 훈련이 헛되지 않아 제법 안정적인 자세였다.

“누구냐!”

소년의 외침과 함께 발끝에서 뻗어 나간 어둠이 사방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며 시야를 확보했다.

이윽고 드러난 광경에, 천결우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낡고 삭았지만 수레가 서너 대는 지나가도 될 법한 넓은 복도.

그리고 그 복도를 절반 이상 채우고 있는, 거대한 뱀의 머리.

새까만 비늘로 뒤덮인 뱀의 몸 곳곳에 새빨간 결정 같은 것이 열매처럼 맺혀 있었다. 거대한 뱀은 핏줄이 터진 것처럼 붉은 눈으로 세자를 내려다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쉬익.

“……!”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내달렸다. 다음 순간, 소년은 본능적으로 바닥을 굴렀다.

콰아앙!

조금 전까지 소년이 서 있던 자리에 뱀의 머리가 폭탄처럼 내리꽂혔다. 낡은 마루가 그대로 박살 나며 나뭇조각이 허공에 흩날렸다.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었다면 그대로 으스러져 죽었을 터.

한 바퀴 구른 뒤 잽싸게 일어난 세자는 암령검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었다. 복도 바닥에 처박혔던 뱀의 머리가 서서히 다시 들렸다.

소년을 돌아보는 핏발 선 뱀의 눈에 짜증이 비쳤다. 하찮아 보이는 인간 꼬맹이가 제 공격을 피한 게 못마땅하다는 듯.

츠츠츳,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뱀의 비늘이 차례로 곤두섰다. 비늘 중간에 맺혀 있던 붉은 결정들이 짙게 빛났다. 그러자 비릿하고 괴이한 피 냄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독?’

어쩐지 불길한 기분에 천결우는 소매로 입가를 가렸다. 저게 정말 독이라면 고작 소맷자락으로 막을 순 없겠지만, 그냥 들이쉴 수도 없으니.

대체 여긴 어디기에 그림자로 뒤덮인 복도에 저렇게 거대한 뱀 요괴까지 돌아다니는 걸까.

이런 끔찍한 곳에서…… 부인이 과연 무사할까. 우의정의 손주들은 아직 살아 있는 걸까.

그리고.

‘지금 내가 이것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피비린내를 풍기며 뱀의 머리가 그에게로 기어 왔다. 핏물이 고인 유리알 같은 뱀의 눈이 소년을 빤히 쳐다본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가 아니지. 나는 살아남아야만 한다.’

이런 곳에서 죽으면 그야말로 개죽음이다. 게다가 그 혼자 죽는 것도 아니다. 함께 끌려온 이들도 모두 죽을 테니까.

어둑서니인, 세자인, 남편인 자신이 어떻게든 해야 한다.

소년은 벽을 등지고 서서 암령검을 치켜들었다. 뒷덜미에 식은땀이 흠뻑 돋아났다.

“자신보다 크고 강한 것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강한 공격은 옆면으로 받아 흘리십시오. 유능제강(柔能制剛 : 부드러움이 굳셈을 능히 제압한다)의 묘리에 따라.”

기호철의 가르침이 귓가에 맴돌았다.

소년은 들썩이는 호흡을 기령검술의 구결에 따라 가라앉히며 눈도 깜박이지 않고 거대한 뱀을 응시했다.

서너 발짝 떨어진 곳까지 다가온 뱀의 머리가 멈춰 서서 가만히 소년을 본다.

‘눈을 떼면 죽는다.’

소년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린 땀이 턱 끝에서 뚝 떨어진 순간.

“―!”

천결우는 고개를 홱 꺾고 오른쪽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암령검의 옆면으로 다가오는 뱀의 머리를 밀었다.

쿠우웅, 한 끗 차이로 비켜난 뱀의 머리가 세자의 머리 옆 벽에 처박혔다. 황토벽에 구멍이 나며 흙가루가 비산했다.

‘지금!’

요괴를 밀어 친 양팔이 부러질 듯 저려 왔으나 멈춰 있을 틈은 없었다.

소년은 그대로 몸을 빙글 돌리며 암령검으로 벽에 처박힌 뱀의 모가지를 내리쳤다.

덩치 차이 탓에 담벼락을 검으로 치는 꼴과 다름이 없었으나 세자의 검은 일반적인 검이 아니라 제 어둠을 굳혀 만든 것이었다.

‘더 길게!’

그의 의지에 따라 모양을 바꿀 수도 있다는 뜻이다.

휘둘러지면서 길쭉하니 늘어난 암령검이 어둠을 꼬리처럼 흩날리며 뱀의 목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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