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기호철이 암령검은 고수의 검강만큼 강력한 무기라 했다. 소년은 제 검이 뱀의 목을 벨 수 있으리라 믿었다.
깡!
그러나 들려온 것은 강철을 무쇠로 내리친 듯한 소리였다. 곤두선 뱀의 비늘이 암령검을 튕겨 내 버렸다.
“……!”
동시에 둔중한 충격이 천결우의 전신을 후려쳤다. 아직 어린아이인지라 가벼운 몸뚱이가 던져진 돌멩이처럼 허공을 날아 벽에 처박혔다.
“크윽…….”
세자는 날아 처박힌 뒤에야 자신이 거대한 뱀의 꼬리에 얻어맞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벽에 부딪친 머리가 빙빙 돌고 직격당한 옆구리에 끔찍한 통증이 내달렸다. 입가에서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평범한 아이였다면 즉사하고도 남았을 만한 충격이었다. 어둑서니라 그나마 이 정도로 버틴 거다.
“흐읍……!”
고통 때문에 크게 숨을 몰아쉬자 콧속으로 피비린내가 훅 파고들었다. 일순 시야가 서너 겹으로 흔들렸다.
‘독기를 정통으로 마셨구나.’
구역질이 나와 그대로 토해 냈다. 새카맣게 죽은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너무 아파. 죽을 것 같아…….’
소년은 어지러운 머리를 간신히 들어 올렸다.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지는 시야에 벽에서 빠져나와 다가오는 뱀 요괴의 머리가 보였다.
‘……정말 이대로 죽는 건가?’
그럴 수는 없다.
천결우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흐릿해진 눈을 부릅뜨고 탑처럼 거대한 뱀의 머리를 올려다보았다.
‘죽고 싶지 않아!’
전신에 차오른 죽음의 공포를 먹이로 주어 어둠을 부풀린다. 피투성이로 벽에 처박힌 소년의 아래에서 그림자가 퍼져 나간다.
‘이 어둠이 요괴에게도 효과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것밖에……!’
화선지에 떨어진 먹물처럼 번진 그림자가 뱀 요괴의 아래에 닿았다. 거대한 뱀이 무언가를 느낀 듯 움칠했다.
순간 그림자가 일어서듯 어둠이 치솟아 뱀의 전신에 달라붙었다. 요괴의 덩치가 너무나 커서 완전히 뒤덮지는 못했으나, 거미줄처럼 달라붙으며 목을 타고 올라 눈을 가리는 데에는 성공했다.
어린 어둑서니는 입에서 새카맣게 죽은 피를 줄줄 흘리며 그 광경을 직시했다.
‘두려워해라!’
명령처럼 토해 낸 간절함을 들은 것처럼, 어둠이 들러붙은 뱀 요괴에게 이변이 일어났다.
“캬아아아악!”
지붕이 흔들릴 정도로 날카로운 괴성을 내지른 뱀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복도를 반쯤 메울 만큼 거대한 몸체가 소금 맞은 지렁이처럼 비틀리며 미쳐 날뛰었다. 제멋대로 흔들린 꼬리가 복도 양쪽 벽을 망치처럼 후려쳤다.
‘됐다!’
천결우는 기뻐하다가, 곧 이게 기뻐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앞뒤 안 가리고 미쳐 날뛰는 뱀 요괴의 꼬리가 소년의 머리끝을 스쳐 벽에 처박혔기 때문에.
“……!”
여기 있다가는 공포에 눈먼 뱀에게 깔려 죽는다.
소년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팔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손발이 저리며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들이마신 독 탓일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마비가 퍼지면서 옆구리의 격통은 완화되었다는 것.
천결우는 엎어진 채로 기듯이 움직였다. 어지러움과 토기가 자꾸만 치밀어 의식이 흐려지려 했다.
‘안 돼.’
혀를 물고 입술을 물어 가며 정신을 차리고 조금씩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더 저 날뛰는 뱀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바르작거리던 소년의 귀에, 돌연 맑은 목소리의 외침이 들려왔다.
“오른쪽!”
“……?”
“오른쪽으로 굴러요, 저하!”
절박한 음성. 부인의 목소리였다.
소년은 온 힘을 다해 오른쪽으로 굴렀다. 다음 순간 소년이 있던 곳을 거대한 뱀의 꼬리가 직격하더니, 왼쪽으로 바닥을 홱 쓸면서 사라졌다.
천결우는 복도를 휩쓸며 그대로 벽에 꽂히는 꼬리를 보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왼쪽으로 피했으면 죽었겠군.’
그런데 방금 들린 목소리는……?
의문을 가지고 고개를 돌리는데 보드라운 감촉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천?’
옥색으로 빛나는 긴 천이 그의 팔과 상체를 휘감고 있었다. 그 천이 팽팽해지며 곧장 그를 잡아당겼다. 세자는 어리둥절하게 끌려가며 천의 끝을 보았다.
그림자로 뒤덮인 복도 속에서, 반투명한 옥색 천을 선녀의 날개옷처럼 두른 세루화가 울먹이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하!”
* * *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이거 왜 이렇게 안 나와?’
각오한 바랑 다르게 목숨줄이 잘 빠져나오질 않았다.
하늘과 이어진 목숨줄을 통해 신력이 몸을 휘돌고 있다. 아빠의, 염라대왕으로부터 물려받은 신력이 내 몸 안에 있는 ‘세루화’의 목숨줄을 선명히 보이게 해 주었다.
잘 보이는데, 꼼짝도 안 한다.
‘그나저나 목숨줄이…… 기호철이 가르쳐 준 용력이 흐르는 기맥을 따라 담겨 있네.’
무당이 용력을 못 쌓는 체질인 거랑 연관이 있나?
어쨌든 그냥은 목숨줄이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해서 백회혈이라는 기맥이 있는 정수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목숨줄이 기맥에 담겨 있으니까 기맥을 통해서 빼내면 되는 거 아닐까?’
잘못 건드리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혈이라고 들어서 손놀림이 절로 신중해졌다.
‘착하지, 좀 나오자.’
손끝에 목숨줄이 착 달라붙는 상상을 하면서 천천히 떼어 내자, 드디어 ‘세루화’의 목숨줄이 조금씩 딸려 나왔다.
‘좋아! 이제 이걸 내 목숨줄에다가 아주 살짝…….’
마른침을 삼키며 살며시 손을 움직였다.
하늘로 뻗어 있는 내 목숨줄에 ‘세루화’의 목숨줄을 조심스럽게 가져다 댄다.
‘살살, 살살.’
폭포수가 쏟아지는 곳에 호리병을 넣었다 빼서 물을 조금 떠내는 느낌으로.
너무 푹 넣었다간 거센 물줄기에 호리병이 깨지니까, 끄트머리만 살짝 넣었다가 빼야 한다.
나는 세루화의 목숨줄에 한 모금 남짓한 신력이 흘러들어 오자마자 다급히 줄을 떼어 냈다.
‘……됐다!’
말이 한 모금이지, 내 거대한 신력에서 비롯한 거라 양과 질이 굉장했다.
‘성공했어!’
얼른 세루화의 목숨줄을 도로 집어넣었다.
체내에 신력이 차올라 찰랑거린다.
내 목숨줄을 따라 흘러들어 왔다 나가는 신력과 확연히 구별되는 ‘빌려 온’ 신력.
이 몸의 그릇에 알맞은 양이라, 이제 나도 몸 걱정 없이 마음껏 내 신력을 써 볼 수 있다!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렸지? 그렇게 오래 끌진 않은 거 같은데. 세자 꼬맹이, 벌써 위험한 건 아니겠지?’
나는 이마에 흠뻑 배어난 식은땀을 닦아 내며 그슨대가 사라진 복도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강신 상태는 이 저택을 벗어날 때까지 계속 유지하자. 어차피 내 신분은…… 이 정도로는 안 들킬 테니까.’
천 년 묵은 매구인 석란도 봉황이 나를 대하는 태도와 하늘복숭아 냄새, 눈동자까지 확인한 뒤에 겨우 알아차린 신분이다.
내가 직접 밝히지 않는 한, 요괴들은 어지간해선 알아채지 못할 거다.
‘구중궁궐의 천명공주가 인간 몸으로 하계에 내려와 있다는 것보다는, 어린 무당이 천명공주를 강신하고 있다는 게 훨씬 납득하기 쉽겠지.’
이렇게 강신하고 있으면 빙의 초반처럼 내 본체가 상할 위험이 있긴 했다. 그래도 강신한 신력을 안 쓰면 괜찮을 테니까.
안 써도 천명공주의 신력이 몸에 흐르는 이 상태 자체가 도움이 되거든.
‘이런 식으로.’
천명공주로서의 격을 드러내며 그림자로 꽉 찬 복도에 발을 디뎠다.
요력이 가득한 그림자들이 나를 삼키려 몰려들었다가, 내게서 번져 나오는 아득한 신력에 기겁하여 썰물처럼 멀어졌다.
‘그래, 이런 찌꺼기들은 알아서 꺼져야지.’
예전에 세자가 아직 통제하지 못하는 어둠들을 털어 낸 것처럼, 나는 나를 덮치는 그림자들을 털어 내며 복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쿵, 하고 복도 전체를 울리는 요란한 굉음이 들렸다.
‘뭐야? 무슨 소리야?’
걱정이 되어서 앞으로 달려갔다. 안개를 헤치듯 그림자를 헤치며 뛰다 보니, 곧 복도를 메우다시피 한 거대한 뱀 요괴의 모습이 드러났다.
새까만 비늘에 핏방울처럼 맺힌 혈석들. 한눈에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만인사(萬人蛇)!’
만 명이 넘는 인간을 잡아먹은 끝에 몸 안에 만인혈석(萬人血石)이라 불리는 내단(內丹 : 쌓인 기운이 생물의 몸속에서 응축해 생겨난 덩어리)을 품게 된 요괴.
‘그슨대 못지않게 강한 요괴잖아! 저게 왜 그슨대 그림자 속에 있는 거야?’
기겁하며 살펴보니 만인사의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겁에 질려 날뛰는 것 같은…… 겁에 질려?’
설마?
허둥지둥 만인사 근처를 훑어보자 피투성이가 된 소년이 보인다.
익숙한 도포 자락.
‘세자 꼬맹이!’
쟤가 왜 저 꼴로 저러고 있는 거야! 감히 누가!
‘누구긴, 저 만인사 짓이겠지!’
분노가 치솟아 머리가 하얗게 비려는 찰나, 전신을 비틀던 만인사의 꼬리가 세자를 향해 내리치는 게 보였다.
그 순간, 시간이 느려지는 듯했다.
아무리 세자가 어둑서니라 해도 저런 기둥만 한 꼬리에 정통으로 깔리면 죽을 거다.
죽는다고? 시한부인 나보다 쟤가 먼저?
말이 돼?
용납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내게 저것을 막을 방법이 있나?
나는 무력한, 신력을 쓰지도 못하는 신인데.
‘아니, 이제 쓸 수 있잖아.’
비록 내 본체의 신력에 비하면 티끌 같다 해도.
이제 내겐 안전하게 쓸 수 있는 신력이 있다. 세루화의 그릇 안에서 찰랑거리는 것.
이걸로 어떻게 하면 저 애를 구할 수 있지?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다. 꼬리가 내려치고 있다.
어떻게? 어떻게? 무슨 방법을 써야 해?
날이 선 기감이 만인사의 꼬리를 훑는다. 그릇에 차 있던 신력이 솟아올라 내 눈에 고였다.
‘어떻게?’
그러자 보였다.
기의 흐름이. 저 요괴가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가.
예지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나는 곧바로 소리를 질렀다.
“오른쪽!”
“……?”
“오른쪽으로 굴러요, 저하!”
그러면서 한편으로 생각했다.
피하는 건 임시방편일 뿐. 저 애를 구해 내려면 다른 것이 더 필요하다.
이 작은 신력을 어떻게 쓰지? 무슨 방법을 써야 저 애를 구할 수 있지?
내 몸은 신력을 보태 봤자 너무 작고 느려서 별 도움이 안 될 텐데.
이럴 때는 어떤 방식으로 신력을 써야 해?
자연히 내가 가장 많이 본 선인인, 상라궁의 선녀들이 신력을 쓰던 광경이 떠올랐다.
선녀들은 신들에 비해 가진 신력의 양이 적다. 그런 그들이 주로 신력을 쓰는 방식은.
‘날개옷!’
세자를 향해 달려가며, 몸 안의 그릇에서 신력을 솟구쳐 몸 바깥으로 흘려보냈다. 비췻빛 신력이 유형화하며 길게 늘어나 하늘하늘 몸에 휘감겼다.
선녀의 날개옷.
나는 피투성이로 쓰러진 세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움직임에 따라 날개옷이 길게 늘어나 세자에게 가 닿았다.
“저하!”